한 사람을 살리는 수
기적은 곡물을 먹는다 · 2026. 9.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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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카의 이름이 적힌 성분 자루가 이미 치료실에 도착해 있었다. 레아 바렌은 그 자루를 보고 멈췄다.
아들이 쓰러진 것은 한 시진 전이었다. 그런데 그의 치료용 성분은, 그 한 시진보다 먼저 준비되어 있었다.
레아는 오스틴에게 준비 시점을 물었다.
“언제 이 자루를 채웠소.”
오스틴은 차분히 답했다.
“고위 후계자를 위한 상시 비축입니다. 변경백. 귀한 분들의 위급에 대비하는 것은 교회의 오랜 관례입니다.”
레아는 그 답을 검증할 시간이 없었다. 아들이 죽어 가고 있었다.
그녀는 그 자루의 출처를 의심하면서도, 그것을 쓸 수밖에 없는 자리에 섰다. 음모를 캐기 전에, 한 아이가 먼저 살아야 했다.
레아는 그 자루의 매듭을 손끝으로 만졌다. 미카의 이름은 다른 글씨로 적혀 있었다.
며칠 전, 사빈이 하부 칸에서 발견했다던 그 자루. 그때는 미카가 멀쩡했다.
멀쩡한 아이의 치료 성분이 미리 채워져 있었고, 이제 그 아이가 정말 다쳐 이 자루가 쓰인다. 그것이 우연한 대비인지, 누군가의 예견인지, 레아는 지금 가릴 수 없었다.
가리는 일은 아들이 산 뒤의 일이었다. 그녀는 그 의심을 마음 한구석에 접어 두었다.
접어 둔다는 것은 버린다는 뜻이 아니었다. 사빈이 곁에서 그 자루의 표식을 조용히 옮겨 적었다.
나중에 이 순간을 되짚을 수 있도록. 살리는 일과 기록하는 일이, 같은 방에서 동시에 진행됐다.
긴급 제분에 노동자들이 소집됐다. 리우도 그중에 있었다.
마라가 작업 중단을 요구했다.
“이건 강요요. 후계자 하나를 살리려고, 또 노동자들이 발판을 밟아야 하오?”
그러나 노동자들의 반응은 한 갈래가 아니었다. 몇은 미카를 살리길 원했다.
그 아이가 배급소에서 표를 나르다 다쳤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몇은 배급 빚 때문에 거부할 수 없었다.
그리고 리우는, 누구의 강요도 받지 않고 스스로 작업장으로 걸어 들어갔다. 마라가 그를 붙잡았다.
“네가 왜.”
리우는 “내가 고른 거야”라고만 했다.
자발과 강요가 섞인 그 자리에서, 리우는 자기 몫의 선택을 했다.
“그 아이는,” 리우가 말했다.
“배급표를 나르다 다쳤어. 그 표에 내 어머니 이름도 있었고. 그러니 이건 누나가 말하는 강요만은 아니야.”
마라는 동생의 말을 막지 못했다. 그녀는 강요에 맞서는 사람이었으나, 동생의 자발까지 막을 수는 없었다.
그것을 막으면, 그것도 또 다른 강요가 됐다. 마라는 평생 사람들의 선택을 지키려 싸웠다.
그런데 지금, 동생이 위험한 선택을 ‘스스로’ 하는 것을 지켜야 했다. 그것이 그녀가 싸워 온 자유의 가장 잔인한 얼굴이었다.
자유는 사람이 자기를 해칠 자유까지 포함했다. 마라는 리우의 어깨를 한 번 잡았다가 놓았다.
붙잡는 대신, 그가 몇 시간을 밟는지 정확히 세기로 했다. 막지 못한다면, 적어도 그 값을 한 톨도 빠짐없이 기록하겠다고.
요안이 치료를 집전했다. 그는 생략했던 비용 고지 절을 이번에는 말하려 했다.
그동안 빼먹어 온 그 구절을, 미카의 치료 앞에서만은 말하려 했다. 그러나 오스틴이 시간을 이유로 끊었다.
“아이가 죽습니다, 사제. 지금은 의례가 아니라 속도입니다.”
요안은 그 구절을 다시 삼켰다. 흰 성분이 물에 풀리고, 미카의 상처에 발렸다.
출혈이 멎고, 얕던 호흡이 깊어졌다. 미카의 핏기 없던 얼굴에 색이 돌아왔다.
레아가 아들의 손을 잡았다. 아들이 살아났다.
그 짧은 순간, 레아는 통치자도 변경백도 아닌, 그저 아이의 어머니였다. 그녀는 미카의 이마에 자기 이마를 댔다.
살아 있었다. 따뜻했다.
요안은 그 구절을 삼키면서, 오스틴이 ‘속도’를 이유로 비용 고지를 막는 것을 똑똑히 보았다. 비용을 알리는 절을 빼는 것이, 이 체제가 굴러가는 방식이었다.
위급할수록 비용은 가려졌고, 가려진 비용은 늘 가장 약한 곳에서 치러졌다. 요안은 미카의 상처에 성분을 바르며, 자기 손이 무엇을 하는지 알았다.
한 아이를 살리는 그 손이, 동시에 다른 열한 명을 쓰러뜨리는 손이었다. 그는 그 모순을 손끝으로 느끼며 의례를 마쳤다.
미카가 눈꺼풀을 떨었다. 레아가 아들의 이름을 불렀다.
미카는 답하지 못했으나, 어머니의 목소리에 손가락을 미세하게 움직였다. 그 작은 움직임에 레아의 어깨가 풀렸다.
아주 잠깐. 어머니로 있을 수 있는 그 잠깐이, 그녀에게 허락된 전부였다.
그러나 그 따뜻함의 값이, 동시에 다른 곳에서 치러졌다. 방아 쪽에서 발판이 차례로 멈췄다.
한 사람, 또 한 사람. 열한 명의 노동자가 쓰러졌다.
그리고 리우가, 발판에서 내려오다 오른손을 움켜쥐었다. 그의 오른손이 감각을 잃었다.
평생 발판과 자물쇠와 씨앗을 다루던 그 손이, 미카를 살린 제분에서 식어 버렸다.
요안이 “곧 회복될 수 있습니다”라고 말하려다 멈췄다.
확신이 없었다. 확신 없는 위로를 건네는 것은, 또 하나의 거짓이었다.
그는 그 위로를 삼켰다. 리우의 오른손은, 충격적인 묘사 없이, 그저 더는 펴지지 않는 손으로 남았다.
마라가 리우에게 달려갔다. 그녀는 동생의 오른손을 두 손으로 감쌌다.
그 손은 차가웠다. 발판을 밟던 다른 노동자들은 땀에 젖어 더웠는데, 리우의 손만 식어 있었다.
빛이 미카에게 부어지는 동안, 그 열을 어디선가 빌렸고, 그 빌린 자리 중 하나가 리우의 손이었다. 마라는 그 손을 자기 뺨에 댔다.
데우려는 것이었다. 그러나 자기 체온으로 데울 수 있는 차가움이 아니었다.
그녀는 평생 명단을 고쳐 사람을 살려 왔다. 그런데 자기 동생의 손은, 어느 명단을 고쳐도 돌아오지 않았다.
마라는 처음으로, 장부로 메울 수 없는 손실 앞에 섰다.
리우는 누나에게 “괜찮아”라고 하지 않았다.
거짓 위로를 주지 않는 것이, 그가 누나에게 줄 수 있는 마지막 정직이었다.
사빈이 공개 장부에 그날의 비용을 한 줄씩 적었다. 곡물 18자루.
노동 160인시. 부상자 열한 명의 이름.
그리고 리우 케드, 오른손 감각 손상. 그는 그 수를 시민 앞에서 소리 내어 읽었다.
미카가 살아난 것은 기쁨이었고, 그 기쁨의 값은 정확히 그만큼이었다. 리우가 레아에게 물었다.
성한 손으로 감각 잃은 오른손을 감싸 쥔 채.
“이 승인서에, 누구 이름이 찍혔습니까.”
레아는 거짓말하지 않았다.
“나요.”
그녀가 답했다.
“바렌 가문 인장으로, 내가 승인했소.”
공공 인장이 아니라 가문 인장. 그녀는 그 사실을 숨기지 않았다.
자기 아들을 살리기 위해, 모두에게 같던 규칙을 자기 가문을 위해 한 번 굽혔다는 것을.
사빈은 그 비용을 읽을 때 목소리를 꾸미지 않았다. 곡물 18자루, 라고 읽을 때와 리우 케드 오른손 감각 손상, 이라고 읽을 때의 어조가 같았다.
사람도 곡물처럼 한 줄로 적혔다. 다만 그는 사람의 이름 옆에는 빈칸을 하나 더 두었다.
‘회복 여부 미정’. 곡물은 쓰면 끝이지만, 사람은 쓴 뒤에도 남아 그 빈칸을 채워 가야 했다.
시민들은 그 낭독을 조용히 들었다. 미카가 살았다는 안도와, 그 값을 누가 냈는지를 듣는 무거움이 광장에 함께 내려앉았다.
누구도 환호하지 않았다. 환호하기에는 비용이 너무 또렷했고, 침묵하기에는 한 아이가 살아 있었다.
그 어중간한 자리에 도시가 서 있었다.
레아는 변명하지 않았다. 동시에, 그 선택을 거짓으로 후회하지도 않았다.
“다시 같은 일이 와도, 나는 내 아들을 살릴 거요. 그게 내 약함이오. 그러니 그 약함을 아는 사람이 나를 막아야 하오.”
마라가 그 말을 받았다. 그녀는 고함치지 않았다.
정확한 권한을 요구했다.
“다음부터는, 당신 혼자 서명하지 못하게 하겠소. 기적을 쓰는 승인에, 노동자의 이름도 함께 걸리게 하겠소. 당신이 약해질 때, 그 약함의 값을 내는 사람들이 거기 있어야 하니.”
레아는 그 요구를 거부하지 않았다. 거부할 자격이 없었다.
그녀는 오늘, 자기가 막아야 할 그 약함을 스스로 증명했다.
그 요구는 복수가 아니었다. 마라는 레아를 끌어내리려 하지 않았다.
그녀는 레아가 좋은 통치자라는 것을 알았다. 다만 좋은 통치자도 자기 아들 앞에서는 약해진다는 것을, 오늘 보았다.
그래서 그녀는 사람을 바꾸자고 하지 않고, 규칙을 바꾸자고 했다. 누가 통치하든, 그 한 사람의 약함이 도시 전체의 비용이 되지 않도록.
기적 사용 승인에 노동자의 서명을 함께 거는 것. 그것은 한 사람의 선의에 기대는 대신, 비용을 내는 자에게 거부할 권한을 주는 제도였다.
레아는 그 제도가 자기를 묶을 것을 알았다. 그리고 묶이기를 택했다.
자기를 믿지 못해서가 아니라, 자기를 믿는 것이 위험하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미카는 살았고, 리우의 손은 식었고, 열한 명이 쓰러졌으며, 레아의 이름이 승인서에 남았다. 첫 스무 회의 이야기가, 한 사람을 살리는 수로 끝났다.
그 수는 정확했고, 아무도 그것을 지우지 못했다. 마라의 말이 광장에 남았다.
“다음부터는 당신 혼자 서명하지 못하게 하겠다.”
그것은 위협이 아니라, 다음 이야기의 시작이었다. 곡간을 연 칼로 시작된 스무 회의 이야기가, 이제 한 사람의 서명을 여럿의 서명으로 바꾸려는 싸움으로 옮겨 갔다.
레아는 그 싸움이 자기에게 불리하다는 것을 알았다. 그러나 불리한 싸움일수록, 옳은 싸움인 경우가 많았다.
레아는 그 말을 받아 적게 했다. 자기를 묶을 그 한 줄을, 자기 손으로 장부에 남겼다.
미카는 잠들어 있었고, 리우의 손은 식어 있었고, 광장의 등불 하나가 누군가의 시간을 태우며 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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