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화

축복 없는 후계자

기적은 곡물을 먹는다 · 2026. 6. 15.

조회수 11

미카 바렌은 시종들이 자기 축복복의 금실을 풀고 있다는 것을 한참 뒤에야 알았다. 처음에는 의례 뒤의 정돈인 줄 알았다.

시종들은 평소처럼 손이 빨랐고, 평소와 달리 말이 없었다. 금실을 풀 때는 보통 다음 의례를 위해 다림질을 한다고 말해 주는데, 오늘은 아무도 그 말을 하지 않았다.

미카는 신발부터 벗으라는 말에 발을 빼지 않았다. 신발을 벗으면 의례가 끝났다는 뜻이고, 그는 자기 의례가 아직 시작도 안 했다고 믿고 싶었다.

“연기된 거죠?”

미카가 물었다. 어른들이 쓰는 공적인 문장으로 묻고 싶었지만, 입에서는 짧은 질문이 먼저 나왔다.

시종은 답하지 않고 금실을 마저 풀었다. 풀린 금실이 작은 타래로 감겨 쟁반에 놓였다.

그 금실은 다시 미카의 옷으로 돌아오지 않을 것처럼 단정하게 감겨 있었다.

미카는 거울 앞에 섰다. 금실이 풀린 자리마다 옷감에 눌린 자국이 남아 있었다.

며칠을 입어 길든 자국이었다. 그는 그 자국을 손가락으로 눌러 보았다.

옷은 가벼워졌는데 몸은 무거워졌다. 그는 이 느낌을 뭐라 불러야 할지 몰랐다.

어른들은 이런 때 쓰는 단어를 알 것 같았다. 그는 그 단어를 모른다는 게 자기가 아직 어리다는 증거 같아 더 싫었다.

레아가 들어왔다. 미카는 어머니가 위로하러 온 줄 알았다.

어머니는 위로하지 않았다.

어머니의 손에는 아무것도 들려 있지 않았다. 보통 어머니가 무언가를 결정하고 올 때는 손에 서류나 장부가 들려 있었다.

빈손으로 왔다는 것은, 이미 마음을 정했고 그것을 말로만 전하러 왔다는 뜻이었다. 미카는 어머니의 빈손을 먼저 보고, 다음에 얼굴을 보았다.

“네 후계 축복은 오늘 하지 않는다.”

레아가 말했다.

“축복에 쓸 백맥과, 그 의례를 맡을 사제가 배급소로 간다. 사람들이 굶고 있고, 곡간은 모자란다.”

“영지가 먼저라서요?”

미카가 물었다. 그 말은 어디선가 배운 문장이었다.

어른들이 칭찬할 만한 문장. 레아는 그 문장에 속지 않았다.

“영지가 먼저라서가 아니라, 지금 그게 옳아서다.”

레아가 말했다.

“그리고 네가 알아야 할 게 있다. 축복을 미루면, 네 후계 자격을 두고 말이 나올 거다. 왕실과 방계가 그 틈을 본다. 나는 그 위험을 알면서 미룬다. 너에게 숨기지 않으마.”

미카는 어머니가 자기에게 ‘위험’이라는 말을 쓴 것이 처음이라는 걸 알았다. 그 말은 무서웠지만, 동시에 그를 어린아이 취급하지 않는 말이기도 했다.

그는 무섭다고 말하지 않았다.

대신 “얼마나 미뤄요?”라고 물었다.

레아는 “모른다”고 답했다.

모른다는 답은 위로보다 정직했다.

“그럼 저는 그동안 뭐예요?”

미카가 물었다. 후계자라 불리지도, 후계자가 아니라고 못 박히지도 않은 자기 자리를 가리킬 말이 그에게는 없었다.

레아는 잠시 미카를 보았다.

“너는 그동안 내 아들이다.”

그녀가 말했다.

“그건 축복으로 정해지는 게 아니라서, 미룰 수도 없다.”

미카는 그 말이 위로인지 사실인지 구분되지 않았다. 어머니는 늘 사실을 말했으므로, 그것이 위로처럼 들리는 것이 이상했다.

성당 측랑에서 서기가 후계 문서를 펼쳐 놓고 있었다. 미카는 그 문서를 보러 갔다.

자기 이름이 적힐 자리. 거기에는 축복을 받은 날짜와 사제의 서명이 들어가야 했다.

서기는 그 칸을 비워 두었다. 빈 줄 하나가 문서 가운데에 길게 그어져 있었다.

미카는 그 빈 줄이 자기 몸의 어딘가가 비어 버린 것처럼 느껴졌다.

서기는 빈 줄에 임시 표기조차 하지 않았다.

미카가 왜 아무것도 안 적느냐고 묻자, 서기는 “채워질 줄에 잠정 글자를 적으면, 나중에 그것이 채워졌다는 증거로 쓰일 수 있습니다”라고 답했다.

미카는 그 말의 무게를 절반만 알아들었다. 비어 있는 것이 잘못 채워지는 것보다 안전하다는 뜻.

그는 어른들의 세계가 이렇게 빈칸 하나를 두고도 조심한다는 것을 처음 알았다. 그 조심함이 자기를 지키기 위한 것임도.

서기는 문서를 다시 말아 봉투에 넣으며, 미카에게 작게 말했다.

“도련님, 이 줄은 비어 있는 게 흠이 아닙니다. 비어 있는 줄은 아직 거짓이 적히지 않았다는 뜻이기도 하니까요.”

방계 소년 하나가 측랑으로 들어왔다. 미카보다 두 살 많고, 늘 미카의 옷과 말투를 흉내 내다가 비웃는 아이였다.

그가 빈 줄을 보고 말했다.

“임시 아들이네. 축복도 못 받은. 이러다 진짜 아들이 따로 오는 거 아냐?”

미카는 주먹이 먼저 떨렸다. 그는 주먹을 쥐는 대신, 풀려서 쟁반에 놓인 자기 예복 단추 하나를 슬그머니 집어 주머니에 넣었다.

그 단추는 금실로 짠 것이었다. 그는 그것을 왜 숨기는지 자기도 몰랐다.

다만 빈 줄 앞에서 자기 것이 하나라도 남아 있다는 사실이 필요했다.

방계 소년은 더 말하고 싶어 했지만, 서기가 헛기침을 했다. 소년은 입을 다물고, 대신 빈 축복란을 손가락으로 톡톡 두드리고 나갔다.

그 손짓이 말보다 더 오래 미카의 머릿속에 남았다. 미카는 빈 줄을 메우는 방법을 생각해 보았다.

자기가 직접 거기에 무언가를 적으면 어떻게 될까. 그는 곧 그 생각을 접었다.

빈 줄은 자기가 메울 수 있는 게 아니었다. 그게 어른들이 말하는 ‘자격’이라는 것 같았다.

남이 적어 주어야만 채워지는 줄.

배급소에 갔을 때, 미카는 자기 의례용 백맥이 어떻게 쓰이는지 보았다. 그것은 큰 솥에서 죽으로 끓고 있었다.

사제가 직접 국자를 들고 아이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줄 선 아이들 중에는 미카보다 어린아이가 많았다.

미카는 감동하지 않았다. 감동 대신 먼저 든 것은 상실이었다.

저 죽은 원래 ‘미카의 축복’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었다. 이제 그 죽에는 이름이 없었다.

그의 이름이 자루에서 지워졌다.

미카는 배급대 옆에 적힌 장부를 보았다. 사빈의 글씨였다.

거기에는 ‘후계 축복용 백맥 — 배급 전환’이라고 적혀 있었다. 자기 이름이 지워진 자리에 ‘배급 전환’이라는 네 글자가 들어가 있었다.

미카는 그 네 글자가 자기 이름보다 무겁다는 것을, 아직은 머리가 아니라 가슴으로만 알았다. 한 노파가 미카를 알아보고 허리를 굽히려 했다.

미카는 그것을 막았다. 자기 이름이 지워진 곳에서 절을 받는 것은, 무언가 앞뒤가 맞지 않았다.

그는 그 상실을 부끄러워했다. 굶은 아이들 앞에서 자기 이름을 아까워한다는 것이.

그러나 부끄러움이 상실을 지우지는 못했다. 미카는 두 감정을 동시에 가진 채 죽 솥 앞에 서 있었다.

한 아이가 미카를 알아보고 “도련님 거 먹어도 돼요?”라고 물었다.

미카는 “응”이라고 답했다.

그 짧은 대답을 하는 데 그가 가진 것의 절반이 들어갔다.

사제가 죽 한 그릇을 미카에게도 내밀었다.

“도련님 몫도 여기 있습니다.”

미카는 그 그릇을 받았다. 자기 이름이 지워진 죽을, 이름 없는 한 사람의 몫으로 받는 것이었다.

죽은 따뜻했고 묽었다. 그는 한 입 먹었다.

맛은 특별하지 않았다. 의례용 백맥이 따로 맛있을 거라 믿었던 어린 생각이 그 한 입에 사라졌다.

곡물은 누구의 입에 들어가든 같은 곡물이었다. 그 평범함이 미카에게는 또 다른 종류의 가르침이었다.

저녁 식사 자리에 왕실 봉랍이 도착했다. 가족이 둘러앉은 식탁 위로 붉은 봉랍이 찍힌 서신이 놓였다.

도안이 그것을 먼저 열었다. 방계가 미카의 상속 적격을 심사해 달라고 왕실에 청원했다는 내용이었다.

빈 축복란이, 청원의 근거로 적혀 있었다.

도안은 서신을 내려놓고, 미카를 수도로 잠시 피난시키는 방안을 말했다. 수도에 있으면 방계의 손이 닿지 않고, 왕실의 눈에 직접 보여 자격을 증명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그는 이미 통행 서류의 모양까지 생각해 둔 사람처럼 말했다. 레아는 답하지 않았다.

그녀는 식탁 위의 빈 축복란과 봉랍을 번갈아 보았다.

“수도에 보내면, 아이는 안전하겠지요.”

레아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

“다만 그건 방계의 말이 옳다고 인정하는 모양이 되오. 도망친 후계자는 자격을 의심받는 법이니.”

도안은 “안전이 먼저요”라고 했다.

레아는 “안전과 자격 중 무엇이 먼저인지는, 오늘 정할 일이 아니오”라고 답했다.

두 사람의 말은 부딪쳤으나 다투지는 않았다. 미카는 부모가 자기를 두고 서로 다른 답을 가졌다는 것을 처음 보았다.

그것이 빈 축복란보다 더 어른의 세계처럼 느껴졌다.

미카는 어른들의 말을 다 알아듣지 못했다. 그러나 한 가지는 알았다.

오늘 자기가 잃은 것은 의례 하나가 아니었다. 그는 주머니 속 단추를 손가락으로 만졌다.

금실의 매듭이 손끝에 걸렸다. 식탁 가운데, 비어 있는 축복란 위로 왕실의 붉은 봉랍이 놓여 있었다.

그 두 가지가 같은 종이 위에 함께 있는 것을, 미카는 오래 보았다.

그날 밤, 미카는 잠들기 전 주머니의 단추를 꺼내 손바닥에 올려놓았다. 금실로 짠 작은 매듭.

그것은 그의 축복복에서 떨어져 나온 한 조각이었고, 동시에 오늘 그가 지킨 유일한 것이었다. 그는 그것을 베개 밑에 두려다, 다시 주머니에 넣었다.

숨겨 두는 것보다 가지고 다니는 편이 나았다. 빈 줄이 채워지는 날까지, 자기 것 하나는 손 닿는 곳에 두기로 했다.

문 밖에서 부모의 낮은 목소리가 이어졌다. 수도, 통행 서류, 심사, 자격 같은 말들이 띄엄띄엄 들렸다.

미카는 그 말들 중 무엇이 자기 미래를 정할지 알 수 없었다. 다만 한 가지는 분명했다.

오늘 어머니는 자기를 위해 더 안전한 길을 고르지 않았다. 옳은 길을 골랐고, 그 길에는 위험이 붙어 있었다.

미카는 그 사실이 무섭기보다, 어쩐지 자기도 그런 사람이 되어야 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생각을 끝으로 그는 잠들었다.

주먹은 펴져 있었고, 주머니 속 단추는 그대로 있었다.

이번 화가 재미있었나요?

좋아요와 평점은 언제든 변경할 수 있습니다.

독자 평점 8.7 (3)

댓글

댓글을 작성하려면 로그인해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