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화

세 장부

기적은 곡물을 먹는다 · 2026. 6.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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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빈 노르는 봉인이 잘린 곡간 앞에서 가장 먼저 한 일이 곡물을 세는 것이 아니라, 어제까지의 장부를 덮는 일이었다. 어제의 장부는 교회의 것이었고, 교회의 셈법은 자루를 죄와 공덕으로 나누었다.

그는 새 장부를 폈다. 표지가 다른 세 권이었다.

붉은 것, 푸른 것, 검은 것. 색이 다른 까닭은 그가 나중에 헷갈리지 않기 위해서였다.

곡간 안은 어둡고, 곡물 냄새 아래 미지근한 기운이 남아 있었다. 사빈은 그 온기를 의식했으나 장부에 적지 않았다.

적을 수 없는 것은 적지 않는다. 그것이 그의 첫 번째 규칙이었다.

그는 자루를 세기 시작했다. 시민들이 어제 가져간 자루가 있었다.

교회 장부대로라면 그것은 도난이었다. 사빈은 그것을 도난으로 적지 않고, ‘선지급 배급’ 항목을 새로 만들어 옮겨 적었다.

같은 자루라도 어느 칸에 적히느냐에 따라 죄가 되기도 하고 정책이 되기도 한다.

그는 자루마다 분필로 작은 점을 찍어 두 번 세지 않게 했다. 회계는 정직보다 먼저 절차였다.

절차가 없으면 정직도 곧 헷갈린다. 곡간 깊은 곳, 벽에 붙은 자루들은 손이 닿지 않아 그는 사다리를 가져오게 했다.

사다리 위에서 본 위쪽 자루들은 아래쪽보다 먼지가 적었다. 최근에 옮겨졌다는 뜻이었다.

그는 그 사실을 적었다. 누가 옮겼는지는 적지 않았다.

모르는 것은 적지 않는다. 그것이 두 번째 규칙이었다.

세는 도중 표기가 뒤섞인 자루들이 나왔다. 겉에는 성분용이라 찍혀 있는데, 안의 곡물은 먹을 수 있는 백맥이었다.

또 어떤 자루는 식용 표기인데 안이 비어 있거나 겨가 섞여 있었다. 사빈은 이것을 오류라 부르지 않았다.

오류는 한쪽으로 쏠리지 않는다. 이 뒤섞임은 한 방향이었다.

먹을 것은 성분으로, 못 먹을 것은 식용으로. 그는 그 방향을 검은 장부 여백에 작게 적었다.

누구에게도 아직 보이지 않을 자리에.

그는 표기가 뒤섞인 자루의 수를 따로 셌다. 마흔하나였다.

우연이라기엔 많고, 음모라기엔 정연하지 않았다. 누군가 급하게, 그러나 오래 해 온 솜씨로 표기를 바꾼 흔적이었다.

사빈은 이런 종류의 흔적을 안다. 횡령하는 자는 표기를 바꾸지 않는다.

표기를 바꾸는 자는 곡물의 용처를 숨기려는 자다. 곡물은 그대로 곡간에 있는데, 그것이 무엇으로 쓰일지를 미리 정해 둔 손이 있었다.

그 손이 누구의 것인지, 그는 아직 적을 수 없었다.

레아가 들어왔다. 사빈은 일어나지 않고, 세던 손을 멈추지도 않았다.

그녀는 그의 일을 끊는 사람이 아니었다.

“합계가 필요하면 한 권으로 적겠습니다.”

사빈이 말했다.

“쓰실 거라면 세 권으로 적습니다.”

“세 권으로.”

레아가 답했다.

“먹을 입, 봄에 뿌릴 종자, 수비대. 섞지 마시오.”

사빈은 잠깐 고개를 들었다.

“섞지 않으면 합계가 보기 흉해집니다. 한 권이면 영지에 곡물이 얼마라고 한 줄로 말할 수 있습니다. 세 권이면 어디는 남고 어디는 모자란 것이 한눈에 드러납니다.”

“흉한 게 정확한 거요.”

레아가 말했다.

“한 줄로 말하면 누군가 그 한 줄을 들고 와서 모자란 데를 가리겠지. 세 줄이면, 어느 줄에서 가져올지를 내가 정해야 하오. 정하는 사람이 책임을 지는 거고.”

사빈은 그 말을 받아 적지 않았다. 적을 필요 없는 말이었다.

그것은 장부의 원칙이 아니라 통치자의 원칙이었고, 그는 그것을 기억만 했다.

사빈은 붉은 장부에 먹을 입을, 푸른 장부에 종자를, 검은 장부에 수비대를 적기로 했다. 그는 곧 물었다.

셋 중 어느 것이 먼저인지. 종자를 먹으면 봄이 죽고, 봄을 남기면 겨울이 죽는다.

수비대가 굶으면 곡간을 지킬 손이 없다. 레아는 답하지 않았다.

“아직.”

그녀가 말했다. 사빈은 그 ‘아직’을 장부에 적었다.

우선순위 미정. 미정도 하나의 상태였고, 적어 두지 않으면 나중에 누군가 멋대로 정한다.

그는 우선순위 미정 옆에 날짜를 적었다. 미정이 며칠째 미정인지를 세기 위해서였다.

결정을 미루는 일에도 비용이 든다. 그 비용은 어느 날 갑자기 한 장부의 바닥으로 나타난다.

사빈은 미루는 비용을 셀 줄 아는 회계였고, 그래서 ‘아직’이라는 말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다만 그것을 기록 없이 흘려보내지 않았다.

그때 마라 케드가 배급소 쪽에서 들어왔다. 그녀는 허락을 구하지 않고 들어왔으나, 문턱에서 발을 닦았다.

곡간 바닥을 더럽히지 않으려는 사람의 동작이었다. 그녀는 배급표 한 장을 사빈의 장부 옆에 놓았다.

“기도방아에서 쓰러진 사람과 그 가족이 이 표에 없습니다.”

마라가 말했다. 그녀는 자비를 청하지 않았다.

울지도, 화를 내지도 않았다. 대신 숫자를 내놓았다.

“여기 적힌 교대표를 보십시오. 누가 며칠을, 몇 시간을, 어느 방아에서 일했는지. 받지 못한 식량의 양은 여기까지입니다. 적선이 아니라 미지급분을 청구합니다.”

사빈은 교대표를 받아 들었다. 그것은 그가 평생 본 어떤 노동 기록보다 정확했다.

시간 단위로, 사람 이름으로, 방아별로 나뉘어 있었다. 그는 이 표를 만든 사람이 누구인지 물을 뻔했다가, 묻지 않았다.

표 맨 아래에 마라의 표식이 있었다. 그녀가 만든 것이었다.

표를 보던 사빈의 손이 한 곳에서 멈췄다. 어떤 이름들 옆에는 일한 시간만 적혀 있고 받은 식량 칸이 비어 있었다.

다른 이름들은 받은 칸이 채워져 있었다. 받지 못한 이름들에는 공통점이 있었다.

모두 같은 방아에서, 같은 날들에 일한 사람들이었다. 그는 그 방아의 이름을 푸른 장부가 아니라 검은 장부에 옮겨 적었다.

종자 문제가 아니라, 누군가 의도적으로 비워 둔 칸의 문제였기 때문이다.

“이 사람들을 붉은 장부에 올리겠소.”

사빈이 말했다.

“다만 미지급분 전부를 한 번에 줄 곡물이 지금 없소.”

“압니다.”

마라가 말했다.

“전부를 오늘 달라는 게 아닙니다. 명단에 올리라는 겁니다. 명단에 없으면, 부족할 때 가장 먼저 지워지는 건 늘 명단에 없던 사람입니다.”

사빈은 그 말을 검은 장부가 아니라 붉은 장부에 옮겨 적었다. 마라가 옳았다.

명단은 곡물보다 먼저 사람을 살린다.

도안이 곡간 뒤편에서 나타났다. 그는 북문 수비대와 가족 피난용으로 남길 최소 비축을 요구했다.

사빈은 그 수를 검은 장부에 적었다. 적으면서, 도안의 허리춤에 곡간 열쇠가 두 벌 걸려 있는 것을 보았다.

하나는 이 곡간의 것이었다. 다른 하나는 그가 본 적 없는 모양이었다.

사빈은 그 두 번째 열쇠가 어느 문의 것인지 물으다, 입을 다물었다. 지금 물으면 도안은 답할 것이고, 답하면 그 답을 장부에 적어야 한다.

적을 준비가 안 된 것은 아직 묻지 않는다. 그는 다만 검은 장부 여백에 열쇠 두 벌, 이라고만 적었다.

날짜와 함께.

“수비대 몫은 줄일 수 있소.”

도안이 말했다.

“다만 북문은 못 줄이오. 토르 마을 쪽에서 사람이 움직이고 있고, 왕실 징발대가 그 길을 정찰하는 걸 어제 봤소.”

그는 비축의 까닭을 군사로만 말했다. 가족 피난이라는 말은 입에 올리지 않았다.

사빈은 도안이 말하지 않은 부분이 말한 부분보다 크다는 것을 느꼈으나, 느낌은 장부에 적지 않는다. 그는 도안이 요구한 수만 적었다.

그 수는 북문 하나만 지키기에는 조금 많았다. 조금 많은 그 차이를, 그는 여백에 물음표 하나로 남겼다.

도안이 나간 뒤, 마라가 잠시 더 남았다. 그녀는 사빈이 자기 교대표를 어느 장부에 옮겼는지 보려 했다.

사빈은 표를 가리지 않았다.

“붉은 장부요. 먹을 입 쪽.”

마라는 고개를 끄덕였다.

“당신은 적선하는 사람이 아니라 셈하는 사람이군요. 다행입니다. 적선은 마음이 바뀌면 끊기지만, 장부는 다음 사람이 이어서 셉니다.”

사빈은 처음으로 일하던 손을 멈추고 그녀를 보았다. 그 말은 그가 평생 일로 삼아 온 것의 의미를, 누군가 처음으로 정확히 말한 것이었다.

밤이 되어, 사빈은 세 장부를 곡간 벽에 나란히 걸었다. 먹을 입, 종자, 수비대.

그는 각 장부의 마지막 칸에 현재 보유량을 적고, 필요량을 그 옆에 적었다. 어느 장부를 먼저 채우든, 다른 두 장부가 같은 만큼 비었다.

그는 세 장부의 부족분을 합산했다. 셈은 한 번에 맞아떨어지지 않았고, 그는 두 번 다시 했다.

두 번 다 같은 수가 나왔다.

그는 셈을 세 번째로 다시 했다. 회계의 손은 같은 수가 두 번 나와도 한 번 더 센다.

두 번은 우연일 수 있으나 세 번은 확정이다. 세 번째에도 같은 수였다.

사빈은 그제야 분필을 내려놓았다. 곡간 벽에 걸린 세 권의 장부가 등불 아래 나란히 흔들렸고, 세 권의 마지막 칸이 모두 같은 깊이로 비어 있었다.

삼백열두 자루. 모자라는 수는 어느 한 장부에 속하지 않았다.

그것은 세 장부 모두의 빈칸이 같은 지점에서 멈춘 자리에 있었다. 사빈은 레아에게 그 수를 보고했다.

그리고 덧붙였다.

“이건 종자를 먹어도, 수비대를 굶겨도 메워지지 않습니다. 어디서 가져오든, 그 자리에 또 삼백열두의 구멍이 생깁니다.”

“그 말은, 우리 곡간 밖에 그만큼이 있다는 뜻이오?”

레아가 물었다. 사빈은 곧바로 답하지 않았다.

그는 마흔하나의 뒤섞인 자루와, 먼지 적은 위쪽 자루를 떠올렸다.

“있을 수도 있습니다.”

그가 말했다.

“다만 그건 셈이 아니라 추측입니다. 추측은 장부에 적지 않습니다.”

레아는 벽에 걸린 세 장부를 한참 보았다.

“내일 아침, 공개 배급안을 만드시오. 부족분을 숨기지 말고 그대로 적어서.”

그녀가 말했다. 사빈은 그 말을 받아 적었다.

부족을 숨기지 않는 것. 그것이 그가 아는 가장 위험하고, 가장 정직한 행정이었다.

모자라는 수는 어느 장부에도 속하지 않은 채, 세 권의 가운데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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