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화

휴전문 한 장 사이에 빈 물통 두 개가 놓여 있었다

갑오년, 전보국 주사는 군량을 훔쳤다 · 2026. 9.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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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전문 한 장 사이에 빈 물통 두 개가 놓여 있었다.

이겸은 물통 바닥을 뒤집어 냄새를 맡았다. 궁궐 수비 쪽 통에는 마른 흙, 파견군 쪽 통에는 오래된 기름 냄새가 남았다. 같은 우물에서 물을 받아도 어느 통이 오염되면 상대가 독을 탔다고 주장할 수 있었다.

성문 배급 솥에는 평소보다 묽은 죽이 남아 있었다. 젖은 열두 포대의 추가 손실과 지급은 내일 오시 재계량까지 확정되지 않았다. 오늘 메운 것은 최소 부족분뿐이었다. 공동 급수로 물을 얻어도 곡식 몫은 늘지 않았다.

휴전문에는 ‘마흔여덟 시간 공동 급수’라고만 적혀 있었다. 누가 먼저 받고, 통을 누가 검사하며, 밤 교대가 총을 어디에 둘지는 없었다.

질서는 빈칸을 싫어했다. 총을 든 사람은 더 싫어했다.

“이 문서대로 서명하면 첫 물통에서 다시 싸웁니다.” 이겸이 말했다.

궁궐 수비 장교가 얼굴을 굳혔다.

“이틀간 공격을 멈추기로 한 것이 핵심이오.”

맞은편 파견군 장교가 답했다.

“급수는 부속 조건입니다.”

“부속 조건 때문에 병사가 죽습니다.”

성문 아래에 선 하사 박상호가 끼어들었다. 그는 장교들 사이로 올라오지 않고 자기 중대 앞에 그대로 섰다.

“물통 둘. 검사자 둘. 한 차례에 여섯 명. 교대는 한 식경.”

궁궐 수비 장교가 돌아봤다.

“상호, 협상은 장교가 한다.”

“물은 병사가 듭니다.”

박상호는 경례를 정확히 한 뒤 말을 이었다.

“그 명령, 몇 명이 듭니까?”

이겸은 휴전문을 접지 않았다.

“성문 병사들의 조건을 먼저 받겠습니다.”

“지휘 체계를 흔드는 선례입니다.” 수비 장교가 말했다.

“빈 통을 지휘 체계가 나릅니까?”

이겸은 박상호에게 종이를 내밀었다. 박상호는 자기 의견부터 쓰지 않았다. 성문 안쪽으로 돌아가 초소마다 사람을 불렀다. 수비병 열넷이 내려왔고, 파견군 쪽에서도 통역을 낀 병사 열둘이 우물 반대편에 섰다.

총구는 아래로 향했지만 손은 개머리판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박상호는 번호를 불렀다.

“일번 초소. 남은 물.”

“반 통.”

“교대까지.”

“두 식경.”

“부상자.”

“걷지 못하는 자 둘.”

그는 초소별로 남은 물, 잠을 못 잔 시각, 물통을 들 사람, 부상자를 옮길 사람을 적었다. 높은 명분보다 어깨와 장화 수가 먼저였다.

파견군 병사 한 명이 통역을 통해 말했다.

“우리 쪽은 우물까지 오는 길이 더 깁니다. 같은 순서면 돌아가는 데 늦습니다.”

수비병이 반발했다.

“성 안에는 환자가 더 많소.”

박상호가 둘을 잘랐다.

“머릿수 말고 걸음 수. 여기서 각 초소까지 몇 걸음인지 재.”

병사 넷이 우물에서 양쪽 초소까지 걸었다. 궁궐 쪽은 짧았지만 계단이 있었고, 파견군 쪽은 평지이나 두 배 가까이 멀었다. 물통을 가득 채운 뒤 같은 길을 다시 걸었다. 빈 통으로 잰 시간과 달랐다.

“한 차례 여섯 명은 많습니다.” 파견군 병사가 말했다. “통 들 사람 둘, 엄호 둘, 검사 둘이면 우물 곁이 꽉 찹니다.”

“엄호가 총 들면 휴전이 아니지.” 수비병이 말했다.

“총을 두고 오면 돌아갈 때 빼앗깁니다.”

박상호는 휴전문 옆에 선을 그었다.

“우물 경계선 밖에 총을 세워 둔다. 양쪽 한 명씩 지킨다. 물 뜨는 사람은 빈손으로 들어온다.”

“그 한 명이 총을 돌리면?”

“반대편 한 명이 본다.”

이겸은 끼어들지 않았다. 자기 조항을 먼저 내면 병사들은 장교 뜻에 맞춰 찬성하거나 침묵했을 것이다. 박상호가 현장 조건을 모을 때까지 붓을 들지 않았다.

첫 시험 급수가 시작됐다. 수비병 둘과 파견군 병사 둘이 물통을 들었고, 각 진영 검사자 한 명씩이 우물가에 섰다. 통은 비운 뒤 냄새를 맡고 맑은 물로 한 번 헹궜다. 처음 헹군 물은 우물 쪽 배수로가 아니라 반대편 모래 구덩이에 버렸다.

박상호는 물통 입구에 같은 높이로 먹선을 그었다. 한쪽 통이 더 크면 횟수가 같아도 물 배급은 달랐다. 파견군 통이 손가락 한 마디 깊었으므로 작은 통을 기준으로 채우고, 큰 통의 남는 자리는 비워 두기로 했다. 손해처럼 보이는 빈 공간이 첫 다툼을 막는 값이었다.

젖은 가마니에서 흘러온 물이 기존 배수로에 섞여 있었기 때문이다.

“이 물도 누가 검사합니까?” 수비 장교가 물었다.

박상호가 답했다.

“검사자 둘이 색과 냄새를 보고, 이상하면 윤순화 의원 쪽으로 표본을 보냅니다.”

“의원이 휴전을 정합니까?”

“마실 물을 정합니다.”

첫 통이 우물 아래로 내려갔다. 밧줄이 젖은 돌에 마찰하며 삐걱거렸다. 파견군 병사가 손을 뻗자 수비병이 순간적으로 뒤로 물러났다. 박상호가 밧줄을 가운데에서 잡았다.

“둘이 같이 당겨.”

한쪽만 잡으면 먼저 가져간다는 오해가 생겼다. 두 병사가 같은 밧줄에 손을 얹었다. 속도는 느려졌지만 통은 올라왔다.

검사자들은 물을 나무 잔 두 개에 나눴다. 냄새와 떠다니는 물질을 보고, 각자 먼저 한 모금씩 마셨다. 신뢰가 아니라 서로 같은 위험을 지는 절차였다.

“이상 없음.” 수비 쪽 검사자가 말했다.

파견군 쪽 검사자는 바로 동의하지 않았다. 햇빛에 잔을 비춰 본 뒤에야 자기 표식 막대를 물통 끈에 걸었다. 두 표식이 있어야 통을 들고 경계선을 넘을 수 있었다.

궁궐 수비 장교가 재촉했다.

“시험이 끝났으면 서명합시다.”

박상호가 고개를 저었다.

“교대까지 봐야 합니다.”

“이 속도면 해가 집니다.”

“먹고 움직입니다. 안 자고 지키면 둘째 날에 총이 먼저 나갑니다.”

그는 첫 급수조가 돌아오는 동안 걸린 시간을 적었다. 빈 통 검사, 헹굼, 공동 인양, 표식, 복귀. 한 차례가 예상보다 길었다. 한 식경 교대로는 모든 초소가 물을 받지 못했다.

병사들은 급수 순서를 바꿨다. 물이 가장 적은 초소, 걷지 못하는 부상자가 있는 초소, 먼 초소 순이었다. 계급이나 장교 숙소는 먼저가 아니었다.

수비 장교가 항의했다.

“지휘소 물이 끊기면 명령이 멈춘다.”

박상호가 말했다.

“빈 솥은 계급장을 못 읽습니다. 지휘소는 세 번째입니다.”

이겸은 그 순서를 협상문에 옮겼다. 자기 판단이었다면 지휘소를 첫째로 뒀을 것이다. 명령망이 살아야 휴전도 유지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병사들이 탈수로 쓰러지면 명령망을 지킬 몸이 없었다.

“둘 중 하나입니다.” 이겸이 장교들에게 말했다. “병사가 정한 불완전한 순서를 받아 시간을 사거나, 완전한 지휘 순서를 두고 오늘 다시 싸우는 겁니다.”

파견군 장교가 물었다.

“이 순서가 우리 쪽에도 같은가?”

“같은 기준입니다. 남은 물, 부상자, 거리.”

“누가 수치를 확인합니까?”

“양쪽 급수조가 서로의 초소에 들어가지는 않습니다. 각자 명부를 내고 상대는 물통 도착 시각으로만 대조합니다.”

완전한 검증은 아니었다. 각 진영이 부상자 수를 부풀릴 수 있었다. 상대 초소를 직접 검사하게 하면 휴전보다 침투 위험이 컸다. 이겸은 허점을 숨기지 않고 협상문에 썼다. ‘초소 내부 수치는 각 진영 책임. 도착 시각과 통 수만 상호 확인.’

박상호가 조건을 더했다.

“교대병은 같은 초소에서 연속 두 차례 물통을 들지 않는다.”

“왜?”

“물 나르다 쓰러지면 총 들 사람이 없어집니다.”

“인원이 모자라면?”

“장교 전령과 군량 하사가 채웁니다.”

그는 자기 이름을 대체 인원 첫 줄에 썼다. 병사에게만 조건을 지우지 않았다.

파견군 쪽 하사도 통역에게 자기 이름을 적게 했다. 장교들의 합의문에 없던 현장 책임이 두 줄 생겼다.

이겸은 휴전문을 새로 베끼지 않았다. 원래 ‘공동 급수’ 문구 아래에 병사들이 낸 조건을 덧붙이고, 고친 자리마다 반대 서명 칸을 뒀다. 수비 장교는 지휘소 우선 제외에 반대했고, 파견군 장교는 초소 수치 비공개에 반대했다. 반대가 있어도 휴전은 시작됐지만 이틀 뒤 누가 어떤 문제를 다시 꺼낼지 남았다.

마흔여덟 시간을 재는 모래시계 둘을 동시에 뒤집었다. 하나는 성문 안, 하나는 파견군 진지에 뒀다. 모래 양이 같은지는 시작 전에 두 검사자가 빈 저울로 재고 봉인했다.

이겸은 휴전문 옆에 놓인 육백 석 명령 사본을 보았다. 같은 명령에 찍힌 세 인장은 모양이 달랐다. 하나는 종이를 깊게 눌렀고, 하나는 가장자리만 얕았으며, 셋째는 별도 기록에 적힌 사용 시각이 달랐다. 그는 보이는 모양·압력과 기록 시각만 대조표에 옮겼다.

“완전 항복을 요구할 기회였습니다.” 수비 장교가 낮게 말했다.

“받아들일 군력이 있습니까?”

“돌격할 수는 있습니다.”

“이길 수 있습니까?”

장교가 답하지 않았다.

“무모한 돌격과 완전 항복 사이에서 우리는 물과 이틀을 샀습니다.” 이겸이 말했다.

첫 급수조가 돌아왔다. 병사들은 환호하지 않았다. 통 수를 세고, 표식 두 개가 붙었는지 확인하고, 다음 조를 깨웠다. 박상호는 살아서 돌아온 네 사람 이름과 어깨가 벗겨진 병사 하나를 적었다.

휴전 첫 한 시진 동안 총성은 없었다. 부상자 셋이 공동 경계선까지 옮겨졌고, 윤순화 쪽 들것이 그들을 받았다. 파견군도 부상자 둘을 같은 길로 내보냈다.

그때 전보국에서 기별꾼이 도착했다. 장문수가 북방 회선 조사 명령을 받았다는 짧은 통보였다. 그는 위조 코드 사본과 봉투 셋을 가져가려 했다.

“무슨 봉투입니까?” 이겸이 물었다.

기별꾼은 봉함을 열지 않았다.

“세 봉인의 귀환 확인용이라고만 들었습니다. 서로 다른 경로로 보낼 예정입니다.”

내용도 최종 목적도 적혀 있지 않았다. 이겸은 육백 석 명령 사본에 찍힌 세 인장을 보았다. 같은 수의 봉투가 북쪽으로 향한다는 사실만 확인할 수 있었다.

성문 밖에서 말 세 필이 준비됐다. 장문수는 위조 코드 사본을 기름종이에 싸고, 봉투 셋을 한 말에 몰아 싣지 않았다. 하나는 자기 품, 하나는 전보국 기별꾼, 하나는 상단 역마가 맡았다.

첫 공동 급수의 두 번째 물통이 올라오는 순간, 장문수의 말이 북방 길로 발을 뗐다.

휴전 모래시계의 모래는 아직 한 줌도 줄지 않았고, 세 봉투의 봉인은 어느 것도 열리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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