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어 있는 지정 창고
갑오년, 전보국 주사는 군량을 훔쳤다 · 2026. 8.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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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날 밤 선발대가 보낸 보고는 맞았다. 지정 창고의 문은 열려 있었고, 안에는 쌀 한 톨 없었다. 수비대는 무장 해제를 이미 거부했고 양쪽은 성문을 사이에 둔 채 밤을 넘겼다. 이토 마사루가 새벽 현장에 온 이유는 대치를 새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실패한 점거를 어떤 장기전으로 바꿀지 정하기 위해서였다. 빈 창고를 승리로 오인하면 부하가 성문 앞에서 죽고, 즉시 물러나면 보급 노선을 바꾼 상대에게 다음 길까지 내줄 판이었다.
선발대장은 빈 바닥을 군화로 두드렸다.
“예정대로라면 여기 육백 석이 있어야 합니다.”
“예정표는 쌀을 먹지 않지.”
이토는 목소리를 높이지 않았다. 창고 안을 한 바퀴 돌았다. 바닥에는 가마니를 끌어낸 평행한 자국이 있었고, 문턱의 진흙에는 수레바퀴 자국이 일곱 줄 겹쳐 있었다. 오래된 먼지 위로 새 발자국이 지나갔다. 창고가 애초부터 비어 있던 것은 아니었다.
“마포에서 왔던 통역을 불러라. 수레꾼 명단과 조수 시간을 함께.”
선발대장이 물었다. “성문부터 칩니까?”
“아직 아닙니다.”
“수비대 배급을 끊으면 무기를 내놓기로 되어 있었습니다.”
“배급이 끊겼다는 전제가 사라졌습니다.”
성문 쪽에서 솥뚜껑 부딪치는 소리가 났다. 밤새 도착한 마흔 가마니 중 첫 솥이 이미 끓고 있었다. 병사들이 밥을 배급받는 줄은 길지 않았지만 끊기지도 않았다.
이토는 회중시계를 열었다. 작전표에는 이 시각에 창고 접수, 한 식경 뒤 수비대 무장 해제, 오전 중 통신선 장악이라고 적혀 있었다. 첫 칸부터 틀렸다.
“시간표를 접으십시오.”
부관이 잘못 들은 얼굴을 했다. “폐기합니까?”
“접는 겁니다. 실패 원인을 남겨야 하니까.”
이토는 종이를 네 번 접어 안주머니에 넣었다. 같은 계획을 조금 더 빠르게 반복하는 것은 대안이 아니었다.
성문 앞에는 박상호가 서 있었다. 군량 하사 계급장은 낡았고, 손에는 총보다 배급표가 먼저 들려 있었다. 그 뒤의 병사들은 총을 어깨에 멨지만 총구를 들지 않았다. 외국 선발대도 사격 자세를 잡지 않았다. 서로 먼저 쏘지 않는 데까지는 합의가 있었다.
이토가 통역을 사이에 두고 말했다.
“무기를 내려놓으면 성문 교대조의 신변과 남은 식량을 보장하겠습니다.”
박상호가 배급표를 펼쳤다.
“남은 배급 마흔 가마니. 첫 솥은 교대조와 부상자에게 나갔습니다. 먹고 움직입니다.”
“마흔 가마니로 얼마나 버팁니까?”
“장교 식탁을 끊으면 사흘. 피난민까지 넣으면 하루 반.”
“그 뒤에는?”
“그 뒤는 그때 셉니다.”
이토는 수비대 줄을 보았다. 굶주린 병사는 명령보다 음식 냄새를 먼저 좇는다. 그러나 지금은 각자 한 그릇씩 받았고, 박상호는 장교 몫을 따로 빼지 않았다. 짧은 배급이 충성을 만들지는 않았다. 다만 무기를 내려놓지 않을 하루 반을 샀다.
“대안은 두 가지입니다.” 이토가 말했다. “지금 무기를 넘기고 배급과 신변을 보장받거나, 성문을 지키며 다음 배급이 끊길 위험을 감수하십시오.”
박상호가 물었다. “두 번째 명령, 몇 명이 듭니까?”
“우리 선발대가 성문을 포위합니다.”
“그래서 몇 명이 듭니까. 우리 중대 아흔둘, 부상 일곱. 그쪽은?”
통역이 숫자를 옮겼다. 이토는 숨기지 않았다. “선발대 예순넷. 후속대는 두 시진 뒤입니다.”
박상호는 병사들을 돌아보았다. “들었지? 밥은 교대조 먼저. 장교 솥은 오늘 없다. 1조 스물셋, 먹고 서문. 2조 스물셋, 한 시진 수면. 부상자는 총 대신 물통.”
장교 하나가 발끈했다. “하사가 배급 순서를 바꿔?”
박상호가 경례했다. 자세는 더 정확해졌다.
“빈 솥은 계급장을 못 읽습니다. 이의를 장부에 적으십시오.”
그는 장교 식탁으로 가던 작은 쌀자루를 교대조 솥에 부었다. 병사 둘이 수령 시각을 배급표에 적었다. 대치는 연설이 아니라 그 한 자루로 한 시진 더 길어졌다.
이토는 그 행동을 기록했다. 상대 지휘관이 아니라 하급 보급 담당자가 시간을 사고 있었다. 그를 제거하면 배급표를 본 병사들이 흩어질지, 오히려 결집할지 알 수 없었다. 확실한 것은 총격이 시작되면 빈 창고를 얻고 성문 앞 시체를 치우는 데 하루를 잃는다는 점이었다.
부관이 낮게 말했다. “돌격하면 한 식경 안에 문을 엽니다.”
“손실은?”
“우리 쪽 열둘에서 스물. 저쪽은 그 이상.”
“민간인은?”
“성문 뒤는 확인하지 못했습니다.”
“확인하지 못한 숫자는 영이 아닙니다.”
이토는 공격 명령서의 시각 칸을 비워 두었다.
마포에 보냈던 통역이 돌아왔다. 신발에는 서강 나루의 검은 진흙이 묻어 있었다.
“수레꾼 일곱이 오늘 새벽 궁궐 쪽으로 갔습니다. 두 대는 부두 구호소, 다섯 대는 성문. 품삯은 한서린 상단이 은으로 냈고 노동대가 직접 금액을 적었습니다.”
“남은 마른 쌀은?”
“사백이십칠 석 가운데 예순 가마니만 빠졌습니다. 나머지는 탁지와 감찰이 장부를 나눠 봉했습니다.”
“전보 한 장이 쌀을 옮겼나?”
통역은 질문의 뜻을 헤아렸다. “아닙니다. 수레와 은, 노동대가 옮겼습니다.”
이토는 창고 바닥의 일곱 자국을 다시 보았다. 다음에는 전보 문구만 가로채서는 안 됐다. 가격, 말먹이, 수레꾼, 하역 대표, 봉인권. 상대가 한 줄의 명령을 여러 사람의 이해관계로 나누어 집행했다.
“서강 나루 수레값을 두 배로 올린 자는?”
“저희가 먼저 올렸습니다.”
“그래서 마포 수레꾼들이 우리 쪽으로 왔나?”
“두 명만 계약했고, 나머지는 상단과 노동대 눈치를 봤습니다.”
“가격만으로는 부족하군.”
이토는 부관에게 새 명령을 불렀다. 마포 창고로 돌격하지 말 것. 서강·마포의 수레 계약 시각과 담보 주체를 기록할 것. 말먹이 공급상에게 현금 가격을 제시하되 강제로 압수하지 말 것. 성문과 부두 사이 빈 수레의 왕복 시간을 잴 것.
그는 선발대를 세 조로 나눴다. 첫 조는 창고 문턱의 일곱 바퀴 자국 너비를 재고, 둘째 조는 성문에 도착한 수레의 번호와 돌아간 시각을 적었다. 셋째 조는 서강 나루로 가되 수레를 빼앗지 않고 계약서를 보여 달라고 요구했다. 거부하면 상인 이름 옆에 거부 시각만 남기게 했다.
부관이 종이 세 묶음을 준비하는 동안, 이토는 빈 창고 벽에 분필로 선을 그었다. 전보, 창고, 수레, 말먹이, 하역, 배급. 전보와 창고 사이를 잇던 선은 끊어져 있었지만 나머지는 살아 있었다. 상대는 중앙 명령 하나를 지킨 것이 아니라, 끊어진 명령을 여러 사람의 거래로 우회했다.
“이 이름들을 체포 명단에 올립니까?” 부관이 수레꾼 목록을 들었다.
“아닙니다. 체포하면 값이 오르고 다른 이름이 옵니다. 누가 누구의 담보를 믿는지 연결해서 그리십시오.”
“상인을 전장으로 보겠다는 뜻입니까?”
이토는 잠시 대답하지 않았다. 현금과 계약을 추적하는 것도 결국 밥벌이의 신뢰를 겨누는 일이었다. 총을 쏘지 않는다고 민간 비용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었다.
“작전상 그렇습니다. 그래서 압수하지 말고 기록합니다. 선을 넘은 명령은 내 이름으로 남기십시오.”
부관이 물었다. “군량을 되찾지 않습니까?”
“되찾습니다. 다만 쌀이 있는 곳이 아니라 움직이는 길을 잡습니다.”
“오늘 작전은 실패로 보고합니까?”
“창고 접수는 실패. 무장 해제도 실패. 포위는 유지. 그렇게 쓰십시오.”
부관의 붓이 잠깐 멈췄다. 패배를 완문으로 쓰는 데는 승리보다 긴 시간이 걸렸다.
성문 위에서 병사 하나가 쓰러졌다. 총상은 아니었다. 빈속에 급히 밥을 먹고 일어나다 어지럼을 견디지 못한 것이다. 박상호가 직접 병사를 그늘로 끌고 갔다.
“3번, 물 먼저. 밥 반 그릇. 한꺼번에 먹지 마.”
이토는 그 장면까지 보았다. 배급이 도착했다고 사람 몸이 즉시 회복되는 것은 아니었다. 마흔 가마니는 전력이 아니라 전력으로 바뀌는 중인 물자였다.
그는 통역에게 물었다. “저 하사의 배급표를 살 수 있나?”
“돈으로요?”
“사본을 얻을 수 있느냐는 뜻이다.”
“훔치면 가능할 겁니다.”
“훔치지 마. 공개를 요구해라. 거부하면 누가 거부했는지 적어.”
상대의 장부를 훔쳐 한 번 이기는 것보다, 장부 공개를 둘러싸고 내부 갈등을 만드는 편이 싸고 오래갔다. 이토는 그 계산이 민간인의 신뢰를 전장으로 바꾸는 일이라는 점을 외면했다. 그에게는 아직 그것이 작전 외부 비용이었다.
해가 성문 지붕을 넘었다. 선발대와 수비대는 서로 사정거리 안에 있었지만 총을 쏘지 않았다. 성문은 넘어가지 않았고, 외국 병력도 물러나지 않았다. 점거는 완료가 아니라 대치가 되었다.
박상호가 배급표에 새 줄을 그었다. 장교 식탁 영, 교대조 지급, 부상자 일곱. 그가 서명하자 병사 둘도 증인으로 이름을 썼다.
이토는 회중시계를 닫았다.
“다음 교대 시각에 다시 묻겠습니다.”
박상호가 말했다. “그때도 먹고 움직입니다.”
“예정대로라면, 그 전에 후속대가 옵니다.”
“예정표가 밥 먹여 줍니까?”
이토는 처음으로 짧게 웃었다. “아니. 그래서 버렸습니다.”
그러나 그는 시간표를 버린 것이 아니라 접어 두었다. 실패한 시각과 빈 창고, 수레 자국 일곱 줄을 다음 계획의 증거로 쓰기 위해서였다.
전보국에서 온 연락원이 포위선 밖에 멈췄다. 그는 임관필의 감찰패를 들고 있었다.
“윤해준에게 제안이 들어갔습니다. 원본을 없애면 체포를 풀어 주겠다고 했답니다.”
이토가 물었다. “받았나?”
“거부했습니다. 탄 모서리 원본과 사본을 다른 곳에 둔다고 진술했습니다.”
이토는 빈 창고에서 떼어 온 나무 조각 뒷면에 그 말을 적었다. 상대는 목숨을 살 수 있는 가장 싼 길을 버리고 증거를 분산했다. 전보 한 장을 잡는 것만으로는 다음 명령을 막을 수 없다는 뜻이었다.
그는 부관에게 마지막 명령을 내렸다.
“윤해준을 쫓지 마. 사본을 가진 사람들이 서로 언제 만나는지 보십시오.”
부관이 고개를 갸웃했다. “한 사람보다 느립니다.”
“그래서 오래 갑니다.”
성문 안쪽 솥에서 두 번째 김이 올랐다. 포위선 바깥에서는 수레꾼들이 오른 값을 두고 흥정했다. 어느 쪽도 오늘 원하는 것을 전부 얻지 못했다.
이토는 접어 둔 시간표 옆에 새 제목을 썼다.
창고가 아니라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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