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하러 온 사람
하렘 소문은 재난으로 분류됩니다 · 2026. 5. 12.
오현주는 도진을 구하러 온 사람이 아니었다.
그녀는 도진 앞의 면책서를 구기지 않고 정확히 세 번 읽었다.
그리고 가장 비싼 칸에 반대표를 찍었다.
도장 값은 자기 인사평가 한 회분이었다.
자동 결재 창구 위 숫자가 08:59에서 08:58로 줄었다.
조정국 임시 감사실은 사람보다 기계가 결론을 서두르는 방이었다. 벽면 단말에는 ‘당사자 보호를 위한 신속 면책’이라는 문구가 떠 있었고, 중앙 테이블에는 세라와 도진의 이름이 적힌 서류 두 부가 놓였다. 유리벽 밖에서는 기자들이 배신자와 구원자 팻말을 번갈아 들었다. 안에서는 아크릴 의자도 반대 의견을 내기 불편하게 한 줄로 붙어 있었다.
현주는 의자 하나를 떼어 테이블 반대편에 놓았다.
감사과장 최문식이 웃었다. “오 감사관, 자리를 그렇게 만들 필요는 없습니다. 우리 모두 같은 쪽입니다.”
“같은 쪽의 정의부터 제출해 주십시오.”
“둘 다 살리는 쪽이죠.”
현주는 면책서 첫 장을 넘겼다. 윤세라의 구조 판단은 개인적 일탈로 분류한다. 백도진의 무자격 진입은 계약 위반으로 종결한다. 조정국은 역할 발생과 대외 유통에 관여하지 않았다. 세 문장이 각각 사람 하나씩을 기관 밖으로 밀어냈다.
도진은 현주 맞은편에 서 있었다. 급여 압류 중인 계약직에게 의자는 제공되지 않았다. 그는 여덟 자리 결재번호를 메모하고 있었다.
“확인 하나 해도 됩니까?”
“아직 안 됩니다.” 현주가 잘랐다. “당신 질문에 제가 답하면 이 문서가 도진 씨 개인 변호로 보입니다. 지금은 피해자 권리부터 봅니다.”
도진은 펜을 멈췄다. “알겠습니다.”
최 과장이 두 번째 장을 밀었다. “세라 대장은 지휘 일탈을 인정하는 대신 징계를 면하고, 백도진 씨는 계약 종료 대신 교육 이수로 끝납니다. 두 사람 모두 현장에 돌아갈 수 있어요.”
“승진 심사는요?”
“별도 검토입니다.”
“급여 압류는요?”
“별도 정산입니다.”
“증인 열두 명의 출입 제한과 증언 의무는요?”
“별도 피해입니다.”
현주는 세 가지 ‘별도’를 서류 여백에 그대로 적었다. 둘 다 살린다는 문서에서 살아나는 건 사건 번호뿐이었다.
자동 결재가 07:40을 지나갔다.
최 과장은 목소리를 낮췄다. “반대하시면 대피소 해제가 늦어집니다. 지연 책임자는 실명으로 남고요. 오 감사관 정기평가가 이번 주죠?”
“예.”
“사람을 살리는 문서에 반대해서 평가를 미루실 이유가 있습니까?”
“그 문장은 기록하겠습니다.”
현주는 세 번째 장에서 손을 멈췄다. 글자 크기는 앞장보다 작았다. 면책 효력의 범위. 당사자와 구조 승객은 현재 및 장래의 역할 지정, 증언 강제, 의료비, 경력 손실에 관한 이의제기 권리를 포괄적으로 철회한다.
피해자 권리를 지우는 조항은 맨 뒤에 숨었고, 제목은 당사자 보호였다.
“최 과장님.”
“예.”
“‘둘 다 살린다’고 하셨죠.”
“그렇습니다.”
“둘에 승객 열두 명은 포함됩니까?”
최 과장의 대답이 반 박자 늦었다. “포괄적 종결을 위해선 일부 권리 정리가 필요합니다.”
“삭제를 정리라고 부르셨습니다. 요건이 다릅니다.”
현주는 세 번째 장을 세라 쪽으로 돌렸다. 세라는 병원 화상 연결 화면 안에 있었다. 오른팔은 여전히 고정돼 있었고, 왼손으로 페이지를 확대했다.
“의료비도 포기?”
“현재 부상뿐 아니라 후유증까지 포함합니다.”
“반대.”
세라의 말이 끝나자 화면 아래 현장 직능 칸에 붉은 표가 생겼다.
최 과장이 손을 들었다. “아직 팀 표결 단계가 아닙니다.”
“그래서 문제입니다.” 현주가 답했다. “승객 열두 명과 현장대장, 계약 조정사의 권리를 지우는 광역 종결인데 현장·법무·분석 직능 표결을 거치지 않았습니다. 반대 의견 기록도 없습니다.”
“행정 면책은 광역 정정이 아닙니다.”
“제목이 아니라 효과로 분류합니다.”
현주는 자동 결재 단말의 오른쪽 아래를 세 번 눌렀다. 평소에는 직원번호를 확인하는 작은 창이 감사 보존 모드로 바뀌었다.
이의중지를 신청하시겠습니까?
처리 지연 책임은 신청자에게 귀속됩니다.
인사평가가 보류될 수 있습니다.
남은 시간 05:59.
도진이 현주를 봤다. “제가 지연 비용을-”
“못 냅니다.”
“아직 끝까지 말 안 했습니다.”
“자기 급여로 타인의 결정 비용을 선납하겠다는 문장은 이미 두 번 들었습니다. 세 번째면 선례가 됩니다.”
최 과장이 피식 웃었다. 현주는 웃지 않았다. 건조한 농담 뒤에 남는 건 도진의 습관과 자기 평가표였다.
그때 테이블 한쪽의 보안 단말이 울렸다.
장미나의 얼굴이 작은 화면에 떴다. 뒤로 대시보드 세 개가 빠르게 넘어갔다.
“표본 하나 추가요. 아니, 삭제요. 조정국 공식 계정 캐시가 지금 분당 육십 건씩 사라집니다. 원본은 안 팝니다. 제가 가져올 수 있게 보존 명령부터 주세요.”
최 과장이 화면을 가리려 했다. “외부 분석가는 감사실에 접속할 권한이 없습니다.”
“그럼 누가 접속 링크를 보냈는지 로그에 남겠네요.” 미나가 웃었다. “링크 발급자, 최문식. 이건 밈도 아니고 원본.”
현주는 숫자부터 확인했다. 삭제 작업 승인번호 앞 네 자리가 급여 압류서와 같았다. 뒤 네 자리는 가려져 있었다. 같은 계열이라는 사실만으로는 승인자를 특정할 수 없었다.
“장미나 씨. 추정 말고 지금 보이는 것만.”
미나의 웃음이 사라졌다. “공식 계정 캐시 삭제 진행 중. 승인번호 일부 일치. 최초 영상 게시 시각 앞뒤 사십 분 로그가 삭제 대상. 현재 보존 권한 없음.”
“좋습니다. 그 문장에 서명할 수 있습니까?”
“실명으로요?”
“실명 아니면 보존 신청 증거로 못 씁니다.”
미나는 자기 채널 구독자 수가 떠 있는 창을 한 번 봤다. 이 로그를 넘기면 그녀의 비공식 접근 경로도 조사 대상이 된다.
“장미나. 데이터 분석. 찬성.”
분석 직능 칸에 파란 표가 생겼다.
세라가 말했다. “윤세라. 현장. 찬성. 단, 환자 얼굴과 독립 증언 원본은 별도 봉인.”
현장 직능 칸의 붉은 반대표 옆에 보존 찬성표가 따로 찍혔다. 한 사람이 모든 안건에 같은 표를 던질 이유는 없었다.
현주는 자기 표를 마지막에 남겨 두었다. 먼저 면책서 세 번째 장을 화면에 띄우고 피해자 권리 삭제 문장을 표시했다. 그다음 이의신청 사유를 읽었다.
“기관 면책은 당사자의 현재·장래 이의권을 소급 삭제하며, 광역 효과에도 직능별 표결과 기록된 반대 의견을 누락했습니다. 공식 계정 로그가 동시에 삭제 중이므로 원본 보존 전 자동 종결을 중지합니다.”
최 과장이 테이블을 쳤다. “로그 삭제와 이 사건이 같은 지시라는 증거가 있습니까?”
“없습니다.”
“그런데 감사를 멈춰요?”
“같다는 결론을 내리기 위해서가 아니라, 다를 가능성까지 검증할 원본을 남기기 위해서입니다.”
현주는 실명 칸을 눌렀다.
오현주. 법무·동의 감사. 면책 반대. 로그 보존 찬성.
화면이 붉게 변했다.
이의중지 접수.
개인 사건 종결이 팀7 단위 특별감사로 전환됩니다.
신청자 오현주의 정기 인사평가는 감사 지연 책임 확정 시까지 보류됩니다.
병원 연결 화면의 방화문 상태도 바뀌었다. 대피소 폐쇄는 유지됐지만 ‘배신자 출입 금지’ 자동 명단 전송이 중지되고, 의료진의 수동 이송 권한이 열렸다. 승객 열두 명의 역할은 사라지지 않았다. 다만 번호표 때문에 치료실 밖에 갇히는 일은 멈출 수 있었다.
현주의 직원증에는 더 빠른 비용이 찍혔다.
자동 종결 승인 권한 정지. 특별감사 종료 전까지 모든 결재는 상급자 공동승인 필요.
반대표 한 번이 그녀의 다음 반대표를 더 느리게 만들었다. 현주는 그 통지도 이의신청 파일에 넣었다.
자동 결재 숫자가 03:11에서 멈췄다. 동시에 미나의 화면에서는 삭제 숫자가 멈추지 않았다.
“보존 명령 아직 계정 서버에 안 닿았어요.”
“경로?” 현주가 물었다.
“자동 창구에서 기록관리실, 기록관리실에서 계정 서버. 정상 삼십 초. 지금 예상 이 분.”
“그 사이 로컬 캐시 복제 가능합니까?”
“제 비공식 접근을 증거 오염으로 공격할 겁니다.”
“그래서 묻습니다. 원본 변경 없이 읽기 전용 해시와 접근 로그를 같이 남길 수 있습니까?”
미나는 손가락을 키보드 위에 세웠다. 이번에는 농담이 없었다. “할 수 있어요. 대신 제 채널 운영권도 감사 대상.”
“결정은 장미나 씨가 하세요.”
“합니다. 원본은 안 팝니다.”
미나가 복제를 시작했다. 화면에는 삭제와 복제 숫자가 나란히 뛰었다. 428 대 17. 431 대 42. 439 대 88.
도진이 현주 앞에 압류서 원본을 놓았다. “협조할 자료 목록을 주세요.”
현주는 두 장의 통지서를 따로 출력했다.
“첫째, 감사 중 자료 제출과 출석에 협조할 의무가 있습니다. 정정 문구 초안, 비용 통지, 개인 단말 로그를 삭제하면 안 됩니다.”
도진이 받았다. “확인.”
현주는 두 번째 장도 내밀었다.
“둘째, 침묵 의무는 없습니다. 조정국이 비공개 합의를 요구해도 당사자에게 사실과 위험을 알리는 것을 멈추지 마세요. 다만 타인의 의료·증언 정보는 본인 동의 없이 공개하지 않습니다.”
“저를 변호하는 겁니까?”
“아니요. 당신이 협조를 핑계로 또 혼자 입을 닫지 못하게 하는 겁니다.”
도진은 두 통지서를 겹치지 않고 따로 넣었다. “반박 요청해도 됩니까?”
“대면으로 하세요. 서면 뒤에 숨으면 답하지 않겠습니다.”
미나의 화면이 검게 깜박였다. 복제 311. 삭제 완료 447.
“일부 놓쳤어요.”
보존 명령이 계정 서버에 도착했다. 삭제 작업은 멈췄지만 최초 게시 시각 직전 캐시 스물일곱 건이 비어 있었다. 마지막 삭제 명령의 승인번호는 압류서 결재번호와 같은 계열이었다. 신원 칸은 손상돼 읽히지 않았다.
최 과장이 말했다. “결국 증거도 못 지켰군요. 평가까지 걸고.”
현주는 자기 인사평가 보류 통지와 남은 캐시 해시를 한 파일에 묶어 봉인했다.
“도와준 게 아니라 멈춘 겁니다.”
봉인 시각 아래에서 삭제 시각이 정확히 일 초 빨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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