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day를 버리는 법
내가 구한 사람들 때문에 미래가 틀렸다 · 2026. 9. 21.
조회수 0
D-day를 버리는 법
화이트보드에 세 개의 X가 그어졌다. 명진역 사고 시각, 병원 산소 차단, 보리동 수문 폐쇄. 나는 원래 날짜를 적은 줄 위에 검은 테이프를 붙였다. 펜으로 그은 선은 종이 위에서 아직 보였지만, 테이프는 한동안 다시 보지 말라는 표식이었다.
장유라는 팔짱을 끼고 보드 앞에 섰다. "다음 계산도 원래 날짜 기준입니까?"
"보조 기준으로만..."
"아니요. 지금 기준부터."
나는 입을 다물었다. 원래 날짜를 버리는 일은 생각보다 어려웠다. 날짜는 붙잡기 쉽다. 27일, 11일, 02:17. 사람은 숫자가 있으면 통제하고 있다고 착각한다. 하지만 지금 그 숫자들은 서로 다른 방향으로 우리를 끌고 있었다.
서진이 라디오 장비를 내려놓았다. "방송 문장에도 날짜 빼겠습니다. `오늘 밤` 같은 말도 조심해야 해요. 네트워크 시간이 흔들리면 오늘이라는 말부터 싸움 납니다."
민채는 오프라인 시계 세 개를 책상에 놓았다. "이거 세 개는 아직 맞아요. 근데 휴대폰은 02:17로 튀었다가 돌아와요. 튀는 순간이 점점 길어져요."
오경태의 내선 음성은 더 거칠었다. "시계보다 펌프 봐요. 시간이 미쳐도 물은 내려갑니다."
나는 보드 아래쪽에 새 종이를 붙였다. 제목을 쓰려다 지웠다. 거창한 이름은 필요 없었다. 사람, 설비, 출처. 세 칸이면 충분했다. 보리동 주민 대표, 문상필, 장유라 구조팀, 서진 방송, 민채 시계, 오경태 원격 조언, 병원 전원, 남서 수문, 서해 방벽 보조 라인. 선을 그을 때마다 날짜 대신 조건을 적었다.
문상필이 급수 밸브를 건드리면 고층 역류가 늦춰진다. 대신 수문 압력 변화에 취약해진다. 서진이 방송하면 주민 이동이 빨라진다. 대신 검증 안 된 소문이 같이 붙을 수 있다. 장유라가 고립자를 먼저 빼면 전력 예산이 줄어든다. 대신 사람을 숫자로만 배치하지 않게 된다.
"이제야 지도 같네요." 서진이 말했다.
"전에는 뭐였는데."
"사망자 줄 세우기."
그 말은 아팠지만 틀리지 않았다. 나는 노트의 날짜표를 접어 주머니에 넣었다. 버리지는 않았다. 원본은 증거다. 다만 지휘판 위에서 내려왔다.
민채가 색펜을 들었다. "출처 태그 붙여도 돼요? 직접 관측은 A, 로그는 B, 추정은 C, 무효는 X. 근데 정확도라는 말은 쓰지 말고요."
"좋아." 내가 말했다.
"그리고 제 배터리는 58퍼센트. 드론은 못 띄워요. 센서 하나만 쓸 수 있어요."
"그럼 센서는 어디에 둡니까."
민채는 바로 답하지 않았다. 유용해 보이고 싶은 얼굴이 먼저 지나갔다. 그 뒤에 계산이 왔다. "수문 쪽에 두고 싶지만 이동 시간이 길어요. 지금은 관리실 급수 압력계에 붙일게요. 대신 누가 수동으로 숫자도 적어야 해요. 센서 죽으면 끝이라."
문상필이 손을 들었다. "내가 적죠."
"한 시간마다가 아니라 10분마다요."
"눈도 나쁘고 손도 느려."
"그래서 숫자 크게 쓰세요."
그는 투덜거리면서도 종이를 받아 갔다. 민채가 어른에게 지시했고, 장유라는 끼어들지 않았다. 역할이 생기면 나이보다 손이 먼저 움직인다.
서진은 방송 초안을 읽었다. "확인된 사실만 말합니다. 셀 3은 자율 운용 중이고, 외곽 수문 예약 명령이 확인됐습니다. 현재 출입 가능 여부는 미확인. 각 동 대표는 고립자 위치, 약품 냉장, 물 사용량을 관리실 표에 올려 주세요. 소문 제보는 원본 위치와 시각이 없으면 방송하지 않습니다."
"수문 예약 명령을 말하면 공황 옵니다." 임도윤이 말했다.
"숨기면 더 늦게 옵니다."
"공개 범위가 문제입니다. `폐쇄`라는 단어는 주민 이동을 밀어낼 수 있습니다."
장유라가 둘 사이에 섰다. "폐쇄 예정은 말합니다. 단, 탈출하라는 말로 들리지 않게. 지금 바깥으로 몰리면 외곽문에서 다칩니다."
서진은 문장을 고쳤다. "외곽문으로 몰리지 마십시오. 현장팀이 닫힘 여부를 확인 중입니다. 지금 필요한 건 층별 인원과 물 사용 제한입니다."
임도윤은 잠깐 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 정도면 기록 가능합니다."
기록 가능. 방송 가능. 구조 가능. 전부 다른 말이었다. 우리는 그 차이를 맞추느라 시간을 썼다. 예전의 나는 그 시간을 낭비라고 불렀을 것이다. 지금은 아니었다. 동의와 검증은 느리지만, 잘못된 빠름보다 싸다.
장유라는 구조팀을 셋으로 나눴다. 자신은 B동 고립자 확인, 젊은 대원 둘은 계단 통로, 주민 자원자는 물통 운반. 그녀는 내게 지휘를 넘기지 않았다. 대신 물었다. "철수 조건."
"급수 압력 13 이하, 외곽 수문 폐쇄 확인, 또는 비상전원 예산 8시간 아래."
"셋 중 하나면?"
"현장 재평가. 둘이면 고층 구조 중지하고 내부 대피."
"공개합니다."
나는 망설였다. 철수 조건을 공개하면 주민들이 우리가 떠날 준비를 한다고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숨기면 더 큰 배신이 된다. 장유라가 기다렸다. 이번에는 내가 먼저 말했다.
"공개하겠습니다."
서진은 그 문장도 방송에 넣었다. `철수 조건은 세 가지이며, 해당 조건 발생 시 현장 지휘자가 대피 순서를 재공지합니다.` 주민들이 싫어할 문장이었다. 그러나 싫은 문장과 필요한 문장은 자주 겹친다.
보리동 안은 준비의 소리로 바뀌었다. 물통이 계단 아래에 모였고, 캠핑 배터리에는 약국 이름표가 붙었다. 어린이집 교사는 아이들 이름 대신 현재 위치를 표에 적었다. 한 주민은 자기 집에 있는 냉장고 전원을 요구하다가, 당뇨 약이 필요한 집 번호를 듣고 멈췄다. 선의가 아니라 순서가 사람을 붙잡았다.
순서를 정하는 일은 곧 싸움이었다. 15층 노인은 계단을 내려오지 않겠다고 했다. 자기 무릎으로는 못 내려간다는 이유였고, 틀린 말도 아니었다. 아래층 주민들은 그 때문에 들것이 묶인다고 화를 냈다. 장유라는 들것을 먼저 올리지 않았다. 대신 노인의 집 현관 앞까지 연결되는 계단 폭, 난간 높이, 쉬는 지점을 확인하게 했다.
"못 내려온다는 말은 정보입니다." 그녀가 무전으로 말했다. "고집이라고 처리하지 마세요. 내려오려면 어디서 멈추는지부터 봅니다."
나는 보드에 노인의 위치를 점으로 찍었다. 그 점 하나 때문에 B동 계단 동선이 바뀌었다. 전력 예산으로 움직이는 엘리베이터는 이미 1회만 남아 있었다. 그 1회를 노인에게 쓸지, 산소가 필요한 아이에게 쓸지, 약품 냉장고를 위해 아껴 둘지 결정해야 했다.
서진이 방송을 멈추고 내게 물었다. "이걸 공개하면 싸움 납니다."
"숨기면 나중에 폭발합니다."
"범위."
나는 잠깐 생각했다. 예전 같으면 답을 혼자 냈을 것이다. 이번에는 장유라에게 물었다. "유라 씨, 공개 범위."
무전 너머에서 계단 소리와 숨소리가 들렸다. 그녀는 뛰면서도 대답했다. "개인 이름 빼고 조건만. 엘리베이터 1회, 거동 불가 1명, 산소 필요 1명, 약품 냉장 1건. 결정 기준 공개."
서진은 그대로 바꿨다. "엘리베이터 잔여 운행 1회입니다. 거동 불가자, 산소 필요자, 약품 냉장 전원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합니다. 현장팀은 생명 위험과 대체 가능성을 기준으로 결정합니다. 의견은 층별 대표를 통해 받습니다."
복도에서 욕이 터졌다. 하지만 동시에 손이 올라갔다. 누군가는 산소 아이가 몇 층인지 물었고, 누군가는 노인을 의자로 옮길 수 있다고 했다. 약국 주인은 냉장고 전원을 포기할 수 있는 시간을 다시 계산했다. 정보가 공개되자 모두가 착해진 것은 아니었다. 다만 자기 요구를 같은 표 위에 올려야 했다. 그게 달랐다.
약국 주인이 말했다. "인슐린은 보냉함으로 세 시간 버팁니다. 냉장 전원은 뒤로 미뤄도 됩니다. 대신 얼음 더 필요합니다."
아래층 주민 둘이 냉동실 얼음을 가져오겠다고 했다. 그중 한 명은 방금 전까지 노인 때문에 자기 아이가 늦어진다고 소리치던 사람이었다. 사람은 일관되게 선하거나 악하지 않다. 조건이 바뀌면 행동도 바뀐다. 그래서 조건을 공개해야 했다.
엘리베이터 1회는 산소 아이에게 갔다. 노인은 계단참마다 의자와 담요를 놓고 천천히 내려오기로 했다. 선택은 모두를 만족시키지 못했다. 하지만 누구도 나중에 "왜 그랬는지 몰랐다"고 말할 수는 없었다.
나는 날짜표 대신 의존망 지도에 새 선을 그었다. `엘리베이터 1회 -> 산소 아이`, `노인 -> 계단 보조`, `약품 -> 보냉함`. 전부 임시였다. 임시라는 말이 예전에는 실패처럼 들렸는데, 지금은 살아 있는 계획의 조건처럼 보였다.
오경태는 전화 너머에서 수동 전력 절차를 불러 줬다. "차단기 올릴 때 한꺼번에 하지 마요. 한 칸씩. 불꽃 튀면 바로 내려. 냄새 나면 자랑하지 말고 도망가고."
문상필이 받아 적다가 말했다. "말투가 왜 이렇게 험해요."
"살아 있으면 나중에 예쁘게 말해 줄게요."
민채가 작게 웃었다. 그 웃음은 오래 가지 않았다. 압력계 숫자가 15.8로 내려갔다. 그녀는 색펜을 바꾸고, 숫자 옆에 `수문 예약 이후 하락`이라고 적었다. 원인 확정이 아니라 관측 순서였다.
나는 보드 한쪽에 마지막으로 큰 글씨를 썼다.
현재 시각 / 현장 수치 / 출처.
완성된 문장은 아니었다. 아직 내 입에 붙지도 않았다. 하지만 날짜 대신 물어야 할 세 가지였다. 나는 그 아래 D-day라는 글자를 작게 쓰고, 동그라미 대신 보류 표시를 했다.
문상필이 그 글자를 보고 물었다. "출처까지 왜 써요. 숫자 맞으면 된 거 아닙니까."
"누가 언제 본 숫자인지 모르면, 나중에 서로 다른 숫자가 싸웁니다."
"그럼 내가 쓴 압력도 이름 붙입니까?"
"붙입니다. 문상필, 급수 압력, 관리실 계기판, 현실 시각 기준."
그는 민망한 듯 펜을 돌렸다. "내 이름이 틀리면 어쩌죠."
"그러면 수정 기록을 남깁니다. 틀린 걸 숨기는 것보다 낫습니다."
임도윤이 그 말을 듣고 보드 아래에 작은 칸을 만들었다. `수정자 / 수정 이유`. 주민 대표가 그 칸을 보며 불평했다. 하지만 곧 자기 층 인원 수를 고쳐 적었다. 처음에는 18명이라 했던 층이 실제로는 21명이었다. 세 명은 방문객이었다. 날짜표에는 절대 나오지 않는 사람들이었다.
그 세 명 때문에 물 배분 표가 바뀌었다. 작은 수정이었지만, 나는 그 순간 D-day보다 현재 명단이 더 무겁다는 걸 느꼈다.
서진은 방문객 세 명을 방송하지 않았다. "개인 신원은 층 대표와 구조팀만. 공개 방송에는 총원만."
"왜요?" 민채가 물었다.
"사람 이름이 나오면 가족들이 한꺼번에 몰려요. 지금 필요한 건 위치와 수량이지, 누가 누구냐가 아니야."
그 말도 지도 옆에 붙었다. 정보 공개는 많이 말하는 일이 아니라, 사람이 움직일 수 있는 만큼 자르는 일이었다.
"버린 겁니까?" 임도윤이 물었다.
"실무 기준에서 제외합니다. 증거 원본은 보관하고요."
"그 차이를 기록하겠습니다."
좋았다. 누군가 차이를 기록해야 했다. 기록되지 않은 차이는 나중에 변명으로 쓰인다.
라디오실은 관리실 옆 작은 창고를 비운 곳이었다. 서진은 송출기를 책상 위에 놓고, 안테나 선을 창밖 난간에 묶었다. 네트워크가 흔들리면서 인터넷 방송은 끊겼지만, 짧은 FM 송출은 살아 있었다. 주민들이 오래된 라디오를 가져왔다. 등산용, 주방용, 손전등 겸용. 각자 다른 크기의 스피커에서 같은 잡음이 났다.
서진이 첫 문장을 읽었다. 목소리는 빠르지 않았다. "보리동 셀 3 내부 임시 방송입니다. 확인된 사실과 미확인 소문을 분리해서 전달합니다."
잡음 사이로 복도 소리가 낮아졌다. 사람들은 믿어서 조용해진 것이 아니었다. 들을 것이 생겼기 때문에 잠깐 멈췄다.
방송이 끝나갈 때, 라디오 하나가 갑자기 흰 잡음을 냈다. 처음에는 안테나 문제처럼 들렸다. 서진이 주파수를 조금 돌렸지만 잡음은 사라지지 않았다. 다른 라디오에서도 같은 소리가 났다. 창고 안의 여섯 대가 순서 없이 떨리다가, 같은 간격으로 끊겼다.
치익.
짧은 정적.
치익.
민채가 오프라인 시계를 확인했다. "현실 시각 10:06."
라디오에서 낮은 기계음이 흘렀다. 사람 목소리는 아니었다. 숫자를 읽는 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단말 화면들이 동시에 흰색으로 바뀌었다가 돌아왔다. 그 사이에 네트워크 시각 한 줄이 떴다.
02:17.
서진이 송출을 멈추지 않고 말했다. "방금 신호 원본 보존. 추정 방송 금지."
그러나 라디오는 다시 같은 간격으로 울렸다. 이번에는 관리실 전광판, 주민 휴대전화, 병원 내선 단말의 작은 화면까지 동시에 흔들렸다.
02:17.
도시 전역 라디오가 같은 시각을 읽기 시작했다.
이번 화가 재미있었나요?
좋아요와 평점은 언제든 변경할 수 있습니다.
독자 평점 아직 없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