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화

배신자의 목소리

내가 구한 사람들 때문에 미래가 틀렸다 · 2026. 9.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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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신자의 목소리

음성 파형의 앞뒤는 비어 있었다. 정확히 말하면 비어 보였다. 민채가 화면을 확대하자 검은 선은 완전한 침묵이 아니라 낮은 잡음으로 깔려 있었다. 사람이 일부러 지운 것인지, 장비가 받지 못한 것인지, 전송 중 잘린 것인지 구분할 수 없는 얇은 흔적이었다.

스피커는 더 재생하지 않았다. 장유라가 손을 올려 막았다.

"반복 재생 금지. 먼저 앞뒤."

그녀는 나를 보지 않았다. 내 표정을 보면 이미 결론을 알 수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나는 윤설아의 목소리를 들은 순간 남문 수문 앞 냄새를 떠올렸다. 젖은 콘크리트, 뜨거운 모터, 경보가 없어 더 크게 들리던 물소리. 그리고 같은 문장.

남문을 열어.

기억은 증거가 아니었다. 그 말을 지난 며칠 동안 내가 몇 번이나 적었는지 모른다. 그런데 같은 목소리가 나오자 손이 먼저 노트의 X가 아닌 A칸으로 움직였다. 싫어도 몸은 오래된 확신을 믿는다.

서진이 파일 속성을 읽었다. "원본 길이 23초. 실제 음성 구간은 2.4초. 앞 9분 31초, 뒤 9분 29초에 레벨은 있는데 데이터 태그가 비어 있어."

"합치면 19분." 민채가 말했다.

임도윤은 바로 적었다. "19분 공백. 삭제 단정 금지."

"삭제가 아니면 뭡니까." 내가 물었다.

그는 내 쪽을 봤다. "장비 장애, 권한 대리, 전송 실패, 포맷 미지원. 지금은 후보입니다."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후보라는 말이 너무 느렸다. 도시가 닫히고, 수문 예약이 앞당겨지고, 윤설아의 목소리가 남문을 열라고 했다. 느린 말이 사람을 죽일 수 있다. 하지만 빠른 확신도 사람을 죽였다. 내 노트가 그 증거였다.

단말이 한 번 깜박였다. 발신자 없는 창 위에 새 연결 요청이 떴다. `YS-AUTH / LOW BANDWIDTH`. 장유라는 스피커 음량을 낮추고 말했다.

"녹음, 원본 보존."

서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켜져 있어요."

연결이 열리자 윤설아의 목소리가 다시 들어왔다. 이번에는 실시간이었다. 잡음이 많았고, 두 단어마다 끊겼다.

"그 파일... 먼저 원본 해시부터 남겼나요?"

나는 웃지 않았다. "첫마디가 그겁니까."

"네가 화낼 건 예상했어. 그래도 해시부터."

반말 한 조각이 잡음 사이로 새어 나왔다. 오래된 관계의 잔여물처럼 짧았다. 그녀는 곧바로 존댓말로 돌아갔다. "그 음성은 제 목소리가 맞습니다. 하지만 원문 명령은 남문 주수문 개방이 아닙니다."

"그 문장이 그대로 들어 있습니다."

"비상 패치 절차에서 모형 밸브를 열라는 구간입니다. 현장 명칭이 남문으로 축약됐을 수 있습니다. 원본 문맥 없이 들으면 그렇게 들립니다."

"편리하네요."

"편리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앞뒤 19분을 보라고 하는 겁니다."

장유라가 끼어들었다. "믿으라는 말 말고, 확인할 수 있는 걸 주세요."

윤설아는 바로 답했다. "로그 상세 보기에서 실행자 아래 두 칸. executor 다음 proxy token 필드가 있을 겁니다. 표시 안 되면 원시 보기로 바꾸세요. 거기에 `LCHS-DELTA` 또는 빈 토큰이 남아 있는지 확인하세요."

민채가 손을 들었다가 바로 키보드로 옮겼다. "원시 보기... 권한 없어요."

"오프라인 캐시 열람이면 됩니다. 네트워크로 들어가지 마세요. 지금 들어가면 중앙 큐에 위치가 남습니다."

"그걸 어떻게 알아요." 임도윤이 물었다.

"제가 설계했으니까요."

짧은 대답이었다. 변명보다 나빴다. 설계자는 무고해도 책임이 남는다. 윤설아는 그 사실을 피하지 않았다. 하지만 책임을 인정하는 것과 범행을 부정하는 것은 동시에 가능했다. 그래서 더 판단하기 어려웠다.

민채가 로컬 캐시를 열었다. 그녀는 해킹하지 않았다. 보리동 단말이 이미 받은 로그의 읽기 전용 복사본을 꺼냈다. 화면 오른쪽에 필드가 하나 더 나타났다.

executor: YS-AUTH

proxy_token: LCHS-DELTA-EMPTY

generated_at: 02:17

applied_at: 02:36

민채의 손이 멈췄다. "생성하고 적용 사이가 19분이에요."

서진이 바로 물었다. "그 19분 동안 뭘 했는지 기록은?"

"비어 있습니다." 민채가 말했다. "아니, 칸은 있는데 레코드가 없어요."

오경태의 음성이 병원 내선으로 끼어들었다. "장비가 죽으면 그런 칸 나옵니다. 다 삭제라고 보면 안 돼요."

서진은 반대로 말했다. "삭제해도 그런 칸 나옵니다. 특히 원본 인덱스만 남기면."

나는 화면의 `YS-AUTH`를 봤다. 윤설아가 아니라고 하기에는 너무 가까웠고, 윤설아라고 단정하기에는 한 칸이 더 있었다. proxy_token. 대리 실행. 내 미래 기억에는 그 칸이 없었다. 아니, 내가 보지 않았거나 기억하지 못했을 수도 있었다. 외상 기억은 장면을 한꺼번에 붙인다. 무음과 명령과 붕괴를 한 장면으로 압축한다.

"네가 남문을 열었어." 내가 말했다.

통신 너머에서 숨소리가 끊겼다. "그렇게 기억하는 거 알아."

"기억한다고 말한 적 없습니다."

"네가 나를 그렇게 보는 건 알아."

장유라가 낮게 말했다. "두 분 개인 감정은 뒤로."

윤설아가 바로 말을 고쳤다. "확인 가능한 것만 말하겠습니다. 제 목소리는 맞습니다. 제 권한 서명도 맞습니다. 하지만 실행은 대리 토큰으로 들어갔고, 19분 구간이 비어 있습니다. 저는 그 공백을 설명할 자료가 없습니다."

"위치는요." 임도윤이 물었다.

"공개할 수 없습니다."

"그러면 협조가 아닙니다."

"공개하면 그쪽 위치도 같이 잡힙니다. 지금은 보리동 셀 단말을 오프라인으로 유지하세요."

서진이 날카롭게 물었다. "당신이 우리를 보호하는 건지, 당신 흔적을 숨기는 건지 어떻게 구분하죠?"

"구분 못 합니다." 윤설아가 말했다. "그래서 원본 보존하라고 했습니다."

그 말에 관리실이 조용해졌다. 완벽한 해명은 아니었다. 오히려 빈 곳이 더 많았다. 하지만 거짓말만 하는 사람은 보통 자기에게 불리한 보존 절차를 먼저 말하지 않는다. 물론 그것조차 계산일 수 있었다. 윤설아는 그 정도로 유능했다.

임도윤은 통신선을 향해 한 발 다가섰다. "윤설아 씨, 현재 진술은 자기 방어와 기술 협조가 섞여 있습니다. 나중에 법적 진술로 쓰려면 구분해야 합니다."

"알고 있습니다."

"그럼 지금 구분하십시오. 확정 사실."

윤설아는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잡음 사이로 키보드를 치는 소리 같은 것이 들렸다. "첫째, 음성은 제 목소리입니다. 둘째, 해당 파일은 원문 전체가 아닙니다. 셋째, proxy token 필드가 있으면 실행 주체는 제 계정 단독이 아닐 수 있습니다. 넷째, 저는 현재 보리동 단말에 접속하지 않았습니다."

"확인 불가능하거나 미확인인 것."

"제 위치. 19분 공백 원인. 대리 토큰을 만든 사람. 그리고 한이겸 씨가 기억한 남문 장면과 이 파일이 같은 사건인지 여부."

내 이름이 나왔을 때 목 안이 마른 듯했다. 그녀는 내 기억을 부정하지 않았다. 동시에 그 기억이 지금 파일의 판결문이 되는 것도 막았다.

서진이 물었다. "당신에게 불리한 건 뭡니까."

"제 권한 설계가 대리 실행을 가능하게 했다는 점입니다. 누가 눌렀든 제 책임이 없어지지 않습니다."

그 말은 사과처럼 들리지 않았다. 보고서 문장에 가까웠다. 하지만 윤설아다운 방식이었다. 감정을 넣어 용서받으려 하지 않는 것. 그래서 더 차가웠고, 그래서 조금 더 믿기 어려웠다.

민채가 화면 아래쪽을 가리켰다. "토큰 상세에 체크섬 있어요. 근데 한 글자가 깨져요."

"읽지 마세요." 윤설아가 급히 말했다. "깨진 글자를 맞추려 하지 마세요. 자동 보정이 켜지면 중앙 큐가 원본 요청을 보냅니다."

민채가 손을 뗐다. "안 눌렀어요."

"좋아요. 지금은 모르는 글자 하나가 더 안전합니다."

오경태가 내선에서 투덜거렸다. "요즘 기계들은 모르는 걸 왜 자꾸 채우려고 해. 모르면 빈칸으로 둬야지."

서진이 그 말을 받아 적었다. "빈칸 유지. 이거 방송에는 못 내지만 기록에는 남깁니다."

나는 파형을 다시 보았다. 2.4초짜리 목소리는 너무 선명했고, 앞뒤 19분은 너무 흐렸다. 선명한 것에만 매달리면 윤설아는 범인이 된다. 흐린 것에만 매달리면 아무도 책임지지 않는다. 둘 다 틀릴 수 있었다.

"설아." 내가 말했다.

통신 너머가 잠깐 조용해졌다.

"네가 말하지 않는 게 더 있습니까."

"있습니다."

장유라가 눈을 좁혔다. "그럼 협조가 아니죠."

"지금 말하면 당신들이 할 수 없는 선택을 하게 됩니다. 그래서 안 말합니다."

"그 판단도 통제입니다." 장유라가 말했다.

"맞습니다." 윤설아의 목소리는 낮아졌다. "그래서 저를 믿지 말고 로그를 보세요."

믿지 말라는 협조. 그것이 지금 윤설아가 줄 수 있는 전부였다. 나는 그 말을 좋아할 수 없었다. 하지만 좋아하지 않는다고 버릴 수도 없었다.

단말 오른쪽 위 시간이 흔들렸다. 08:??로 표시되던 네트워크 시각이 다시 02:17로 튀었다가 돌아왔다. 민채가 오프라인 시계를 들어 보였다.

"현실 시각 09:18. 네트워크 시각만 흔들려요."

윤설아의 목소리가 급해졌다. "셀 명령 큐 확인하세요. 수문 쪽 예약이 들어올 겁니다. D-day 기준이 아니라 현재 큐 기준으로요."

"무슨 수문." 장유라가 물었다.

"보리동 남서쪽 외곽 수문. 서해 방벽 보조 라인에 붙은 곳입니다. 거기 닫히면 셀 3은 물을 자체 순환해야 합니다."

나는 지도에서 점선을 찾았다. 15화에 오경태가 가능성으로 남긴 선. 도면 확인 전이라고 적어 둔 선. 가능성은 하루도 지나지 않아 명령 큐가 됐다.

민채가 셀 단말을 열었다. 예약 명령 목록은 원래 관리자 화면에 숨어 있었지만, 지금은 셀 자율 운용 탭 아래에 일부가 떠 있었다. 한 줄이 흰색으로 깜박였다.

BORI-GATE-SW3 / CLOSE / 02:17 SYNC / D-11 OVERRIDE.

권한 계정은 윤설아가 아니었다.

LACHESIS-FUTURE-CODE / 7C-PRESERVE.

임도윤이 소리 없이 화면을 촬영했다. 서진은 같은 문장을 두 번 쓰지 않고, 계정명과 예약 시각만 적었다. 장유라는 바로 무전했다.

"남서 외곽 수문 폐쇄 예약 확인. 현장팀은 사람 접근 통제. 오 반장님, 수동 확인 가능한가요?"

오경태가 기침했다. "그쪽 수문은 직접 못 봅니다. 근데 닫히기 전에 압력 튈 겁니다. 급수 밸브 더 열지 말고, 고층 물 사용 막아요."

문상필이 관리실 문 밖에서 들었는지 욕을 낮게 뱉었다. "아까 더 안 돌린 게 맞았네."

나는 노트에서 D-day 줄을 찾았다. 원래 수문 폐쇄는 11일 뒤였다. 거기에 줄을 그으려다 멈췄다. 아직 X가 아니었다. 완전히 틀렸다고 선언하기엔 물리 사실이 부족했다. 하지만 실무 기준으로는 더 이상 믿을 수 없었다. 나는 B를 C로 내리고, 옆에 썼다. `현재 큐 우선. 날짜 보류.`

그 표기를 본 민채가 물었다. "보류면 믿는 거예요, 안 믿는 거예요?"

"구조 근거로는 안 믿고, 증거로는 보관합니다."

"헷갈려요."

"나도 그래."

서진이 그 대화를 그대로 받아 적었다. "헷갈리는 상태도 기록. 나중에 누가 확신했다고 자르지 못하게."

장유라는 수문 지도에 빨간 테이프를 붙였다. "그럼 지금 기준은 닫힌다고 보고 대비. 원인은 모른다고 보고 말하지 않기."

말은 짧았지만, 그 안에 이번 회차의 답이 있었다. 의심은 남기고 행동은 늦추지 않는다. 임도윤은 그 문장을 별도 표시했다. "행동 기준과 수사 결론 분리. 이게 나중에 중요해집니다."

"한이겸." 장유라가 불렀다.

나는 고개를 들었다.

"의심은 나중에 해요. 지금은 닫히는 문부터."

그 말이 맞았다. 윤설아가 배신자인지 아닌지는 셀 안의 물을 당장 올려 주지 않는다. 19분 공백의 의미도 지금은 답이 아니라 위험 범위였다. 우리는 미스터리를 해결하기 전에 닫히는 수문에 대비해야 했다.

윤설아가 마지막으로 말했다. "대리 토큰은 지우지 마세요. 그리고 19분을 범인으로 만들지도 마세요. 그 시간에 누군가 막았을 수도 있습니다."

"누가요."

통신이 끊기기 전, 그녀의 목소리가 한 번 더 들어왔다. "그걸 아직 모릅니다."

단말은 침묵했다. 대신 예약 줄이 더 굵게 변했다.

BORI-GATE-SW3 폐쇄 예정: 02:17 동기화 시.

달력상 D-day보다 11일 빨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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