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인 방정식
24시간마다 살인범이 바뀐다 · 2026. 10.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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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인 방정식
21:30, 강태준은 보드에서 사람 이름을 가렸다.
검은 테이프가 홍상욱, 오세진, 서이현, 윤해원의 이름을 덮었다. 이름이 사라지자 줄만 남았다. 손, 명령, 침묵, 정보 입력. 네 줄은 사람보다 얇았지만, 사람보다 덜 도망쳤다. 나는 그 얇은 줄을 보며 처음으로 숨을 조금 고르게 쉬었다.
“실험은 세 개입니다.”
내가 말했다.
강태준은 펜을 들지 않았다.
“실험 대상은 사람입니까, 조건입니까.”
그 질문 하나로 내 문장이 멈췄다. 나는 조건이라고 말하려 했고, 이미 머릿속에는 사람을 옮기는 순서가 떠 있었다. 오세진을 격리한다. 홍상욱의 권한을 잠근다. 내가 원본을 낸다. 윤해원을 다른 방에 둔다. 말은 조건이었지만 동선은 사람을 체스말처럼 잡고 있었다.
고유라가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사람 칸부터 쓰면 또 틀릴 것 같은데요.”
그 말이 맞았다. 나는 보드 왼쪽에 새 표를 그렸다.
`조건 A: 손을 막는다.`
`조건 B: 명령을 늦춘다.`
`조건 C: 침묵을 깨운다.`
강태준은 그제야 펜을 들었다. 그는 각 줄 옆에 `동의`, `기록`, `실패 시 중단`을 붙였다.
“공동 계획이면 조건이 있습니다.”
“알고 있습니다.”
“아직 말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내 대답을 받아 주지 않았다. 공동 계획이라는 말은 멋있지만, 내가 혼자 정한 다음 설명하면 실험이 아니라 지시가 된다. 강태준은 그 지시가 어디로 가는지 알고 있었다. 그의 손목이 오래된 부상 때문에 조금 늦게 움직였다. 그래도 선은 곧았다.
“첫째, 누구도 모르는 조건을 넣지 않습니다.”
그가 말했다.
“둘째, 실패를 성공처럼 해석하지 않습니다.”
고유라가 펜 끝을 내려놓았다. 그 소리는 작았지만 방 안의 사람들을 한 번씩 멈추게 했다.
“셋째도 있어요. 실험 때문에 누군가 평소와 다른 죄를 짓게 만들면 안 됩니다.”
그 말은 나를 향했다. 나는 반박하지 않았다. 내가 하려던 일 중 일부는 정확히 그 경계에 걸려 있었다. 오세진이 움직이지 못하게 만들고, 홍상욱이 답답해서 다른 통로를 쓰게 만들고, 윤해원이 모르는 말을 하게 만든다. 그러면 루프는 반응한다. 반응이 크면 증거도 크다. 나는 그 크기를 생각하고 있었다.
강태준은 내 쪽으로 종이를 밀었다.
“유도와 관찰을 구분하십시오.”
나는 그 문장을 맨 위에 다시 썼다. `유도 금지.` 손끝이 잠깐 멈췄다. 이 규칙을 넣으면 계획은 느려진다. 느려지면 사람을 잃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규칙 없이 빨라지면 우리가 홍상욱과 달라지는 지점이 사라진다.
21:45, 우리는 첫 실험을 손으로 제한했다.
오세진은 의무실 밖에서 보안팀과 함께 있어야 한다. 약품 보관함은 봉인한다. 윤해원의 응급 기록은 사본만 둔다. 원본 카트리지는 아무도 만지지 않는다. 여기까지가 조건 A였다. 명령과 침묵은 일부러 건드리지 않는다. 그래야 손만 막았을 때 무엇이 바뀌는지 본다.
“사람을 살리는 실험입니까, 가설을 살리는 실험입니까.”
윤해원이 물었다.
그는 피해자답게 말하지 않았다. 자기 죽음을 변수로 보는 사람의 말이었다.
나는 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둘 다입니다.”
“둘 다라면 순서를 정하십시오.”
강태준이 말했다.
나는 보드 아래에 썼다.
`사람 보호가 실험보다 앞선다.`
글씨를 쓰는 동안 손이 느려졌다. 그 문장은 나에게 불리했다. 불리한 문장이 계획서 첫 줄에 있어야 한다. 그래야 나중에 내가 숫자 뒤로 숨을 때 누군가 손가락으로 짚을 수 있다.
윤해원은 그 줄을 보고 말했다.
“그럼 내가 거부하면 실험은 멈춥니까.”
“멈춥니다.”
강태준이 나보다 먼저 답했다.
나는 늦게 고개를 끄덕였다. 늦었다는 사실도 기록해야 했다. 동의서에는 `언제든 철회 가능`이라는 문구가 들어갔다. 윤해원은 서명하기 전에 그 문구를 손가락으로 눌렀다.
“철회했을 때 손해가 생기면 누가 책임집니까.”
방 안이 조용해졌다. 좋은 질문은 계획서의 빈칸을 들킨다.
“수사팀이 책임집니다.”
강태준이 말했다.
“아니요.”
윤해원이 고개를 저었다.
“수사팀은 책임질 수 없습니다. 저는 살아 있는 사람이고, 이 건물의 부원장입니다. 내가 철회하면 내가 책임지는 부분도 적으십시오.”
그는 자기 이름 옆에 `철회 시 공개 진술 유예 책임 수용`이라고 썼다. 문장은 차가웠다. 차가운 문장이어서 더 무거웠다. 그는 보호받는 피해자 자리에만 앉지 않았다. 그래서 내 계획은 또 한 번 흔들렸다.
고유라는 조건 A의 로그 장치를 준비했다. 카메라를 늘리지 않았다. 오세진의 손과 보관함 봉인, 복도 출입 표시만 보이게 했다. 노을은 식당 쪽 컵 줄을 그대로 두겠다고 문자로 알렸다. 자기 행동이 입력이 될 수 있음을 이제 먼저 적었다.
`오늘 컵 안 만짐. 바닥 물 있으면 표시만 함.`
고유라는 그 문장을 표 하단에 붙였다.
“변경 입력 목록에 넣을게요.”
노을의 행동은 이제 배경이 아니었다. 그 사실만으로도 루프는 달라진다.
강태준은 노을의 문자를 별도 봉투에 출력했다.
“왜 문자까지 증거화합니까.”
내가 물었다.
“작은 입력이 큰 동선을 만든다는 주장을 우리가 하고 있으니까요.”
그는 봉투 겉면에 `자발 통지, 행동 변경 아님`이라고 썼다. 노을에게 새 행동을 시키지 않았다는 표시였다. 그 차이는 작아 보였다. 그러나 나중에 누군가 “수사팀이 노을을 움직여 결과를 만들었다”고 말하면, 이 작은 문장이 방어선이 된다.
고유라는 카메라 배치도에도 같은 원칙을 적었다. 새 카메라는 설치하지 않는다. 기존 화면의 저장 범위만 고정한다. 보는 눈이 늘어나면 사람은 다른 사람이 된다. 우리는 사람이 바뀌어서 생긴 결과가 아니라 조건이 막혔을 때 남는 결과를 보려 했다.
22:20, 첫 실험의 예비 루프를 종이에 돌렸다.
강태준은 실제 사람을 움직이기 전에 종이 동선을 요구했다. 나는 윤해원을 보안실 옆 대기실에 두고, 오세진을 의무실 밖에 두고, 홍상욱을 회의실 안에 둔 그림을 그렸다. 선은 깔끔했다. 너무 깔끔했다.
“이 그림에서 윤해원 씨는 뭘 합니까.”
강태준이 물었다.
“보호받습니다.”
“그 말은 행동이 아닙니다.”
윤해원이 웃지 않고 말했다.
“저는 살아서 말해야 합니다.”
그가 자기 칸에 직접 적었다. `R-3 가능성 사전 인지 경로 진술 준비.` 보호받는 사람이 아니라 말할 사람이 됐다. 계획이 조금 덜 매끈해졌다. 덜 매끈한 쪽이 맞았다.
홍상욱은 자기 칸을 보며 말했다.
“저는 또 앉아만 있어야 합니까.”
“네.”
강태준이 답했다.
“그건 감금입니다.”
“아닙니다. 출입 제한에 동의하지 않으면 R-3 관련 단말 접근 금지 명령을 문서로 요청하겠습니다.”
“누구에게요.”
“재단 감사관에게.”
이주완이 옆에서 손을 들었다.
“저는 아직 누구 편도 아닙니다.”
“그래서 요청합니다.”
강태준의 말에 이주완은 잠시 입을 닫았다. 누구 편도 아니라는 말은 편리하다. 그러나 문서 앞에서는 자리를 골라야 한다.
이주완은 결국 자기 이름을 보드 맨 아래에 썼다.
`법무 참관, 실험 설계 관여 없음.`
“이 문장도 방패입니다.”
고유라가 말했다.
“맞습니다.”
이주완은 이번에는 인정했다.
“하지만 방패가 있어야 나중에 이 기록을 밖으로 들고 나갈 수 있습니다.”
나는 그 말을 마음에 들어 하지 않았다. 그런데 맞는 말이었다. 증거는 진실만으로 걷지 못한다. 형식이라는 다리가 있어야 한다. 홍상욱은 그 다리를 너무 잘 썼고, 우리는 그 다리를 싫어한다는 이유로 자주 놓쳤다.
강태준은 이주완의 문장 옆에 `제한적 참관 승인`이라고 적었다. 편을 묻는 대신 역할을 좁혔다. 역할을 좁히면 배신의 크기도 줄어든다. 나는 그 계산을 하고 있는 나를 알아차렸다. 다시 사람을 칸으로 보고 있었다.
23:10, 조건 A를 실제 동선으로 옮겼다.
오세진은 의무실 문 밖 의자에 앉았다. 그의 손은 보안팀 카메라 안에 있었다. 보관함 열쇠는 강태준의 봉투 안에 들어갔다. 봉투는 투명했고, 봉인 테이프는 두 줄이었다. 고유라는 카메라 시간을 독립 기준으로 맞췄다. 중앙 표시를 옆에 두되 합치지 않았다.
“손을 막으면 명령은 남습니다.”
내가 말했다.
“그 문장을 결과처럼 쓰지 마십시오.”
강태준이 바로 막았다.
나는 `예상`이라고 붙였다. 예상은 사실이 아니다. 루프에서 여러 번 맞았던 예상도 사실은 아니다. 16화의 카트 이동이 노을의 청소로 틀렸던 것을 우리는 이미 배웠다.
강태준은 예상 옆에 빈칸 세 개를 만들었다.
`반증 조건.`
나는 첫 칸을 오래 보았다. 반증 조건이 없으면 실험은 고백이 된다. 내가 믿는 것을 확인하는 장치가 될 뿐이다.
고유라가 대신 하나를 썼다.
`오세진 손이 고정되어도 카트리지가 이동하지 않으면 조건 A 단독 효과 불명.`
윤해원이 두 번째 칸을 채웠다.
`오세진 손이 고정되어도 다른 위험 입력이 발생하면 보호 실패.`
세 번째는 내가 써야 했다.
`다른 사람이 움직이면 손의 주체 가설 폐기 또는 확장.`
폐기라는 단어를 쓰는 데 시간이 걸렸다. 내가 세운 가설을 버리는 일이 사람을 버리는 일보다 쉬워야 한다. 그런데 내 안에서는 반대였다. 그 사실이 싫었다.
23:55가 다가오자 나는 녹음기를 보았다. 조건 C는 아직 건드리지 않기로 했다. 원본도 내 손에 있었다. 나는 버튼을 누르지 않았다. 누르지 않은 것도 행동이다. 그 사실을 오늘은 모른 척하지 않기로 했다.
00:03, 의무실 쪽 복도에서 카트 바퀴 소리가 났다.
오세진은 의자에 앉아 있었다. 두 손은 카메라 안에 있었다. 보관함은 봉인된 채였다. 그런데 카트가 움직였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려 했다. 강태준이 팔을 들어 막았다.
“조건 A 안에서 움직입니다.”
그는 보안팀 한 명에게만 손짓했다. 모두가 뛰면 입력이 바뀐다. 한 명만 움직였다. 우리는 화면을 봤다.
나는 그제야 내 몸이 먼저 뛰었다는 것을 알았다. 계획서의 첫 줄은 사람 보호였지만, 내 첫 반응은 화면 확보였다. 강태준이 막지 않았다면 나는 복도로 나갔을 것이다. 나가서 회색 비옷을 잡았을 수도 있고, 그 사람이 떨어뜨린 것을 밟았을 수도 있다. 내가 만든 실험을 내가 망칠 뻔했다.
“서이현 씨.”
강태준이 화면에서 눈을 떼지 않고 말했다.
“지금 한 행동도 적으십시오.”
나는 펜을 들었다.
`00:03, 관찰자 서이현 현장 진입 시도. 강태준 제지.`
그 줄이 창피했다. 그래서 필요했다.
카트는 의무실 안에서 나오지 않았다. 생활동 비상 보관함 쪽에서 나왔다. 그 보관함은 조건 A에 없었다. 내가 오세진의 손만 막았기 때문이다.
카트 옆에 선 사람은 흰 가운이 아니었다. 회색 비옷을 입고 있었다. 얼굴은 모자 그림자에 가려졌다. 손에는 윤해원 이름이 붙은 카트리지가 있었다. 같은 외형. 다른 보관 위치. 조건 A는 손 하나를 막았고, 다른 손을 불렀다.
고유라가 화면을 확대했다.
“오세진 선생님 아니에요.”
그는 말끝을 삼키지 않았다.
보안팀원이 생활동 비상 보관함 앞에서 멈췄다. 무전음은 작게 낮춰졌다. 강태준은 “접촉하지 말고 위치만 확인”이라고 말했다. 보관함의 봉인은 낡았다. 오늘 붙인 봉인이 아니었다. 생활동 비상 보관함은 의무실 보관함과 다른 관리표를 쓴다. 나는 그 표를 왜 목록에 넣지 않았는지 생각했다.
이유는 간단했다. 오세진이 의사라서 의무실만 보았다. 약품이라는 단어에 갇혔다. 카트리지가 약품일 수도 있고, 기록일 수도 있고, 이름일 수도 있다는 것을 25화에서 들었는데도 나는 약품 칸만 잠갔다.
“조건 A가 좁았습니다.”
내가 말했다.
강태준은 고개를 끄덕이지 않았다.
“좁았다는 판단은 결과입니다. 지금은 범위 누락으로 쓰십시오.”
말은 차가웠지만 맞았다. 결과가 나오자마자 해석을 붙이는 버릇. 그 버릇도 루프의 일부였다.
강태준은 보드에 새 줄을 썼다.
`조건 A 실패: 약품만 차단했는데 다른 인물이 카트리지를 이동.`
나는 그 줄을 보며 계획서 첫 문장을 다시 봤다. 사람 보호가 실험보다 앞선다. 지금 우리는 어느 쪽을 먼저 보고 있는가.
회색 비옷의 손이 카트리지를 뒤집었다. 표식이 안쪽으로 갔다. 오세진의 습관과 같은 방향이었다. 하지만 손은 오세진이 아니었다.
화면 속 사람은 카트리지를 주머니에 넣지 않았다. 카트 위에 놓고, 손잡이를 오른쪽으로 돌리고, 그대로 멈췄다. 가져가려는 행동보다 보이게 하려는 행동에 가까웠다. 그러나 보이게 하려는 의도라고 쓰면 또 너무 빨랐다.
고유라는 마지막 프레임을 정지했다.
“손등에 반창고가 있어요.”
“의료진입니까.”
이주완이 물었다.
“반창고는 직업이 아닙니다.”
고유라가 바로 답했다.
나는 그 말에 조금 늦게 숨을 내쉬었다.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으려면, 작은 특징이 큰 신분으로 변하는 순간을 막아야 한다.
회색 비옷은 카트리지를 놓고 사라지지 않았다. 손이 다시 화면 아래로 내려갔다. 무언가를 눌렀다. 생활동 비상 보관함의 잠금 로그가 새로 떴다. 사용자명은 없었다. 대신 권한군만 표시됐다.
`임시 응급 접근.`
강태준은 그 줄을 보는 순간 펜을 멈췄다.
“오세진 손은 막혔습니다.”
윤해원이 말했다.
“그래서 다른 손이 나왔습니다.”
나는 보드의 조건 A 옆에 실패라고 쓰려다가 멈췄다. 실패는 맞다. 그러나 실패가 끝은 아니었다. 손 하나를 막으면 다른 손이 나온다. 그렇다면 살인 방정식의 첫 항은 손이 아니라, 손을 고르는 조건이었다.
회색 비옷의 인물은 마지막으로 카트리지를 한 번 더 뒤집었다. 표식은 다시 안쪽으로 갔다. 두 번째 반복. 흉내라기엔 정확했고, 습관이라기엔 너무 의식적이었다.
강태준은 화면을 끄지 않은 채 말했다.
“다음 실험은 사람을 늘리는 게 아닙니다.”
그가 보드에 새 문장을 썼다.
`손을 고르는 조건을 찾는다.`
나는 그 문장을 보며 내가 틀린 위치를 알았다. 나는 사람을 막으면 사건이 멈춘다고 생각했다. 사건은 사람을 골라 움직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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