범인은 한 명이 아니다
24시간마다 살인범이 바뀐다 · 2026. 10.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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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인은 한 명이 아니다
18:20, 윤해원은 자기 이름을 지우지 말라고 했다.
그는 장부 오른쪽 칸을 손가락으로 눌렀다. `정보 설계: 윤해원 / 미해결.` 종이는 눌린 만큼만 휘었다. 그 손가락 아래에는 핏자국도, 서명 도장도 없었다. 그래서 더 쉽게 빠질 수 있는 칸이었다.
“저 칸을 오늘 안에 왼쪽으로 옮기십시오.”
그가 말했다.
강태준은 펜을 들었다.
“어느 왼쪽.”
“살인 행위 층 옆입니다. 같은 줄은 아니어도 됩니다.”
홍상욱이 낮게 말했다.
“결국 모두를 공범으로 만들겠다는 뜻이군요.”
윤해원은 그를 보았다.
“아닙니다. 모두를 한 단어로 묶으면 당신이 제일 편해집니다.”
홍상욱은 답하지 않았다. 그 말이 맞았기 때문이다. 공범이라는 단어는 넓다. 넓은 단어 안에서는 각자의 손 모양이 사라진다.
강태준은 보드 가운데에 세로선을 그었다. 왼쪽에는 `결정`, 오른쪽에는 `사람`이라고 썼다. 사람 이름을 뒤로 미룬 형식이었다. 이현의 시간표가 공식 양식이 된 뒤, 그는 더 자주 이름을 늦게 썼다. 이름은 필요하지만 너무 빨리 쓰면 수사를 망친다.
첫 줄.
`손: 오세진 / 카트리지 교체 / 20:15.`
오세진은 고개를 들지 않았다. 그는 이 줄을 부정하지 못한다. 아직 죽이려던 것은 아니었다는 문장이 입 근처에서 맴돌 수 있다. 하지만 오늘 그 문장은 자리를 얻지 못했다. 의도와 결과는 나중에 법정에서 싸울 일이다. 지금은 손이 물건을 바꿨다는 사실만 남겼다.
둘째 줄.
`명령: R-3 / 홍상욱 원소유 / 대리 발급 / 예약 보정 / 00:07.`
홍상욱은 원소유자와 실행자를 분리해 달라고 요구했다. 강태준은 분리했다. 분리한 줄이 더 길어지자 홍상욱의 얼굴은 나빠졌다. 짧은 비난보다 긴 사실이 더 오래 붙는다.
셋째 줄 앞에서 펜이 멈췄다.
`침묵:`
그 뒤는 내 차례였다.
나는 장부를 보지 않았다. 보면 숫자가 먼저 보인다. 23:55. 00:04. 87퍼센트. 버튼음. 산소 경보. 구조 요청. 숫자는 늘 나에게 피난처를 줬다. 이번에는 피난처가 아니라 증거였다.
“서이현 9분.”
내가 말했다.
강태준은 그 말을 그대로 썼다. `침묵: 서이현 / Q-13 거래 파형 / 23:55~00:04 / 사유 미진술.`
사유 미진술. 그 네 글자가 나를 보호하지 않았다. 오히려 다음 질문을 예약했다.
고유라는 그 줄을 보고 파일명에 내 이름을 넣지 않았다. `silence_2355_0004_copy`. 이름 대신 시각을 썼다. 배려가 아니었다. 아직 사실이 시각까지밖에 가지 않았기 때문이다. 나는 그 정확함에 잠깐 화가 났고, 곧 화낼 자격이 없다는 것을 알았다.
윤해원은 세 줄을 보더니 고개를 저었다.
“아직 틀렸습니다.”
강태준이 물었다.
“무엇이 틀렸습니까.”
“범인이 한 명이 아니라는 결론으로 가면 틀립니다.”
오세진이 처음으로 고개를 들었다. 홍상욱도 그를 봤다. 둘 다 같은 오해를 기대한 얼굴이었다. 사람이 늘어나면 죄가 얇아질 수 있다. 윤해원은 그 길을 막았다.
“살인은 세 사람이 한 것이 아니라, 세 번 결정됐습니다.”
그는 천천히 말했다.
“손이 한 번. 명령이 한 번. 침묵이 한 번.”
그 문장은 방 안을 설명하지 않았다. 방 안을 나눴다. 나는 그 차이를 느꼈다. 세 사람이라는 말은 이름을 세는 일이다. 세 번이라는 말은 순간을 세는 일이다. 순간을 세면 나도 빠지지 않는다.
고유라는 보드 아래에 `세 사람 아님 / 세 결정`이라고 적었다. 생활어 번역을 붙이는 습관이었다. 이번에는 기술어가 아니라 책임어를 번역했다.
“그럼 봉투 설계는요.”
그가 물었다.
윤해원은 바로 대답했다.
“정보 입력입니다. 손도 명령도 침묵도, 어떤 정보를 먼저 받았는지에 따라 달라졌습니다. 그 입력을 설계한 사람으로서 제 책임이 있습니다.”
“살인 결정입니까.”
강태준이 물었다.
“아직 아닙니다. 하지만 살인이 가능해지는 순서를 만들었습니다.”
그는 자기 문장을 작게 만들지 않았다. 그렇다고 크게 부풀리지도 않았다. 그 균형이 더 불쾌했다. 나는 피해자를 보호하고 싶었다. 동시에 조종자를 기록해야 했다. 같은 사람이다.
19:05, 우리는 도식을 다시 그렸다.
가운데에는 윤해원의 이름이 아니라 봉투 라우팅이 들어갔다. `정보 입력: 증거 봉투 / 첫 인증 문 / 사람별 압박점.` 그 아래에 질문이 붙었다. `누가 어떤 정보를 먼저 받았는가.` 이 줄은 살인 줄이 아니었다. 그러나 살인 줄들을 움직이는 바닥이었다.
강태준은 각 줄 옆에 법적 평가 금지 표시를 붙였다.
“여기까지는 사실 구조입니다. 살인, 방조, 과실, 은폐 같은 단어는 아직 쓰지 않습니다.”
이주완이 말했다.
“그 말은 제가 해야 하는데요.”
“오늘은 제가 합니다.”
강태준의 대답은 짧았다. 이주완은 더 말하지 않았다. 법률 언어를 독점하지 못한 사람은 잠시 할 일이 없어졌다.
홍상욱이 의자를 뒤로 밀었다.
“그러면 저 역시 살인자가 아니군요.”
“아직 법적 평가를 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원소유와 대리 발급을 분리했잖습니까.”
“분리했습니다. 지운 것이 아닙니다.”
강태준은 보드의 둘째 줄을 손가락으로 짚었다.
“당신의 이름은 남아 있습니다. 단지 그 이름만으로 다른 사람의 손을 지우지 않을 뿐입니다.”
홍상욱은 이번에는 기관이라는 말을 쓰지 못했다. 기관을 말하면 원소유자 칸이 더 커진다.
19:30, 오세진은 자기 줄 앞에서 입을 열었다.
“교체가 없었다면 명령만으로는 늦었을 겁니다.”
그 문장은 자기 변명이 될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는 곧 덧붙였다.
“그래서 제 줄을 지우면 안 됩니다.”
아무도 그를 용서하지 않았다. 용서는 요청되지 않았다. 그는 처음으로 “치명적이지 않았다”는 말을 쓰지 않았다. 결과와 의도를 분리하던 사람이, 자기 손의 필요성을 인정했다. 작지만 방향이 바뀌었다.
윤해원은 그 말을 듣고 눈을 내렸다.
“저도 제 줄을 지우면 안 됩니다.”
“당신 줄은 아직 정보 입력입니다.”
내가 말했다.
“그래서 더 쉽게 지워집니다.”
그의 대답이 나를 멈췄다. 나는 기록을 믿는 사람이다. 그런데 기록하기 쉬운 것과 지워지기 쉬운 것이 늘 반대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물건을 바꾼 손은 사진에 남는다. 명령은 로그에 남는다. 입력의 순서를 설계한 사람은 좋은 의도로 숨어 있을 수 있다.
20:10, 강태준은 첫 번째 대가설을 완성했다.
그는 제목을 붙이지 않았다. 대신 번호를 붙였다.
`가설 A: 원래 살인은 단일 행위가 아니라 세 결정의 합성이다.`
`A-1 손: 오세진의 물리 교체.`
`A-2 명령: R-3 예약 보정의 실행.`
`A-3 침묵: 서이현의 9분 무응답.`
`A-4 입력: 윤해원의 봉투 설계가 각 결정을 다른 순서로 노출.`
그 아래에는 큰 글씨로 썼다.
`사람 수 확정 금지. 법적 평가 보류.`
나는 그 줄에 동의해야 했다. 동의하기 싫었다. 사람 수를 세면 내가 어느 위치인지 빨리 알 수 있다. 순간을 세면 내가 어디서 멈췄는지 다시 봐야 한다.
고유라는 독립 저장소에 도식 파일을 올렸다. 파일명은 `decision_chain_A`였다.
“범인표 아니고 결정표예요.”
그가 말했다.
“좋습니다.”
강태준이 답했다.
윤해원은 그 파일명을 보고 말했다.
“살인이 세 번 결정됐다면, 막는 것도 한 줄로 끝나지 않습니다.”
그 말은 장부에 그대로 들어가지 못했다. 아직 확인하지 않은 다음 행동을 사실 칸에 올릴 수는 없었다. 강태준은 대신 현재 압력만 적었다. `손, 명령, 침묵을 각각 검증.` 세 가지 중 하나만 지우면, 다음 반복은 다른 모양으로 사람을 밀 수 있다.
강태준은 가설 A 옆에 실패 조건을 붙였다.
`손만 막음: R-3 실행으로 다른 위해 가능.`
`명령만 막음: 교체와 침묵의 책임 미해결.`
`침묵만 공개: 현재 사망 원인 차단 실패.`
세 줄은 해결책이 아니라 구멍이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 구멍이 처음으로 길처럼 보였다. 지금까지 우리는 범인을 찾으면 하루가 풀릴 것처럼 움직였다. 이제는 무엇을 막아야 하는지 세어 볼 수 있었다. 만족이 있었다. 동시에 그 만족이 나를 향해 돌아왔다.
고유라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러면 다음 루프 목표가 세 개예요?”
“목표가 아니라 검증 축입니다.”
강태준이 말했다.
“목표라고 쓰면 실패했을 때 사람을 밀어 넣게 됩니다.”
그 말은 윤해원의 봉투에도, 홍상욱의 토큰에도, 내 녹음기에도 닿았다. 목표라는 말은 깨끗해 보이지만 사람을 도구로 만들기 쉽다. 검증 축은 더 딱딱하고 덜 아름답다. 그래서 오늘은 그쪽이 맞았다.
윤해원은 자기 이름이 붙은 입력 줄을 한 번 더 읽었다.
“제 설계는 살인을 만든 것이 아니라 살인이 다른 모양으로 드러나게 했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그렇게 말하면 기록합니까.”
내가 물었다.
“아니요.”
그는 고개를 저었다.
“그 문장은 방어입니다. 기록할 문장은 이겁니다. 저는 사람별 압박점을 알고도 봉투를 나눴고, 그 순서가 누군가의 결정을 바꿀 수 있음을 알았습니다.”
그는 피해자 자리에서 한 발 나왔다. 영웅 자리로 간 것은 아니었다. 자기 설계의 책임 쪽으로 갔다. 그 이동이 이번 화의 대가였다.
20:50, 나는 녹음기를 꺼냈다.
작은 장치였다. 1화부터 주머니에 있었고, 여러 번 증거를 지킨 물건이었다. 물건은 늦게 말한다고 했지만, 이 물건은 너무 오래 늦었다. 강태준은 장부를 닫지 않았다. 고유라는 새 파일을 만들었다. 윤해원은 내 손을 보지 않고 장치만 봤다.
“전체를 재생합니까.”
강태준이 물었다.
“앞뒤만 먼저.”
“왜.”
“전체를 틀면 제가 설명을 붙일 것 같아서입니다.”
그는 펜을 들었다.
“설명 회피가 아니라 설명 지연으로 기록합니다.”
“그렇게 쓰세요.”
나는 재생 버튼을 눌렀다.
처음에는 복사 진행률 음성이 나왔다. 86퍼센트. 87퍼센트. 숫자는 낮고 건조했다. 그 뒤에 짧은 버튼음이 들어왔다. 경보 확인 버튼. 나는 그 소리를 안다. 손가락이 기억하는 소리는 귀보다 늦게 온다.
윤해원의 숨이 아주 작게 멈췄다. 노을이 있었다면 못 들었을 것이다. 나는 들었고, 들었다고 해서 해석하지 않았다.
버튼음 뒤에는 아무 소리도 없었다.
9분.
녹음기는 말하지 않는 시간을 그대로 재생했다. 정적이라는 말은 쓰지 않았다. 정적은 분위기다. 이건 파일이었다. 23:55부터 00:04까지, 파형이 거의 평평한 파일. 중간에 멀리서 두 번 진동이 있었고, 한 번은 복사 진행률 알림이 올라오다 잘렸다. 사람 목소리는 없었다.
고유라가 화면을 보며 말했다.
“사본 기준으로는 평평합니다. 원본 검사 전에는 처리 방식까지 말하면 안 돼요.”
“원본을 보면 달라질 수 있습니까.”
강태준의 질문이 왔다.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답하지 않는 내 얼굴을 묘사하고 싶지 않았다. 대신 녹음기를 봤다. 내 손은 재생 버튼 위에 그대로 있었다. 그 손이 9분 전에 무엇을 눌렀는지, 아직 말하지 않았다.
녹음기에서 경보 버튼음이 다시 반복됐다. 고유라가 앞뒤를 잘라 루프 재생으로 걸어 둔 것이다. 버튼음. 9분 무음. 버튼음. 9분 무음. 같은 소리가 반복될수록 변명할 문장이 줄었다.
윤해원이 말했다.
“이현 씨의 줄은 침묵이라는 단어로 끝나지 않을 겁니다.”
강태준이 바로 말했다.
“아직 사실은 9분 무응답입니다.”
윤해원은 고개를 끄덕였다.
“맞습니다. 제가 앞섰습니다.”
그가 물러섰다. 피해자가 내 죄를 빨리 이름 붙이지 않았다. 그래서 더 피할 곳이 없었다.
21:05, 장부 마지막 줄이 바뀌었다.
`침묵: 서이현 / 경보 버튼음 뒤 9분 무응답 / 사유 미진술.`
세 번째 줄은 아직 법적 이름을 얻지 않았다. 그러나 소리는 생겼다. 버튼음 뒤의 무음. 나는 그 소리를 들으며 보드의 첫 줄부터 다시 봤다. 손, 명령, 침묵. 모두 아직 끝난 줄이 아니었다.
강태준은 녹음기 옆에 작은 봉투를 놓았다.
“원본 제출 시각을 정합니다.”
“지금은 사본입니다.”
“알고 있습니다.”
그는 사본이라고 쓰고도 봉투를 닫았다. 원본은 아직 내 손에 있었다. 그 사실이 다음 질문이 됐다.
녹음기는 다시 버튼음을 냈다. 그 뒤 9분 동안 아무도 말하지 않았다. 이번에는 파일이 아니라 방이었다. 나는 그 침묵을 끝까지 들었다. 끝나자마자 다음 루프가 오지는 않았다. 그래서 더 나빴다. 시간이 앞으로 가지 않는 세계에서도, 어떤 9분은 계속 남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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