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화

퇴근하지 않은 조

안전수칙을 지키면 죽는다 · 2026. 10.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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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근하지 않은 조

김문식은 퇴근 예정 없음이라는 줄을 보고 웃었다. 소리가 나지 않는 웃음이었다. 그는 종이를 접으려다 멈췄다. 접으면 문장이 사라질까 봐서였다.

도윤이 종이를 투명 파일에 넣었다. “접지 마세요.”

백기준은 무전기를 들었다. “3번 출고 라인 멈추지 말고, B조는 대기. 김문식 씨 건은 현장 확인 중.”

한수아가 바로 물었다. “B조 대기면 돈 나와요?”

“계약에 따라 다릅니다.”

“그 계약 누가 보여 줘요.”

백기준은 무전기를 내렸다. “지금 출고가 밀리면 새벽 배송 전체가 늦습니다. 냉장품 폐기 나면 손실이 큽니다. 작업자들 일당보다 훨씬 커요.”

“그래서 일당은 작으니까 밀어도 된다는 말이에요?”

“그런 뜻 아닙니다.”

서진은 둘의 말을 끊었다. “퇴근 스캔이 되지 않은 조 전체를 확인해야 합니다. 김문식 씨만 처리하면 다른 사람이 남습니다.”

은채는 원격으로 센터 근태 로그를 받았다. 오정호의 배제 공문 때문에 서진 계정은 막혀 있었지만, 백기준이 다온 관리자 권한으로 일부를 열었다. 그는 보여 주는 범위를 계속 줄이려 했다. 이름 대신 사번, 업체명 대신 코드, 임금 대신 공란.

“공란이 많습니다.” 서진이 말했다.

“개인정보라서요.”

“개인정보를 가리려면 대체 표기를 해야 합니다. 공란으로 두면 여기서는 없는 사람처럼 처리될 수 있습니다.”

백기준은 모니터를 다시 열었다. 이름 일부, 업체명, 작업조, 출근 횟수, 퇴근 여부. 다섯 칸만 보이게 했다. B조에는 퇴근 실패가 네 명 있었다. 김문식, 라만, 박선영, 응우옌 티란. 네 사람 모두 일용 또는 파견이었다. 정규직 오승필은 같은 시간에 퇴근 성공으로 되어 있었다.

오승필은 고개를 숙였다. “저도 같이 했습니다. 근데 제 건 찍혔어요.”

“사번이 있어서요.” 은채가 말했다. “정규직은 단일 키가 있습니다. 일용은 업체 앱, 임시 QR, 현장 도장 세 개가 따로 놀아요.”

백기준이 말했다. “그래서 현장 반장이 확인합니다.”

“그 반장이 지금 어디 있습니까.”

아무도 바로 답하지 않았다. 한수아가 휴게실 밖을 가리켰다. “아까 문 닫고 나갔어요. 출고 지연 나면 책임진다고.”

창고 쪽 방화문은 닫혀 있었다. 안쪽에서는 컨베이어 소리가 계속 났다. 문 위 전광판에 B조 대기 중이라는 글자가 떠야 했지만, 실제로는 B조 작업 중이었다.

도윤이 문 손잡이를 잡았다. “안에 몇 명.”

오승필이 답했다. “명단상 12명. 실제 13명일 수도 있습니다.”

“왜 그렇게 말합니까.”

“교대 때마다 한 명 더 보입니다. 그런데 바코드 찍으면 수량은 맞아요.”

백기준이 문을 막았다. “지금 열면 냉장 라인 온도 떨어집니다. 출고 지연도 문제지만, 안쪽에서 지게차가 돌고 있어요.”

“닫아 두면 안에 있는 사람들이 계속 일합니다.” 서진이 말했다.

“열면 다칠 수 있습니다.”

이번에는 백기준 말이 핑계만은 아니었다. 방화문 너머 지게차 후진음이 들렸다. 도윤은 손잡이를 놓지 않은 채 말했다. “벨 울리고 멈춤 신호부터.”

백기준이 비상정지 버튼을 보았다. 버튼 옆에는 플라스틱 커버가 있었다. 커버에는 작은 봉인이 붙어 있었다. 봉인 번호 47-1. 서진은 사진을 찍었다. 의미는 붙이지 않았다.

“비상정지 누르면 전체 라인 멈춥니다. 손해가 큽니다.” 백기준이 말했다.

한수아가 그에게 다가갔다. “그럼 손해 나는 버튼이니까 아무도 못 누르게 봉인한 거네요.”

“안전 오작동 방지입니다.”

“사람 퇴근 못 하는 건 오작동 아니고요?”

김문식이 의자에서 일어나려 했다. 도윤이 막았다. “당신은 앉아 있어요. 다시 라인 들어가면 출근 유지됩니다.”

그 말이 끝나자 휴게실 스피커가 울렸다.

B조 김문식 작업자, 3번 라인으로 복귀하십시오.

김문식의 손목 단말기가 진동했다. 화면에는 작업 배정이 떠 있었다. 냉장 3번, 피킹 12개, 제한 시간 4분. 퇴근 예정 없음인 사람이 새 작업을 받았다.

은채가 말했다. “시스템이 휴게실을 이탈 대기 구역으로 보지 않습니다. 작업자가 쉬는 동안도 근무로 잡아요.”

“휴게실인데요.” 한수아가 말했다.

“명칭만 휴게실입니다. 근태 코드에는 대기 작업구역.”

백기준은 그 말을 듣고도 바로 부정하지 못했다. “그건 운영상 편의 때문에...”

“편의 때문에 퇴근이 안 됩니다.” 서진이 말했다.

도윤은 비상정지 버튼 커버를 열었다. 경보음이 작게 울렸다. 백기준은 손을 뻗었다가 멈췄다. 누르면 손해가 나고, 막으면 사람이 남았다. 그는 둘 중 하나를 고르는 대신 방화문 쪽으로 가서 관리자 카드로 문을 잠갔다.

“안쪽 지게차부터 멈추게 하겠습니다. 문은 잠깐 닫습니다.”

“닫지 마세요.”

서진의 말보다 문 잠금음이 빨랐다. 전광판의 B조 작업 중 문구가 바뀌었다.

B조 퇴근 대기.

처음으로 퇴근이라는 단어가 떴다. 백기준은 안도한 얼굴을 했다. 그러나 곧 창고 안쪽에서 출근 벨이 울렸다. 야간 시작 때 울리는 짧은 벨이었다.

다음 교대조 출근이라는 문구가 뜨자, 휴게실 밖 대기 의자에 앉아 있던 사람들이 일어났다. 그들은 아직 작업복도 다 입지 않았다. 어떤 사람은 컵라면에 물을 부은 상태였고, 어떤 사람은 안전화를 한 짝만 신었다. 벨은 그들을 부르는 소리였다.

서진은 손을 들었다. “새 교대조는 아직 출근기 찍지 마세요.”

한 남자가 불쾌한 얼굴로 말했다. “안 찍으면 지각입니다.”

백기준이 끼어들었다. “잠시 대기하세요. 근태는 제가 보증합니다.”

“말로요?” 한수아가 물었다.

백기준은 이를 악물고 경비실에 말했다. “C조 대기시간은 현장 사유로 인정. 지각 처리 금지. 무전 녹음 남깁니다.”

그 말이 끝나자 몇 사람이 다시 앉았다. 하지만 전부는 아니었다. 한 명은 출근기로 걸어갔다. 일당을 놓칠 수 없다는 얼굴이었다. 도윤이 앞을 막지 않았다. 대신 물었다.

“이름.”

“조대성.”

“지금 찍으면 안쪽 B조가 못 나올 수 있습니다. 그래도 찍습니까.”

조대성은 출근기 앞에서 멈췄다. “안 찍으면 제가 못 들어가고요. 들어가야 돈 받아요.”

서진은 그 문장을 적었다. 새 교대조 사회적 강제: 지각·일당 손실. 규칙을 어기는 사람이 어리석어서가 아니라 돈 때문에 움직이는 장면이었다.

은채는 B조와 C조 명단을 나란히 띄웠다. B조 퇴근 실패 네 명의 업체 코드와 C조 출근 대기자 네 명의 업체 코드가 같았다. 교대가 아니라 같은 업체의 다음 사람들로 빈자리를 덮는 구조였다.

“B조가 안 빠지면 C조가 들어가고, 시스템은 인원 수를 유지합니다.” 은채가 말했다.

“그럼 B조는 어디로 갑니까.”

“기록상 대기. 실제로는 계속 작업.”

백기준이 낮게 욕을 했다. 이번에는 서진이 그 말을 적지 않았다. 대신 업체 코드 일치, 교대 덮기 가능성이라고 썼다.

방화문 작은 창 안쪽에서 박선영이 손을 흔들었다. 그는 무언가 말하고 있었지만 문이 닫혀 들리지 않았다. 도윤이 창에 귀를 대지 않았다. 대신 휴대전화 화면을 켜서 큰 글씨로 보였다.

이름 써 주세요.

안쪽 작업자들은 박스 라벨 뒷면에 자기 이름을 썼다. 김문식, 라만, 박선영, 응우옌 티란. 네 장이 창문에 붙었다. 그런데 스캐너가 안쪽에서 지나가자 박스 라벨의 이름이 상품 코드로 바뀌었다. 냉장식품 코드였다.

한수아가 욕을 하려다 참았다. “이름을 상품 라벨에 쓰면 상품으로 먹어요.”

서진은 새 종이를 꺼냈다. 문 밖 목격자용 이름표였다. 라벨이 아니라 종이에 쓰고, 창문 밖에서 보이게 들었다. 안쪽 작업자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름이 상품으로 읽히지 않는 위치를 찾는 데만 몇 분이 걸렸다.

백기준은 그 몇 분 동안 고객사 전화를 세 번 끊었다. 네 번째에는 받았다. “현장 안전 이슈입니다. 출고 지연 사유서 보내겠습니다.”

전화 너머에서 목소리가 커졌다. 백기준은 휴대전화를 귀에서 조금 떼었다. 한수아가 그를 봤다.

“녹음해요. 나중에 다 작업자 탓으로 돌릴 거잖아요.”

백기준은 통화 녹음 버튼을 눌렀다. “고객사 출고 지연 압박 녹음합니다. 작업자 귀책 아님.”

그 말은 작게나마 현장을 바꿨다. C조 조대성은 출근기에서 물러났다. 그는 컵라면 뚜껑을 다시 덮었다. “그럼 지각 아니죠?”

백기준은 대답을 피하지 못했다. “아닙니다. 제 이름으로 남깁니다.”

서진은 백기준의 이름을 적었다. 그의 이름은 아직 해결이 아니었다. 하지만 공란이 줄어드는 방향이었다.

방화문 안쪽 출근 벨은 세 번째 울렸다. 벨이 울릴 때마다 B조 작업자 네 명의 이름표가 조금씩 내려갔다. 창문에 붙은 테이프가 약해지는 게 아니라, 종이 자체가 무거워지는 것처럼 보였다. 도윤은 문틈에 발을 넣었다. 문을 닫은 사람은 백기준이었고, 열어야 하는 사람도 백기준이었다.

C조 사람들은 각자 다른 이유로 불안해했다. 조대성은 지각 처리, 베트남 출신 레티후옌은 교통비, 대학생 아르바이트생 민재는 오전 수업이었다. 모두 일을 하고 싶어서라기보다, 안 하면 잃는 것이 있어서 출근기를 봤다.

서진은 C조를 사건 밖 사람으로 두지 않았다. “이분들은 아직 피해자가 아닐 수 있습니다. 하지만 다음 교대조로 덮일 위험이 있습니다.”

은채가 C조 명단을 따로 저장했다. B조와 섞이지 않게 파일명을 나눴다. B조_퇴근실패, C조_출근대기. 이름을 나누자 전광판의 다음 교대조 출근 문구가 잠깐 흐려졌다.

한수아는 C조에게 말했다. “지금 안 찍는다고 돈 못 받으면, 그거 적어야 해요. 나중에 괴담 탓으로만 넘기면 회사가 빠져요.”

레티후옌은 한국어가 느렸다. 그는 휴대전화 번역기로 말했다. ‘버스 끊기면 택시비 누가 줍니까.’ 서진은 그 문장을 그대로 적었다. 작업중지의 비용은 영웅적인 손해가 아니라 택시비였다.

백기준은 그 메모를 보고 경리 담당자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야간 대기 교통비 처리 가능 여부 확인. 답장은 바로 오지 않았다. 그래도 질문은 남았다.

방화문 안쪽에서 박선영의 이름표가 다시 상품 코드로 바뀌었다. 이번에는 도윤이 창문 밖 이름표를 더 높게 들게 했다. 상품 라벨과 사람 이름의 높이를 분리하자 코드 변환이 멈췄다. 스캐너는 바닥 가까이 있는 것을 상품으로 먼저 먹었다. 사람 이름은 눈높이에 있어야 했다. 그 단순한 위치 차이가 수칙처럼 작동했다.

서진은 적었다. 사람 이름표는 상품 라벨 높이에 두지 말 것. 단정하지 않고 임시 대응으로 표시했다.

백기준은 C조 대기자들에게 임시 확인서를 써 주려 했다. 양식이 없었다. 그는 빈 A4에 적었다. C조 출근 대기, 현장 안전 사유, 지각 처리 금지. 서명란에 자기 이름을 썼다. 조대성은 그 종이를 사진으로 찍었다. 레티후옌은 번역기로 내용을 확인했다. 민재는 수업 지각 증빙으로 쓸 수 있냐고 물었다.

“쓸 수 있게 회사 도장 찍겠습니다.” 백기준이 말했다.

도장은 사무실 안에 있었다. 사무실 문은 창고 반대편이었다. 백기준이 가려 하자 도윤이 막았다. “혼자 가지 마세요. 도장 찍는 동안 문이 닫힐 수 있습니다.”

결국 장영식 경비원과 오승필이 같이 갔다. 세 사람이 도장을 가져오는 동안 출근기는 조용했다. 사람이 움직이는 것보다 도장이 이동하는 절차가 더 위험해진 상황이었다. 서진은 도장 이동 목격자까지 적었다. 공문 하나가 C조의 지각을 막는 데 필요했다.

도장이 도착하자 C조 확인서에는 회사 도장과 백기준 이름이 같이 찍혔다. 전광판의 다음 교대조 출근 문구는 사라지지 않았지만, C조 대기 인원 옆에 보류라는 글자가 붙었다. 보류는 해결이 아니었다. 그래도 출근도 아니었다.

조대성은 확인서를 접으려다 서진을 봤다. “접어도 됩니까?”

“사진 먼저, 접은 뒤 다시 확인.”

종이를 접어도 글자가 사라지지 않았다. 이곳에서는 그런 작은 확인도 필요했다. 레티후옌은 택시비 질문 옆에 자기 서명을 넣었다. 민재는 오전 수업 시간을 적었다. C조의 비용도 사건 안으로 들어왔다.

C조 확인서가 만들어지는 동안 B조 이름표는 계속 창문에 붙어 있었다. 테이프가 떨어지면 이름도 내려갔다. 민재가 자기 노트를 찢어 새 테이프 받침을 만들었다. 아직 출근하지 않은 사람이 퇴근하지 못한 사람의 이름표를 받친 셈이었다. 서진은 그 행동을 적었다. C조 목격자가 B조 이름표 유지에 참여. 교대조가 덮는 구조를 잠깐 반대로 썼다.

백기준은 그 장면을 보고 C조 확인서 아래에 한 줄을 더했다. 대기자는 퇴근 실패자 대체 투입에 동원하지 않는다. 문장은 투박했지만 필요했다. 조대성은 그 줄을 보고서야 출근기에서 완전히 물러났다.

전광판에 새 줄이 생겼다.

다음 교대조 출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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