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화

빨간 줄의 작성자

안전수칙을 지키면 죽는다 · 2026. 10.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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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간 줄의 작성자

미란은 출력물을 자기 가방에 넣지 않았다. 로비 바닥에 빈 의자를 놓고, 그 위에 투명 파일을 펼쳤다. 번호표 0번, 번호표 37번, 수정 전 수칙 복사본, 재출력 로그, 미접수 원부 화면 캡처 목록이 차례로 놓였다.

“한곳에 모으지 마세요.” 서진이 말했다.

“그래서 펼쳐 둔 겁니다.”

미란은 봉투도 의자 아래에 두었다. 학원에서 가져온 S.M. 카드와 오늘 날짜 하준 확인서가 들어 있는 봉투였다. 그는 봉투를 열지 않았다. 대신 봉투 바깥에 새 메모지를 붙였다.

접근자: 서미란. 보관 사유: 증거 훼손 방지. 확인 한계: 작성자 동일성 미확정.

서진은 그 문장을 찍었다. “동일성 미확정이라고 직접 쓰셨습니다.”

“확정하지 않았으니까요.”

“그럼 빨간 줄은요.”

미란은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로비 전광판에는 0번 창구 호출이 사라지고, 대기 인원 2명이 떠 있었다. 윤하준과 김태민. 김태민은 의자에 앉아 자기 이름이 다시 인쇄된 독서실 출입증을 두 손으로 잡고 있었다. 박현주는 아들의 어깨를 직접 보지 못해도 볼펜을 놓지 않았다.

이정배 주무관은 상황실에서 서류를 들고 나왔다. 그의 글씨는 삐뚤었다.

야간 협조 기록. 민원지원과 이정배는 23시 11분 특이민원3팀 요청에 따라 별관 민원실 접근을 협조함. 민원 판단 및 미접수 원부 수정 권한 없음. 현장 확인자: 윤서진, 강도윤, 서미란.

책임자 칸은 비어 있었다.

서진은 그 칸을 보자마자 펜을 들지 않았다. “비워 두면 다시 돌아갑니다.”

이정배가 물었다. “제가 쓰면 안 되죠?”

“주무관님 책임이 아닙니다.”

“그럼 누가 써요.”

그 질문이 로비에 남았다. 공무원 한 명, 하청 계약직 두 명, 기관 팀장 한 명, 미접수된 사람 두 명. 누구도 칸을 비우고 싶지 않았고, 누구도 혼자 쓰면 안 됐다.

도윤이 말했다. “공동 책임으로 쓰면?”

은채가 바로 답했다. “시스템 칸이 단수입니다. 한 명만 받도록 되어 있어요. 하지만 첨부란은 여러 명 가능. 책임자 칸에 ‘별첨’이라고 쓰고 별지에 실명 서명 붙이면 우회될 수 있습니다. 우회지 해결은 아닙니다. 원 시스템이 다시 지울 수 있어요.”

미란이 고개를 들었다. “우회가 아니라 절차상 보완입니다. 공문에서는 허용됩니다.”

“수칙에서도 허용됩니까.” 서진이 물었다.

“모릅니다.”

그 말은 쓸모 있었다. 모른다고 말한 사람이 처음이었다. 서진은 새 종이를 꺼냈다.

별첨 책임자 목록. 사건명: 0번 창구 미접수 실종 임시 재개. 대상: 윤하준, 김태민 및 미접수 원부 전후 항목. 책임 범위: 원부 폐쇄 금지, 번호표 보관, 보호자 기억 복구 시도, 원본 문서 훼손 금지.

서진은 맨 아래에 자기 이름을 썼다. 강도윤은 그 옆에 서명했다. 미란은 세 번째 줄에 이름을 썼다. 이정배는 협조자로 따로 썼다. 은채는 원격 확인자로 전자서명 로그를 보냈다. 박현주는 보호자 확인자로 이름을 쓰려다가 손을 멈췄다.

“제가 쓰면 태민이한테 나쁜 거 아니에요?”

서진은 바로 괜찮다고 말하지 않았다. “책임자 목록이 아니라 보호자 확인란입니다. 쓰지 않아도 됩니다. 쓰면 태민 씨가 여기 있었다는 물건과 함께 남습니다. 위험은 확인되지 않았습니다.”

박현주는 볼펜을 오래 들고 있다가 이름을 썼다. 그 순간 김태민의 출입증 사진 아래 이름이 완전히 돌아왔다. 김태민은 대답하지 않고 출입증을 어머니 앞에 놓았다. 박현주는 이번에는 그것을 보았다. 아들의 얼굴을 보려면 아직 시간이 더 필요했다.

전광판의 대기 인원은 1명으로 줄었다. 윤하준만 남았다.

0번 창구 셔터 안쪽에서 복사기가 다시 켜졌다. 이번에는 서진이 들어가지 않았다. 셔터 밑으로 종이 한 장이 밀려 나왔다. 도윤이 발로 종이를 멈추고, 모두가 본 뒤 서진이 집었다.

미접수 실종 임시 재개 목록.

첫 줄은 김태민이었다. 상태는 임시 재개. 보호자 확인 보류, 물건 확인 완료.

두 번째 줄은 윤하준이었다. 상태는 임시 재개 실패. 사유는 책임자 불일치.

세 번째 줄부터는 이름 일부가 가려진 사람들이 이어졌다. 주소 불명, 보호자 부재, 관할 불일치. 미란은 그 목록을 보며 말했다. “전부 오늘 해결할 수 없습니다.”

“오늘 닫지는 않습니다.”

서진은 그렇게 답했다. 목록을 접지 않고 의자 위에 올렸다. 미란은 이정배 주무관에게 말했다. “민원지원과장 호출하십시오. 지금 출근시키세요. 법무 담당도 부르세요. 야간 인력 부족은 사유가 될 수 있어도 원부 폐쇄 근거는 아닙니다.”

이정배는 겁먹은 얼굴로 전화기를 들었다. 이번에는 도망치듯 유리문 안으로 들어가지 않았다. 로비에서 전화를 걸었다.

“과장님, 별관입니다. 미접수 원부가 열렸습니다. 네, 제가 연 게 아닙니다. 아니요, 닫을 수 없습니다. 책임자 별첨으로 걸었습니다. 오셔야 합니다.”

전화 너머 고함이 작게 들렸다. 이정배는 눈을 감고도 전화를 끊지 않았다.

전광판이 바뀌었다.

담당 공무원 호출 중.

십분 뒤 첫 번째 직원이 들어왔다. 민원지원과장이라고 소개한 여자는 코트 단추도 잠그지 못했다. 그는 처음엔 미란에게 화를 내려 했다가, 의자 위에 놓인 별첨 책임자 목록과 번호표들을 보고 말을 바꿨다.

“이건 우리 과 단독으로 처리할 수 없습니다.”

서진은 말했다. “그래서 이름을 나눠 적었습니다. 닫으시면 닫은 사람 이름이 남아야 합니다.”

과장은 번호표 37번과 김태민의 출입증을 번갈아 보았다. 박현주는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았다. 김태민은 여전히 어머니 눈에 완전히 들어오지 않았지만, 이름은 돌아와 있었다.

과장은 결국 자기 이름을 썼다. 민원지원과 오경란. 원부 재개 책임. 그 옆에 법무 연락 예정, 복지 연계 예정이라고 적었다. 그의 손이 떨렸지만 서명은 끝까지 이어졌다.

그 순간 0번 창구 셔터가 내려갔다. 전광판의 윤하준 항목은 사라지지 않았다. 다만 상태가 바뀌었다.

임시 재개. 본인 확인 필요.

서진은 그 문장을 오래 보았다. 구출은 아니었다. 생존 확인도 아니었다. 하지만 미접수에서 한 칸 움직였다.

미란이 말했다. “이 정도가 오늘의 끝입니다.”

“하준은 아직 창구 안에 있습니다.”

“아직 확인되지 않았습니다.”

서진은 그 말에 반박하지 않았다. 대신 투명 파일에 새 라벨을 붙였다. 윤하준: 임시 재개, 본인 확인 필요, 발신자 미확정.

오경란 과장은 처음에는 원부 재개를 거부했다. 그는 로비 의자에 앉지 않고 서서 말했다. “실종 신고는 경찰 소관입니다. 구청은 주민등록과 복지 연계만 합니다. 절차가 다릅니다.”

서진은 반박하지 않고 원부 화면 캡처를 보여 주었다. “그래서 여기 있으면 안 되는 항목입니다. 그런데 여기 있습니다.”

“전산 이관 오류일 수 있습니다.”

“오류로 처리하려면 오류 책임자를 적어야 합니다.”

과장은 이정배를 보았다. 이정배는 바로 한 걸음 물러났다. “저는 접근 협조만 했습니다. 그렇게 적었습니다.”

그 한 걸음이 중요했다. 평소라면 대체 근무자가 대신 맞았을 것이다. 이번에는 이미 종이에 역할이 나뉘어 있었다. 과장은 미란을 보았다. 미란은 그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서미란 팀장님이 책임지실 겁니까.”

“제 책임 범위는 현장 수칙 판단과 증거 보전입니다. 민원 원부 재개 책임은 해당 과가 져야 합니다.”

“그럼 저 혼자 쓰라는 말입니까.”

“아니요. 별첨으로 쓰자는 말입니다.”

과장은 웃지 않았다. 그는 별첨 책임자 목록을 읽었다. 이름들이 한 줄에 몰려 있지 않고, 책임 범위가 분리되어 있었다. 누가 무엇을 했는지 구분되는 문서였다. 공란을 좋아하는 시스템에는 불편한 양식이었다.

전광판이 깜박였다.

별첨은 책임자가 아닙니다.

도윤이 전광판을 보며 말했다. “반응하네.”

은채가 바로 받아 적었다. “시스템이 단수 책임자를 요구합니다. 별첨을 거부하는 문구 확인.”

서진은 새 줄을 추가했다. 단수 책임자 요구 거부 사유: 대체 희생 방지 및 권한 분리. 그 문장을 쓰자 전광판이 다시 깜박였다.

책임자 1명을 입력하십시오.

“싫습니다.” 서진이 말했다.

도윤이 작게 말했다. “대답하지 말라니까.”

“이건 대답이 아니라 기록입니다.”

서진은 종이에 같은 말을 썼다. 책임자 1명 입력 요구를 거부함. 공동 별첨 유지. 그 순간 번호표 37번의 보정 문구가 더 흐려졌다. 김태민이 어머니 쪽으로 조금 몸을 돌렸다. 박현주는 아직 얼굴을 완전히 보지 못했지만, “태민아, 물 마셔”라고 말했다.

작은 보상은 그렇게 왔다. 누군가가 완전히 돌아오지 않아도, 생활 문장이 먼저 돌아왔다.

미란은 그 장면을 보고도 미소 짓지 않았다. 대신 빨간 펜을 꺼냈다. 서진이 바로 손을 뻗었다.

“그 펜으로 줄 긋지 마세요.”

“긋지 않습니다.”

미란은 빨간 펜을 별첨 목록 옆에 내려놓았다. “제가 예전에 그은 줄이 있습니다. 전부는 아닙니다. 그리고 그 줄이 처음부터 사람을 지우려고 그은 줄이었다고 말하면 거짓말입니다.”

서진은 펜을 보았다. “부분 인정입니까.”

“부분 인정입니다. 변명은 나중에 하겠습니다. 지금은 창구를 닫아야 합니다.”

“창구를 닫으면 미접수로 돌아갈 수 있습니다.”

“그래서 담당 공무원 이름으로 재개한 뒤 닫아야 합니다. 하청 기록원 이름으로 닫으면 서진 씨가 들어갑니다.”

그 말이 끝나자 전광판의 윤하준 항목 옆에 새 글자가 생겼다.

대체 민원인 후보: 윤서진.

도윤이 전광판 앞을 가로막았다. 가린다고 사라지지는 않았다. 하지만 박현주와 김태민은 보지 않았다. 이정배도 고개를 돌렸다. 오경란 과장은 그제야 펜을 잡았다.

“민원지원과 오경란. 미접수 원부 임시 재개 책임.”

그는 자기 이름을 또박또박 썼다. 글씨가 끝나는 순간 전광판의 대체 민원인 후보 문구가 사라졌다. 윤하준 항목은 남았지만, 서진의 이름은 빠졌다.

서진은 그 결과를 적었다. 공무원 실명 책임 입력 후 대체 민원인 후보 문구 소거. 하준 본인 확인은 여전히 필요.

도경에게서는 세 통의 메시지가 와 있었다. 현장 위치를 묻는 말, 별관이라는 단어가 맞냐는 말, 그리고 마지막으로 ‘올리지 않겠다, 확인만 하겠다’는 말. 서진은 답하지 않았다. 대신 은채에게 말했다.

“도경 씨에게는 위치 공유하지 않습니다. 사건 종료 후 피해자 동의 범위만 전달합니다.”

은채가 건조하게 답했다. “통계적으로 기자는 종료 후에도 종료라고 안 믿습니다.”

“그래도 지금은 안 보냅니다.”

그 선택은 작은 일이 아니었다. 별관 로비에는 공무원 이름과 미접수 원부가 실제로 있었고, 공개하면 바로 압박이 생길 수 있었다. 하지만 김태민은 아직 어머니 눈에 완전히 돌아오지 않았고, 하준은 본인 확인 필요 상태였다. 서진은 공개를 미루는 비용도 기록했다.

도경 미공유. 사유: 피해자 확인 미완, 위치 확산 위험, 원부 원본 미보전.

미란은 그 메모를 보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전에는 밖으로 내보내면 더 불린다고만 했던 사람이었다. 이번에는 서진이 스스로 늦췄다.

오정호가 들어오기 전, 김태민은 별관 밖으로 나가지 않았다. 오경란 과장이 복지 야간 연락망을 붙일 때까지 로비 의자에 앉아 있었다. 박현주는 아들의 손목을 잡지 못했지만, 물병 뚜껑을 열어 옆에 놓았다. 그 정도의 복구를 완료라고 쓰지 않기 위해 서진은 ‘동행 대기’라고 적었다.

그때 별관 자동문이 다시 열렸다. 정장 차림의 남자가 들어왔다. 젊었고, 젖지 않은 우산을 들고 있었다. 그는 로비를 한 번 훑고 바로 미란에게 갔다.

“서 팀장님. 여기서 멈추셔야 합니다.”

미란이 물었다. “오정호 담당관님이 왜 이 시간에 오셨습니까.”

남자는 대답 대신 의자 위 문서들을 봉투에 넣기 시작했다. 도윤이 손목을 잡았다. 남자는 웃지 않았다.

“증거 보전입니다. 그리고 윤서진 기록원은 지금부터 현장 업무에서 배제됩니다. 본인 가족 사건의 직접 이해관계자입니다.”

서진은 자기 이름이 들어간 별첨 책임자 목록을 보았다. 오정호는 그 종이까지 집어 들었다.

“배제 사유와 권한을 서면으로 주십시오.”

“드리겠습니다. 다만 그 전까지 추가 접촉 금지입니다.”

미란이 봉투 위에 손을 올렸다. “압수 목록부터 쓰십시오.”

오정호가 처음으로 미간을 움직였다. “팀장님.”

“수칙이 아니라 우리가 골랐습니다.”

미란은 그 말을 서진 쪽이 아니라 오경란 과장과 이정배 주무관 쪽을 보고 했다. “빨간 줄도, 공란도, 오늘의 별첨도. 누가 골랐는지 이름을 남겨야 합니다.”

서진은 미란을 보았다. 미란은 설명하지 않았다. 다만 번호표 0번의 남은 절반을 집어, 압수 봉투 밖 별도 투명 파일에 넣었다.

오정호의 펜이 압수 목록 첫 줄에서 멈췄다.

책임자 칸은 아직 비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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