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르는 학생은 데리고 나가지 마시오
안전수칙을 지키면 죽는다 · 2026. 9.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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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르는 학생은 데리고 나가지 마시오
계단 문은 보라 앞에서 빨간불을 켠 채 열리지 않았다.
등록 학생 이름 옆에는 초록불이 순서대로 켜졌다. 정민, 이서현, 박민재. 조금 전까지 흔들리던 학생 이름들이 계단 쪽 표시창에서는 또렷했다. 보라 이름이 있어야 할 줄은 비어 있었다.
연기 냄새가 자습실 천장 쪽으로 먼저 모였다. 도윤은 손바닥으로 학생들을 밀지 않고 바닥 타일을 가리켰다.
“초록불 켜진 애들부터 한 층 내려가. 뛰지 말고, 두 명씩.”
서진은 그 말을 막지 않았다. 등록 학생을 먼저 이동시키자 계단 경고음이 줄었다. 3초마다 울리던 삐 소리가 7초 간격으로 늘어났다. 아래층에서 올라오던 학생들의 발소리도 덜 엉켰다.
수칙은 효과가 있었다.
그 사실이 더 불편했다.
보라는 창문 쪽 두 번째 줄에 서 있었다. 정민이 내려가다 말고 돌아보려 하자 보라가 먼저 말했다.
“가. 내려가서 내 이름 말해.”
정민은 계단 첫 칸에서 멈췄다. 이서현이 그의 팔을 잡고 내려갔다. 두 사람의 발소리가 한 층 아래로 사라졌다. 계단 표시창에는 등록 인원 대피 12명이라고 떴다. 연기 유입 경고는 한 칸 낮아졌다.
도윤은 그 숫자를 봤다.
“3분만.”
서진은 그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알았다.
도윤은 보라를 보지 않고 말했다.
“등록 학생 먼저 빼고 돌아오자. 보라 옆에는 너랑 나랑 남기고.”
“보라에게 묻지 않았습니다.”
“물으면 거절하겠지.”
보라가 바로 말했다.
“거절합니다.”
도윤은 입을 다물었다. 그의 계산은 틀리지 않았다. 등록 학생을 먼저 빼면 계단 루프가 줄었다. 연기도 줄었다. 남는 인원이 적을수록 다시 내려갈 가능성도 커졌다.
서진은 그 계산을 보고서에 적었다. 등록 학생 우선 이동 시 경고 간격 3초에서 7초로 감소. 다수 대피 효율 있음.
그 다음 줄에 적었다. 당사자 동의 없는 잔류 거부.
원장은 그 두 줄 중 첫 줄만 보았다.
“보셨죠. 카드대로 하면 됩니다. 미등록 학생은 잠시 대기시키는 게 안전합니다.”
“잠시라는 문구는 카드에 없습니다.”
서진은 비상문 옆 카드를 다시 찍었다. 미등록 학생은 교실에 남겨 두고 등록 인원만 대피하십시오. 잠시, 보호, 대기 같은 단어는 없었다.
도윤은 계단 쪽을 봤다. 내려간 학생들이 아래층에서 “2층!”이라고 외쳤다. 실제로 내려간 것이다. 루프가 줄어든 것은 사실이었다.
서진은 보라에게 물었다.
“같이 내려가면 돌아올 수 있습니다. 그래도 갑니까.”
보라는 자기 손목의 이름을 봤다. 정민과 이서현이 따라 쓴 글자가 땀에 조금 번져 있었다.
“혼자 남는 것보다 나아요.”
서진은 그 대답을 적었다. 보라 본인 선택. 단독 잔류 거부. 공동 이동 선택.
도윤은 짧게 숨을 내쉬었다.
“그럼 내가 앞.”
“앞이 아니라 옆입니다.”
서진은 위치표를 다시 그렸다. 도윤, 보라, 서진. 뒤에는 원장과 아직 내려가지 못한 학생 둘. 이름 기준이 아니라 위치 기준이었다.
계단 첫 칸은 열렸다. 보라가 발을 올리자 표시등이 노란색으로 바뀌었다. 두 번째 칸에서 빨간불이 켜졌다. 아래층이어야 할 문을 열자 같은 자습실 복도가 나왔다.
칠판의 83일이 다시 보였다.
책상 위 포스트잇도 그대로였다.
정민과 이서현도 복도 반대편에서 돌아오고 있었다. 한 층 내려갔던 등록 학생 일부가 서진 일행을 따라 같은 층으로 되돌아왔다. 정상 대피가 무효화된 학생 수가 표시창에 떴다. 5명.
도윤은 서진을 보았다.
“봐. 다 같이 끌고 들어오면 더 위험해져.”
그 말은 틀리지 않았다. 서진은 반박하지 않았다.
“맞습니다. 그래도 한 명을 동의 없이 남기는 방식은 쓰지 않습니다.”
“그럼 대체안.”
“찾습니다.”
“찾는 동안 연기 들어온다.”
도윤의 목소리는 높지 않았다. 그래서 더 피하기 어려웠다. 서진은 연기 경고등을 봤다. 노란색이 두 칸 올라갔다.
보라가 말했다.
“저 때문에 다 돌아온 거예요?”
서진은 바로 아니라고 하지 않았다.
“현재 절차가 그렇게 반응했습니다.”
보라는 그 말을 듣고 손목 이름을 가렸다.
“그럼 저를 남기면 내려가요?”
도윤이 대답하려 했지만 서진이 먼저 물었다.
“남겠다고 선택하는 겁니까, 남으라고 들은 겁니까.”
보라는 대답하지 못했다. 학생들이 보는 앞에서 남겠다고 말하면 선택처럼 기록될 수 있었다. 그는 파일을 가슴에 안고 고개를 저었다.
“모르겠어요.”
서진은 그 말도 적었다. 모름. 선택 확정 아님.
원장은 행정실 쪽 문을 열고 들어갔다. 잠시 뒤 봉투 하나를 들고 나왔다. 봉투에는 백로학원 안전대응 카드 원본이라고 적혀 있었다. 봉인은 낡았고, 모서리에는 성안시 생활안전대응원 로고가 희미했다.
원장은 봉투를 높이 들었다.
“우리가 만든 규칙이 아닙니다. 승인받은 현장 카드입니다.”
도경의 카메라가 올라갔다. 그는 원장 얼굴을 찍지 않고 봉투, 카드, 원장의 손만 잡았다. 위치 정보는 꺼져 있었다.
도경은 녹화 버튼을 누른 뒤 바로 송출 버튼 쪽으로 손을 옮겼다. 성안선 때와 같은 손놀림이었다. 공개하면 학원이 숨기기 전에 제보가 붙을 수 있었다. 동시에 보라와 학생들 얼굴, 학원 위치, 아직 확인되지 않은 S.M. 이니셜이 한꺼번에 나갈 수 있었다.
서진은 그 손을 잡지 않았다.
“원본 보관. 위치 지연. 학생 얼굴 제외.”
“S.M. 카드가 나왔습니다.”
“그래서 더 검증 전 공유 금지입니다.”
도경은 이를 악물었다. “비공개가 늘 보호는 아니죠.” 말은 그렇게 했지만 화면 설정을 열었다. 얼굴 인식 블러가 학생들 손목까지 잡자 그는 수동으로 영역을 줄였다. 보라 손목 이름은 증거였고 얼굴은 아니었다. 그는 손목만 남기고 교복 명찰은 가렸다.
“24시간은 못 기다립니다.”
“화재 종료 전에는 안 됩니다.”
도경은 예약 시간을 오늘 새벽으로 밀었다. 완전한 동의는 아니었다. 그래도 지금 복제되지는 않았다.
계단 쪽에서 정민이 다시 올라왔다. 혼자 올라오면 루프가 켜질 수 있었다. 이서현이 그의 뒤에 붙어 있었다.
“아래층까지는 갔어요. 그런데 보라 이름 말하니까 다시 여기로 나왔어요.”
서진은 그 말을 적었다. 등록 학생 단독 대피는 정상. 미등록 학생 동반 또는 호명 시 루프. 조건은 아직 확정이 아니었다.
도윤은 벽의 비상 안내문을 뜯지 않고 사진만 찍었다.
“등록 애들 먼저 빼면 최소 20명은 아래로 보낼 수 있어.”
보라는 말했다.
“그럼 보내요.”
서진이 보라를 봤다.
보라는 손목 이름을 들어 보였다. “혼자 남는 건 싫어요. 근데 애들 다 여기서 연기 마시는 것도 싫어요. 정민이랑 서현이는 내려가서 제 이름 말해요. 나 교실에 혼자만 안 있으면 돼요.”
그 말은 동의처럼 보일 수 있었다. 서진은 바로 쓰지 않았다.
“조건을 말하세요.”
보라는 숨을 들이마셨다.
“문 열어 둔다. 선생님 한 명 말고, 서진 씨나 도윤 씨 중 한 명 남는다. 3분마다 내 이름 확인한다. 카메라로 얼굴 안 나간다.”
도윤은 시계를 봤다.
“3분마다면 늦어.”
“그럼 2분.”
보라가 바로 고쳤다. 그는 구조 대상이 아니라 협상자였다. 서진은 그 조건을 적었다. 단독 잔류 아님. 2분 확인. 문 개방 유지. 얼굴 비공개.
그 조건을 붙이자 계단 표시등이 잠깐 노란색으로 바뀌었다. 완전한 초록은 아니었다. 하지만 빨간불만 있던 줄에 다른 색이 생겼다.
은채가 통화 너머에서 말했다.
“조건부 대기 항목이 생겼어요. 공식 메뉴는 아니고 훈련 예외 쪽.”
원장이 바로 끼어들었다.
“그런 항목은 사용하면 안 됩니다. 사고 책임이 더 커집니다.”
“사고는 이미 났습니다.”
서진은 원장에게 조건부 대기 항목 확인란을 내밀었다. 원장은 보지 않았다. 보라는 그 칸 옆에 원장 확인 거부라고 적었다.
연기 경고등은 빨간색 한 칸 아래에서 멈췄다. 등록 학생들이 순서대로 내려갈수록 경고음 간격이 길어졌다. 수칙의 효율은 계속 증명됐다. 그러나 보라를 남기는 칸도 같이 선명해졌다.
서진은 봉투를 직접 빼앗지 않았다.
“개봉자 성명 쓰세요.”
원장은 펜을 들지 않았다.
“지금 그게 중요합니까?”
“나중에 원본이 아니라고 할 수 있으니까요.”
원장은 마지못해 이름을 썼다. 백로학원 원장 이찬구. 글씨는 빠르고 삐뚤었다.
카드 원본은 현장 카드와 달랐다. 첫 줄은 같았다.
미등록 학생은 이동시키지 마시오.
그 아래 작은 줄이 있었다. 등록 인원 우선 대피 시 생존율 상승. 4년 전 백로학원 사고, 등록 인원 63명 구조.
보라가 그 숫자를 읽었다.
“그럼 한 명은요.”
원장은 답하지 않았다.
카드 하단 책임 승인란에는 이니셜이 있었다.
S.M.
날짜는 4년 전 백로학원 심야 화재 신고 다음 날이었다. 서진은 이니셜을 보고도 서미란이라고 쓰지 않았다. S.M. 승인란. 작성자 미확정. 그렇게 적었다.
카드 뒷면에는 작은 표가 있었다. 등록 인원 63명 구조, 미등록 1명 퇴실 미확인, 시설 피해 경미. 원장은 그 숫자를 손가락으로 짚었다.
“그때도 이 카드 덕분에 다수가 살았습니다.”
“한 명은 이름이 있습니까.”
원장은 손가락을 뗐다.
“보호자 요청으로 비공개 처리됐습니다.”
“비공개와 미확인은 다릅니다.”
서진은 뒷면 표를 찍고, 비공개 처리 근거란을 찾았다. 근거란은 비어 있었다. 빈칸 옆에는 S.M. 이니셜과 같은 색의 작은 체크 표시만 있었다.
도윤은 그 표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63명이면...”
그는 문장을 끝내지 않았다. 63명을 살렸다는 숫자는 현장에서 힘이 있었다. 지금도 등록 학생을 먼저 빼면 실제로 계단이 열렸다. 도윤은 그런 숫자를 무시하지 못하는 사람이었다.
서진도 무시하지 못했다. 그래서 더 적었다. 63명 구조 사실 여부 확인 필요. 미등록 1명 퇴실 미확인. 승인자 S.M. 작성자 미확정.
보라는 숫자를 보다가 말했다.
“그 한 명 이름이 없으면, 63명도 확인 안 된 거잖아요.”
원장은 “그런 식으로 말하면 안 된다”고 했다.
보라는 물러서지 않았다.
“그럼 이름 보여 주세요.”
원장은 봉투 안에서 다른 종이를 꺼내지 않았다. 대신 카드 모서리를 접었다. 서진은 그 접힌 모서리도 사진으로 남겼다. 원본 훼손 가능성. 이도경은 그 장면을 찍고 있었지만 아직 올리지 않았다.
도경이 낮게 말했다.
“이건 바로 나가야 합니다.”
“학생 얼굴 제외, 위치 지연.”
“알아요.”
그는 이번에도 반박했지만 설정부터 확인했다. 영상은 원본 보관함으로 들어갔다.
스피커가 켜졌다.
감독 음성이 출석을 다시 시작했다. 현재 학생 이름이 아니었다. 원본 카드 옆에 적힌 4년 전 사고 보고서의 맨 아래 이름이 먼저 불렸다.
“문세영.”
원장은 얼굴을 굳혔다.
보라는 물었다.
“누구예요?”
서진은 보고서를 넘겼다. 4년 전 남겨진 학생. 퇴실 미확인.
스피커는 다시 말했다.
“문세영.”
대답하는 사람은 없었다. 그런데 맨 뒤 빈자리에서 오래된 퇴실 서명부가 한 장 출력되기 시작했다.
출력된 종이에는 문세영이라는 이름 옆에 작은 체크 표시가 있었다. 완료가 아니라 보류였다. 체크 표시 색은 S.M. 카드의 승인 표시와 같았다. 서진은 색을 단정하지 않고 사진 번호를 붙였다.
보라는 종이를 보다가 물었다.
“그 사람도 그때 모르는 학생이었어요?”
원장은 대답하지 않았다.
도윤이 대신 말했다.
“모르는 학생이라고 쓰면, 아는 사람이 있어도 모르는 쪽으로 처리돼.”
그는 길게 설명하지 않았다. 자기 과거를 꺼내지도 않았다. 하지만 서진은 그 문장에 47-1을 떠올렸다. 한 명을 남겨 다수를 살리는 계산. 도윤은 그 계산을 증오하면서도 버리지 못했다.
계단 아래에서 정민의 목소리가 들렸다.
“선생님, 한 줄씩 내려가면 돼요. 이름 부르지 말고 자리 번호로요.”
정민과 이서현은 아래층에 있었다. 그들이 보라 이름을 부르지 않고 위치만 확인하자 루프가 켜지지 않았다. 다수 대피는 가능했다. 이름을 어떻게 부르느냐에 따라 계단이 달라졌다.
서진은 새로 적었다. 위치 확인은 통과. 미등록 이름 호명은 루프.
보라는 그 줄을 보며 말했다.
“그럼 제 이름 말하지 말고, 창문 쪽 둘째 줄이라고 하면 돼요?”
“현재는 그렇습니다.”
현재는. 그 단어를 붙여야 했다. 다음 호명에서 규칙이 바뀔 수 있었다.
도경은 아래층 학생들의 목소리만 녹음했다. 얼굴도 위치도 없었다. 그는 다시 한 번 업로드 예약을 확인했다. 새벽으로 미룬 영상은 아직 나가지 않았다.
원장은 문세영 퇴실 서명부를 접으려 했다. 서진이 손목을 잡지 않고 종이 아래에 자기 수첩을 밀었다.
“접으면 접힌 상태도 원본에 남습니다.”
원장은 손을 뗐다.
스피커가 세 번째로 문세영을 불렀다. 이번에도 대답은 없었다. 대신 교실 뒤 빈자리 하나에 먼지 묻은 실내화 주머니가 나타났다. 이름표는 오래되어 읽기 어려웠다. 서진은 실내화 주머니를 열지 않았다. 보라가 사진을 찍고, 정민에게 아래층에서 같은 물건을 본 적 있는지 묻지 않았다. 4년 전 물건이었다. 지금 학생들이 알 수 없었다.
확인 가능한 것과 불가능한 것이 갈렸다.
서진은 문세영 실내화 주머니, 실물 소유자 미확인이라고 적었다. 보라는 그 옆에 모름이라고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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