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화

빈자리

안전수칙을 지키면 죽는다 · 2026. 9.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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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자리

보라는 자기 이름을 두 번 쓰려 했다.

첫 번째 김보라는 또렷했다. 두 번째는 보라의 ㅂ이 반쯤 쓰이다가 펜이 멈췄다. 손에 힘이 빠진 것이 아니었다. 종이 위에서 글자가 밀려나는 것처럼 보였다.

서진은 펜을 빼앗지 않았다.

“다시 쓰지 마세요. 옆에 목격자를 붙입니다.”

보라는 입술을 물었다.

“제가 제 이름도 못 써요?”

“못 쓰는 게 아니라, 혼자 쓰면 지워지는 쪽이 빠릅니다.”

설명은 거기까지였다. 서진은 보라 옆자리 정민과 앞자리 이서현을 불렀다. 둘 다 일어나려 하지 않았다. 일어나면 자기 이름도 불릴까 봐서였다.

“자리에서 말해도 됩니다. 김보라의 좌석은 어디입니까.”

정민이 보라 옆 의자를 가리켰다.

“여기요.”

“마지막으로 한 말은요.”

이서현이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체육복 얘기.”

서진은 두 답을 같은 줄에 적었다. 김보라, 좌석 다섯째 줄 왼쪽, 체육복 대여 목격. 정민과 이서현이 각자 자기 책상에서 서명했다. 종이는 서진이 들고 있었다. 보라는 그 종이를 보며 숨을 고르지 않았다. 그는 바로 요구했다.

“저도 확인자에 넣어 주세요.”

“당사자 확인란 따로 만듭니다.”

서진이 칸을 하나 더 그었다. 김보라는 그 칸에 자기 이름 대신 파일에 붙어 있던 편의점 영수증 시간을 적었다. 22시 31분. 제보자 도착. 이름이 흐려질 때도 시간은 아직 남았다.

보라는 그 아래에 한 줄을 더 적었다.

내가 들고 온 파일은 내 것이다.

글자는 중간에서 한 번 밀렸다. 보라는 이를 악물고 다시 쓰지 않았다. 밀린 글자 옆에 화살표를 그었다. 밀림 발생. 그는 자기 상태를 남의 말로 정리하지 않았다. 자기 손으로 오류를 표시했다.

정민은 보라의 필통을 들어 보였다.

“이것도 보라 거예요. 스티커 똑같아요.”

원장은 “학생 물품을 함부로 만지지 말라”고 했다. 정민은 필통을 바로 내려놓았다. 서진은 물건을 가져오게 하지 않고, 각자 자리에서 보이는 특징만 말하게 했다. 필통 스티커, 파일 모서리 깨짐, 보라가 자주 쓰는 파란 형광펜.

이서현이 말했다.

“보라는 파란색만 써요. 답 체크할 때.”

보라는 그 말에 바로 반박했다.

“수학은 초록색도 써.”

이서현이 “아, 맞다”라고 했다. 틀린 기억을 고치는 장면도 기록이 됐다. 서진은 정정됨이라고 적었다. 완벽한 기억보다 정정 가능한 기억이 오래 버텼다.

퇴실 서명부가 다시 움직였다. 보라 이름이 있던 줄이 사라지고, 맨 뒤 빈자리 쪽에 빈자리 1이라고 적힌 칸이 생겼다.

보라가 그 칸을 보자 얼굴이 굳었다.

“저 아니에요.”

“아직 아닙니다.”

도윤은 빈자리 쪽으로 학생들이 돌아보지 못하게 통로에 섰다. 그는 한 번도 보라에게 괜찮다고 말하지 않았다. 대신 원장에게 물었다.

“야간 자습 명단 원본 어디 있습니까.”

원장은 답을 늦췄다.

“행정실에 있습니다.”

“가져오세요.”

“외부인에게 제공할 수 없습니다.”

은채가 통화로 끼어들었다.

“학부모 알림 서버에 등록 명단과 실제 출석 명단이 따로 있어요. 보험 등록 학생만 야간 명단입니다.”

원장은 은채 목소리를 듣고 표정을 바꿨다. 화난 얼굴이 아니라 계산하는 얼굴이었다.

“보험 처리 때문에 구분한 겁니다. 실제 자습은 모두 허용했습니다.”

서진은 그 말을 받아 적었다.

보험 등록 학생만 야간 명단. 실제 자습 인원과 다름.

“명단에서 뺀 학생들은 몇 명입니까.”

원장은 답하지 않았다.

은채가 대신 숫자를 불렀다.

“오늘 3관 입실 앱 26명. 보험 야간 명단 23명. 차이 3명.”

학생들이 서로를 세기 시작했다. 손가락으로, 눈으로, 자리표로. 세는 행동이 시작되자 세 명이 조용해졌다. 미납, 반 변경, 상담 대기. 누가 어느 칸인지 공개되는 순간, 학원 밖 문제까지 교실 안으로 들어왔다.

서진은 숫자만 적었다. 이름은 쓰지 않았다.

“차이 3명. 이름 비공개. 당사자 확인 전 공개 금지.”

도경은 그 문장을 보고 휴대전화 메모에 그대로 옮겼다. 그는 학원 비리를 당장 쓰고 싶은 얼굴이었다. 하지만 학생 세 명의 이름이 같이 딸려 나간다는 것도 보고 있었다.

“이건 기사 가치가 큽니다.”

“학생 이름 없이요.”

“그러면 학원이 부인합니다.”

“원장 서명을 받습니다.”

서진은 다시 원장에게 서명란을 밀었다.

보라가 바로 물었다.

“그럼 미납한 애들은 사고 나면 없는 애예요?”

원장은 “그런 뜻이 아니다”라고 했다. 뜻이 아니라 처리가 문제였다. 서진은 그 문장을 쓰지 않았다. 대신 원장에게 서명란을 밀었다.

“방금 말한 운영 기준 확인 서명하세요.”

원장은 펜을 들지 않았다.

학생들은 조용해졌다. 조용해서 안전해진 것이 아니었다. 자기 이름이 어느 명단에 있는지 계산하느라 말이 줄었다.

빈자리 책상 위에는 보라의 문제집이 놓여 있었다. 방금까지 보라 가방 안에 있던 것이었다. 표지 모서리에는 보라가 붙인 작은 스티커가 있었다. 정민이 그것을 보고 말했다.

“저거 보라 거 맞아요.”

서진은 정민에게 고맙다고 하지 않았다.

“근거 하나 더 말하세요.”

“스티커. 저랑 같이 샀어요.”

서진은 스티커 사진을 찍고 정민 서명 옆에 붙였다. 보라의 이름은 출석부에서 흐렸지만 문제집의 스티커는 아직 남아 있었다.

보라가 빈자리 쪽으로 가려 했다.

“내 책이에요.”

도윤이 막았다.

“자리에 앉으면 그쪽이 네 자리 돼.”

보라는 도윤을 노려봤다.

“그럼 제 책도 못 가져와요?”

서진은 문제집을 만지지 않았다. 먼저 사진을 찍고, 정민과 이서현에게 스티커와 필체를 확인하게 했다. 그 다음 도윤이 긴 자로 문제집을 밀어 왔다. 손이 닿지 않는 방식이었다.

빈자리 책상은 움직이지 않았다. 하지만 퇴실 서명부의 빈자리 1 칸이 한 번 깜빡였다.

표면 수칙은 맞았다. 빈자리는 비워 둬야 했다. 하지만 그 수칙은 누가 빈자리로 밀리는지 가리지 않았다.

보라는 문제집을 품에 안고 바로 자기 자리로 돌아가지 않았다. 돌아가면 자리표가 따라올지 모른다는 걸 이제는 그도 알았다. 그는 문제집을 서진의 종이 옆에 내려놓았다.

“내 자리로 가져가도 되는지 먼저 확인해 주세요.”

그 말은 허락을 구하는 말처럼 들렸지만, 실제로는 자기 선택권을 남기는 말이었다. 서진은 보라에게 묻고, 정민과 이서현에게 확인하게 했다. 세 사람이 동시에 고개를 끄덕인 뒤에야 문제집은 보라 책상으로 돌아갔다.

책상 위 좌석표는 한 번 흔들렸지만, 보라 줄이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았다.

원장은 그때도 보험 얘기를 했다.

“등록 명단에 없는 학생을 대피시키면 사고 책임이 복잡해집니다. 보호자 동의도 없고요.”

보라가 웃지 않고 물었다.

“그럼 남겨 두는 건 안 복잡해요?”

원장은 대답하지 않았다.

건물 아래층에서 경보음이 울렸다. 처음에는 자습실 스피커와 다른 소리였다. 짧고 일정한 전자음. 도윤이 문 쪽으로 갔다가 계단 아래를 보았다.

“진짜야.”

한 단어였다.

은채가 바로 말했다.

“3관 1층 전기실 화재 신고 들어왔어요. 스프링클러 점검 아님.”

학생들이 일어났다. 이번에는 벌점이나 퇴실 서명보다 연기 냄새가 빨랐다. 원장도 문으로 갔다. 자동문은 잠겨 있었지만 비상해제 버튼에는 초록불이 들어왔다.

서진은 보라의 손목에 이름을 썼다. 김보라. 그 아래 정민과 이서현이 각각 한 글자씩 따라 썼다. 글씨는 비뚤었지만 세 사람의 필압이 달랐다.

도경은 그 손목을 찍으려다 멈췄다.

보라가 먼저 말했다.

“손목은 찍어도 돼요. 얼굴은 안 돼요.”

도경은 손목만 찍었다. 위치 정보는 꺼져 있었다. 그는 파일명을 보라_공동목격_검증전이라고 썼다. 이번에도 바로 올리지 않았다.

비상문 옆 카드가 바뀌었다.

미등록 학생은 교실에 남겨 두고 등록 인원만 대피하십시오.

학생 몇 명이 보라를 보았다. 시선이 오래 머물지는 않았다. 오래 보면 자기 책임이 생길 수 있었다. 정민은 보라 손목을 잡았다가 바로 놓았다. 놓은 손을 다시 잡았다.

“얘 등록돼 있어요. 우리 반이에요.”

이서현도 말했다.

“제 앞자리예요.”

서진은 두 문장을 같은 종이에 적었다. 공동목격은 기도문이 아니었다. 틀릴 수 있는 사람이 서로 고치는 구조였다.

원장은 비상해제 버튼 앞에서 망설였다.

“카드대로 해야 합니다. 등록 인원부터.”

도경은 원장을 찍었다. 얼굴 전체가 아니라 손과 버튼, 그리고 카드 문구만 화면에 들어갔다. 그는 이번에는 서진을 보지 않았다. 공개 욕망 때문이 아니라, 나중에 원장이 그런 말을 한 적 없다고 할 가능성 때문이었다.

“이건 검증 전에도 보관합니다.”

“공유는요.”

“학생 얼굴 빼고, 위치 지연.”

그는 스스로 조건을 말했다. 말투는 여전히 거칠었지만 손은 설정 화면으로 먼저 갔다.

도윤은 버튼을 누르기 전에 학생들을 두 줄로 세웠다. 등록 명단에 있는 줄과, 아직 확인이 필요한 줄이 아니었다. 그런 줄을 만들면 괴이가 먼저 읽을 수 있었다. 그는 문에서 가까운 줄과 창문에서 가까운 줄로 나눴다.

“이름 기준으로 서지 마. 위치 기준.”

학생들은 처음엔 이해하지 못했지만, 바닥 타일 줄을 따라 섰다. 보라는 창문 쪽 두 번째에 섰다. 정민은 그 옆에 섰고, 이서현은 뒤에 섰다. 보라를 가운데 두지 않았다. 가운데 세우면 보호받는 사람처럼 보이고, 끝에 세우면 남겨질 사람처럼 보였다.

서진은 위치 기준 대기라고 적었다.

은채가 말했다.

“계단 표시등은 보험 명단을 읽고 있어요. 임시 목격 기록은 아직 반영 안 됩니다.”

“반영 경로는요.”

“학원 관리자 승인 아니면 보호자 확인.”

원장은 그 말을 듣고 바로 말했다.

“보호자 확인 없이 학생 상태를 바꿀 수 없습니다.”

보라가 휴대전화를 들었다.

“엄마한테 전화할게요.”

통화 버튼을 눌렀지만, 화면에는 상담 대기 학생은 보호자 알림 대상이 아닙니다라는 문구가 떴다. 보라가 그 문구를 서진에게 보여 줬다. 목소리는 나오지 않았다. 문구가 대신 말했다.

서진은 보라에게 휴대전화를 들고 있으라고 했다. 자신이 대신 들면 보호자 연락 실패가 서진의 조작처럼 보일 수 있었다. 보라는 화면을 든 채 서 있었다. 정민이 옆에서 시간을 읽었다.

“23시 13분.”

이서현이 문구를 읽었다.

“상담 대기 학생은 보호자 알림 대상이 아닙니다.”

보라는 그 문장을 따라 읽지 않았다. 자기한테 붙은 문구를 자기 입으로 확인하고 싶지 않은 사람처럼 화면만 들었다.

도경은 문구만 찍었다. 보라 손목의 이름이 화면 아래에 조금 들어오자 그는 각도를 바꿨다.

“이건 정말 바로 나가야 하는데.”

“위치 지연.”

“알아요.”

도경은 업로드 예약 시간을 다음날 오전으로 잡았다. 공개를 포기한 게 아니라 늦춘 것이다. 그래도 지금 복제되지는 않았다.

연기 냄새가 더 가까워졌다. 학생 한 명이 기침했다. 원장은 그제야 비상 안내문을 찾았다. 안내문에는 등록 인원 우선 대피라고 되어 있지 않았다. 모든 재실자 대피라고 되어 있었다. 카드 문구와 안내문이 달랐다.

서진은 두 종이를 나란히 찍었다.

“원장님, 어느 문서대로 합니까.”

원장은 답하지 못했다.

보라가 말했다.

“저 재실자예요.”

정민이 바로 따라 말했다.

“김보라 재실.”

이서현도 말했다.

“김보라 재실.”

서진은 두 학생에게 같은 말을 반복시키지 않았다. 한 번이면 기록이 됐다. 대신 각자의 서명 시간을 적었다. 23시 14분, 23시 14분 8초. 같은 기억도 같은 시각에 생기지 않았다.

원장은 그 종이를 보더니 뒤늦게 펜을 들었다. 서명하려는 손이 아니라 종이를 치우려는 손이었다. 도윤이 손목을 잡지 않고 책상 다리를 발로 밀었다. 종이와 원장 손 사이에 책상 모서리가 들어갔다.

“서명할 거면 쓰고, 치울 거면 이름 남기고 치우세요.”

원장은 펜을 내려놓았다. 서진은 미서명이라고 적었다.

보라는 그 미서명 글자 옆에 원장 봄이라고 덧붙였다. 책임자가 보았다는 사실은 남았다.

정민도 봄이라고 썼다.

이서현도 썼다.

도윤이 버튼을 눌렀다. 문은 반쯤 열리다 멈췄다. 계단 쪽 표시등이 학생 명단을 읽기 시작했다. 등록 학생 이름에는 초록불이 들어왔고, 보라 이름이 있어야 할 줄은 비어 있었다.

보라는 자기 손목을 들어 보였다.

“여기 있어요.”

표시등은 손목을 읽지 않았다. 출석부도, 보험 명단도, 학부모 앱도 보라를 늦게 읽었다. 계단 문 위 초록불은 등록 학생 이름 옆에서만 켜졌다.

연기 냄새가 자습실 안으로 들어왔다.

감독 음성이 말했다.

“등록 인원부터 대피하십시오.”

계단 문은 보라 앞에서 빨간불을 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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