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원 성명을 기록할 것
안전수칙을 지키면 죽는다 · 2026. 6.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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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원 성명을 기록할 것
초기 공지 문장이 나온 뒤에도 엘리베이터는 내려가지 않았다.
서진은 수첩 한 장을 뜯어 세 칸으로 나눴다.
종이 기록, 책임자 서명, 실제 호명.
은채가 원격으로 확인한 조건을 한 줄씩 적었다.
“셋 중 하나만 있으면요.” 수아가 물었다.
은채는 바로 답하지 않고 로그를 더 봤다.
“과거 공지에는 세 조건이 같이 붙어 있습니다. 종이 기록은 서버 롤백을 피하고, 책임자 서명은 관리 주체를 고정하고, 실제 호명은 누락된 이름을 방송 경로에 올립니다.” 도윤이 말했다. “길어.” 서진은 줄을 그었다.
“종이, 서명, 호명.”
서진은 네 사람만 적지 않았다.
현재 탑승자 다섯 명 아래에 8년 전 옥상 세대 수령란을 따로 만들었다. 이름은 아직 먹칠되어 있었으므로 1301 수령인, 1302 수령인처럼 적었다. “확인되지 않은 이름을 만들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세대가 있었다는 기록은 올릴 수 있습니다.” 장명수가 고개를 들었다.
“택배대장 원본은 관리소 창고에 있습니다.” “반장님이 접근할 수 있습니까.” “열쇠는 있는데, 소장 허가가 필요합니다.” “허가가 없으면요.” 장명수는 손 안의 열쇠를 굴렸다. “무단 반출입니다.” 수아가 말했다.
“그럼 영상으로 읽어요. 가져오지 말고.”
그때 2호기에서 신고가 들어왔다.
은채의 목소리가 빨라졌다.
“404동 2호기 표시창 13. 탑승자는 없음. 그런데 단체 채팅 참여 가능 인원이 2호 라인에서 한 명씩 줄고 있습니다.” 민규의 휴대전화가 울렸다.
같은 반 친구가 보낸 메시지였다.
너희 동 엘베 왜 다 13층임?
사진 속 다른 엘리베이터 버튼에도 13이 켜져 있었다.
도윤은 조작반을 닫았다.
“건물 전체로 번진다. 오래 못 끌어.” 서진은 세 조건 옆에 제한 시간을 적으려다 멈췄다.
정확한 시간이 없었다.
대신 단체 채팅 참여 가능 인원 감소라고 썼다.
관리소장은 서명을 거부했다.
무전기 너머 그의 말은 또렷했다.
“무등록 세대를 인정하면 건물 사용 승인부터 흔들립니다. 보험사는 화재 처리 다시 열 겁니다. 새벽에 전원 대피시키면 노약자 사고도 생깁니다. 그 책임을 누가 집니까.” 주민 대표도 통화에 들어왔다. “배달기사 한 명 때문에 전 세대 재산 피해를 감수하라는 겁니까? 우리 애들도 자고 있어요.” 수아가 입을 열었지만 바로 말하지 않았다.
그는 민규를 한 번 보고, 장명수를 봤다.
“저 한 명 때문에라고 하지 마세요. 시스템이 한 명을 고른 거예요. 그걸 사람들이 편하다고 받는 거고.”
서진은 책임자 서명란에 자기 이름을 썼다.
윤서진, 다온생활안전 계약직 현장기록원.
저장은 되지 않았다.
은채가 말했다.
“권한 반려. 관리 주체가 아니라서 효력 없음.” 서진은 펜을 내려놓았다. 권한 없는 사람이 옳은 말을 쓰는 것만으로는 문이 열리지 않았다.
도윤이 그 실패를 보고 있었다.
“최악이면 내가 나간다.” “어디로요.” “문 열리는 순간 13층 쪽으로. 한 명을 바깥에 두면 나머지는 내려갈 수 있어.” 서진은 그를 바로 보았다. “자원자 지정은 해법이 아닙니다.” “시간 벌기야.” 수아가 끼어들었다.
“그 시간으로 다음 수칙을 또 만들겠죠. 자원자도 한 명 적게랑 같은 말이에요.”
도윤은 반박하지 않았지만 문 앞 위치를 바꾸지 않았다.
자기 몸으로 막을 준비를 하는 사람처럼 섰다.
서진은 그의 팔에 적힌 아를 봤다.
글자가 땀에 조금 번졌다.
“강도윤 씨가 나가면 수아 씨 이름은 돌아오지 않습니다. 8년 전 사람들도 그대로입니다.” “전부 잡고 있다가 다 잃으면?” “그래서 책임자를 움직입니다.” “소장이 안 한다.” “소장이 못 끄는 걸 찾겠습니다.” 서진은 관리실 영상통화 화면을 확대했다.
공지 상자 뒤쪽에 전관 방송 장치가 보였다.
장명수도 같은 것을 보았다.
그의 손이 열쇠 꾸러미에서 방송실 열쇠를 골랐다.
장명수는 처음에는 “그게 말이지”라고 했다.
그 뒤 말을 잇지 못했다.
관리소장이 무전으로 “장 반장, 그 열쇠 내려놓으세요”라고 했다.
장명수는 무전기를 들고 한참 있다가 답했다.
“최 소장님, 2018년 4월 19일 아침 공지 붙인 사람 접니다.” 날짜가 엘리베이터 안에 떨어졌다. “대피 완료라고 붙였습니다. 옥상 세대 택배대장 봤고도요.” 관리소장이 욕을 삼키는 소리가 났다.
장명수는 이어 말했다.
“오늘은 실제 거주하신 분 이름부터 부르겠습니다.” 그의 목소리는 생활어가 아니었다.
이름과 날짜를 말할 때의 목소리였다.
영상통화 속 장명수의 후배 경비원이 방송실 문 앞에 섰다.
장명수가 열쇠 위치를 설명했다.
왼쪽에서 세 번째, 빨간 고무캡.
수아는 분전반 위치를 물었다.
“소장이 전원 내리면 방송 끊겨요.” 장명수가 답했다. “관리실 뒤쪽. 회색 문.” 수아는 엘리베이터 안에서 나갈 수 없었지만 영상통화 너머 후배에게 말했다. “문 앞 막아요. 몸 다치게 막지 말고, 차단기 손잡이 사진 찍으면서요. 누가 내리는지 남겨요.” 수아의 말은 명령처럼 들렸지만 자기 손으로 못 하는 일의 초조함이 끝에 붙어 있었다.
주민 대표는 계속 말했다.
“이거 녹음되고 있습니까? 우리 동 이미지 문제도 생각해야죠.” 은채가 건조하게 답했다. “현재 통화 녹음 중. 이미지보다 참여 가능 인원이 먼저 줄고 있습니다. 7라인 세 명 감소.” 민규가 자기 반 단체방을 보다가 말했다. “엄마가 엘리베이터 타지 말래요. 근데 이미 층마다 문이 열렸대요.” 도윤이 문틈을 확인했다.
아무 틈도 없었다.
서진은 수첩의 종이 기록을 카메라 앞에 세웠다.
“탑승자 다섯 명. 옥상 세대 존재 기록. 책임자 증언자 장명수.” 장명수가 고개를 저었다.
“증언자가 아니라 서명자요.”
방송실 마이크가 켜졌다.
처음에는 하울링이 길게 났다.
장명수의 목소리는 그 소리 뒤에 들어왔다.
“404동 경비반장 장명수입니다. 2018년 4월 19일 대피 완료 공지는 실제 거주 인원을 빠뜨렸습니다.” 관리소장이 전원을 내리라고 소리쳤지만, 영상 속 회색 문 앞에서 경비원이 휴대전화를 들고 버티고 있었다. 수아는 화면을 보며 “손잡이 말고 얼굴도 찍어요. 책임자는 손만 남기면 또 빠져요”라고 했다. 서진은 책임자 서명 칸 아래에 장명수의 이름을 적었다.
실제 서명은 아직 아니었다.
하지만 방송은 시작됐다.
세 조건을 적은 종이는 사람마다 다르게 읽혔다.
은채에게는 검증 조건이었고, 도윤에게는 시간이 오래 걸리는 위험 목록이었다.
장명수에게는 자기 이름을 써야 하는 칸이었다.
수아에게는 자신을 살리는 방법이면서 8년 전 누군가를 다시 불러오는 절차였다.
서진은 그 차이를 하나로 묶으려 하지 않았다.
“각자 동의 범위 확인하겠습니다. 수아 씨, 이름 방송에 동의합니까.” 수아는 바로 답하지 않았다. “내 이름만요. 주소랑 번호는 안 돼요.” “민규 학생.” “제 이름은 괜찮은데 엄마 번호는 말하지 마세요.” 장명수는 “제 직책까지 말하겠습니다”라고 했다. 도윤은 “강도윤, 현장처리관. 거기까지만.”
이 확인은 느렸다.
도윤은 그 느림을 싫어했다.
“지금 동의서 받을 시간 없어.” 서진은 펜을 멈추지 않았다. “그래서 짧게 받습니다.” “문 열리면 바로 움직여야 해.” “문이 열려도 누가 빠지는지 모르면 같은 일입니다.” 수아가 도윤을 봤다. “선임님은 빠르게 살리는 쪽이고, 이 사람은 느리게 안 빠뜨리는 쪽이네요.” 도윤은 그 말에 대꾸하지 않았다.
대신 엘리베이터 안쪽 비상 정지 버튼을 테이프로 고정했다. 문이 갑자기 움직일 때 손이 다치지 않게 하려는 조치였다.
말은 짧아도 손은 먼저 움직였다.
관리소장은 서명 거부 사유를 계속 늘렸다.
사용 승인, 보험, 주민 민원, 언론 노출, 법적 책임. 오정호라는 시 법무 담당자에게 문의하겠다는 말도 나왔다.
아직 연결되지는 않았다.
은채가 “소장 발언 기록 중. 법무 담당자 실제 연결 없음”이라고 보고했다.
주민 대표는 단체 채팅에서 투표를 다시 열자고 했다.
‘현재 확인 가능한 인원만 처리’라는 문구가 올라왔다.
참여 가능 인원은 어느새 3으로 줄어 있었다.
누가 빠졌는지는 표시되지 않았다.
민규가 자기 이름이 아직 있는지 확인하려 했지만, 채팅방은 이름 목록을 접어 버렸다.
숫자만 남았다.
수아는 숫자만 남은 화면을 보고 자기 손바닥을 다시 펼쳤다.
잉크가 손금에 번져 한수아의 수가 조금 흐렸다.
“이거 지워지면 다시 써요.” 그는 서진에게 펜을 요구했다.
이번에는 망설이지 않았다.
서진이 펜을 건네자 수아는 손바닥을 덧칠했다.
“저는 방송 동의합니다. 대신 나가서 이거 다 말할 거예요.” 도윤이 “지금 공개하면 주민들이 몰려와”라고 했다. “그럼 몰려온 사람 이름도 세요.” “통제가 안 돼.” “통제하려고 한 명 뺀 결과가 지금이잖아요.” 도윤은 이번에도 반박하지 못했다. 그의 침묵이 동의는 아니었지만, 이전보다 덜 닫혀 있었다.
장명수는 방송실 열쇠를 설명하면서도 계속 관리소장 눈치를 봤다. “후배가 열면 제 책임입니다.” 서진은 “맞습니다”라고 했다. “제가 시켰다고 하면요.” “거짓 기록이 됩니다.” 장명수는 그 말을 듣고 웃지도 못했다.
“무섭게 말하네.” “반장님 책임을 빼앗으면 또 다른 누락입니다.” 장명수는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자기 이름을 종이에 적었다.
장명수.
획이 처음엔 작다가 마지막 수에서 커졌다.
“그럼 제 책임으로 합시다. 대신 제가 아는 것까지만 말합니다. 모르는 이름은 모른다고 하고요.” 서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모르는 건 모른다고 방송합니다.”
영상통화 속 후배 경비원은 떨고 있었다.
소장이 뒤에서 다가오는 발소리가 들렸다.
수아가 화면에 대고 말했다.
“찍고 있어요. 흔들려도 돼요. 끊기지만 않으면 돼요.” 후배는 휴대전화를 가로로 돌렸다. 분전반, 소장의 손, 방송실 문, 공지 상자, 택배대장.
화면은 예쁘지 않았지만 필요한 것들이 들어왔다.
은채가 파일을 분산 저장했다.
“서버 한 곳 말고 세 곳에 임시 저장. 단, 공식 기록 아님.” 서진은 “공식으로 만들 책임자가 필요합니다”라고 했다.
장명수가 종이를 들었다.
“그래서 제가 읽습니다.” 그가 말하자 엘리베이터 스피커가 짧게 잡음을 냈다.
마치 방송 순서를 빼앗기 싫어하는 장치처럼.
서진은 그 비유를 생각에서 지웠다.
장치는 순서를 처리할 뿐이었다.
서진은 방송 전에 한 가지를 더 확인했다.
“과거 옥상 세대 이름은 삭제된 상태입니다. 임의로 이름을 만들지 않습니다.” 장명수가 고개를 끄덕였다. “택배대장에 남은 호수와 수령 사실만 읽겠습니다.” 수아가 “그 사람들도 이름으로 불리고 싶었을 텐데요”라고 했다.
서진은 펜을 멈췄다.
“그래서 모른다고 남깁니다. 지어서 채우면 또 다른 삭제입니다.” 수아는 그 답이 마음에 들지 않는 표정이었지만 반박하지 않았다.
모른다는 말은 구조가 아니었다.
그러나 거짓 이름으로 덮는 것보다는 덜 나빴다.
방송실 문이 열리기 직전, 단체 채팅방에 새 투표가 떴다.
1호기 사고 종결 동의.
선택지는 찬성뿐이었다.
반대 버튼은 없었다.
민규가 “이건 투표가 아니잖아요”라고 했다.
은채가 건조하게 말했다.
“단일 선택 확인 양식입니다.” 수아가 바로 받았다. “이름만 투표고, 결과는 이미 정해졌네.” 서진은 그 화면을 수첩 옆에 두고 촬영했다.
주민들의 악의보다 양식의 모양이 더 무서웠다.
반대할 칸이 없는 문서는 사람을 조용하게 만들었다.
장명수는 그 화면을 본 뒤 마이크를 더 세게 잡았다.
관리소장은 마지막으로 장명수의 고용을 말했다.
“그 방송 나가면 오늘부로 끝입니다.” 장명수는 마이크 앞에서 잠깐 입을 다물었다. 경비실 야간 수당, 명절 선물, 주민들이 맡기는 택배, 모두 그의 생활이었다.
수아도 그 침묵을 재촉하지 않았다.
서진은 책임자 서명 칸 위에 펜을 대고 기다렸다.
누군가를 옳은 쪽으로 밀어 넣는 것도 다른 방식의 누락이 될 수 있었다. 장명수가 스스로 말하기 전까지, 칸은 비워 두어야 했다.
장명수는 택배대장 첫 줄을 읽었다.
“1301호, 수령인 성명 삭제됨. 당시 실제 거주자.” 엘리베이터 스피커가 같이 켜졌다. “등록되지 않은 인원은.” 방송이 그 말을 덮었다. “현재 1호기 탑승자 윤서진, 강도윤, 한수아, 장명수, 최민규. 다섯 명.” 수아가 자기 이름에서 눈을 감지 않았다.
민규는 손등의 한 글자를 들어 보였다.
도윤은 문 앞에서 물러서지 않았지만 몸을 던질 자세는 풀었다. 장명수가 다음 줄을 읽으려는 순간, 404동 모든 엘리베이터 문이 동시에 열렸다.
1호기 앞에는 같은 복도가 있었다.
문패는 모두 1304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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