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상전화는 안에서 걸려왔다
안전수칙을 지키면 죽는다 · 2026. 5.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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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상전화는 안에서 걸려왔다
도윤은 스피커 버튼을 누른 손을 떼지 않았다.
수화기를 들면 이름을 묻는 쪽으로 끌려갈 것 같아서가 아니라, 손을 떼면 문이 열릴지도 모르기 때문처럼 보였다. 전화기 작은 구멍에서 다섯 사람의 숨소리가 흘러나왔다.
한 박자 늦었다.
서진이 숨을 내쉬면 전화 속 서진이 뒤따라 내쉬었다.
수아가 “뭐야”라고 말하자 같은 말이 얇게 접혀 돌아왔다.
도윤은 자기 이름을 말하지 않았다.
“위치.” 전화는 답하지 않았다. 천장 안쪽 벨은 멎었고 비상전화 표시등만 빨갛게 켜져 있었다.
무전기에서 박은채의 목소리가 들어왔다.
“1호기 상태값 이상. 발신 번호가 내부 비상전화로 잡힙니다. 통화 기록상 호출자도 1호기입니다.” 숫자만 말하는 목소리였다.
서진은 수첩 모서리에 발신 위치: 내부라고 적었다.
“CCTV 보내 주세요.” 은채가 바로 답했다. “관리 서버 접속 중. 화면 오면 이름 말하지 말고 손만 들어요.” 도윤이 짧게 웃었다.
웃음은 소리가 아니라 숨의 방향이었다.
“말하지 말라잖아.” 서진은 그 말을 수첩에 적지 않았다.
천장 스피커가 다시 켜졌다.
“남은 한 분은 성명을 말씀해 주십시오.” 이번에는 아이 목소리가 아니었다.
같은 문장을 성인 여성 안내원이 녹음한 듯 읽었다.
카드 뒷면이 서진의 손에서 따뜻해졌다.
아까 비어 있던 면에 글자가 떠올랐다.
비상전화에는 성명을 답하지 마십시오.
글자는 감열 영수증처럼 검게 올라왔다.
수아가 카드를 보려 하자 도윤이 손바닥으로 가렸다.
“전화에 이름 들어가면 대상 확정돼.” “이미 제 이름만 빠졌는데요.” 수아가 말했다.
“확정이 덜 된 거면 누가 고마워해야 해요?”
은채가 화면을 보냈다.
서진의 휴대전화에는 관리실 CCTV 정지 프레임이 떴다.
엘리베이터 내부, 00:19:32.
서진은 왼쪽 벽에, 도윤은 조작반 앞에, 장명수는 문 가까이, 민규는 뒤쪽 모서리에 있었다.
수아가 서 있는 자리는 비어 있었다.
대신 배달 가방만 바닥에 놓인 것처럼 보였다.
서진은 고개를 들어 실제 수아를 확인했다.
수아는 가방을 어깨에 메고 있었다.
화면 속 가방은 같은 색, 같은 반사띠였다.
“수아 씨, 가방 내려놓은 적 있습니까.” “없어요. 내려놓으면 음식 쏟아져요.”
은채가 이어 말했다.
“공동현관 출입 기록에도 한수아 없음. 1102호 배달 앱 로그는 주문번호만 남고 기사 계정이 공란입니다.” 장명수가 수아를 잠깐 보았다.
보는 눈이 방금 만난 사람을 확인하는 눈이었다.
서진은 그의 시선을 놓치지 않았다.
“반장님, 제 수첩 읽어 주세요. 세 번째 줄.” 장명수는 종이를 받아 들고 더듬었다. “한… 한수아. 1102호 완료 사진.” 수아가 바로 말했다. “제 번호도요.” 서진이 번호를 적었다.
장명수가 두 번째로 읽을 때 성을 틀렸다.
“김수아.” 수아가 손바닥으로 벽을 쳤다.
“한수아요. 한. 배달 앱에도 한수아였고요.”
전화기에서 지연된 숨이 다시 들렸다.
이번에는 한 사람 분량이 아니었다.
다섯 명의 숨이 겹친 뒤, 여섯 번째처럼 비어 있는 박자가 따라왔다.
민규가 귀를 막으려 하자 도윤이 손목을 잡아 내렸다.
“소리 막지 마. 뭐가 바뀌는지 들어.” 민규는 고개를 끄덕였지만 눈은 문틈만 봤다.
서진은 수첩을 카메라에 비췄다.
이름, 목적 층, 번호.
은채가 말했다.
“화면에는 수첩 글자가 보입니다. 그런데 세 번째 줄만 번집니다.” “종이는 여기 있습니다.” “서버 화면 기준입니다.” 은채는 틀린 말을 고치듯 덧붙였다.
“제가 보고 있는 기록 기준.”
관리사무소에서 단체 채팅 공지가 올라왔다.
404동 1호기 탑승자 확인 투표.
안전 확인을 위해 실제 탑승자만 선택해 주십시오.
선택지는 네 개였다.
윤서진, 강도윤, 장명수, 최민규.
수아의 휴대전화는 조용했다.
방 목록에서 404동 입주민 임시방이 사라져 있었다.
수아가 검색창에 자기 동호수를 넣었다.
아무것도 나오지 않았다.
“저 입주민 아니에요. 그래서 뺀 거예요?” 장명수가 입술을 적셨다. “배달기사는 출입대장에 남아야 하는데.” “그 대장에도 없다고요.” 수아가 장명수에게 휴대전화를 들이밀었다.
도윤은 네 명 중 아무것도 누르지 않았다.
“투표하지 마.” 장명수는 손가락을 화면 위에 올려 둔 채 멈췄다. “안 누르면 사고 보고가 밀립니다. 주민들 깨우면 난리가 나요.” “누르면 수아 씨가 빠져.” 서진은 말했다. “안 눌러도 자동 마감될 수 있습니다.” 은채가 바로 확인했다.
“마감까지 30초. 관리자가 수동으로 보낸 투표가 아니라 시스템 자동입니다.” “시스템은 누가 열었습니까.” “관리 권한은 관리사무소. 로그에는 사용자 공란.” 공란이라는 말에 수아가 짧게 웃었다.
“오늘 공란 인기 많네요.”
서진은 투표창을 닫고 휴대전화 카메라를 켰다.
수첩과 수아의 얼굴, 가방에 붙은 주문번호가 한 화면에 들어오게 했다. “말하지 않고 기록하겠습니다.” 도윤이 그녀를 봤다. “기록도 방송으로 들어가면 같아.” “숨기면 삭제가 완료됩니다.” “확정되면 못 돌려.” “이미 네 명짜리 화면이 확정 중입니다.” 두 사람의 말은 길어지지 않았다.
그 사이 수아가 자기 이름을 종이에 크게 썼다.
한수아.
획 끝이 흔들렸지만 글자는 읽혔다.
민규가 그 종이를 들었다.
장명수도 손을 보탰다.
서진은 수아의 번호를 한 번 더 확인했다.
“끝자리 3179 맞습니까.” “맞아요. 근데 이러다 제 번호도 없어져요?” “없어지는 순서를 봐야 합니다.” 수아는 잠깐 웃었다. “순서 알면 덜 없어져요?” 서진은 펜을 멈췄다. “아니요. 다만 어느 기록이 먼저 배신하는지 압니다.” 은채가 그 말을 받아 적듯 말했다.
“앱, 출입, CCTV 순서로 빠졌습니다. 단체 채팅은 네 번째. 종이는 아직 유지.” 도윤이 “유지라는 말도 조심해”라고 했다.
은채는 바로 고쳤다.
“현재 시점에서 변형 없음.” 숫자와 시점이 붙자 말이 조금 덜 거짓말처럼 들렸다.
전화는 이름을 요구하지 않을 때도 사람을 세고 있었다.
수화기 구멍에서 민규가 삼킨 침소리가 늦게 들렸다.
민규는 자기 목을 만졌다.
“저 소리도 이름처럼 잡혀요?” 도윤은 “모른다”라고 했다.
모른다는 말이 의외로 빠르게 나왔다.
서진은 그 말을 들은 뒤 도윤을 다시 보았다.
그는 아는 척으로 사람을 끌고 가지 않았다.
다만 모르는 상태에서도 몸을 문 앞에 세웠다.
장명수는 업무용 무전기의 통화 버튼을 만지작거렸다. 보고를 해야 하는 사람과 사람을 빼면 안 된다는 사실 사이에서 버튼만 닳아 갔다.
관리사무소 쪽에서는 이미 표현을 바꾸고 있었다.
‘갇힘 사고’가 아니라 ‘일시 정지’, ‘탑승자’가 아니라 ‘확인 대상’, ‘한수아’가 아니라 ‘외부 출입자’.
은채가 통화 기록을 읽으며 말했다.
“소장 쪽 보고 초안에 외부 출입자 미확인이라고 들어갑니다.” 수아가 바로 받았다. “미확인이면 제가 확인 안 된 거지, 안 탄 건 아니잖아요.” 서진은 그 문장을 수첩에 따옴표 없이 적었다. 당사자의 반박은 기록으로 남겼을 때 힘이 조금 생겼다.
장명수는 수아의 이름을 세 번째로 읽었다.
이번에는 틀리지 않았다.
그는 읽고 나서 “한수아 씨”라고 불렀다. 수아는 “씨 붙이면 살아나요?”라고 했지만, 대답을 기다리는 눈이었다.
카드 뒷면의 문구는 더 진해졌다.
비상전화에는 성명을 답하지 마십시오.
그 아래 작은 글자가 추가로 떠올랐다.
통화 중 반복된 성명은 잔류자 확정에 사용될 수 있습니다.
서진은 그 문장을 보고도 소리 내 읽지 않았다.
도윤은 카드만 보고 이해했다.
수아는 카드 앞을 막은 손을 밀어냈다.
“내 일인데 왜 못 보게 해요.” 도윤이 손을 거뒀다.
수아는 문장을 끝까지 읽고 이를 악물었다.
“잔류자. 말이 좋네요. 남겨진 사람이라고 쓰면 너무 티 나니까.” 민규가 작게 물었다. “잔류자가 되면요?” 도윤은 “돌아오기 어렵다”라고만 했다. 어렵다는 말 뒤에 과거 사례 하나가 매달려 있었지만, 그는 아직 풀지 않았다.
서진은 이름을 말하지 않는 대신 글자를 나눠 보여 주는 방법을 시험했다.
한 장에는 한, 다음 장에는 수, 다음 장에는 아.
CCTV 화면에서 글자가 어떻게 보이는지 은채가 확인했다. “첫 글자만 선명합니다. 두 번째는 흐림. 세 번째는 화면 노이즈.” “사람들이 같이 읽으면요.” “음성 경로로 들어갑니다.” “눈으로만 확인하면요.” “관리 서버가 눈을 갖고 있진 않습니다. 카메라가 있을 뿐입니다.” 은채는 그 말을 하고 잠깐 멈췄다. “그래서 화면을 조작할 수 있습니다.” 서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결국 눈으로 확인한 사람의 기억이 필요했다.
하지만 기억은 이미 장명수와 민규에게서 흔들리고 있었다.
수아는 자기 휴대전화 메모장에 이름을 썼다.
저장 버튼을 누르자 앱이 꺼졌다.
다시 열자 빈 메모가 있었다.
그는 종이를 빼앗듯 가져가 자기 이름을 크게 적었다.
“기계가 안 되면 종이. 종이도 안 되면 사람. 사람도 안 되면 몸.” 그 말은 구호처럼 들릴 수 있었지만, 수아는 말하면서 자기 손등을 보고 있었다.
손등은 아직 비어 있었다.
서진은 펜을 내밀었다.
수아는 바로 받지 않았다.
“내 몸에 쓰는 건 내가 정해요.” “네.” 서진은 펜을 내려놓았다.
그 짧은 동의가 두 사람 사이에 남았다.
투표 결과가 올라온 뒤 주민 댓글은 빠르게 바뀌었다.
처음에는 엘리베이터 고장 문의였고, 다음에는 배달기사 출입 문제였고, 곧 관리비 이야기가 됐다. 새벽 긴급 점검 비용은 누가 부담하느냐는 질문이 달렸다.
수아는 그 댓글들을 보고 휴대전화를 내렸다.
“저 없어지는 동안 관리비 정산하네요.” 장명수가 “주민들도 놀라서 그렇습니다”라고 했지만 목소리에 힘이 없었다.
서진은 댓글을 모두 옮겨 적지 않았다.
대신 주민 반응: 비용으로 이동이라고 적었다.
괴이는 사람을 직접 설득하지 않아도 됐다.
이미 준비된 비용 언어가 있었다.
은채는 통화 로그를 더 파고들었다.
“비상전화 발신 패킷에 0.8초 지연이 반복됩니다. 현장 소리를 받아 재송출하는 구조처럼 보입니다.” 도윤이 “따라 하는 거네”라고 했다. 은채는 “따라 한다는 표현은 의도 추정입니다. 재송출만 확인”이라고 바로 고쳤다.
서진은 그 차이를 중요하게 봤다.
의도가 없는 장치가 더 위험할 때가 있었다.
이름을 부르면 잡아간다는 말보다, 입력된 이름을 처리한다는 말이 지금 상황에 맞았다. 수아는 “그러면 제가 입력값이에요?”라고 물었다.
은채는 대답하지 못했다.
서진이 대신 말했다.
“아직 출력에서 빠지는 사람입니다. 입력으로 고정하지 않겠습니다.”
장명수는 사고 보고서 초안의 문장을 읽고 자기 말투처럼 고쳤다. “외부 출입자 미확인”을 “한수아 씨 탑승 주장”으로 바꾸려 했다.
저장 버튼을 누르자 문장은 원래대로 돌아갔다.
장명수는 화면을 보고 처음으로 욕을 삼켰다.
“주장이 아니라 여기 서 있는데.” 서진은 그 말을 듣고 수첩에 장명수 직접 목격 유지라고 적었다. 방관하던 사람이 목격자로 바뀌는 데에는 큰 결심보다 틀린 문장 하나가 먼저 필요했다.
민규는 자기 반 단체방에 ‘나 엘리베이터에 다섯 명이랑 있음’이라고 쓰려 했다. 전송 버튼을 누르자 문장이 ‘네 명이랑 있음’으로 바뀌었다.
아이는 휴대전화를 떨어뜨릴 뻔했다.
수아가 화면을 보고 말했다.
“너까지 고치네.” 도윤은 휴대전화를 끄라고 했지만 서진이 막았다. “변경 증거입니다.” 은채가 “화면 녹화 켜세요. 서버 저장 말고 로컬”이라고 했다.
민규는 손을 떨면서 녹화를 켰다.
투표 결과의 미탑승 문구는 화면에서 사라지지 않았다.
다른 알림이 와도 맨 위에 고정됐다.
수아가 알림을 왼쪽으로 밀어 지우려 했지만 버튼은 나타나지 않았다.
그는 휴대전화를 뒤집어 바닥에 놓았다.
“안 보면 덜 지워져요?” 서진은 “아니요”라고 했다. 수아는 “역시”라고 답하고 다시 화면을 들었다.
피하는 것보다 보는 쪽을 택했다.
그 선택 하나가 엘리베이터 안의 공기를 조금 바꿨다.
민규도 자기 녹화 화면을 도망치듯 끄지 않았다.
투표가 자동으로 마감됐다.
결과 화면이 네 사람의 휴대전화에 동시에 떴다.
탑승 확인 4명.
미탑승: 한수아.
수아의 휴대전화에는 배달 완료 알림 대신 계정 재로그인 안내가 떴다.
비상전화 표시등이 세 번 깜박였다.
스피커가 말했다.
“미탑승자는 탑승 인원에 포함하지 않습니다.” 서진은 수첩 세 번째 줄을 두꺼운 펜으로 다시 눌러 썼다.
종이가 찢어질 만큼 세게.
한수아는 그 손을 말리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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