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판관을 데려오겠습니다
혼인계약 심판관은 왕관을 거부한다 · 2026. 5. 7.
“심판관을 데려오겠습니다.”
로벤이 그렇게 보고하자 테오른은 명령서에서 ‘데려오라’는 동사를 그었다.
북부 대표 숙소의 작전실에는 출구가 둘이었다. 복도로 난 문 하나, 병참 마당으로 이어지는 문 하나. 창은 성인 어깨가 빠져나갈 만큼 넓었지만 쇠살이 박혀 있었으므로 세지 않았다. 테오른은 방에 들어온 뒤 언제나 그 수부터 확인했다. 오늘은 복도 문을 열어 둔 채였다.
“초대한다.”
로벤이 장화의 진흙을 두 번 털었다. 나쁜 소식이 더 있다는 뜻이었다. “궁정 회랑에서는 이미 납치라고 부릅니다. 수레는 하나고 따라붙은 구경꾼은 서른둘입니다. 목은 하나고 수레는 열둘이어야 덜 눈에 띌 텐데요.”
“수레도 쓰지 않는다.”
“그럼 심판관이 오지 않으면요?”
테오른의 펜이 멈췄다. 오지 않을 수 있다는 가능성을 작전에서 빼는 습관은 오래됐다. 북부 성벽이 무너질 때 적군에게 동의를 물을 수는 없었다. 그러나 에이라 벨렌은 적군도 병사도 아니었다. 그녀는 황실과 북부가 함께 내민 조약을 자기 자격으로 멈춘 사람이었다. 만나게 하기 위해 군사를 쓰는 순간, 북부 역시 강압의 증거가 된다.
“오지 않으면 끝이다.”
로벤이 입꼬리를 비틀었다. “대공 전하께서 거절을 작전안에 넣으셨다고 기록해 둘까요? 북부 평의회가 기념 주화를 찍을지 모릅니다.”
“네 처형 일정과 함께 올려라.”
“제 목은 하나라니까요.”
농담 뒤에 로벤은 국경 보고서를 밀었다. 남쪽 곡물 마차 여섯 대가 합병 조약의 사전 징발 명목으로 붙잡혔다. 조약이 정지됐는데도 현장의 명령은 멈추지 않았다. 테오른은 당장 기병을 보내고 싶었다. 하지만 봉쇄를 시작하면 황실은 그를 반역자로 부르고, 에이라의 이의는 북부와 짠 연극이 된다.
그는 호송 명령안의 나머지 문장도 지웠다. 호위 병력 열둘, 비밀 통로, 북부 숙소 내 대기. 모두 안전을 위한 배치였고, 모두 에이라의 출구를 테오른이 정하는 방식이었다.
“황실 기록회랑의 공개 면담석을 빌린다. 문은 두 곳 모두 연다. 호위는 회랑 밖에 둔다.”
“목적은?”
“상호 거부권 제안.”
“혼인 조약을 막기 위한 새 계약이라 쓰면 또 혼인으로 읽을 겁니다.”
“혼인이 아니라고 쓴다.”
로벤은 새 종이를 꺼냈다. 테오른은 받아 적히는 문장을 하나씩 잘랐다. 장소, 시각, 참석자. 원본 덧칠을 확인할 자료를 제공한다는 목적. 초대에 응하지 않아도 북부의 군사·재정 불이익이 없다는 조항. 도착 뒤 언제든 면담을 끝낼 권리. 질문을 미리 제출할 의무도 없었다.
“보호를 위해 열린 문을 유지한다.” 로벤이 읽었다.
“‘보호’를 지워라.”
“왜죠?”
테오른은 자신이 먼저 그 단어를 쓰려 했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했다. “보호하는 사람이 문을 닫을 권리까지 갖는 것처럼 보인다. 확인을 위해 연다고 써.”
작전실 밖에서 구두 소리가 멎었다. 섭정의 조카 세라핀 아르셀이 문턱에 서 있었다. 초대를 공적 접수부에 올리려면 왕실 측 확인인이 필요하다고 청했지만, 그녀가 직접 올 줄은 몰랐다.
세라핀은 열린 두 문을 번갈아 보고 미소 지었다. “아주 교육적인 작전실이네요. 악명 높은 북부 대공께서 문단속을 잊은 장면이라니.”
테오른은 의자 대신 출구와 가장 먼 자리를 가리켰다. “확인 서명이 필요합니다.”
“서명할 문안을 먼저 보지요. 관객에게 문을 보여 주는 것과 나갈 권리를 주는 것은 다르니까요.”
그녀는 초대장을 읽다가 마지막 서명란에서 종이를 거꾸로 돌렸다. 테오른의 필체를 뒤집힌 방향으로 천천히 따라 쓴 뒤, 원래 방향으로 되돌렸다.
“문안 책임자는 대공 전하 본인. 대필자는 로벤 오르단. 그런데 공적 접수 확인을 제 이름으로 요구하셨군요. 제가 무엇을 얻습니까?”
“사적 결탁이 아니라는 증거.”
“그건 두 분이 얻는 것이고요.”
세라핀의 정중한 문장 마지막 절에는 늘 가격이 숨어 있었다. 테오른은 그녀가 황실 편이라서 온 것이 아님을 알았다. 에이라의 이의가 살아남으면 섭정의 무서명 명령들도 심사 대상이 될 수 있었다. 세라핀에게도 위험이자 기회였다.
“접수 원본과 사본을 동시에 열람할 권한. 수정 이력도 공개합니다.”
“적절하군요. 한 가지 더. 심판관이 초대를 거절하면 그 사실을 누가 발표합니까?”
“아무도.”
“대공께서 침묵을 모욕으로 읽지 않는다는 증거는요?”
테오른은 답을 숫자로 바꾸려 했다. 병력도 시간도 아닌 문제였다. 그는 장갑을 벗어 탁자 위에 놓았다. 허락을 묻기 전에 몸에 밴 절차였다.
“없습니다. 그래서 기록을 남깁니다.”
세라핀의 미소가 아주 조금 사라졌다. 진심을 들었을 때만 생기는 짧은 공백이었다.
그녀는 초대장 사본에 왕실 확인 인장을 찍되, 원본과 같은 접수 번호를 달았다. 그 뒤 ‘보호’가 지워진 자리에 ‘선택 확인’이라고 적었다. 이로써 북부가 에이라를 몰래 부른다는 소문은 적어도 문서 하나와 충돌하게 됐다. 초대는 명령이 아니었고, 거절은 위반이 아니었다.
“제가 직접 접수부에 올리죠.” 세라핀이 말했다. “대신 오늘 면담은 유리 회랑에서 하십시오. 지나가는 서기 누구나 볼 수 있는 곳. 아주 품위 없는 투명성이 필요해 보이니까요.”
테오른은 고개를 끄덕였다. “동의합니다.”
“동의를 너무 빨리 하시는군요. 제안을 받는 분에게도 그 여유를 남기시길.”
같은 날 저녁, 황실 기록회랑의 등불은 평소보다 두 배 밝았다. 벽 대신 서가가 길을 나누고, 양쪽 문은 활짝 열려 있었다. 면담석 주변에는 빈 의자가 셋 놓였다. 에이라가 증인을 더 데려올 수 있도록 남겨 둔 자리였다.
테오른은 먼저 와서 출구 둘과 잠금쇠가 풀린 것을 확인했다. 로벤은 회랑 밖에서 북부 병사들을 물렸다. 세라핀은 공적 접수부 곁에 앉아 초대장 사본을 펼쳤다. 어느 누구도 사적인 만남이라 부르기 어려운 배치였다.
에이라는 약속 시각보다 일 분 늦게 왔다. 기다렸다는 빚을 만들지 않으려는 선택처럼 보였지만, 테오른은 추측을 입 밖에 내지 않았다. 그녀 곁에는 닐로가 있었고 손에는 검은 조약의 사본이 없었다.
“원본 자료를 제공한다고 적혀 있었습니다.” 에이라가 자리에 앉지 않은 채 말했다.
테오른은 북부가 비준 전 받은 초안을 탁자 위에 놓았다. “황실 원본과 여백이 다릅니다.”
“제가 받기 전에 조건부터 묻겠습니다. 이 자료를 열람하면 북부에 어떤 의무를 집니까?”
“없습니다.”
“없다는 문구는 어디 있죠?”
테오른은 초안의 빈 여백을 보았다. 또 빠뜨렸다. 선의로 보충할 수 없는 빈칸이었다. 그는 변명하지 않고 로벤에게 펜을 청했다.
“지금 추가하겠습니다. 열람과 복사는 제안 수락으로 간주하지 않는다.”
에이라가 비로소 의자 하나를 빼냈다. 앉지는 않았다. “제안의 이름은 상호 거부권이라고 했습니다. 누가 누구의 무엇을 막습니까?”
“당신은 내 공개 군사 결정을, 나는 당신의 공개 계약 판정을 정해진 시간 동안 보류시킬 수 있습니다.”
“보류 뒤에는요?”
“거부한 쪽이 대안을 냅니다.”
“실행할 수 있다는 기준은 누가 판단합니까?”
“상대가.”
에이라의 손가락이 문서 여백을 짚었다. “그러면 상대가 싫다는 이유로 모든 대안을 무효화할 수 있습니다.”
테오른은 국경의 붙잡힌 곡물 마차를 떠올렸다. 가장 빠른 답은 자신에게 최종 판단권을 두는 것이었다. 그 답을 버리자 시간이 들었다.
“인력, 비용, 시작 시각을 적습니다. 셋이 충족되면 실행 가능한 것으로 보고, 다투면 공개 심사에 넘깁니다.”
“기한은?”
“열두 시간.”
“계약 판정에는 너무 짧습니다. 하루.”
“군사 결정에는 너무 깁니다. 분야별로 나눕시다. 군사는 열두 시간, 계약은 하루.”
처음으로 에이라가 그를 오래 보았다. 호감인지 불신인지 테오른은 정하지 않았다. 그녀가 질문을 바꾼 것이 더 중요했다.
“사적 접근도 거부할 수 있습니까?”
“예.”
“오늘 같은 초대를 취소하면?”
“나는 이유를 요구하지 않습니다.”
“그 문구도 적으세요.”
테오른은 적었다. 장갑을 벗은 손으로, 자기 군사권이 막히는 문장과 자신의 초대가 취소될 수 있는 문장을 같은 크기로 썼다. 북부 대공의 세습 인장은 아직 찍지 않았다. 오늘은 제안이지 협약이 아니었다.
세라핀이 접수부에서 끼어들었다. “관객을 잊지 마시죠. 대공 전하가 심판관의 판정을 막으면 북부가 법 위에 선다고 읽힐 겁니다. 심판관이 군사 결정을 막으면 황실이 북부를 굶긴다고 읽힐 테고요.”
“그래서 거부와 대안을 함께 공개합니다.” 에이라가 답했다.
“좋습니다. 아주 교육적인 결탁이 되겠군요. 어느 쪽도 몰래 이길 수 없다는 점에서.”
에이라는 그제야 자리에 앉았다. 그러나 펜은 들지 않았다. “검토하겠습니다. 동의한 것은 아닙니다.”
“회신 기한은 없습니다.” 테오른이 말했다.
“북부 곡물 마차는 기다리지 못할 텐데요.”
그녀는 이미 자료 첫 장에서 징발 표식을 찾아냈다. 테오른은 긴급함을 숨기고 선택을 얻을 수도 있었다. 그러면 이 제안은 첫 문장부터 거짓이 된다.
“남쪽 관문에 여섯 대가 묶였습니다. 조약 정지와 별개로 징발 명령이 움직이고 있습니다. 나는 오늘 밤 병력을 보내고 싶습니다.”
에이라는 곧장 답하지 않았다. 북부의 위기를 빌미로 서명을 재촉한다고 읽었을 수 있었다. 테오른은 그 오독을 침묵으로 키우지 않았다.
“그래도 지금 서명하라는 뜻은 아닙니다. 이 정보는 먼저 공개하겠습니다.”
“왜죠?”
“당신이 거절하더라도 관문은 막혀 있으니까.”
짧은 대답 뒤에 에이라의 어깨에서 눈에 보이지 않을 만큼 작은 힘이 빠졌다. 안도라고 단정하지 않았다. 그녀는 초안을 닐로에게 넘겨 접수 시각을 기록하게 했다.
“사본을 가져가겠습니다. 내일 가문 회의 전에 수정안을 보내죠.”
“가문 회의?”
“아버지가 제 이의를 가문 배신으로 규정했습니다. 언니의 혼담과 제 상속 몫을 함께 논의하겠답니다.”
테오른의 첫 충동은 경비를 붙이는 것이었다. 그는 그 말을 삼키고 다른 질문을 골랐다.
“도움이 필요합니까?”
에이라는 열린 두 문을 차례로 보았다. “필요하면 범위부터 적어 보내겠습니다.”
거절도 수락도 아니었다. 그러나 그녀는 초안을 들고 회랑을 나갔다. 세라핀이 접수부에 그 사실을 적었다. 에이라 벨렌, 상호 거부권 제안 사본 수령. 동의 유보. 불이익 없음.
테오른은 자신의 서명 아래 남은 빈칸을 보았다. 명령을 지운 자리에 처음으로 상대의 회신이 들어올 공간이 생겨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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