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화

평가서 초안은 한 장이었고, 도윤의 이름만 있었다

포기한 선택을 다시 여는 장학생 · 2026. 9.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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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가서 초안은 한 장이었고, 도윤의 이름만 있었다.

태호의 책상에는 그 초안 말고도 서류가 두 뭉치 있었다. 하나는 지하 구조 보고서, 하나는 백지훈의 자퇴 처리 취소 신청서였다. 취소 신청서에는 이미 도장이 찍혀 있었다.

그 도장을 도윤은 먼저 확인했다. 사람이 남는 건 확정됐다. 그게 오늘 제일 중요한 부분이었다.

구조 성공 일 건. 사용 시간 십칠 초. 손실 없음. 능력 통제 등급 상.

“이의 있습니까.” 태호가 초안을 밀지 않고 놓았다.

도윤은 그 종이를 읽었다. 능력 통제 등급 상. 그 한 줄이면 장학 회복 심사에서 동결이 풀린다. 백이십칠만 원이 돌아온다.

“이 평가는 뭘 측정한 겁니까.” 도윤이 종이를 들지 않고 물었다.

“학생의 능력 사용 결과입니다.” 태호가 항목 번호를 짚었다.

“열일곱 초는 제가 정한 게 아닙니다.”

태호의 펜이 멈췄다. “누가 정했습니까.”

“백지훈 학생입니다. 본인이 계산했습니다.”

“그건 대상자 진술 항목입니다. 평가 항목이 아닙니다.”

“그러면 항목이 잘못됐습니다.”

“학생은 지금 서식을 문제 삼고 있습니다.”

“예.”

“서식을 문제 삼는 학생은 대개 점수가 낮게 나온 학생입니다.” 태호가 초안을 손끝으로 돌렸다. “학생은 지금 최고 등급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지금 말하는 게 맞습니다. 낮게 받고 말하면 아무도 안 듣습니다.”

태호는 초시계를 책상에 놓았다. 이 사람이 시간을 재기 시작한다는 뜻이었다.

“설명하십시오.”

도윤은 준비해 온 게 없었다. 준비해 온 건 미래와 서린이 갖고 있었다.

어젯밤에 셋이 생활관 복도에서 이 얘기를 했다. 도윤은 그때 평가서를 그냥 받자고 했다. 동결이 풀리면 다음 학기가 생긴다고. 미래가 반대했고, 서린은 반대도 찬성도 안 했다.

서린은 이렇게 말했다. 네가 받으면 나는 이의를 안 낼 거야. 대신 다음에 네가 뭘 받든 나는 검증 안 해 줄 거야.

그 말이 밤새 남았다.

문이 열리고 둘이 들어왔다. 미래의 손에 표가 있었다.

“기여 분할표입니다.” 미래가 표를 책상에 놓았다.

표는 다섯 줄이었다.

비용 고지 및 부분 동의 절차 설계, 박미래. 의사 확인, 이가람. 종료 시각 관리, 유서린. 재개방 실행, 한도윤. 허가 및 현장 접근, 마은하.

마지막 줄에 교수 이름이 있는 게 도윤은 마음에 걸렸다. 미래는 넣어야 한다고 했다. 허가 없이 지하에 들어간 걸로 기록되면 조 전체가 무단 진입이 된다고.

“이건 학생들이 만든 표입니다.” 태호가 표를 자기 쪽으로 돌렸다. “평가 권한은 학생에게 없습니다.”

“평가하지 않았습니다.” 미래가 표를 짚었다. “관찰 사실만 적었습니다. 각 항목에 시각과 서명이 있습니다.”

“한도윤 학생 항목이 하나뿐입니다.”

“하나였습니다.” 미래는 그 칸을 지우지 않았다.

태호가 그 표를 한참 봤다. 도윤은 그 침묵의 방향을 알 수 없었다.

표에는 여섯 번째 줄이 지워진 자리가 있었다. 도윤은 그 자리를 알아봤다. 어제 미래가 백지훈의 이름을 넣었다가 지웠다. 대상자를 기여자로 적으면 나중에 그 사람이 자기 구조에 책임이 있다고 몰릴 수 있다고 했다.

“유서린 학생.” 태호가 물었다. “학생 항목은 종료 시각 관리입니다. 이건 왜 필요했습니까.”

“한도윤이 종료 신호에 늦는 습관이 있습니다.” 서린은 도윤을 보지 않고 말했다. “첫 재현 검사에서 일 초 초과했습니다. 기록에 있습니다.”

“그래서 초시계를 본인이 안 봤습니까.”

“못 보게 했습니다. 보면 본인이 판단합니다.”

태호는 그 문장을 여백이 아니라 본문 칸에 적었다.

“이가람 학생 항목이 의사 확인입니다.” 태호가 계속했다. “이건 측정 가능한 행위입니까.”

도윤이 대답했다.

“측정 가능합니다.” 도윤이 말했다. “지난주 추가 실습 기록을 보십시오. 그리고 어제 지하 기록도요.”

태호가 두 기록을 나란히 놓았다. 하나는 최하점이었고, 하나는 구조 성공이었다.

“그 실습은 최하점입니다.”

“그 최하점이 근거입니다.” 도윤은 그 문장을 천천히 말했다. 말하는 동안 자기 목소리가 빨라지지 않게 신경 썼다. “이가람 학생이 그때 저를 멈췄습니다. 목표물을 놓쳤고 점수를 잃었습니다. 그 뒤에 밟으려던 바닥이 절단돼 있다는 게 확인됐습니다.”

“결과론입니다.”

“예. 그래서 결과가 아닌 부분을 말하겠습니다.” 도윤은 지난주 지하를 떠올렸다. “어제 지하에서 이가람 학생이 백지훈 학생의 두 소리가 안 맞는다고 했습니다. 그 말 때문에 저는 대상자 동의를 다시 받았습니다. 안 받았으면 저는 그냥 열었을 겁니다.”

“열었으면 어땠습니까.”

“동의 없는 사용이 됐을 겁니다. 위반 두 건째입니다.”

“백지훈 학생은 살아 나왔습니다.”

“살아 나왔습니다.” 도윤은 그 문장을 인정했다. “첫날에도 사람이 살아 나왔습니다. 그리고 그 사람은 자기 퇴로를 잊었습니다.”

태호는 그 이름을 말하지 않았다. 도윤도 말하지 않았다. 둘 다 강준의 기권 사유 칸이 비어 있던 걸 봤다.

태호는 그 대답을 적지 않았다. 대신 물었다.

“학생, 지금 자기 등급을 내리고 있습니다. 압니까.”

“압니다.”

“장학 동결이 유지됩니다.”

“압니다.”

“그러면 왜 합니까.”

도윤은 그 질문에 대답할 문장을 세 개 만들었다. 세 개 중 두 개는 좋게 들리는 문장이었다.

세 번째를 썼다.

“지난주에 원장님이 저한테 트랙을 제안했습니다. 뒷면에 조원이 저를 멈추는 게 실험 방해라고 적혀 있었습니다. 저는 거절했습니다.”

태호의 손이 멈췄다.

“그런데 이 평가서도 같은 구조입니다.” 도윤이 말했다. “여기 제 이름만 있으면, 다음에 저는 저를 멈춰 준 사람 이름을 안 적을 겁니다. 두 번째부터는 쉬워집니다.”

태호는 초시계를 껐다.

“학생 이름은요.” 미래가 물었다. “한도윤 학생 항목도 남습니다. 재개방 실행이요.”

“남습니다.”

“그럼 그 항목만 등급 매기시면 됩니다.”

태호는 평가서를 뒤집었다. 뒷면이 백지였다.

“기존 서식에는 공동 항목이 없습니다.”

“만들 수 있으십니까.” 서린이 물러서지 않았다.

“만들 수 있습니다. 만들면 제 재량 판단이 되고, 재량 판단은 학기말 공개 검증 대상입니다.” 태호가 펜을 들었다. “틀리면 제 평가 신뢰도가 떨어집니다.”

“그럼 안 만드십니까.” 미래가 물었다.

“만듭니다.” 태호가 말했다. “다만 조건이 있습니다.”

“말씀하십시오.”

“이 항목은 학기말에 공개 검증합니다. 검증에서 이 항목이 성적 회피 수단으로 쓰였다고 판정되면 소급 삭제됩니다.” 태호가 넷을 봤다. “그때 학생들의 다른 점수도 재산정됩니다. 지금보다 낮아질 수 있습니다.”

미래가 즉시 물었다. “재산정 범위가 어디까지입니까.”

“이번 학기 실습 전체입니다.”

“그럼 저희 넷 다 서명해야 합니다.” 미래가 서린과 가람을 봤다. “한 사람이 정하는 조건이 아니에요.”

서린이 먼저 서명했다. 가람이 손바닥을 책상에 붙이고 나서 서명했다.

태호는 대답 대신 쓰기 시작했다.

“임시 항목입니다. 명칭은 뭐라고 합니까.”

넷이 서로를 봤다. 미래가 먼저 뭐라고 말하려다 멈췄고, 서린도 멈췄다.

도윤이 말했다.

“남겨 둔 선택.”

“그게 무슨 뜻입니까.”

“열 수 있었는데 안 연 것들이요.” 도윤이 말했다. “저는 삼십삼 초까지 쓸 수 있었고 열일곱 초에서 멈췄습니다. 이가람 학생은 확실하지 않은데도 멈추라고 했습니다. 유서린 학생은 초시계를 저한테 안 줬습니다.”

태호가 그 명칭을 적었다.

“임시 항목, 남겨 둔 선택. 점수 반영은 이번 학기 말에 검증 후 결정합니다.”

“지금은 점수가 없습니까.” 미래가 확인했다.

“없습니다. 표시만 됩니다.” 태호가 화면을 돌려 보여 줬다.

평가 시스템에 그 항목이 들어간 건 오후였다.

7조 네 명의 기록에 새 줄이 하나 생겼다. 남겨 둔 선택. 값 칸은 비어 있었고, 대신 회색 표시가 있었다.

회색 표시는 시스템이 처리 방법을 모르는 항목에 붙는다. 미래가 그걸 확인했다. 학사 시스템에서 회색은 임시라는 뜻이 아니라 미분류라는 뜻이었다.

“미분류면 나중에 누가 분류해요?” 가람이 물었다.

“분류하는 사람이 정해지면 그 사람 판단이 돼요.” 미래가 말했다. “그래서 학기말까지 우리가 근거를 쌓아야 해요.”

“근거를 어떻게 쌓아.”

“멈춘 걸 계속 적어요. 멈춰서 잃은 것도 같이요.” 미래는 이미 새 장을 만들고 있었다. “잃은 걸 안 적으면 자기 자랑이 돼요.”

가람이 그 화면을 오래 봤다.

“내 이름도 있어.”

“당연하지.” 도윤이 화면을 가리켰다.

“나 그때 점수 깎았어.” 가람의 목소리가 낮았다.

“깎은 게 항목이 된 거야.”

가람은 화면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그리고 손바닥을 책상에 붙였다.

“나 이거 캡처해도 돼?”

“왜?”

“다음에 내가 또 멈춰야 할 때, 이거 보려고.” 가람이 단말을 들었다.

도윤은 그 말이 자기가 지난주에 서린에게 한 요청과 같은 종류라는 걸 알았다.

상위 분기조 게시판에 글이 하나 올라온 건 그 직후였다.

제목은 짧았다. 최하위반 새 항목 관련 문의.

본문은 두 줄이었다. 점수 없는 항목이 왜 기록에 표시되는지 궁금합니다. 표시가 나중에 점수가 되면 우리 순위는 어떻게 됩니까.

미래가 그 글을 캡처했다. “이거 시작이에요.”

장학 회복 심사 결과는 저녁에 나왔다. 동결 유지. 사유 칸에 두 줄이 있었다.

개인 능력 등급 미기재. 공동 항목은 학기말 검증 대상.

도윤은 그 통지를 접어서 주머니에 넣었다. 두 번 눌러 접었다.

접고 나서 왼손을 봤다. 어제 뜨거웠던 선은 밤에 식었다. 다만 식는 데 여섯 시간이 걸렸고, 그건 첫날의 몇 초와 달랐다.

그는 그 시간을 종이에 적었다. 조 공동 장부가 아니라 자기 노트였다.

적고 나서 한참 봤다. 여섯 시간. 첫날 몇 초, 재현실 십여 분, 어제 여섯 시간.

세 개가 늘어나는 방향이었다. 도윤은 그 방향에 이름을 붙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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