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학생의 조건
포기한 선택을 다시 여는 장학생 · 2026. 6.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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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은하 교수는 장치를 책상에 올려놓고 아무 설명도 하지 않았다.
최하위 분기반의 첫 수업이었다. 교실에는 열두 개 책상과 열세 번째 책상이 있었고, 마은하는 열세 번째 책상 옆을 지나면서 그 위를 보지 않았다. 보지 않는 방식이 자연스럽지 않았다.
금속 상자였다. 한 면에 회전 손잡이가 있고, 반대 면에 계기판이 있었다. 계기판 바늘은 왼쪽 끝에 붙어 있었다.
“고치세요. 이 시간 안에.” 그녀가 초시계를 켰다. 사십 분.
“어디가 고장인지—”
“그것도 고치는 일에 포함입니다.” 마은하는 문 쪽으로 갔다. “아, 하나만. 이 장치는 새로 만든 겁니다. 아무도 이걸로 뭘 하려다 포기한 적이 없습니다.”
문이 닫혔다.
미래가 먼저 물었다. “점수 배분은 어떻게 됩니까?”
“복구율과 진단 절차에 각각 줍니다. 절차 점수가 더 큽니다.”
“그게 왜 더 큽니까.” 서린이 물었다.
“고친 것은 다음에 또 고칠 수 있다는 증거가 아닙니다. 어떻게 찾았는지가 증거입니다.”
도윤은 상자 앞에 앉아서 그 문장의 뜻을 이해했다.
포기한 선택이 없으면 열 게 없다. 그의 능력은 없는 걸 만들지 못한다. 누군가 이 손잡이를 돌리려다 그만뒀다면, 그 그만둠을 삼십삼 초 열 수 있다. 새 장치에는 그 자리가 비어 있었다.
도윤은 왼손을 상자 위에 올려 봤다. 습관이었다. 아무 감각도 없었다. 문고리가 없는 문에 손을 대는 것과 같았다.
“없어.”
“뭐가 없어요?” 미래가 물었다.
“열 게 없어. 이건 내가 아무 도움도 안 돼.”
말하고 나서 도윤은 자기 목소리가 이상하다는 걸 알았다. 도움이 안 된다는 말인데, 억울한 소리로 들렸다. 억울함에는 전제가 있었다. 자기가 도움이 되는 자리에 늘 있어야 한다는 전제.
마은하가 이 장치를 왜 골랐는지 도윤은 그때 알았다. 능력 금지 조건보다 정확한 시험이었다. 금지는 안 쓰는 것이고, 이건 쓸 게 없는 것이다.
미래는 그 말에 반응하지 않았다. 이미 메모지를 펴고 있었다.
“그럼 고장 원인 후보를 나눠요. 세 갈래로 갈게요.”
“왜 세 개예요?” 가람이 물었다.
“동력, 전달, 표시. 계기판이 안 움직이는 건 이 셋 중 하나예요.” 미래가 선을 그었다. “동력이면 손잡이 쪽. 전달이면 안쪽 기어. 표시면 계기판 자체. 셋 다 비용이 달라요.”
“비용이라니.”
“분해 비용이요. 계기판을 먼저 열면 나사 네 개. 기어를 먼저 열면 케이스 전체. 손잡이는 여섯 개.” 미래는 숫자를 적었다. “시간이 사십 분이니까, 잘못 고른 쪽을 두 번 열면 못 끝내요.”
서린이 손잡이를 잡고 한 번 돌렸다. 저항 없이 돌아갔다.
“헛돌아.”
“그럼 전달이에요.” 미래가 표에 표시했다. “동력은 들어가는데 전달이 안 돼요. 케이스 열어요.”
“기다려.” 가람이 상자 옆면에 귀를 붙였다. “서린아, 한 번 더 돌려 봐. 천천히.”
서린이 천천히 돌렸다.
가람은 이십 초 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도윤은 그 이십 초를 견디는 게 어려웠다. 그동안 자기가 할 수 있는 게 없었고, 할 게 없을 때 그는 뭐라도 말하려고 한다.
“가람아, 뭐 들려? 아니면 안—”
“잠깐.”
가람이 손바닥을 들었다. 손바닥이 아니라 손가락 두 개였고, 거부 신호는 아니었지만 도윤의 문장은 끊겼다.
“…미안.”
가람이 다시 이십 초를 썼다. 그리고 말했다.
“두 개 소리가 나. 하나는 기어 소리 맞아. 다른 하나는 합주 소리 같아.”
“합주요?” 미래가 되물었다.
“음이 두 개 겹쳐서 하나로 들리는 거. 근데 지금은 두 개가 억지로 하나로 맞춰져 있어.” 가람은 단어를 찾느라 잠깐 멈췄다. “틀린 합의음 같아. 서로 안 맞는데 맞는 것처럼 소리 나.”
“그게 고장이랑 무슨 상관인데.” 서린이 물었다.
“기어 두 개가 서로 반대로 밀고 있는 것 같아. 그래서 헛도는 거야. 하나가 부러진 게 아니고.”
미래의 펜이 멈췄다.
“가람 학생. 그 말이 맞으면 케이스 안 열어도 돼요. 기어가 부러진 게 아니라 조립 방향이 반대면, 조정 나사만 돌리면 돼요.”
“나 틀릴 수 있어.”
“알아요. 그래서 확인 순서를 바꿀게요.” 미래가 표를 다시 썼다. “조정 나사 두 개 먼저. 나사 두 개면 삼 분이에요. 틀리면 그때 케이스 열어요. 남는 시간 이십칠 분.”
“유서린 학생이 돌려요. 손 힘이 제일 일정해요.”
“근거 있어?”
“아까 손잡이 세 번 돌릴 때 속도 편차가 제일 작았어요.” 미래는 이미 적어 뒀던 숫자를 보여 줬다.
서린이 나사를 돌렸다. 반 바퀴. 한 바퀴.
계기판 바늘이 움직였다. 왼쪽 끝에서 중간까지.
거기서 멈췄다.
“절반이네.” 서린이 말했다.
미래가 시계를 봤다. 십팔 분 남아 있었다.
“절반이 최선일 수도 있어요. 나머지 절반은 다른 원인이에요.”
“열어 보자.” 도윤이 말했다.
말투가 빨랐다. 결론을 먼저 던지는 자기 습관이 나왔다는 걸 스스로 알았다.
세 사람이 그를 봤다. 도윤은 자기가 무슨 말을 한 건지 뒤늦게 정리했다. 케이스를 열자는 뜻이었지만, 그 문장을 말할 때 그의 손은 왼쪽 장갑에 있었다.
“어느 쪽 열자는 거예요?” 미래가 물었다.
도윤은 정직하게 대답했다.
“…둘 다 생각했어.”
장치에 포기한 선택이 없다면, 만들 수도 있었다. 누군가에게 이 손잡이를 돌리게 하고, 그만두게 하면 된다. 그만두는 순간이 생기면 열 자리도 생긴다. 도윤은 그 방법을 세 번째 이십 초에 이미 떠올렸다.
미래가 조용해졌다. 계산하는 침묵이 아니라 판단하는 침묵이었다.
“그거 조항 위반이에요. 고지 없이 유도하는 것도 사용이에요.”
“안 했어.”
“했으면 제가 멈췄을 거예요.” 미래는 펜을 놓지 않았다. “말한 건 안 멈춰요. 말한 건 좋아요.”
“좋다고 말하면서 왜 조항을 다시 읽어?”
“좋은 건 좋은 거고, 기록은 기록이에요.” 미래가 조항 두 번째 줄에 동그라미를 쳤다. “학생이 방금 말한 방법, 이거 조항에 없어요. 남을 유도해서 포기를 만드는 건 안 적혀 있어요. 추가할게요.”
“내가 말했다고 조항이 늘어나는 거야?”
“학생이 말해 줘서 늘어나는 거예요. 말 안 했으면 우리가 몰랐어요.”
도윤은 그 계산을 이해했다. 정직하게 말한 대가로 감시가 하나 늘었다. 그런데도 손해라는 느낌이 오지 않았다. 손해였다면 다음에 말하지 않을 것이고, 다음에 말하지 않으면 그때는 진짜로 할 것이다.
가람이 그때 손바닥을 책상에 붙였다.
“나 지금 엇박 없었어. 도윤이 말한 거 진짜야.”
“그게 위로예요?” 서린이 물었다.
“위로 아니야. 기록이야.”
열여덟 분 중 십일 분을 셋이 썼다. 미래가 계기판 뒷면의 접점을 확인하고, 서린이 기어의 두 번째 조정점을 찾고, 가람이 소리로 방향을 확인했다.
세 사람의 순서는 도윤의 순서가 아니었다. 도윤이라면 셋을 동시에 시켰을 것이다. 미래는 하나씩 시켰다. 하나씩 하면 어느 단계에서 틀렸는지 알 수 있다고 했다.
느렸다. 그리고 두 번째 조정점을 찾을 때 그 느림이 값을 했다. 서린이 첫 번째 후보에서 틀렸고, 틀린 자리를 정확히 알았기 때문에 두 번째 후보로 바로 갔다.
도윤은 나사를 잡아 주고, 부품을 순서대로 늘어놓고, 미래가 부르는 숫자를 받아 적었다.
그게 그가 한 일이었다. 적는 동안 그는 세 번 먼저 말하려다 참았다. 참는 건 아무 점수도 아니었다.
마지막 삼 분에서 바늘이 한 칸 더 올라갔다. 절반과 절반의 조금 사이.
마은하가 들어왔다. 계기판을 보고, 늘어놓은 부품을 보고, 미래의 표를 봤다.
“원인 세 갈래로 나눈 사람.”
“박미래입니다.”
“방향이 반대라고 말한 사람.”
“이가람이요.” 가람이 대답했다. 자기 이름을 자기가 말했다.
“점수는 진단 절차에 줍니다. 복구율은 오십오 퍼센트, 감점입니다.” 마은하가 표를 접었다. “한도윤 학생.”
“예.”
“이 장치는 학생 능력으로 열 수 없습니다. 알고 있었습니까?”
“오 분 만에 알았습니다.”
“그 뒤 삼십오 분은 뭘 했습니까?”
도윤은 대답을 골랐다. 좋게 들리는 대답이 두 개 있었고, 정확한 대답이 하나 있었다.
“기다렸습니다. 기다리는 게 오래 걸렸습니다.”
마은하가 처음으로 표정을 바꿨다. 웃은 게 아니라 뭔가를 적어야 하는 사람의 얼굴이었다.
“그것도 적겠습니다.”
교수가 나가고, 넷은 장치를 원래 자리에 돌려놓으려 했다. 그때 바늘이 움직였다.
아무도 손잡이를 잡지 않았는데 바늘이 오른쪽으로 조금 갔다.
“누가 만졌어?” 서린이 물었다.
아무도 아니었다.
바늘이 향한 방향을 미래가 확인했다. 계기판에는 방위 표시가 없었지만, 상자를 돌리면 바늘도 같이 돌았다. 방향을 가리키고 있었다.
가람이 그 방향을 따라 몸을 돌렸다. 교실 문, 복도, 그리고 3층 뒤편.
“열세 번째 자리 쪽이야.”
도윤이 상자에 가까이 갔다. 바늘이 한 칸 더 움직였다.
그가 뒤로 물러났다. 바늘이 돌아왔다.
미래가 그 두 동작을 세 번 반복하게 했다. 세 번 다 같았다.
“학생 봉인에 반응해요.” 미래가 적었다. “장갑 쪽이에요.”
“봉인이 아니라 손일 수도 있어.” 서린이 말했다.
“구분할 방법 있어요.” 미래가 도윤을 봤다. “오른손 대 보세요.”
도윤이 오른손을 상자에 댔다. 바늘은 움직이지 않았다.
왼손을 댔다. 움직였다.
“왼손이에요.” 미래가 두 줄로 적었다. “봉인인지 능력인지는 아직 구분 안 돼요. 잠금쇠를 풀어 보면 알겠지만, 그건 허가가 필요해요.”
“허가 신청할까.” 도윤이 물었다.
“신청하면 이 장치 얘기를 써야 해요.” 미래가 펜을 멈췄다. “그러면 이게 열세 번째 자리를 가리킨다는 것도 같이 적어야 하고요.”
넷은 그 자리에서 아무 결정도 하지 않았다. 가람이 상자 옆면에 마지막으로 귀를 붙였다.
“지금은 합주 소리 안 나. 하나만 나.”
“고쳐진 쪽이야?”
“모르겠어. 다른 데서 하나가 더 와야 합주가 되는 것 같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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