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세 번째 종
포기한 선택을 다시 여는 장학생 · 2026. 5. 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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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은은 편지지 다섯 칸 중 네 칸을 오전에 다 채웠다.
요양원의 편지 서식은 칸이 나뉘어 있었다. 이번 주 복용, 이번 주 몸 상태, 이번 주 날씨, 이번 주 있었던 일, 다음 달에 하고 싶은 일.
복용 칸은 쉬웠다. 아침 두 알, 저녁 한 알, 수요일에 한 번 빠뜨렸고 간호사에게 말했다. 채은은 빠뜨린 것까지 적었다. 도윤이 편지에서 무엇을 찾는지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애는 늘 빈칸을 찾는다.
몸 상태 칸에는 왼쪽 무릎이 비 오는 날 아프다고 적었다. 날씨 칸에는 화요일부터 비, 목요일에 그쳤다고 적었다. 있었던 일 칸에는 옆 방 할머니가 화분을 하나 줬고 그 화분 이름이 뭔지 몰라서 그냥 초록이라고 부르기로 했다고 적었다.
네 칸을 채우는 데 사십 분이 걸렸다.
다섯 번째 칸 앞에서 채은은 펜을 놓았다.
다음 달에 하고 싶은 일.
문장을 만들 수는 있었다. 산책을 하고 싶다. 책을 읽고 싶다. 그런 문장은 손이 알아서 쓴다. 문제는 쓰기 전에 확인하는 절차였다. 채은은 문장을 쓰기 전에 자기 안을 한 번 들여다보는 습관이 있었다. 진짜로 그걸 원하는지 확인하는 습관.
들여다보면 아무것도 없었다.
없다는 건 슬픔이 아니었다. 슬픔이면 슬픔이 있는 것이다. 그냥 그 자리가 비어 있고, 비어 있다는 사실만 정확히 알 수 있었다. 채은은 그 정확함을 좋아하지 않았다.
삼 년 전에는 그 칸이 제일 먼저 채워지는 칸이었다.
삼 년 전의 채은은 편지지 다섯 칸이 좁다고 불평했다. 하고 싶은 일이 다섯 개가 넘어서 뒷면까지 썼다. 그때 뒷면에 쓴 목록에는 도윤에게 빌려준 돈을 언제 받을지도 적혀 있었다.
그 목록은 지금 서랍에 있다. 채은은 그걸 일 년에 한 번 정도 꺼내 본다. 꺼내 보면 확인되는 게 있다. 글씨는 자기 글씨고, 항목도 자기가 쓴 것이고, 그때 그걸 원했다는 사실도 안다. 아는데 지금은 원하지 않는다.
의사는 그걸 의욕 저하라고 불렀다. 채은은 그 말이 틀렸다고 생각한다. 저하는 낮아지는 것이다. 낮아진 게 아니라 그 자리에 아무것도 없다.
삼 년 전 그날의 기억에는 구멍이 하나 있다. 검사실에 앉았고, 서류에 서명했고, 그다음이 있고, 그다음의 앞부분이 없다. 병원 기록에는 검사 소요 시간이 적혀 있었다. 채은은 그 숫자를 외우고 있다. 삼십삼 초.
짧다. 삼십삼 초는 물을 한 컵 마시는 시간이다. 그 시간 동안 무슨 일이 있었는지 채은은 모르고, 모른다는 것만 정확히 안다. 그 정확함도 좋아하지 않는다.
채은은 펜을 다시 들었다. 다섯 번째 칸에 쓸 수 있는 것 중에 거짓말이 아닌 걸 찾아봤다. 하나 있었다.
없음.
두 글자를 쓰고, 그 위에 줄을 그었다. 없음이라고 쓰면 도윤이 그 두 글자를 삼십 분쯤 볼 것이다. 채은은 그 애가 뭘 보는지 안다.
그래서 칸을 비워 뒀다. 비워 두면 서식 문제로 보인다.
요양원에는 채은 같은 사람이 여섯 명 있었다.
여섯 명의 공통점은 진단명이 아니었다. 나이도, 사는 곳도 아니었다. 여섯 명 다 삼 년 전 이맘때 도시의 어떤 검사에 참여했다. 그 얘기를 처음 꺼낸 건 옆 방 할머니였다.
“나도 그해에 갔어. 시청에서 하는 거라고 해서.” 할머니가 말했다.
할머니는 지금 자기 아들 이름은 기억하지만 아들을 만나고 싶은지는 모른다고 했다. 그 말을 하면서 화분에 물을 줬다. 물 주는 일은 매일 한다고 했다. 하고 싶어서 하는 게 아니고 시간이 되면 한다고 했다.
채은은 그 여섯 명의 이름을 종이에 적어 본 적이 있다. 적고 나서 찢었다. 적어 두면 다음 절차를 생각해야 하고, 다음 절차를 생각하는 힘이 있는 사람은 이 방에 없었다.
도윤의 편지는 사흘 뒤에 도착했다. 봉투가 얇았다.
채은은 봉투를 열기 전에 두께를 봤다. 지난달 편지는 두꺼웠다. 두꺼운 편지에는 늘 계획이 들어 있었다. 다음 학기에 이걸 하겠다, 그래서 누나가 이렇게 될 거다, 하는 계획.
얇은 편지를 열었다. 종이 한 장이었고, 위쪽에 지운 자리가 있었다.
지운 자리는 완전히 지워지지 않았다. 도윤은 볼펜을 쓰고, 볼펜은 지워지지 않는다. 그 애는 줄을 세 번 그어 놓았다.
채은은 종이를 창 쪽으로 기울였다.
반드시 되돌려 놓겠다.
세 번 그은 줄 아래에 그 문장이 있었다. 그리고 그 아래 새로 쓴 문장이 있었다.
누나. 이번 주에 하기 싫었던 일 하나만 알려 줘.
그게 전부였다. 아래에 학원 이야기가 두 줄 있었다. 반이 정해졌고, 조원이 셋 생겼고, 그중 하나는 자기를 막는 조항을 네 개 썼다고 적혀 있었다. 장학금 이야기는 없었다.
채은은 그 두 줄을 다시 읽었다. 장학금 이야기가 없다는 건, 장학금에 문제가 생겼다는 뜻이었다. 도윤은 나쁜 소식을 안 쓰는 게 아니라, 해결한 다음에 쓴다.
조항을 네 개 썼다는 조원 얘기는 두 번 읽었다. 채은은 그 애가 누구인지 궁금했다. 궁금하다는 감각이 오래 안 쓴 근육처럼 낯설었다.
그리고 지운 자리를 한 번 더 봤다. 반드시 되돌려 놓겠다. 그 문장이 지워졌다는 게, 채은에게는 이번 편지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이었다. 그 문장이 있는 동안 채은은 자기가 도윤의 숙제라고 느꼈다.
하기 싫었던 일.
채은은 그 질문 앞에서 펜을 들었다. 이번에는 들여다볼 필요가 없었다. 하기 싫은 건 있었다. 있는 것과 없는 것 중에, 있는 쪽이 남아 있었다.
월요일 오전에 상담사가 와서 검사를 했다. 종이에 그림을 그리고, 단어를 잇고, 마지막에 이런 질문이 있었다. 앞으로 삼 개월간의 목표를 세 개 쓰십시오.
채은은 그 종이를 쓰지 않았다. 상담사는 괜찮다고 했다. 다음에 하자고 했다. 그리고 종이를 가져갔다.
가져간 게 하기 싫었다.
채은은 편지지를 새로 꺼냈다. 서식 칸을 무시하고 뒷면에 썼다.
하기 싫었던 일. 월요일 검사지를 상담사가 가져간 것. 내가 못 쓴 종이를 다른 사람이 들고 나가는 것.
한 줄 더 쓸 수 있었다. 채은은 썼다.
그 종이에 내가 못 쓴 칸이 있다는 걸, 내가 아닌 사람이 먼저 읽는 것.
쓰고 나서 손등이 조금 뜨거웠다. 삼 년 만에 처음으로, 없음이 아니라 싫음이 두 줄 나왔다.
거기까지 쓰고 손이 멈췄다. 다음 문장을 쓸지 말지 결정해야 했다. 결정은 오래 걸리지 않았다. 요양원에서 삼 년 동안 채은이 배운 건 하나였다. 나중에 말하면 늦다.
그리고 하나 더.
학원에 내 기록 제출하지 마.
채은은 그 줄을 다시 읽었다. 이유를 쓸 수도 있었다. 이유를 쓰면 도윤이 이유를 반박할 것이다. 그 애는 반박을 잘한다. 결론을 먼저 던지고 근거를 세 개 붙이는 방식으로, 늘 자기가 맞는 쪽으로 이야기를 옮긴다.
그래서 이유를 쓰지 않았다. 이유 없는 금지는 협상이 안 된다. 채은이 도윤에게서 배운 것 중에 하나였다.
그 애는 늘 조건을 붙여서 이겼다. 지금 채은은 조건을 붙이지 않는 쪽을 골랐다.
봉하기 전에 채은은 두 줄을 소리 내어 읽어 봤다. 목소리로 들으면 다른 사람의 문장처럼 들리는지 확인하려고. 자기 목소리였다.
편지를 봉하기 전에 채은은 다섯 번째 칸을 다시 봤다. 여전히 비어 있었다.
다음 달에 하고 싶은 일. 채은은 그 칸에 손을 대지 않았다. 대신 뒷면의 두 줄을 손가락으로 한 번 짚었다. 하기 싫은 것 하나와 하지 말라는 것 하나. 둘 다 자기가 정한 것이었다.
간호사가 편지를 수거하러 왔다.
“다 쓰셨어요?”
“네.” 채은이 봉투를 밀어 놓았다.
“오늘은 좀 빨리 쓰셨네요.” 간호사가 봉투를 챙겼다. “저번엔 이틀 걸리셨는데.”
“이번엔 쓸 게 있어서요.”
“무슨 좋은 일 있으셨어요?”
“좋은 일은 아니고요.” 채은은 창틀의 화분을 봤다. “싫은 일이 하나 있었어요.”
간호사는 그 대답을 어떻게 받아야 할지 모르는 얼굴로 웃었다. 채은은 그 웃음을 이해했다. 이 방에서 싫은 일이 있다고 말하는 사람은 드물다.
간호사가 나가고 나서 채은은 창가에 앉았다. 초록이라고 부르기로 한 화분이 창틀에 있었다. 물을 얼마나 줘야 하는지 몰라서, 옆 방 할머니에게 물어봐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 생각을 하고 나서 채은은 잠깐 멈췄다.
물어봐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건 다음 주에 하고 싶은 일에 가까웠다. 다섯 번째 칸에 쓸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편지는 이미 나갔다.
채은은 그게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다음 편지에 쓰면 된다. 다음 편지가 있다는 것도 계획의 일종이었지만, 채은은 그 사실을 계획이라고 부르지 않았다.
답장을 부치고 나흘째, 채은은 옆 방에 갔다.
“할머니. 이 화분 물 얼마나 줘요?”
“그거 일주일에 한 번이면 돼.” 할머니는 자기 화분을 보고 있었다. “왜, 죽을 것 같아?”
“아니요. 물어보려고 했던 걸 물어보려고요.”
할머니가 그 말을 이해했는지는 모르겠지만 고개를 끄덕였다. 채은은 방으로 돌아와 화분에 물을 반 컵 줬다. 반 컵인지 한 컵인지는 다음 주에 다시 물어보기로 했다.
그것도 다음 주에 할 일이었다.
같은 날 오후, 도윤은 편지를 강의동 우편함에서 받았다.
뒷면 두 줄을 읽고 그는 첫 줄에서 안심했다. 하기 싫은 것을 말했다. 그건 무언가 남아 있다는 증거였다. 도윤은 그 줄을 두 번 읽고, 두 번째에는 소리 내어 읽었다.
두 번째 줄에서 그는 우편함 앞에 서 있었다.
학원에 내 기록 제출하지 마.
지난달에 그는 장학 심사 서류에 가족 요양 증명서를 첨부했다. 조건부 장학생 가산 항목이었고, 서류 목록에 진료 기록 사본이 포함돼 있었다.
제출한 사본에는 삼 년 전 검사 기록도 들어 있었다. 소요 시간 항목까지.
도윤은 왼손 장갑 끝을 당겼다. 봉인 잠금쇠에 걸려서 장갑은 당겨지지 않았다.
그는 회수 절차를 검색했다. 제출된 가산 서류는 심사 종료 전까지 반환 신청이 가능하다고 나와 있었다. 심사 종료일은 어제였다.
도윤은 봉투를 접어 주머니에 넣었다. 그리고 접힌 자리를 손가락으로 두 번 눌렀다.
이번 화가 재미있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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