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화

비워 둔 밤

회귀한 자금팀 대리는 망할 회사를 살리지 않는다 · 2026. 10.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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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지석은 야간 칸이 비어 있는 작업표를 벽에서 떼지 않았다.

아침 교대가 시작되기 전, 그는 표 아래에 작은 종이를 하나 더 붙였다. ‘오늘 가능한 시간은 오늘 주문에만 쓴다.’ 어제 대표가 서명한 문장이었다. 종이는 얇았지만, 야간을 못 한다고 적은 다섯 사람의 이름보다 먼저 떨어지면 안 됐다.

현장 반장이 커피를 들고 다가왔다.

“이렇게 하면 밀린 주문은 계속 밀립니다.”

“그래서 붙여 둡니다.” 지석이 말했다. “못 하는 걸 할 수 있다고 쓰면, 나중엔 사람부터 밀립니다.”

반장은 은박 라인을 힐끗 보았다. 자물쇠가 채워진 전원함에는 정비 업체 이름이 적힌 노란 태그가 달려 있었다. 부품이 오기 전에는 누구도 풀지 못하게 한 태그였다. 지석은 열쇠가 어디 있는지 묻지 않았다. 이미 한 사람이 가진 열쇠가 너무 많았다.

낮 교대 작업자들은 단순 포장 라인 앞에 모였다. 종이 상자 접기, 완충재 넣기, 테이프 검사. 돈이 되는 일은 적었지만, 손이 들어갈 자리는 보였다. 지석은 작업자들의 이름 옆에 맡을 공정을 적고, 손목이 아프다고 쓴 사람에게는 테이프 검사를 맡기지 않았다.

“이 정도면 한 시간 더 할 수 있어요.” 현장 반장이 말했다.

지석은 시계를 보지 않고 퇴근 시각 칸을 가리켰다. “한 시간은 누구 시간입니까?”

“다 같이 조금씩.”

“그 다섯 명 이름으로 쓰세요.”

반장은 펜을 들었다가 내려놓았다. 어제까지만 해도 ‘야간 가능 인원’이라고 적으면 됐던 칸이었다. 이제는 아이를 데리러 가야 하는 시간과 통원 일정, 손목을 쉬어야 하는 날이 같이 붙어 있었다. 그는 결국 작업표를 접지 않고, 원래 정해진 시간만 남겼다.

지석에게 태경이 전화를 걸었다.

“아침 물량은?”

“작업표대로면 됩니다.”

“작업표보다 더 할 수 있다는 말이 나왔습니까?”

“나왔고, 안 적었습니다.”

잠깐 침묵이 있었다. 태경은 지석을 칭찬하지 않았다. 그 대신 말했다.

“그 표를 사진으로 보내지 마십시오. 대표와 반장, 작업자에게 원본을 남겨야 합니다.”

“알아요.”

지석은 전화를 끊고도 기분이 가벼워지지 않았다. 원본을 남긴다는 건, 나중에 누군가 그 표를 들고 ‘왜 이만큼밖에 못 했냐’고 물을 수 있다는 뜻이었다. 그래도 사본만 돌며 사람 이름이 사라지는 것보다는 나았다.

오전 열 시, 백나린이 현장에 왔다. 어제보다 단정한 재킷을 입었지만, 구두 끝에는 창고 먼지가 묻어 있었다. 그녀는 작업표 앞에서 한참 서 있었다.

“야간을 비우면 거래처가 다시 전화할 거예요.”

“낮 물량도 못 받겠다고 하면요?” 지석이 물었다.

나린은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단순 포장 라인에서 상자가 닫히는 모습을 봤다. 기계가 아니어서 속도는 느렸고, 종이는 반듯하지 않았다. 한 작업자가 테이프 끝을 다시 붙이고, 다른 작업자가 상자 안의 완충재를 고쳤다.

“저렇게 하면 마진이 안 나옵니다.”

“그럼 주문을 받지 말아야 합니다.”

나린의 시선이 지석에게로 옮겨왔다. “당신은 정말 쉽게 말하네요.”

“저도 오늘 여기서 돈을 안 받습니다.”

그 말은 거칠었다. 지석은 태경의 미지급 진단료가 자기 돈이 아니라는 걸 알았다. 그러나 현장 사람들에게는 누군가가 수임료를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도 작업표 일부였다. 그는 말을 고쳤다.

“쉽다는 뜻이 아닙니다. 오늘 못 버는 걸 내일 사람한테 갚게 만들지 말자는 뜻입니다.”

나린은 반박하지 않았다. 그녀는 회계 담당자에게 전화를 걸어, 낮 교대 물량으로 가능한 납품 단가를 다시 계산해 달라고 했다. 그리고 전날 떠난 은박 파우치 고객에게 다시 전화했다.

지석은 통화 내용을 듣지 않으려 했지만, 창고가 좁았다.

“은박 파우치는 못 합니다. 대신 무지 포장으로 나눠서, 오늘 가능한 수량을 드릴 수 있습니다.”

상대가 무엇을 말했는지는 들리지 않았다. 나린의 어깨가 한 번 굳었다가 풀렸다.

“네. 기존 단가로는 못 합니다. 작업 방식이 달라졌으니까요.”

통화가 길어졌다. 나린은 할인도, 납기 약속도 바로 꺼내지 않았다. 마지막에 그녀가 적은 것은 주문 확정이 아니라 ‘오후 두 시까지 답변’이었다.

지석은 그 메모를 보고 현장 반장에게 말했다.

“답 나오기 전엔 사람들한테 추가 물량 말하지 마세요.”

“안 나올 수도 있잖아요.”

“그래서 더 그렇습니다.”

점심 무렵, 단순 포장 라인에서 문제가 하나 생겼다. 완충재 폭이 주문서와 맞지 않았다. 이전에는 은박 라인에서 함께 자르던 자재라, 새 방식으로는 모서리가 들떴다. 현장 반장은 가위를 들고 직접 잘라 보려 했다.

지석이 손목을 잡지는 않았다. 대신 주문서와 시제품을 나란히 놓았다.

“이대로 보내면 반품 가능성 있습니까?”

“있죠.”

“그럼 오늘 물량에 넣지 맙시다.”

“그러면 더 적어집니다.”

“더 적은 게 아니라, 가능한 물량이 적은 겁니다.”

현장 반장은 한참 시제품의 뜬 모서리를 눌렀다. 결국 해당 상자 스무 개를 작업표에서 지웠다. 한 작업자가 ‘그럼 오늘 일찍 끝나나요’라고 물었다. 지석은 그렇다고도, 아니라고도 말하지 않았다. 주문 답이 오기 전까지는 누구의 시간을 더 가져갈 수 없었다.

오후 두 시가 지나도 거래처 연락은 없었다. 나린은 회의실 문을 닫지 않고, 책상 위에 세 장의 문서를 펼쳤다. 낮 교대 작업표, 수정된 현금표, 태경이 전날부터 적고 있던 진단서 초안이었다.

지석은 초안 첫 장을 읽지 않았다. 대신 맨 아래의 결재란을 봤다. 대표 확인, 회계 사실 확인, 현장 안전 확인, 작업자 열람. 태경 이름은 ‘진단 작성’ 칸에만 있었다.

“왜 작업자 열람이 필요합니까?” 나린이 물었다.

태경이 답했다. “야간 거부와 안전 정지는 대표 혼자 내린 비용이 아니니까요. 숨기면 다음 주문에서 같은 사람들에게 다시 받게 됩니다.”

“그걸 다 공개하면 회사가 더 흔들립니다.”

“이미 흔들립니다. 다만 누가 손잡이를 쥐었는지 적는 겁니다.”

지석은 태경의 말을 듣고도 고개를 끄덕이지 않았다. 공개가 현장을 지키는 방식이 될 때도 있지만, 문서가 작업자를 새 표적처럼 만들 때도 있었다.

“열람은 하되, 이름별 사정은 빼야 합니다.” 그가 말했다. “야간 못 한다는 이유까지 거래처가 알 필요는 없어요.”

태경이 초안을 다시 봤다. “맞습니다.”

그는 작업자 열람 칸 옆에 ‘개별 사유 비공개’라고 적었다. 지석은 그제야 펜을 들었다. 자기 이름은 현장 의견 칸에만 썼다. 야간 거부가 안전 검토에 반영됐다는 사실, 그리고 개인 사유는 각자에게 남긴다는 문장 아래였다.

나린은 그 문장을 보고 말했다. “내가 모르는 조건이 계속 늘어나네요.”

“원래 있던 조건입니다.” 지석이 말했다. “이제 표에 들어온 거고.”

오후 세 시 십 분, 거래처에서 답이 왔다. 무지 포장으로 나눈 소량 주문을 받겠다는 답이었다. 단가는 낮았고, 납기는 이틀 뒤가 아니라 닷새 뒤였다. 나린은 답장을 읽고 눈을 감지 않았다. 그녀는 바로 작업표를 보았다.

“닷새면 오늘 야간 안 해도 됩니다.” 현장 반장이 말했다.

“오늘은 안 합니다.” 지석이 말했다. “내일도 표를 새로 봐야 합니다.”

나린이 그를 쳐다봤다.

“주문이 들어왔는데도요?”

“주문이 들어왔다고 작업자가 자동으로 늘어나진 않습니다.”

태경은 낮은 단가와 닷새 납기를 현금표에 넣었다. 임금일까지 남는 금액은 아주 작았지만 음수는 아니었다. 안전 부품 값과 미지급 진단료 줄도 그대로 남아 있었다.

회계 담당자가 계산표를 가리켰다. “이 주문은 기존 고객 조건보다 이익이 적습니다. 굳이 받는 이유가 있습니까?”

나린은 대답하기 전에 작업자들이 접어 둔 상자를 보았다. “오늘 저 사람들이 할 수 있는 일이라서요.”

“그럼 다음 달에도 같은 단가를 요구할 겁니다.”

“그때는 받지 않겠습니다.”

나린은 주문을 지키기 위해 위험 라인을 열겠다는 조건을 붙이지 않았다. 그녀는 단가 아래에 ‘이번 회차 한정’이라 쓰고, 협상 날짜를 적었다.

지석은 그 종이를 보고 자기 쪽 작업표에도 날짜를 적었다. 닷새 뒤 납품이 끝나면 작업자들이 계속 이 라인을 선택할지 다시 물을 날짜였다. 낮 교대가 가능하다는 것은, 계속하겠다는 서명이 아니었다.

한 작업자가 오후 일정 칸을 보며 말했다. “내일은 세 시까지만 가능해요. 오늘보다 일찍 가야 해서.”

현장 반장이 잠깐 난처한 얼굴을 했다. 닷새 납기라면 내일 물량을 조금 더 쌓아야 했다.

“그럼 다른 사람이 더 하면 되지 않습니까?” 회계 담당자가 말했다.

지석은 대답 대신 다른 작업자의 표를 가리켰다. 그 사람은 오늘 수작업 포장을 두 시간 더 했고, 내일은 진료가 있었다. 비어 있는 칸에 이름을 옮기는 건 가능했지만, 그 이름들이 빈 사람이라는 뜻은 아니었다.

“내일 표는 내일 확인합니다.” 지석이 말했다. “오늘 정한 닷새가 내일 사람 시간을 먼저 사는 건 아닙니다.”

나린은 그 말을 듣고도 짜증을 감추지 못했다. “매일 새로 확인하면 납품 약속을 어떻게 합니까?”

“그래서 닷새라고 말했고, 하루치 물량은 말하지 않았습니다.”

태경이 덧붙였다. “고객에게도 그 차이를 적어 보냈습니다. 가능한 생산 범위와 확정 수량은 다릅니다.”

나린은 휴대전화를 다시 들여다봤다. 거래처에 보낸 메일에는 ‘최소 수량 우선’이라는 문장이 있었다. 전에는 없던 문장이었다. 고객은 그 문장을 보고 다른 업체를 알아볼 수 있고, 그래서 회사는 더 적은 돈을 받을 수 있다. 그러나 현장에는 일을 못 하는 사람이 약속을 어긴 것처럼 남지 않았다.

지석은 자물쇠가 채워진 은박 라인 앞으로 가 보았다. 정지 태그 옆에는 정비 업체 도착 예정 시각이 적혀 있었다. 다음 주 화요일 오전. 그는 그 시간 아래에 ‘재가동 결정 별도’라고 썼다. 부품이 온다는 일과 사람이 다시 기계 앞에 선다는 일은 같은 일이 아니었다.

“이게 버틴다는 겁니까?” 나린이 물었다.

태경은 고개를 저었다. “이건 버틸 수 있는지 확인할 시간을 산 겁니다.”

지석은 그 답이 마음에 들었다. 잘됐다는 말보다 작업표에 가까웠다. 오늘 밤을 비워 두는 대신, 닷새 뒤까지 누가 무엇을 할 수 있는지 매일 다시 적어야 한다는 뜻이었다.

작업이 끝나자 현장 반장이 야간 칸 옆에 ‘0명’이라고 쓰려 했다. 지석은 펜 끝을 멈추게 하지 않고 말했다.

“0명 말고, 미배정.”

“차이가 있습니까?”

“0명은 없는 사람 같고, 미배정은 아직 안 맡긴 일입니다.”

반장은 잠시 생각하다가 ‘미배정’이라고 썼다. 지석은 벽에 남은 그 단어를 보았다. 밤은 비어 있었지만, 비어 있는 자리가 포기한 사람들의 이름을 지우지는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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