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을 받는 줄
회귀한 자금팀 대리는 망할 회사를 살리지 않는다 · 2026. 10.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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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태경은 진단서의 제목부터 지웠다.
‘나린패키징 회생안’이라고 적혀 있던 첫 줄을 지우고, ‘운영 지속 가능성 진단’으로 바꿨다. 회사를 살린다는 말은 너무 많은 사람의 선택을 한꺼번에 빌렸다. 지금 문서가 할 일은 회사를 살리겠다고 약속하는 것이 아니라, 무엇을 멈추고 무엇을 남길지 분리하는 일이었다.
그는 회의실 창가에 서서 세 장의 표를 다시 펼쳤다. 현금표, 작업표, 안전 점검표. 현금표에는 임금일 전까지 남는 금액이 아주 얇게 남아 있었고, 작업표에는 야간이 미배정으로 비어 있었다. 안전 점검표에는 은박 라인 부품 도착일과 재가동 결정 별도라는 문장이 붙어 있었다.
문서 첫 장에는 네 줄만 남겼다.
안전: 가드 센서 정상 확인과 현장·정비·작업자 재확인 전 은박 라인 중단.
현금: 임금, 필수 자재, 안전 부품, 미지급 진단료의 순서를 공개.
대표 권한: 대표는 결제와 고객 설명을 맡되, 재가동과 개별 작업 가능 여부를 단독 승인하지 않음.
작업자 정보: 운영 한계만 열람하고, 개인 사유는 개별 보관.
문장 아래에는 빈 칸이 많았다. 태경은 빈 칸을 메우고 싶어지는 습관을 알고 있었다. 이전의 그는 예측과 의지로 빈칸을 채우고, 나중에는 그 빈칸에 사람 이름을 넣었다. 이번에는 확인할 사람이 없는 칸을 남겨 두었다.
백나린이 문을 열고 들어왔다. 손에는 전날 고객에게 보낸 메일 출력본이 들려 있었다.
“거래처가 소량 주문은 유지하겠대요. 대신 다음 달 단가를 다시 보자고 합니다.”
“오늘 문서에는 그걸 성공으로 적지 않겠습니다.”
나린이 의자를 당기며 물었다. “왜요? 주문이 들어왔잖아요.”
“안전 장치가 돌아온 게 아니고, 임금일까지 버틴 것도 아닙니다. 주문 하나는 조건입니다.”
“그럼 진단서에는 뭘 적습니까?”
태경은 첫 장을 그녀 쪽으로 밀었다. 나린은 제목을 읽고, 네 줄을 차례로 읽었다. ‘대표 권한’에서 손이 멈췄다.
“재가동을 내가 승인하지 못한다고요?”
“대표가 혼자 승인하지 못한다는 뜻입니다.”
“내 회사인데.”
“그래서 대표에게 고객 설명과 결제 책임을 남겼습니다. 하지만 가드 센서가 열린 채 움직였던 기계를, 주문이 있다는 이유로 혼자 다시 켤 권한까지 남기면 같은 표를 다시 만들게 됩니다.”
나린은 문서를 덮지 않았다. 대신 오른쪽 여백에 손톱을 댔다. 견본 모서리를 맞추던 손이 이제는 종이의 빈칸을 만졌다.
“불리한 결론도 적겠다는 거죠.”
“네.”
“대표 교체 권고가 나와도?”
“가능성으로 적습니다. 누가 결정하는지와 함께요.”
나린은 웃지 않았다. “그러면 내가 이 돈을 내고, 나를 밀어낼 수도 있는 문서를 받는 겁니까?”
“그 문서를 소유하는 건 대표가 아닙니다. 계약서에 이미 그렇게 적었습니다.”
창밖에서 지게차가 멈추는 소리가 났다. 나린은 그 소리에 고개를 돌렸다가, 다시 문서를 봤다.
“진단비는 성과가 나면 더 주는 방식으로 합시다.”
태경은 고개를 저었다. “성과급으로 묶으면, 제가 불리한 결론을 적기 어려워집니다.”
“당신은 안 그럴 것 같은데요.”
“그렇게 보이게 만드는 계약이 더 위험합니다.”
나린은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회계 담당자가 회의실 문턱에 서 있었다. 그는 들어오라는 말이 없자 출력본을 들고 기다렸다.
“지급 순서는요?” 나린이 물었다.
태경은 현금표 마지막 줄을 펼쳤다. 임금과 필수 자재, 안전 부품 아래에 미지급 진단료가 있었다. 전날에는 보류였고, 오늘은 소량 주문의 계약금과 전시회 취소 환급 일부가 들어와 있었다.
“지급할 수 있습니다. 다만 이 금액 뒤에도 임금표가 음수가 아닌지, 회계 담당자가 확인해야 합니다.”
회계 담당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확인했습니다. 하지만 다음 주 부품값이 바뀌면 다시 달라질 수 있습니다.”
나린이 말했다. “그래도 지급합니다.”
태경은 바로 계좌번호를 말하지 않았다. “한 줄을 더 넣겠습니다. 이 지급은 안전 라인 재가동이나 고객 유지의 성공 보수가 아니라, 오늘까지 확인한 진단 범위에 대한 대가입니다.”
“그 문장이 꼭 필요해요?”
“대표님이 나중에 불리한 결론을 받았을 때도, 이 돈을 돌려달라고 하지 않기 위해서요.”
나린은 회계 담당자에게 펜을 달라고 했다. 그녀는 문장 아래에 대표 확인을 먼저 썼다. 그리고 한참 뒤에 덧붙였다.
“그럼 당신도 이 진단서에 ‘회사 존속 권고 아님’이라고 적으세요.”
태경은 그 문장을 읽었다. 회사가 살아남는다는 결론을 미리 막는 문장이었다. 불편했지만 맞았다.
“적겠습니다.”
그는 제목 아래에 한 줄을 더 넣었다. ‘본 진단은 나린패키징 법인의 존속 또는 대표 지위 유지를 권고하지 않는다.’ 문장은 차가웠고, 그래서 오히려 누구의 희망을 담보로 하지 않았다.
오지석이 회의실 안으로 들어왔다. 그는 작업표 원본을 들고 있었고, 현장 반장과 작업자 두 명의 확인란이 채워져 있었다.
“열람 문구 봤습니다.”
태경이 물었다. “문제 있습니까?”
“개별 사유는 빠졌고, 운영 한계는 남았습니다. 그런데 재가동 확인을 작업자 열람으로만 쓰면 안 됩니다.”
지석은 안전 점검표의 마지막 줄을 가리켰다. ‘작업자 열람.’
“일할 사람한테도 거부할 수 있는 칸이 있어야 합니다. 읽었다는 것과 하겠다는 건 다르니까.”
태경은 펜을 들었다. ‘작업자 열람’ 옆에 ‘재가동 전 작업 참여 동의 별도’라고 썼다.
나린이 한숨을 내쉬었다. “조건이 또 늘었네요.”
지석이 말했다. “원래 있던 조건입니다. 이번에는 기계 옆에서 사라지지 않게 적는 거고요.”
태경은 그 말을 문서에 적지 않았다. 대신 안전 항목 아래에 ‘동의하지 않는 작업자에게 불이익을 주지 않음’이라는 문장을 넣었다. 이 문장은 대표가 한 번 더 읽어야 했다.
나린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넣으세요. 대신 내가 고객에게 설명할 때, 생산이 불가능하다는 말만 남기지 마세요. 어떤 주문은 가능한지도 같이 적어야 합니다.”
“그건 대표님이 정할 수 있습니다.”
“아니요. 가능한 주문의 기준은 현장과 같이 확인해야죠.”
그녀는 지석 쪽을 보았다. 지석은 바로 동의하지 않았다.
“현장 기준은 현장이 적습니다. 대표가 홍보 문장으로 바꾸지 않는다는 조건이면요.”
“그 조건으로 하죠.”
문서 마지막 장에 새 결재란이 생겼다. 대표: 고객 통지와 현금 집행. 회계: 수치 사실 확인. 현장: 작업 가능 범위. 작업자: 열람과 별도 참여 동의. 진단자: 발견 사실과 권고. 다섯 칸은 서로를 대신하지 않았다.
회계 담당자가 노트북을 열었다. 이체 화면에는 태경의 이름과 금액이 표시됐다. 금액은 첫날 계약서에 적힌 하루치 진단료였다. 작았지만, 전날까지는 임금표 아래에 미뤄진 줄이었다.
그때 현장 반장이 문을 두드렸다. 정비 업체에서 전화가 왔다는 말이었다. 센서 부품은 예정대로 도착하지만, 가드 잠금 장치의 마모도 함께 확인해야 한다고 했다. 부품 하나만 바꾸면 점검을 끝낼 수 없다는 뜻이었다.
나린의 얼굴이 굳었다. “그럼 다음 주 화요일에도 못 돌립니까?”
“아직 모릅니다.” 태경이 말했다. “정비 확인이 끝난 뒤, 현장 쪽에서 작업 가능 여부를 다시 말해야 합니다.”
“고객에게는 뭐라고 합니까?”
“은박 라인은 재가동 일정이 아니라, 재가동 조건만 알려야 합니다.”
나린은 의자에서 일어나 창문 쪽으로 갔다. 회의실 유리 너머로 은박 라인의 빨간 정지등이 보였다. 그 라인 하나가 회사에서 제일 많은 돈을 벌었다. 그래서 문제를 오래 숨겼고, 이제는 가장 먼저 멈춘 자리가 됐다.
“진단비를 받았으니, 당신은 멈추라고 말하기 쉬워졌겠네요.”
태경은 그 말을 피하지 않았다. “그래서 지급 문장을 넣었습니다. 이 돈은 라인을 멈추라는 결론의 보수가 아닙니다.”
“하지만 당신은 그 결론을 썼죠.”
“네.”
“내가 원하지 않아도?”
“대표님도 계약서에 적었습니다. 불리한 결론을 지울 수 없다고.”
나린은 유리창을 손끝으로 두 번 두드렸다. “그 조항을 내가 썼어요. 그때는 이런 날이 올 줄 몰랐죠.”
지석이 작업표를 내려놓았다. “그날을 몰랐어도, 기계가 멈추던 날은 있었잖아요.”
나린은 대답하지 않았다. 태경은 지석에게 고개를 돌렸다. 그의 말은 맞았지만, 대표를 한 문장으로 몰아붙이면 문서는 다시 처벌문이 된다.
“그래서 진단서에는 승인 경위도 같이 적었습니다.” 태경이 말했다. “대표 책임, 정비 지연, 현장 우회, 고객 납기 압박을 분리해서요. 누구 하나만 지우거나 세우지 않습니다.”
회계 담당자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그럼 공급업체와 은박 주문 고객에게도 그 문서를 줍니까?”
“아닙니다.” 태경이 말했다. “외부에는 납품 가능 범위와 재가동 조건만. 내부 원문은 열람 대상에게만.”
나린은 그제야 회의실 테이블로 돌아왔다. “내가 외부 설명을 맡고, 현장이 가능한 범위를 확인하고, 당신은 그 둘이 어긋난 걸 적는 거군요.”
“네.”
“그럼 당신이 다음번에 문서를 쓸 때도, 내가 불리하다고 고치지는 못합니까?”
“사실 오류는 고칠 수 있습니다. 결론을 바꾸려면 근거가 필요합니다.”
나린은 잠시 웃었다. 기쁜 웃음은 아니었다. “브랜드 문구보다 어려운 계약이네요.”
“브랜드 문구는 보통 반품되면 끝납니다.” 지석이 말했다. “이건 사람이 일하다 다치면 끝이 안 나고요.”
나린은 그 말에 반박하지 않았다. 그녀는 안전 부품 견적서와 낮 교대 작업표를 함께 집어 들었다. 두 장을 겹치면 맞지 않는 듯했지만, 오늘은 어느 것을 먼저 버릴지 적혀 있었다.
“이체해도 됩니까?” 회계 담당자가 물었다.
나린은 현금표를 한 번 더 봤다. “해 주세요.”
태경은 화면을 보지 않았다. 그는 진단서의 마지막 확인란을 보았다. 돈이 들어오면 자신도 다음 문서를 더 써야 할 이유가 생긴다. 그래서 이체는 보상인 동시에, 더 분명하게 거절해야 할 요구가 생길 수 있다는 표시였다.
휴대전화가 울렸다. 입금 알림은 짧았다. 태경은 금액을 소리 내어 읽지 않았다.
나린이 말했다. “이제 이 공장을 살릴 수 있습니까?”
“오늘은 그 질문에 답하지 않는 게 진단 결과입니다.”
그녀의 표정이 굳었다. 그러나 문서를 찢거나 이체를 취소하라고 하지 않았다. 대신 대표 확인란 아래에 날짜를 적었다.
“그럼 다음 진단은 언제입니까?”
태경은 안전 부품 도착일을 가리켰다. “부품이 온 뒤가 아니라, 누가 다시 일할지 확인된 뒤입니다.”
지석은 작업표를 접지 않고 들고 나갔다. 벽의 야간 칸에는 여전히 ‘미배정’이 남아 있었다. 첫 진단비는 들어왔지만, 가장 돈 되는 라인은 그 돈으로도 열리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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