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화

멈춘 손의 속도

회귀한 자금팀 대리는 망할 회사를 살리지 않는다 · 2026. 10.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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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지석은 정지등을 보자마자 작업복 소매를 걷었다.

“영상 말고, 실제로 보여 주세요.”

나린패키징의 현장 반장은 대답하지 않고 은박 파우치 라인 앞 안전선을 열었다. 태경은 지석을 부른 이유가 단순했다. 서류에는 센서 우회라고 적을 수 있어도, 그 우회가 사람의 손에서 무엇을 빼앗는지는 현장을 아는 사람이 보여 줘야 했다.

지석은 기계 전원을 켜지 않았다. 대신 컨베이어 위에 불량 봉투 하나를 올리고, 가드가 닫혀 있다고 표시되는 램프와 실제 잠금 장치 사이를 손전등으로 비췄다. 배선 한 가닥이 임시 단자에 묶여 있었다.

“이게 켜져 있으면 가드가 열려도 기계는 닫혔다고 알아듣습니다.”

현장 반장이 말했다. “센서가 자꾸 멈춰서요. 납기 때만 잠깐.”

지석은 단자를 만지지 않았다. “잠깐은 누가 정합니까?”

반장이 입을 다물었다. 기계가 멈춘 날은 작업표에 있었지만, 다시 돌린 날은 납기표에만 있었다. 두 표 사이에는 작업자의 손이 있었다.

나린이 말했다. “사고는 없었습니다.”

지석이 그녀를 보았다. “그래서 멈춰야 합니다.”

“사고가 없는데요?”

“사고 난 다음엔 정지등이 아니라 병원 접수표가 남습니다.”

그 말은 회의실을 위한 문장이 아니었다. 지석은 장갑 하나를 컨베이어 옆에 놓고, 가드가 열린 상태에서 봉투가 걸리면 작업자가 어느 쪽으로 손을 넣게 되는지 손가락으로 짚었다. 누구도 손을 넣지 않았다. 그 짧은 재현으로도, 석 달 동안 비어 있던 점검란이 왜 비어 있었는지는 충분히 보였다.

태경은 작업표에 ‘위험’이라고 쓰지 않았다. 너무 넓은 말이었다. 대신 ‘가드 열림 상태에서 정지 신호 미작동’이라고 적고, 확인자 칸을 현장 반장과 지석에게 넘겼다.

지석이 펜을 받지 않았다.

“제가 확인자는 아닙니다. 저는 이 공장 사람도, 정비 업체도 아니에요.”

태경이 물었다. “그럼 무엇을 적겠습니까?”

“작업자한테 보여 준 사람. 재가동 판단은 현장 반장과 정비 담당, 그리고 일할 사람들한테 남겨요.”

태경은 고개를 끄덕였다. 지석을 데려왔다는 이유로 그에게 새 권한까지 붙일 수는 없었다. 도움은 책임을 훔치는 방식이 되면 안 됐다.

나린은 기계 옆에 놓인 계약서 사본을 봤다. 대표 도장이 찍힌 수정 전표는 이미 회계팀에 넘어갔고, 전시회 취소 메일도 발송됐다. 그러나 오늘 오후에 답을 줘야 하는 은박 파우치 주문은 여전히 남아 있었다.

“그 주문을 놓치면 이번 달 고객 하나가 사라집니다.” 그녀가 말했다.

“안전장치 없이 받으면 고객 하나보다 더 많이 잃습니다.” 태경이 말했다.

“당신은 제 회사가 아니라서 쉽게 말하네요.”

지석이 끼어들었다. “제 회사도 아닙니다. 그래서 여기서 일할 사람 말부터 듣자는 겁니다.”

그는 현장 반장에게 작업자들을 부르라고 했다. 나린은 잠깐 고개를 저었다가, 결국 휴대전화로 회계팀에 메시지를 보냈다. 은박 파우치 견적서는 보류, 다른 품목의 당일 가능 물량만 다시 계산하라고.

라인 앞에 모인 사람은 일곱 명이었다. 전날 야간을 비워 둔 작업자도 있었고, 새로 들어온 포장 보조도 있었다. 지석은 ‘몇 명이 할 수 있습니까’라고 묻지 않았다. 이름표를 하나씩 봤다.

“오늘 여섯 시 이후 가능한 사람?”

두 손만 올라갔다.

“내일 낮 교대에 가능한 사람?”

다섯 손이 올라갔다. 다만 그중 한 명은 오후 세 시에 아이를 데리러 가야 했고, 다른 한 명은 손목 통증 때문에 수작업 포장만 가능하다고 말했다. 지석은 그 조건을 지우지 않았다.

태경은 종이에 낮 교대만으로 만들 수 있는 물량을 계산했다. 숫자는 원래 주문의 절반에도 못 미쳤다. 전날 전시회를 지운 계산보다 더 적었다.

“야간 증산을 하면 납기를 맞출 수 있나요?” 나린이 물었다.

지석이 먼저 대답했다. “은박 라인은 못 돌립니다. 다른 라인도 오늘 야간은 두 명뿐이에요.”

“그럼 임시 인력을—”

“오늘 들어온 사람이 접착제 농도와 칼날 위치를 압니까?” 지석이 말했다. “사람 수로 작업표를 채우면, 다음엔 사고 원인을 사람 수로 설명하게 됩니다.”

나린의 얼굴이 굳었다. “그럼 어떻게 하자는 거예요. 주문을 전부 거절합니까?”

“전부 말고, 낮 교대가 책임질 수 있는 것만 받습니다.”

태경은 지석의 말을 듣고도 바로 적지 않았다. 낮 교대 물량으로 현금이 임금일까지 버티는지 확인해야 했다. 회계 담당자가 계산기를 두드리는 동안, 현장 반장은 작업자에게 종이 한 장을 돌렸다. ‘야간 불가’와 ‘수작업 가능’ 옆에 이름을 쓰는 표였다.

한 작업자가 말했다. “우리가 야간 못 한다고 적으면, 다음 달에 자르나요?”

나린이 대답하려다 멈췄다. 어제 ‘임금표를 공개하겠다’고 한 말은 해고를 막는 약속이 아니었다.

태경이 말했다. “오늘 표는 오늘 주문을 정하는 데만 씁니다. 다음 달 인사 판단에 쓰지 않는다는 문장을 대표가 넣을 수 있습니까?”

나린은 그 문장을 읽었다. 손가락이 종이 모서리를 맞추려다 멈췄다.

“넣겠습니다.”

“대표 개인의 약속이 아니라, 작업표 보관 규칙으로요.”

“그렇게 하죠.”

현장 반장이 종이에 한 줄을 더 썼다. 작업 가능 표는 이번 주문의 배치와 안전 교육 기록에만 사용, 인사평가와 해고 사유로 전용 금지. 나린은 그 줄 아래에 서명했다. 지석은 자기 이름을 쓰지 않았다. 그는 작업자 쪽에 서서, 빈 야간 칸을 한 번 더 확인했다.

회계 담당자가 태경에게 다가왔다. “낮 교대 물량만 받으면 임금일까지는 갑니다. 다만 진단료 선금은 오늘 못 드립니다.”

나린이 들었다. “계약에는 오늘 지급으로 되어 있죠.”

태경은 계약서의 수임료 항목을 폈다. 첫날 단위 진단료는 작았지만, 그 돈까지 임금표 옆에서 가져가면 그가 어제 적은 기준과 충돌했다.

“지급일을 미룹시다.”

나린이 눈을 들었다. “그럼 당신도 손해잖아요.”

“계약을 무효로 하는 건 아닙니다. 지급 순서를 공개로 바꾸는 겁니다.”

“제가 나중에 못 내면요?”

“그 가능성도 진단서에 적겠습니다.”

지석이 낮게 말했다. “돈 받을 사람도 작업표 밖에 있으면 안 됩니다.”

태경은 그 말이 불편했다. 자신은 외부 진단자였고, 그 수임료를 직원 임금과 한 표에 올리는 순간 관계가 달라진다. 하지만 오늘의 돈이 어디에서 빠지는지 숨기는 것보다는 낫다.

그는 회계 담당자에게 새 표를 만들게 했다. 임금, 필수 자재, 안전 부품, 그리고 미지급 진단료. 네 번째 줄에는 ‘지급 보류, 대표 확인 후 재협의’라고 적었다. 나린은 그 줄을 보고 나서야 계약서에 대표 도장을 찍었다. 돈을 주겠다는 도장이 아니라, 지금 못 준다는 사실을 같이 남기는 도장이었다.

표가 완성되자 공급업체에서 전화가 왔다. 필름을 싣고 오던 트럭이 공장 입구에서 멈췄다는 연락이었다. 어제 취소한 전시회 물량 때문에가 아니라, 고객 결제 표시를 되돌린 전표가 공급업체에도 전달됐기 때문이었다.

“선결제 아니면 못 내린답니다.” 회계 담당자가 말했다.

나린은 바로 자신의 개인 카드를 꺼내지 않았다. 그녀는 카드를 가방에 넣은 뒤 태경에게 물었다.

“필수 자재가 아니면요?”

“오늘 낮 교대가 맡은 주문에 꼭 필요한지부터 확인해야 합니다.”

지석이 납품 명세를 받아 들었다. 은박 라인용 필름이 절반, 단순 포장 라인용 무지 필름이 절반이었다. 그는 무지 필름 수량만 작업표의 이름들과 대조했다.

“이쪽은 두 시간치가 모자랍니다. 저쪽은 오늘 안 씁니다.”

태경은 공급업체에 전화를 걸어 전체 납품을 요구하지 않았다. 무지 필름 두 롤만 현금으로 받고, 은박 필름은 반송해 달라고 요청했다. 추가 운송비는 나린패키징이 내야 했다.

나린은 전화를 넘겨받아 말했다. “전시회 건은 취소했고, 오늘 쓰는 물량만 받겠습니다. 나머지는 다음 약속을 드릴 수 없어요.”

상대는 전화를 끊기 전까지 대답하지 않았다. 그러나 트럭은 십오 분 뒤 무지 필름 두 롤만 내리고 떠났다. 지게차가 남긴 바퀴 자국은 짧았고, 그만큼 오늘 돌릴 수 있는 라인도 짧아졌다.

지석은 작업자들에게 롤을 옮기게 하지 않았다. 손목이 아프다고 적은 작업자를 빼고, 가능한 두 사람에게만 물었다. “이동 작업까지 할 수 있습니까?” 두 사람 중 한 명은 고개를 저었고, 다른 한 명은 낮 교대 안에서라면 가능하다고 했다. 그 대답까지 넣자, 계획된 물량은 다시 한 번 줄었다.

태경은 줄어든 숫자를 지우지 않았다. 오늘은 트럭 한 대를 반쯤 돌려보내고도, 남은 사람의 시간을 더 부풀리지 않는 날이었다.

오후 세 시, 거래처 담당자가 전화를 걸었다. 은박 파우치 주문을 절반으로 줄이고 납기를 이틀 미루겠다는 나린의 제안을 듣고 한참 말이 없었다.

“그럼 다른 데 알아보겠습니다.”

나린은 통화를 끊고 휴대전화를 내려놓았다. 울지도, 화내지도 않았다. 대신 견본 상자에서 은박 봉투 하나를 꺼내 접착선을 손톱으로 눌렀다.

“고객 하나가 갔네요.”

“아직 확정은 아닙니다.” 태경이 말했다.

“그렇게 말하지 마세요.” 나린은 봉투를 다시 상자에 넣었다. “오늘은 갔습니다.”

지석은 작업표를 들고 다가왔다. 낮 교대 물량이 정리돼 있었다. 다섯 명의 이름, 각자 가능한 시간, 손목 통증과 귀가 시각, 그리고 야간 칸의 빈 공간.

“이만큼이면 할 수 있습니다.” 그가 말했다. “더는 못 합니다.”

태경은 그 표를 받아 현금표 옆에 놓았다. 회사가 버틴다는 말은 이제 고객을 다 잡는다는 뜻이 아니었다. 낮에 할 수 있는 일을 낮에 끝내고, 다친 사람이 없었다는 말을 운으로 남기지 않는다는 뜻에 가까웠다.

나린은 작업자들 앞에서 말했다. “은박 라인은 부품과 점검이 끝날 때까지 안 돌립니다. 오늘 주문은 줄였습니다. 줄어든 이유는 제가 거래처에 설명하겠습니다.”

누군가가 물었다. “우리가 야간 안 한다고 해서요?”

“아니요.” 나린이 말했다. “내가 안전장치를 묶어 둔 채 주문을 받은 것까지 포함해서요.”

그녀는 길게 말하지 않았다. 작업자들은 박수치지 않았고, 신뢰가 생겼다고 말하지도 않았다. 다만 현장 반장은 내일 낮 교대표를 벽에 붙였고, 야간 칸은 여전히 비워 두었다.

태경은 미지급 진단료 줄을 다시 봤다. 첫 고객을 얻었다는 사실은 남았지만, 오늘 받을 돈은 없었다. 대신 그 옆에는 안전 부품 납기와 다섯 명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공장 문 밖으로 나가던 지석이 말했다. “내일도 낮만 봅시다. 밤은 비워 둔 채로.”

태경은 고개를 끄덕였다. 주문은 줄었고, 가장 돈 되는 라인은 멈췄고, 수임료도 미뤄졌다. 그런데도 작업표는 처음으로 실제 사람의 시간만큼만 움직일 수 있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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