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화

아침 여덟 시, 백나린은 대표 도장을 찍지 않은 계약서를 들고 창고에 들어왔다

회귀한 자금팀 대리는 망할 회사를 살리지 않는다 · 2026. 10.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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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 여덟 시, 백나린은 대표 도장을 찍지 않은 계약서를 들고 창고에 들어왔다.

어제 접어 간 재고표에는 밤새 접힌 자국이 하나 더 생겨 있었다. 태경은 그 종이를 먼저 펴지 않았다. 운송 담당, 재고팀 직원, 회계 담당자가 같은 테이블에 앉은 뒤에야 빈 칸을 가리켰다.

“고객 수령 확인은 없고, 전시회 보관 지시만 있습니다.”

운송 담당자가 말했다. “출고는 안 했습니다. A창고에 넘기라는 지시만 있었고요. 팔레트는 아직 여기 있습니다.”

회계 담당자가 노트북을 돌렸다. “고객 결제로 잡은 건 제가 전표를 올렸습니다. 대표님이 이번 주문 들어오면 맞추자고 하셔서.”

나린은 회계 담당자를 보지 않았다. 견본 상자도 만지지 않았다. 대신 도장을 테이블 위에 내려놓았다.

“제가 지시했습니다.”

말이 짧아서 방 안이 더 조용해졌다.

“전시회 물량을 먼저 확보하면 거래처가 큰 주문을 넣을 거라고 봤어요. 고객 결제 예정으로 잡아 두면 이번 주 자재값을 막을 수 있다고.”

회계 담당자가 입술을 열었다가 닫았다. 태경은 그에게 설명을 시키지 않았다. 대표가 승인했고, 실무자가 전표를 입력했다. 두 문장은 책임을 같은 무게로 만들지 않았다.

“누가 지시했는지와 누가 고칠 수 있는지는 나눠 적겠습니다.” 태경이 말했다. “오늘 오전에는 고객 결제 표시를 되돌리고, 전시회 물량은 재고로 복구합니다. 확인자는 세 분 이름으로요.”

나린이 종이를 밀었다. “그렇게 하면 계좌가 비어요.”

“얼마나 비는지부터 보죠.”

회계 담당자는 이틀 뒤 지급할 원자재 대금과 나흘 뒤 임금을 화면에 띄웠다. 고객 결제 칸을 지우자 잔액이 음수로 내려갔다. 숫자는 한 줄이었지만, 현장에서는 지게차 연료와 야간 수당, 점심 뒤에 들어올 필름 납품을 같이 지웠다.

“전시회를 접으면 됩니다.” 태경이 말했다.

나린이 고개를 들었다. “그 전시회가 우리 브랜드를 살릴 기회예요.”

“전시회 물량을 지키려면 임금표에 없는 돈을 써야 합니다.”

“주문 하나만 잡히면 다 갚을 수 있어요.”

태경은 전날과 같은 말을 되풀이하지 않았다. 대신 두 장의 표를 나란히 놓았다. 하나에는 전시회, 하나에는 나흘 뒤 임금일. 그는 각 표의 맨 아래에 누구의 서명이 필요한지만 적었다.

“이쪽은 대표님이 결정할 수 있습니다. 전시회를 갈지 말지. 이쪽은 직원들 몫이라 대표님 혼자 결정할 수 없습니다.”

나린은 한참 표를 내려다봤다. “직원들이 공장 문 닫는 걸 원할까요?”

“오늘 물어볼 수 있는 건 야간과 안전, 지급일 전 가능한 작업입니다. 폐업을 대신 묻지 않겠습니다.”

그 말에 나린은 도장을 다시 집었다. 찍지는 않았다.

현장 반장은 오전 첫 작업표를 들고 들어왔다. 가장 수익이 높은 은박 파우치 라인이 빨간 펜으로 동그라미 쳐져 있었다.

“이 라인은 오늘 돌립니까?”

나린이 먼저 답했다. “돌려야 해요. 이게 멈추면 남은 주문도—”

반장이 작업표를 뒤집었다. 뒷면에는 설비 점검표가 붙어 있었다. 가드 센서 점검란 세 칸이 비어 있었고, 마지막 점검 날짜는 석 달 전이었다.

“어제 말씀드린 정비 기록입니다.” 반장이 말했다. “센서가 자꾸 멈춰서, 임시로 우회해 둔 상태예요.”

나린의 눈썹이 움직였다. “우회는 잠깐이었잖아요.”

“잠깐이 석 달입니다.”

반장의 목소리는 높지 않았다. 그래서 더 이상 변명할 자리가 없었다. 센서가 멈추면 기계가 멈춰야 하는데, 누군가 배선을 묶어 두었다. 멈춘 기계는 납기를 못 맞췄고, 움직이는 기계는 손을 다치게 할 수 있었다. 공장에서는 그 둘을 같은 주간표에 넣어 두면 안 됐다.

태경은 점검표를 들었다. “누가 우회를 지시했습니까?”

반장은 나린을 보지 않았다. “정비 업체가 부품 오기 전까지만 하자고 했습니다. 최종 결정은 대표님이요.”

나린의 손이 도장 위에서 멈췄다. 이번에는 회계 담당자에게 시선이 가지 않았다.

“제가 승인했습니다.”

그녀는 한숨도 쉬지 않았다. 길게 설명하면 자기에게 유리한 문장부터 고르게 된다는 걸 아는 표정이었다.

“전시회 샘플도, 이 라인도, 이번 주문도 제가 다 놓치기 싫었습니다. 그래서 부품이 오면 고치자고 했고요.”

“부품은 언제 옵니까?” 태경이 물었다.

반장은 납기 확인 메일을 열었다. 다음 주 화요일. 임금일보다 뒤였다.

나린은 메일의 날짜를 읽고도 고개를 저었다. “두 시간만 돌리면 오늘 출고분은 만들 수 있어요. 숙련자만 붙이고.”

반장이 말했다. “숙련자도 손은 같습니다.”

태경은 그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결정은 회의실에서 나올 수 있었지만, 기계 앞에 설 사람은 다른 쪽에 있었다.

“라인을 멈추면 현금은 더 줄어듭니다.” 나린이 말했다.

“라인을 돌리면 누군가가 다칠 수 있습니다.”

“그 가능성으로 회사 전체를 접을 수는 없어요.”

“회사 전체를 접자는 게 아닙니다. 이 라인과 오늘 주문을 분리하자는 겁니다.”

태경은 작업표에 세 칸을 만들었다. 센서 정상 확인 전 은박 파우치 라인 중단. 수작업으로 가능한 단순 포장만 직원 동의 뒤 진행. 전시회 물량은 재고로 복구하고, 고객 결제 전표는 오전 중 수정. 첫 줄은 가장 돈이 됐고, 둘째 줄은 가장 느렸고, 셋째 줄은 나린의 이름을 남겼다.

“이렇게 하면 거래처가 떠납니다.” 나린이 말했다.

“안전장치를 묶어 둔 채 납품하면 더 크게 떠납니다. 사람도요.”

나린은 표를 밀어내지 않았다. 다만 첫 줄의 ‘중단’ 위에 손가락을 올렸다.

“대표가 서명하면, 다시 켤 권한도 없다는 뜻입니까?”

“정상 점검 기록과 현장 책임자의 확인 없이는 없습니다.”

“제 공장인데요.”

“그래서 대표 책임으로 남깁니다. 하지만 오늘 작업할 사람의 거부권까지 가져가진 못합니다.”

현장 반장은 휴대전화로 작업자들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회의는 십 분 뒤, 라인 앞에서 하기로 했다. 그는 대표의 승인을 기다리지 않았다. 이미 고장 난 센서 앞에서 기다린 시간이 석 달이었기 때문이다.

나린은 그 모습을 보고 말했다. “저 사람이 나를 건너뛰는 걸 허락하라는 건가요?”

“아닙니다. 안전 정지와 재가동 확인을 한 사람 손에서 분리하자는 겁니다.”

“그게 결국 내 권한을 줄이는 거죠.”

“네.”

태경은 부드럽게 돌려 말하지 않았다. 첫 고객의 계약은 기분을 보장하지 않는다고 이미 적혀 있었다.

라인 앞에는 여섯 명이 모였다. 반장은 센서가 멈춘 뒤에도 컨베이어가 돌아가는 영상을 재생했다. 화면 속 종이 봉투 하나가 기계 틈에 걸렸고, 작업자의 장갑이 그 앞에서 멈췄다. 실제 사고는 없었다. 그래서 나린은 그동안 사고 보고서가 없다는 사실을 방패처럼 들고 있었다.

“오늘 은박 라인은 안 돕니다.” 반장이 말했다. “다른 라인은 선택할 수 있습니다. 야간은 가능한 사람만 이름을 적어 주세요.”

한 작업자가 물었다. “멈추면 임금은요?”

회계 담당자가 태경을 보았다. 태경은 대답을 빼앗지 않았다. 나린이 먼저 입을 열었다.

“전시회 비용은 오늘 보류합니다. 고객 결제 표시도 되돌리겠습니다. 임금표는 따로 공개할게요.”

“돈이 모자라면요?”

나린의 목소리가 잠깐 낮아졌다. “그때는 제가 설명하겠습니다. 회계팀 탓으로 돌리지 않고.”

직원들은 바로 고개를 끄덕이지 않았다. 두 명은 단순 포장 작업을 하겠다고 적었고, 한 명은 아이를 데리러 가야 한다며 퇴근 시각을 적었다. 야간 칸은 비어 있었다. 반장은 그 빈칸을 지우지 않고 작업표에 붙였다.

태경은 그 종이를 보며 계산했다. 오늘 만들 수 있는 물량은 줄고, 수익성 높은 주문은 취소 가능성이 커졌다. 대신 안전장치가 묶인 라인은 더는 ‘정상 가동’으로 계산되지 않았다. 손실은 커졌지만, 누가 손실을 떠안을지는 조금 선명해졌다.

나린은 도장을 들고 회계 전표 앞에 섰다. 고객 결제 표시를 되돌리는 수정 전표와 전시회 물량 재고 복구표, 두 장이었다. 그녀는 먼저 전표에 도장을 찍었다. 그 소리는 견본 상자를 여닫는 소리보다 컸다.

“전시회는 취소하겠습니다.”

회계 담당자가 놀라 고개를 들었다.

“대신 거래처에는 제가 직접 전화할게요. 출고를 늦춘 이유도 제가 말하고.”

태경이 물었다. “오늘 주문은요?”

나린은 은박 라인을 바라보았다. 기계는 멈춰 있었고, 빨간 정지등만 켜져 있었다.

“그 라인으로는 받지 않겠습니다.”

그녀는 ‘우리 브랜드’라고 말하지 않았다. “내가 승인한 방식으로는 더 이상 받지 않겠습니다.”

현금은 전시회 비용을 멈추고, 남은 단순 포장 주문을 줄여 잡으면 임금일까지는 버틸 수 있었다. 회사를 살리는 계산은 아니었다. 최고수익 라인과 전시회라는 가장 보기 좋은 부분을 먼저 지운 계산이었다.

점심 무렵, 태경의 휴대전화에 서윤의 메시지가 하나 왔다. 봉투 사진 아래에 ‘일정은 내가 확인할게. 돈 얘기는 나중에 하자’라고 적혀 있었다. 그는 답장을 바로 쓰지 않았다. 오늘도 누군가의 일정표에 대신 서명하지 않는 편이 맞았다.

창고에서 돌아온 나린은 수정 전표 사본을 세 장으로 나눴다. 회계팀, 현장 반장, 자기 몫이었다. 대표 도장은 세 번째 종이에만 남아 있었다.

“이게 현금을 버티게 한다고 확신합니까?” 그녀가 물었다.

“확신은 아닙니다. 오늘 무엇을 멈췄는지는 확인할 수 있습니다.”

나린은 사본을 접지 않았다. 직원들이 보는 게시판에 붙일지, 거래처에 먼저 전화할지 순서를 고르고 있었다.

정지등 아래의 은박 라인은 조용했다. 현장 반장은 전원을 잠근 자물쇠의 번호를 작업일지에 적고, 열쇠를 자기 주머니에 넣지 않았다. 재가동 점검을 하는 정비 담당과 작업자 대표가 함께 받아야 한다는 칸을 비워 두었다. 나린은 그 빈칸을 보고도 자기 이름을 먼저 쓰지 않았다.

공장은 나흘을 버틸 수 있을지 몰랐지만, 가장 돈 되는 기계는 이제 안전장치가 돌아올 때까지 한 장의 주문도 만들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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