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나린은 공장을 살려 달라고 말하지 않았다
회귀한 자금팀 대리는 망할 회사를 살리지 않는다 · 2026. 9.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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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나린은 공장을 살려 달라고 말하지 않았다.
대신 계약서 첫 줄에 자신을 해임할 수 있다는 문장을 넣어 달라고 했다.
그 문장이 사흘치 진단료보다 비쌌다.
나린패키징의 회의실은 포장 견본으로 가득했다. 라벤더색 상자, 무광 은박 봉투, 계절 한정 문구가 찍힌 완충재. 나린은 견본 모서리를 맞추며 태경 앞에 계약서를 놓았다. 공장 바깥에서는 지게차가 팔레트를 옮겼고, 실내에서는 향료가 밴 종이 냄새가 났다.
“진단 범위는 현금, 재고, 임대 설비, 임금입니다.” 태경이 말했다. “직원 면담은 동의한 사람만.”
“브랜드 자료는요?”
“필요한 범위만.”
“그 말이 제일 위험해요.” 나린은 견본을 내려놓았다. “필요하다는 판단을 누가 합니까?”
태경은 계약서 여백에 세 줄을 그었다. 대표 열람 동의, 직원 면담 동의, 외부 공유 금지. “자료마다 목적과 열람자를 적겠습니다. 진단 결과를 투자자에게 넘길 땐 별도 동의가 필요하고요.”
나린은 고개를 끄덕이지 않았다. “대표 해임 가능성도 넣으세요.”
“제가 해임할 권한은 없습니다.”
“그럼 진단서에 대표가 문제라고 적힐 수 있다는 건 넣어야죠. 나중에 직원들 앞에서 말이 바뀌면 안 되니까.”
그녀는 ‘우리 브랜드’라는 말을 하다가 멈췄다. 손톱이 견본 상자의 모서리를 세 번 쓸었다. 태경은 그 동작이 시간을 버는 방식이라는 걸 알아챘지만, 대신 말하지 않았다.
“결과가 대표 교체나 생산 중단을 권하면, 대표가 삭제를 요구할 수 없다는 조항으로 쓰죠.”
“공개는요?”
“누구에게 공개할지는 별도 표결입니다. 진단은 판결문이 아닙니다.”
나린은 계약서의 수임료 칸보다 자료 반환 시각을 먼저 확인했다. 하루 단위의 작은 금액, 거짓 자료가 나오면 즉시 중단, 원본은 공장 밖으로 반출하지 않음. 태경에게는 첫 고객이었다. 나린에게는 브랜드를 지키기 위해 누군가의 눈을 공장 안으로 들이는 일이었다.
“사인하기 전에 한 가지.” 나린이 말했다. “직원들한테 공장 닫을 수도 있다고 바로 말하지 마세요.”
“그건 제가 약속할 수 없습니다.”
“왜요?”
“급여나 안전이 당장 위험하면, 먼저 알아야 하는 사람에게는 말해야 합니다.”
나린의 얼굴이 잠깐 굳었다. “그럼 당신은 제 편이 아니군요.”
“계약서에도 그 말은 없습니다.”
그녀는 한참 뒤에 서명했다. 대표 도장은 마지막까지 누르지 않고, 이름만 적었다. 도장은 계좌 잔액표가 맞는지 본 뒤 찍겠다고 했다. 계약은 시작됐지만, 나린은 여전히 가장 중요한 서명권을 손에 쥐고 있었다.
첫 번째 자료는 현금표였다. 둘째는 재고표였다. 숫자만 보면 공장은 다음 주까지 버틸 수 있었다. 나린은 포장지 재고가 충분하고, 대형 고객 두 곳이 결제를 기다린다고 설명했다. 태경은 결제 예정일 옆에 적힌 고객명을 보다가 묻지 않았다. 먼저 창고를 봐야 했다.
창고는 회의실보다 차가웠다. 팔레트마다 원재료 코드가 붙어 있었고, 일부는 ‘출고 완료’ 스티커가 붙은 채 그대로 쌓여 있었다. 현장 반장이 멈춰 섰다.
“그건 어제 나갔다고 들었는데요.”
나린은 곧바로 대답했다. “전산 반영이 늦었을 겁니다.”
태경은 스티커 날짜를 손가락으로 짚었다. 사흘 전이었다. 출고 완료라 적힌 원재료가 남아 있으면, 돈이 들어온 것처럼 보이는 재고와 실제 창고가 서로 다른 말을 하고 있다는 뜻이었다.
“누가 확인합니까?”
“재고팀이요.” 나린이 말했다.
“재고팀 한 명의 말 말고요. 출고지시, 운송장, 고객 수령 확인.”
반장은 휴대전화를 꺼냈다. 운송장 번호 두 개가 비어 있었다. 나린은 그 빈칸을 오래 보지 않았다. 대신 다른 팔레트로 시선을 돌렸다.
“이번 주문만 넘기면 정리됩니다.”
태경은 고개를 저었다. “정리라는 말부터 확인합시다. 팔렸다고 적은 재료가 남아 있으면, 현금표도 못 믿습니다.”
그는 계좌 잔액을 열어 달라고 하지 않았다. 아직 계약 첫날이었다. 대신 재고팀, 출고 담당, 운송 담당의 이름과 재확인 시각을 표에 적었다. 나린은 그 표를 보며 한숨을 쉬었다.
“공장 돌아가는 동안 이런 걸 다 확인하면 납기를 놓칩니다.”
“확인 안 하면 누구 돈으로 납기를 지키는지도 모릅니다.”
그날 오후, 동의한 직원 다섯 명만 면담실에 들어왔다. 태경은 공장 폐업 이야기를 먼저 꺼내지 않았다. 대신 오늘 야간을 누가 할 수 있는지, 설비가 멈추면 누구에게 연락하는지 물었다. 한 작업자가 말했다.
“야간은 다음 주부터 못 합니다. 아이 맡길 데가 없어서.”
나린은 메모를 하다가 손을 멈췄다. “그건 조정할 수 있어요.”
작업자는 고개를 저었다. “조정 말고요. 이번엔 못 한다고 적어 주세요.”
태경은 그 말을 그대로 적었다. 나린은 반박하지 않았지만, 계약서에 넣은 대표 해임 가능성보다 그 한 줄을 더 불편해했다. 브랜드는 밤에도 돌아갈 수 있었지만, 사람의 귀가 시간은 로고로 바꾸지 못했다.
면담을 마친 직원들이 나가자 나린은 의자를 돌려 창고 쪽을 보았다. “야간이 안 되면 이번 주문은 못 맞춥니다. 그 주문이 끊기면 계좌도 더 빨리 마르고요.”
“그래서 누가 야간을 할 수 없다는 사실을 먼저 적었습니다.” 태경이 말했다.
“대안을 찾을 수 있잖아요. 임시 인력이나, 다른 라인.”
“찾을 수 있다는 말과 오늘 가능한 일은 다릅니다.”
나린은 견본 하나를 집어 들었다. 은박 로고가 조명 아래서 번쩍였다. “이 제품이 제일 잘 팔립니다.”
“안전 점검은 언제 했습니까?”
그녀가 답하지 않자 태경은 제품을 내려놓았다. 계약 첫날부터 가장 수익성 높은 라인을 묻는 것은 무례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현금이 끊긴 공장에서 무례하지 않은 질문만 하면, 결국 누군가의 손이 먼저 다친다.
“내일 설비 임대계약도 보겠습니다. 정비 기록과 보험 증서까지.”
“그건 진단 범위가 넓어지는 겁니다.”
“현금표가 출고표와 다르면 이미 넓어졌습니다.”
나린은 가방에서 열쇠 꾸러미를 꺼냈다. 보관실 열쇠 하나를 손바닥에 올렸다가 다시 넣었다. “그 방에는 대표만 보는 계약서가 있어요.”
“그럼 열람 목적과 범위를 따로 쓰죠. 제가 복사하지 않고, 당신이 옆에 있는 상태에서요.”
“직원들에게 보이면 안 됩니다.”
“직원 권리에 영향을 주는 내용이면, 필요한 부분은 알려야 합니다.”
나린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당신은 계속 제 회사를 제 것이 아니게 만들려고 하네요.”
“아직 회사가 누구 것인지부터 확인하는 중입니다.”
그 말 뒤에 나린은 한참 열쇠를 쥐고 있었다. 태경이 공장을 닫자고 말하지 않았다는 사실은 그녀에게 위로가 되지 않았다. 더 나쁜 것은, 아직 닫을지 말지조차 누구도 말할 수 없다는 점이었다.
창고에서는 재고팀 직원이 다시 운송장 번호를 찾고 있었다. 누락된 두 건 중 하나는 고객이 수령을 거부했다는 표시가 있었고, 다른 하나는 발송 지시만 남아 있었다. 팔렸다고 기록된 원재료는 아무 데도 가지 않았다. 그 재료로 만든 포장지는 다음 주문의 비용까지 먹고 있었다.
태경은 재고표에 새 줄을 만들었다. ‘실물 확인 전 현금 반영 금지.’ 나린은 그 옆에 대표 확인란을 보았다.
“그 줄에 사인하면, 거래처가 불안해할 겁니다.”
“사인 안 하면 내부가 먼저 무너집니다.”
나린은 펜을 들었다가 내려놓았다. “오늘은 안 하겠습니다. 재고팀과 운송 담당 말을 더 듣고요.”
“그건 대표의 선택입니다.”
“그 문장을 계약서에 넣은 건 당신이잖아요.”
“그래서 제가 대신 사인하지 않습니다.”
나린은 재고표를 접어 가져갔다. 태경은 그녀를 붙잡지 않았다. 계약은 고객을 묶는 줄이 아니라, 서로가 거절할 수 있는 범위를 적는 종이였다.
창고를 나오는 길에 재고팀 직원이 태경을 불렀다. “운송장 하나는 찾았습니다. 고객이 받지 않은 게 아니라, 다른 창고로 보냈다고 적혀 있어요.”
“누가 지시했습니까?”
직원은 화면을 더 내려 보았다. “대표 계정인데, 결재는 없어요.”
나린이 뒤에서 멈췄다. “그건 샘플 보관입니다. 다음 달 전시회에 쓸 물량이라서.”
“현금표에는 고객 결제로 잡혔습니다.” 태경이 말했다.
“잠깐만 그렇게 처리한 거예요. 주문이 들어오면 다시 맞춰집니다.”
태경은 말하지 않았다. 잠깐이라는 말은 자금표에서 가장 오래 남는 단어였다. 직원은 출고 지시서의 날짜를 다시 확인했다. 전시회까지는 세 주, 임금일까지는 나흘이었다.
“이 재료는 공장 안에 있어도 팔린 것으로 적혀 있네요.” 직원이 말했다.
나린은 견본 상자 모서리를 맞추려다 손을 멈췄다. “오늘은 그 줄을 되돌리지 않겠습니다. 거래처에 확인하고 나서.”
“그 사이에 임금표는?” 태경이 물었다.
“대표가 확인하겠습니다.”
“확인만으로 돈이 생기진 않습니다.”
나린의 얼굴이 붉어졌다. 그러나 그녀는 재고팀에게 화면을 닫으라고 하지 않았다. 대신 전시회 보관 지시와 고객 결제 표시를 나란히 출력해 달라고 했다. 두 장의 종이가 같은 팔레트를 서로 다르게 부르고 있었다.
태경은 그 사이에 계약서의 중단 조항을 다시 읽었다. 자료가 거짓이면 중단한다는 문장은 쉬웠다. 무엇이 거짓인지 확인할 사람의 이름을 적는 일은 쉬운 적이 없었다. 그는 재고팀 직원, 운송 담당, 나린의 이름을 재확인표에 올렸다. 나린은 그 표에 아직 서명하지 않았다.
“내일 오전까지요.” 그녀가 말했다. “확인하고, 그다음에 결정하겠습니다.”
태경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 약속도 계약의 일부가 아니었다. 다만 오늘 팔렸다고 적힌 재료가 내일도 창고에 남아 있다면, 공장은 다른 결정을 해야 한다는 시간표였다.
면담이 끝날 무렵, 태경의 휴대전화가 울렸다. 서윤이 보낸 사진이었다. 봉투는 아직 열리지 않았고, 그 옆에 학교 일정표가 놓여 있었다. 태경은 사진을 확대하지 않았다. 나린패키징의 재고표가 아직 열려 있었고, 그 안에는 이미 팔렸다고 적힌 재료가 창고에 남아 있었다.
나린은 계약서 사본을 접어 가방에 넣었다. “진단 결과가 마음에 안 들면, 제가 공장을 닫아야 합니까?”
“아직 모릅니다.”
“그 대답이 제일 싫네요.”
“그래도 지금은 그게 맞습니다.”
창고 바깥에서 지게차가 멈췄다. 출고 완료 스티커가 붙은 팔레트는 움직이지 않았다. 현금표와 재고표가 서로 다른 공장을 가리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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