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확인서에는 사실보다 이름이 먼저 적혀 있었다
회귀한 자금팀 대리는 망할 회사를 살리지 않는다 · 2026. 9.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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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확인서에는 사실보다 이름이 먼저 적혀 있었다.
윤태경.
그 아래 문장은 비어 있었고, 책임 결론은 이미 채워져 있었다.
오후 두 시, 내부감사 면담실의 창문 블라인드는 반쯤 내려가 있었다. 회의실이라고 부르기에는 책상이 하나뿐이었고, 면담실이라고 부르기에는 녹음 표시등이 지나치게 밝았다. 태경은 서류 첫 장을 다시 넘겼다. ‘긴급 자금 집행 과정에서의 단독 실무 과실’. 아직 누구의 말을 듣지도 않았는데 문장만은 이미 끝나 있었다.
감사 담당자가 펜을 밀어 주었다.
“기재된 사실관계부터 확인해 주시면 됩니다.”
“사실관계가 아니라 결론이 먼저 적혀 있습니다.”
“결론은 수정 가능합니다.”
“그럼 빈칸으로 두죠.”
담당자는 잠시 펜 끝을 보았다. “지급 보류 지시, 고객 데이터 접근 기록, 채권 양도 관련 메일은 태경 씨 계정에서 확인됐습니다.”
태경은 고개를 끄덕였다. 자기 계정에서 나간 기록은 맞았다. 임금을 먼저 묶기 위해 지급을 보류한 것도 맞고, 민수의 퇴사 뒤 접근 로그를 확인한 것도 맞았다. 그 기록들이 틀렸다고 말하면 곧 다른 기록도 숨기는 사람이 된다. 다만 그것들을 한 줄로 묶어 ‘중복 팩토링을 만든 실무자’로 만들 수는 없었다.
그는 사실확인서의 문장을 지우고 표를 그었다. 왼쪽에는 자신이 확인한 문서, 가운데에는 확인하지 못한 원본, 오른쪽에는 누가 언제 지시했는지를 적었다. 지급 보류는 오전 열한 시 삼십 분. 임금 계정의 잔액 확인 뒤. 부속합의서 원본은 미확인. 최초 전송 지시는 확인 필요. 고객 데이터는 공식 주문 자료와 민수 개인 파일을 분리해 조사할 것.
“이렇게 쓰면 책임을 피하는 것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담당자가 말했다.
“피할 건 따로 적었습니다.” 태경은 가운데 칸을 가리켰다. “원본을 확인하지 못한 건 제 책임입니다. 그런데 누가 만들었는지는 아직 모릅니다.”
“그러면 조사 기간 동안 긴급 데스크 접근권은 중지될 수 있습니다.”
그 말은 처벌보다 먼저 오늘 일을 멈추게 하는 말이었다. 태경이 잃을 것은 직함만이 아니었다. 잠겨 있는 임금 계정의 변동을 확인할 권한도, 고객 취소가 들어올 때 누가 답하는지 보는 자리도 함께 끊긴다. 어제부터 남긴 기능이 다시 사람 한 명의 로그인에 매달리지 않게 만들려 했는데, 그 사람 한 명이 자신이라는 사실이 우스웠다.
“중지 절차를 적어 주세요.”
“네?”
“누가 대신 보고, 어느 시각까지 인수인계하고, 임금 계정은 누가 두 사람 확인으로 보는지요. 접근권을 끊는 건 동의합니다. 빈자리까지 비워 두진 마세요.”
감사 담당자는 손에 든 양식을 넘겼다. 대기 발령 대상의 권한을 회수하는 칸은 있었지만, 그 권한으로 확인하던 미지급 급여를 누가 넘겨받는지 적는 칸은 없었다. 태경은 그 양식 아래에 작은 종이를 덧댔다. 오후 다섯 시까지 상훈과 혜린이 잔액을 대조하고, 고객 취소가 들어오면 법무와 영업 대행자가 함께 답한다는 임시 순서였다. 금액은 한 줄도 쓰지 않았다. 숫자가 아니라 다음 손이 없으면, 잠긴 계정도 결국 또 다른 방치가 된다.
“이건 감사 범위 밖입니다.” 담당자가 말했다.
“그래서 밖에 남기는 겁니다. 조사 때문에 임금 확인이 멈췄다는 말은 나중에 누구 책임인지 더 모호해지니까요.”
담당자는 처음으로 서류의 아래쪽을 읽었다. 거기에는 책임 확정 뒤의 조치만 있었고, 오늘 오후의 지급 확인은 없었다. 태경은 그 빈칸을 보며 펜을 내려놓았다. 사실확인서에 서명하는 일은 쉬웠다. 누가 잘못했는지 미리 정해 주면, 남은 일을 볼 이유도 줄어든다.
“결론 칸은 비워 두겠습니다.” 담당자가 말했다.
태경은 종이를 돌려받았다. “사실부터 채우시죠.”
오후 네 시, 박혜린은 법무 원본보존실의 문을 안에서 잠갔다. 유리벽 밖으로 팀장이 두 번 지나갔다. 평소라면 원본을 열람할 사람이 없는 방이었다. 그러나 오늘은 공용 계정으로 전송된 부속합의서 사본이 문제였다. 사본에는 두 장만 있었고, 마지막 장의 서명란도 잘려 있었다. 누군가가 문서를 만들었다는 증거는 아니었다. 다만 누군가가 결재 순서와 다른 문장을 붙였을 가능성은 남아 있었다.
혜린은 서버 관리자에게 보존 요청을 보냈다. 공용 계정 접속자 목록, 전송 시각, 수정 이력, 백업본 해시. 네 개를 한 묶음으로 잠그는 동안 태경이 들어왔다. 면담실에서 나온 얼굴은 평소보다 창백했지만, 그는 먼저 자기에게 유리한 메모를 꺼내지 않았다. 대신 자신이 쓴 지급 보류 지시 사본을 책상 위에 놓았다.
“이것도 넣어 주세요.”
혜린이 첫 줄을 읽었다. 임금 우선 계정으로 옮기기 전, 원본 계약서 확인이 끝나지 않았다는 메모였다. 태경에게는 불리한 문장이었다. 원본을 못 봤다는 걸 스스로 남긴 셈이니까.
“이걸 빼면 더 편하겠죠.” 혜린이 말했다.
“편한 쪽이 아니라 남는 쪽으로 하죠.”
“그건 의견이고요.” 혜린은 빨간 펜을 열었다. “확인하지 못했다는 건 사실입니다. 같은 봉인에 넣겠습니다.”
그녀는 태경의 메모 위에도, 공용 계정 로그 위에도 같은 보존 스티커를 붙였다. 날짜와 시각, 열람 금지, 복제 금지. 태경에게 유리한 자료와 불리한 자료가 같은 봉투 안으로 들어가는 모습은 응원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러나 둘 중 하나만 남기면 다음 조사도 결국 사람을 고르는 일이 된다.
“민수 파일은요?” 태경이 물었다.
“별도 항목입니다. 공식 주문 데이터와 개인 고객지도는 같은 파일명이 아니고, 같은 책임도 아닙니다.”
“고객한테 먼저 연락한 흔적이 나오면.”
“나오면 그 범위만 봅니다. 중복 채권 문서에 묶어서 처리하지 않겠습니다.”
혜린은 말끝을 자르지 않고, 컴퓨터 화면에 두 개의 사건 번호를 띄웠다. 하나는 자금 문서, 하나는 영업 접근권. 화면에서는 옆에 붙어 있었지만 서로의 증거가 될 수는 없었다. 태경은 그 차이가 회사가 버티는 데 얼마나 느린 도움인지 알았다. 누군가를 빨리 내보내고 싶을 때, 다른 잘못을 옆에 붙이는 일만큼 빠른 방법은 없으니까.
혜린은 두 번호 사이에 굵은 선을 그었다. “같은 날 일어났다고 같은 원인은 아닙니다.” 그녀는 파일명을 읽어 내려갔다. 하나는 채권을 누가 먼저 받는지의 문서였고, 하나는 퇴사한 사람이 무엇을 보관했는지의 목록이었다. 둘을 섞는 순간, 어느 쪽도 제대로 확인할 수 없게 된다.
서버 관리자가 전화를 걸어 왔다. 공용 계정의 백업 보존은 다섯 시까지 가능하다고 했다. 이후에는 정기 정리 작업이 돈다. 혜린은 통화가 끝나자마자 외부 저장장치를 봉인 봉투에 넣었다. 손이 빠르다고 해서 그녀가 확신하는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확신하지 않기 위해, 누가 무엇을 열었는지를 남기는 것이었다.
“태경 씨 계정도 같이 동결됩니다.” 혜린이 말했다.
“알고 있습니다.”
“그럼 임금 확인은 상훈 씨와 제가 이중으로 받겠습니다. 당신이 확인하던 화면은 보지 마세요.”
그 말에는 신뢰보다 제한이 먼저 있었다. 태경은 반박하지 않았다. 한 번쯤은 자신이 보지 못하는 방식으로도 일이 계속돼야 했다.
저녁 여섯 시, 경영진 협상실 테이블에는 두 장의 진술서가 한 클립으로 묶여 있었다. 위쪽은 태경의 면책 합의서였다. 아래쪽은 자금팀 하위 실무자가 지시를 독단적으로 따랐다는 책임 진술서였다. 같은 종이 클립이 두 사람의 생계를 한 묶음으로 만들어 놓고 있었다.
강도윤은 창가에 서서 말했다.
“회사도 살리고, 태경 씨도 보호하는 안입니다. 긴급 데스크는 조사에서 빠지고, 실무 지시는 현장 판단으로 정리하면 됩니다.”
“현장 판단이 누구 이름으로 남습니까.”
“불필요하게 넓히지 말자는 겁니다.”
태경은 클립을 풀었다. 면책 합의서는 왼쪽에, 하위 실무자의 진술서는 오른쪽에 놓았다. 종이를 나누는 행동만으로 사람이 가벼워지지는 않았다. 그래도 묶인 채 서명하면 둘은 같은 이유로 무너진다.
“제 지급 보류와 원본 미확인은 제가 진술하겠습니다.” 태경이 말했다. “하지만 다른 사람의 고의는 제가 쓰지 않습니다.”
도윤의 표정이 조금 굳었다. “그럼 본인도 보호받기 어렵습니다.”
“보호가 뭡니까. 제가 모르는 문서를 제가 만들었다고 쓰는 겁니까, 아니면 제가 확인하지 못한 걸 확인하지 못했다고 쓰는 겁니까.”
“조사가 길어지면 임금과 주문도 흔들립니다.”
“그래서 사건을 섞자는 겁니까.”
태경은 두 항목의 조사표를 감사 담당자에게 돌려 주었다. 부속합의서 쪽에는 공용 계정 원본과 전송 지시자를, 민수 쪽에는 퇴사 뒤 고객 접촉과 보관 범위를 각각 적게 했다. 한 줄의 답변으로 둘을 처리할 수 없게 되자, 도윤이 준비한 면책서도 즉시 결론을 낼 근거를 잃었다. 느린 절차였지만, 적어도 하위 실무자의 이름을 먼저 올릴 이유도 사라졌다.
“조사 끝날 때까지 대기 발령을 받겠습니다.” 태경이 말했다. “대신 임금 계정과 필수 주문 확인은 상훈 씨와 혜린 씨가 이어받는 걸 회의록에 적으세요.”
“그렇게 하면 추천도, 퇴직 조건도 보장하기 어렵습니다.”
태경은 잠시 서류를 내려다봤다. 첫 생에서도 누군가는 보호해 주겠다고 말했다. 그때의 보호는 이름을 적는 대가로 왔다. 그는 그 문장을 기억한다고 말할 수 없었다. 지금의 도윤이 같은 사람인지도, 같은 문서를 준비한 건지도 아직 알 수 없었다. 과거는 증거가 아니었다.
“그것도 기록하세요. 오늘 제안은 면책, 추천, 퇴직 조건을 동료 책임 진술과 함께 준다는 내용이라고.”
도윤은 답하지 않았다. 회의실 에어컨 소리만 길게 났다. 태경은 두 장의 진술서를 다시 보았다. 하나를 고르면 다른 하나의 이름도 함께 눌릴 것이다. 그는 펜을 들지 않았다.
“내일 오전까지 생각해 보십시오.” 도윤이 말했다.
태경은 클립을 책상 위에 남겨 두고 일어섰다. 문을 나가기 전, 두 진술서 사이에 빈 회의록 용지를 끼웠다. 누가 무엇을 지시했는지 적히기 전에는 어느 쪽도 완성된 문장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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