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화

면책서에는 태경을 살리는 문장과 다른 사람을 묻는 문장이 붙어 있었다

회귀한 자금팀 대리는 망할 회사를 살리지 않는다 · 2026. 9.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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면책서에는 태경을 살리는 문장과 다른 사람을 묻는 문장이 붙어 있었다.

박혜린은 두 장 사이에 자를 댔다.

태경은 서명 대신 종이를 찢지 않았다. 증거가 될 문서는 화가 나도 보존해야 했다.

다음 날 오전, 경영진 최종 합의실에는 밤새 켜 둔 프로젝터 냄새가 남아 있었다. 테이블 위에 놓인 면책 합의서는 어제와 같은 종이였지만, 오늘은 맨 아래에 서명 시각 칸까지 인쇄되어 있었다. 오전 열 시 전. 권한 회수 절차보다 먼저 끝내야 하는 시간이었다.

강도윤은 앉으라는 말 없이 문서를 가리켰다.

“회사도 시간을 잃고 있습니다. 결론을 미룰수록 임금 계정과 주문 확인까지 흔들립니다.”

“그래서 책임자를 먼저 정하자는 겁니까.”

“조사 중에도 기능은 돌아가야 합니다. 태경 씨는 면책을 받고, 하위 실무자는 자기 지시 범위를 설명하면 됩니다.”

태경은 두 번째 진술서를 펼쳤다. ‘상급자 지시 없이 독자적으로 지급 경로를 변경했다’는 문장이 가운데에 있었다. 자금팀 막내가 어제 보낸 메시지 하나를 떠올렸다. _제가 뭘 잘못했는지부터 알려 주시면 안 됩니까._ 그 사람은 중복 팩토링의 원본도, 부속합의서의 작성자도 볼 수 없었다. 그런데 면책서에는 그 사람이 이미 알고도 움직였다는 뜻으로 적혀 있었다.

“제가 확인하지 못한 원본은 제가 적겠습니다.” 태경이 말했다. “하지만 이 문장은 못 적습니다.”

“그럼 조사 대상에서 빠질 방법이 없습니다.”

“빠지려고 온 게 아닙니다.”

도윤의 손가락이 테이블을 두 번 두드렸다. “그 선택이 회사에 어떤 비용을 주는지는 아십니까?”

태경은 서류 옆의 인수인계표를 꺼냈다. 상훈과 혜린이 임금 계정 확인을 이어받고, 고객 취소 문의는 영업 대행자가 답한다는 표였다. 자신의 접근권이 끝나도 남아야 하는 일들이 적혀 있었다. 회사가 기능을 살리려면 누군가를 빨리 묻어야 한다는 말은, 그 표에 없었다.

“압박을 줄이는 비용과 사실을 바꾸는 비용은 다릅니다.”

“현실적인 제안입니다.”

“현실적이면 기록에도 남겨야죠.”

태경은 면책 합의서와 하위 실무자 진술서 사이에 빈 종이를 놓았다. 자기 판단 경위를 적을 진술서였다. 지급 보류를 지시한 시각. 원본 계약을 확인하지 못한 사실. 임금 계정을 먼저 보존하려고 한 이유. 부속합의서와 민수의 고객 파일을 별도 조사하라고 요청한 내용. 그는 아는 것과 모르는 것을 섞지 않으려 천천히 줄을 나눴다.

“이건 본인을 변호하는 글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도윤이 말했다.

“그럼 확인할 수 없는 문장은 지우세요.”

면책 합의서는 끝내 서명되지 않았다. 도윤은 경영진 명의로 긴급 데스크 책임자 권한을 즉시 회수하겠다는 통지를 읽었다. 대기 발령, 시스템 접근 제한, 퇴직 조건 협의 보류. 문장이 길수록 태경이 잃는 것이 늘어났다. 그는 맨 끝의 수신 확인란에만 서명했다. 내용을 받았다는 뜻이지, 동의했다는 뜻은 아니었다.

복도에 나오자 혜린이 진술서 초안을 들고 기다리고 있었다. 그녀는 빈 법무 회의실 문을 열며 말했다.

“여기부터는 제가 고칩니다.”

회의실 책상 위에는 빨간 펜과 ‘미확인’ 도장이 놓여 있었다. 혜린은 태경의 첫 문단을 읽고 한 줄을 그었다. _회사가 더 큰 손실을 피할 수 있다는 판단 아래._

“이건 빼겠습니다.”

“그게 제 판단 이유였습니다.”

“결과를 아는 사람의 문장입니다. 당시 확인한 근거가 아니고요.”

태경은 반박하려다 멈췄다. 첫 생에서 이쯤의 손실은 더 커졌었다. 그러나 그 기억은 지금의 계약 상대가 무엇을 할지 알려 주지 않았다. 과거의 실패가 그에게 경계심을 줄 수는 있어도, 현재의 서류에 근거가 되지는 못했다.

혜린은 다음 줄 옆에 세 칸을 만들었다. 확인 자료, 미확인 자료, 정정 시각. 태경은 지급 잔액표와 은행 수신 확인을 첫 칸에 넣었다. 원본 부속합의서와 최초 전송 지시는 두 번째 칸에 넣었다. 세 번째 칸에는 조사 결과가 달라지면 언제 고칠지를 적었다.

“원본을 못 본 건 불리합니다.” 혜린이 말했다.

“알고 있습니다.”

“그럼 ‘확인했을 것이다’ 같은 말은 쓰지 마세요.”

“안 씁니다.”

그녀는 태경의 진술 끝 문장에도 도장을 찍었다. _중복 채권을 사전에 알았거나 승인했다는 사실은 현재 확인하지 못했다._ 도장 속 글자가 빨갛게 번졌다. 태경에게 유리한 부정도, 불리한 미확인도 같은 색이었다. 혜린은 뚜껑을 닫고 그 종이를 두 부로 출력했다. 하나는 감사팀으로, 하나는 태경에게 갔다.

“이의를 쓰지 않습니까?” 혜린이 물었다.

태경은 종이를 접지 않고 손바닥으로 눌렀다. “이의가 있으면 근거를 찾아서 쓰겠습니다.”

열 시 삼십 분, 긴급 데스크 화면에는 권한 회수 카운트다운이 떴다. 29분 48초. 태경은 자기 자리로 돌아갔다. 모니터에는 현금표, 작업자 지급 확인, 고객 취소 현황, 윤성정밀 치공구와 도면 이전 동의라는 미결 항목이 나란히 떠 있었다. 어떤 것은 지금 처리할 수 있었고, 어떤 것은 자기 손을 떠나야 했다.

상훈이 화면 앞에 서 있었다. 새 후임자는 경영진이 보낸 재무팀 과장으로, 태경에게 인사도 하지 않은 채 대기하고 있었다. 그는 인수인계표의 첫 줄을 읽었다.

“이 항목들은 왜 아직 열려 있습니까?”

“확인이 끝나지 않았으니까요.” 태경이 말했다.

“오늘 안에 정리해야 합니다.”

“오늘 안에 확인할 것과, 오늘 안에 닫지 말아야 할 것을 나눴습니다.”

태경은 개인 메모 폴더를 열었다. 첫 생에서 적어 둔 숫자와, 누구를 믿지 말아야 한다는 짧은 문장들이 있었다. 그 파일을 들고 나가면 다음 자리에서는 도움이 될지도 몰랐다. 그러나 지금 그것을 복사하면 민수가 남긴 빈자리와 다른 말을 할 수 없다. 그는 파일을 열지 않은 채 삭제했다. 삭제 로그가 화면에 남았고, 상훈은 아무 말 없이 시각을 적었다.

대신 태경은 공유 폴더에 공식 로그만 남겼다. 잠긴 임금 계정의 확인 주체, 취소 고객에게 답할 기한, 부속합의서 원본 보존 번호, 윤성정밀 도면 이전은 동호와 작업자 동의가 있어야 한다는 문장. 민수 개인 지도의 빈 칸도 그대로 두었다. 비어 있다는 사실을 채우기 위해 누군가의 사정을 가져오지는 않았다.

후임자는 공유 폴더의 미결 항목을 한 번에 접으려 했다. 치공구 이전 동의 옆에는 작업자 세 명의 이름과 비어 있는 서명란이 붙어 있었다. 그는 그 이름들을 보고도 파일 상태를 ‘승인 대기’에서 ‘검토 완료’로 바꾸려 했다.

“그건 완료가 아닙니다.” 태경이 말했다.

“동호 씨가 폐업하기로 한 건 맞지 않습니까.”

“폐업과 이전은 다른 결정입니다. 도구를 누가 쓰고, 도면을 어디까지 보며, 작업자가 새 구조로 갈지 말지도 따로 확인해야 합니다.”

후임자는 턱을 한 번 굳혔다. “그렇게 나누면 오늘 납기 답을 못 합니다.”

“답은 할 수 있습니다. 이전 동의 전에는 기존 범위만 가능하다고요.”

태경은 고객에게 보낼 문장까지 적어 주지 않았다. 대신 확인할 사람이 동호인지, 작업자 대표인지, 법무인지의 순서만 남겼다. 그 순서는 새 과장에게 불편했다. 누구의 허락을 기다려야 하는지 적힌 표는, 혼자 결정을 내릴 수 있다는 착각을 늦추기 때문이다.

상훈이 그 옆에서 출고 보류 목록을 열었다. “다온상사에서 다시 전화 왔습니다. 오늘 세 시까지 재고 답이 없으면 주문을 줄인답니다.”

후임자가 태경을 보았다. “그럼 이건 누가 답합니까?”

태경은 손목시계를 봤다. 카운트다운은 이제 일곱 분이었다. “상훈 씨가 답하세요. 확보 여부만. 가능하다는 말은 확인되고 나서.”

“제가 영업 담당은 아닙니다.” 상훈이 말했다.

“그래서 고객 선택을 대신하지 말라는 겁니다. 지금 아는 것만 말하면 됩니다.”

상훈은 전화를 들었다. 태경은 그 통화를 듣지 않았다. 자신이 끝까지 옆에 서서 문장을 고쳐 주면, 권한이 끊긴 뒤에도 일이 자기 판단에 매달릴 것이다. 그는 책상 가장자리로 물러나 후임자가 언제 답을 기록하는지만 보았다. 상훈이 재고 확인 시각과 대체처 문의 창구를 읽어 주자, 후임자는 처음으로 고객 취소 항목 옆에 ‘오후 3시 재확인’이라고 입력했다.

작은 문장이었지만, 태경이 남길 수 있는 것은 그 정도였다. 답을 대신하는 사람이 아니라, 다음 답을 확인할 시간을 적어 둔 사람.

권한 회수 알림이 다시 깜빡였다. 다섯 분. 태경은 자기 이름으로 열려 있던 결재 대기함을 닫았다. 새로 들어온 항목은 없었다. 없다는 사실도 누군가가 확인해야만 남는 기록이었다. 그는 그 화면을 후임자 쪽으로 돌리고, 마지막으로 상훈이 적은 재확인 시각을 읽었다.

열어 두지 않은 권한은 약속이 아니었다. 다만 다음 사람이 질문하고 기록할 자리를, 늦더라도, 남겼다. 그 시간은 공짜가 아니었다.

후임자가 화면을 넘기며 물었다.

“이 도면 이전은 왜 승인하지 않았습니까?”

“아버지 공장 물건입니다. 회사 간판으로 결정할 일이 아닙니다.”

“납기가 걸려 있습니다.”

“그래서 더더욱 동의를 받아야 합니다.”

카운트다운이 열두 분을 가리켰다. 태경은 임금 계정 확인 순서를 한 번 더 말하려다 멈췄다. 상훈은 공유 폴더의 표를 읽고, 자기 글씨로 다음 확인자와 시각을 다시 적었다. 태경의 말을 믿겠다는 표시가 아니라, 태경 없이도 확인자가 바뀌는 표시였다.

보안 게이트 앞에서 태경은 출입증을 내밀었다. 권한이 끝났다는 알림음이 먼저 울렸다. 카드가 회수함으로 떨어지기 전, 휴대전화 화면이 켜졌다. 서윤이 보낸 사진 한 장이었다.

봉투의 앞면만 찍힌 사진.

수신인은 윤태경, 날짜는 첫 생에서 그가 열어 보지 못했던 날이었다. 봉투는 아직 뜯기지 않은 채 서윤의 책상 위에 놓여 있었다.

태경은 사진을 오래 보지 못했다. 보안 게이트가 닫히고, 건물 안에서 하던 일이 자기 없이 계속되는 소리가 유리문 너머로 희미하게 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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