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화

최민수는 고객지도를 복사했다

회귀한 자금팀 대리는 망할 회사를 살리지 않는다 · 2026. 9.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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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민수는 고객지도를 복사했다.

회사 것을 훔치려는 표정은 아니었다. 다음 달 월세를 계산하는 표정이었다.

스탠드스틸 승인 다음 날 새벽, 한림리빙 영업팀에는 민수 말고 아무도 없었다. 복합기만 밤새 뱉어 낸 출고 확인서를 물고 있었다. 유리문 바깥으로는 청소 용역 직원이 밀대를 끌고 지나갔다. 출입카드가 아직 살아 있는 사람은 모두 회사 사람처럼 보였지만, 민수는 그 구분이 급여일을 넘기지 못한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는 공유 폴더를 열었다. 고객별 주문서, 견적서, 납기 변경 메일, 담당자 연락처가 날짜순으로 뒤엉켜 있었다. 전날 태경이 시킨 정리는 단순했다. 누가 무엇을 주문했고, 어느 금액이 이미 출고됐고, 어느 연락처가 개인정보 동의를 받았는지만 남기라는 것이었다. 영업부가 어제까지 무엇을 팔았는지보다, 오늘 누가 고객에게 전화할 자격이 있는지를 정리하라는 말이었다.

민수는 먼저 공식 주문표를 새 폴더에 옮겼다. 가격표와 세금계산서 번호도 빠짐없이 넣었다. 사내 계정에서만 열리도록 권한을 좁히고, 개인 휴대전화 번호가 적힌 오래된 메모는 목록에서 분리했다. 손이 익은 일이었다. 누군가의 이름 옆에 ‘오후엔 연락 금지’, ‘재고보다 납기 설명을 먼저’, ‘대체 생산처 물어보면 숨기지 말 것’이라고 적어 둔 것도 그 손이었다.

문제는 그 메모들이 주문서보다 먼저 작동했다는 데 있었다.

민수는 USB 저장장치를 꽂았다. 파일 이름은 ‘고객지도_개인정리’였다. 그는 공식 주문과 가격 이력은 선택하지 않았다. 대신 자신이 만든 담당자별 대화 이력, 결정이 늦어지는 이유, 취소를 받아들이는 순서, 급하면 어느 협력업체를 먼저 찾는지를 골라 넣었다. 고객 이름만 바꾸면 되는 얇은 파일이 아니었다. 다만 회사 폴더만 남겨 두면 다음 사람은 누구에게 어떤 말을 해야 하는지부터 다시 배워야 했다.

진행 막대가 반쯤 찼을 때, 민수는 화면 오른쪽의 급여 명세서를 봤다. 이번 달 급여는 아직 예정이었다. 퇴직 보상 기준은 없었다. 은행이 허락한 72시간에는 임금과 필수 주문만 적혀 있었다. 나가는 영업사원의 월세나, 그 사람이 데려온 고객에게 어떤 얼굴로 작별 인사를 할지는 그 표의 항목이 아니었다.

그는 잠시 USB를 뽑을 뻔했다. 그러다 고객 하나의 메모를 열었다. 세림유통의 구매팀장은 납기보다 담당자가 바뀔 때를 더 싫어했다. 민수는 그 문장을 개인 파일에 남기고, 회사 폴더에는 ‘담당 변경 시 사전 공지 필요’라고만 적었다. 둘 중 어느 쪽이 회사 것인지 설명하기 어려웠다. 그래서 더 위험했다.

복사가 끝난 뒤, 민수는 사내 폴더에서 자기 개인 메모 하나를 지웠다. 세림유통 구매팀장이 아이 병원 때문에 금요일 오후 연락을 피한다는 내용이었다. 주문도 가격도 아니지만, 남의 사정으로 일을 편하게 만든 기록이었다. 그는 개인 파일에도 그 문장을 넣지 않았다. 다만 고객이 먼저 꺼낸 사정은 다음 일자리로 가져가지 않겠다고, 빈 메모장 첫 줄에 적었다.

아홉 시가 조금 넘자 윤태경이 비상계단 문을 열었다. 민수는 퇴사서와 USB를 주머니에 넣은 채 난간 옆에 서 있었다. 태경의 손에는 출력한 접근 로그가 들려 있었다. 종이 맨 위에 민수의 계정과 새벽 다섯 시 십칠 분이 적혀 있었다.

“회사 자료를 가져간 겁니까.”

민수는 종이를 보지 않았다. “어느 자료를 말하는지부터 정합시다.”

“주문, 가격, 연락처.”

“주문하고 가격은 폴더에 다 올렸습니다. 연락처는 고객한테 확인받고 넘길 수 있는 것만 남겼고요.”

“그럼 방금 복사한 건.”

민수는 손잡이를 한 번 눌렀다 놓았다. “내가 누굴 어떻게 설득했는지 적어 둔 메모입니다. 그 사람들한테 회사가 다음 달에도 월급을 준다는 말은 못 하잖아요.”

태경은 계단 아래를 보았다. 사람들이 오가기 시작하면 이 대화도 곧 소문이 될 터였다. 그는 USB를 내놓으라고 말할 수 있었다. 비상계단에서 목소리를 높이면 민수는 파일을 지우거나 복사 범위를 숨길 것이고, 회사는 그 과정을 증명할 방법조차 잃는다. 그렇다고 아무 말도 하지 않으면, 고객과 직원의 개인정보가 어떤 저장장치에 있는지조차 모른 채 하루를 넘기게 된다.

“개인정보와 공식 주문 내역은 오늘 안에 분리해 주세요. 회사가 고객에게 직접 확인할 수 있게요.”

“그건 하죠.”

“가격 이력도요.”

“그것도요. 대신 제가 쌓은 관계까지 회사 장부라고 쓰진 마세요.”

태경이 고개를 들었다. “관계가 회사 비용으로 만들어진 부분도 있습니다.”

“그럼 회사가 사람을 자산이라고 부를 때 월세도 내줍니까?”

그 말은 비난이라기보다 이미 계산을 끝낸 사람의 질문이었다. 민수는 한림리빙에 남아 있을 때도 고객을 숫자로만 부르지 않았다. 납기가 밀리면 먼저 사과할 사람을 골랐고, 납품이 막히면 대체처를 알려 줄지 말지를 두고 밤마다 계산했다. 회사는 그 시간을 월급으로 샀다고 말할 수 있었다. 민수는 그 시간이 자기 다음 생존을 위해 남겨야 할 자산이라고 믿었다. 둘 중 하나만 옳다고 하기에는, 퇴직 조건이 빈 종이였고 고객 동의는 여러 곳에서 빠져 있었다.

“고용 보장도, 보상 기준도 지금은 못 약속합니다.” 태경이 말했다. “하지만 가져간 범위를 숨기는 건 다른 문제예요.”

“안 숨깁니다. 다만 전부 내놓진 않겠습니다.”

“무엇을 넘기고 무엇을 남길 건지, 문서로 적죠.”

민수는 잠시 웃었다. “그건 당신답네요. 말로는 나가지 말라고 안 하면서, 기록으로는 남기겠다는 거.”

“나가지 말라는 말도 못 합니다. 여기 남는 게 안전하다고 장담할 수 없으니까.”

그 대답 뒤에는 약한 자리에 남은 비용이 있었다. 민수는 퇴사서의 날짜를 가리켰다. 오늘부로라 적혀 있었다. 태경은 그 날짜를 지우라고 하지 않았다. 대신 인수인계 목록을 두 칸으로 나눴다. 회사에 남겨야 하는 주문·가격·승인 연락처, 민수가 개인적으로 보유하되 회사가 범위를 확인할 수 없는 대화 맥락. 두 번째 칸 옆에는 ‘고객별 확인 전 추가 사용 금지’라고 적었다.

“그 조항까지 받으면 서명합니다.” 민수가 말했다.

“회사 쪽도 같은 조항을 지키겠습니다. 고객한테는 담당 변경과 확인 요청을 보내고, 선택은 고객이 하게 하죠.”

“대체처도 알려줄 겁니까?”

“필요하면요. 붙잡으려고 거짓 납기부터 말하지는 않겠습니다.”

민수는 퇴사서 아래에 서명했다. 충성의 반대말은 배신이 아니라, 더는 상대의 약속을 대신 믿지 않는 일이었다. 서명은 그 사실을 멋있게 만들지 않았다. 다만 누가 무엇을 책임지지 않는지 또렷하게 남겼다.

열 시 정각, 상훈이 영업 시스템 관리 화면을 열었다. 민수의 계정은 인수인계 목록이 저장된 뒤에야 비활성으로 바뀌었다. 태경은 그 과정을 옆에서 지켜보며 두 번 확인했다. 빨리 끊으면 고객 문의에 답할 사람이 사라진다. 늦게 끊으면 누가 어떤 파일을 더 옮겼는지 알 수 없다. 그래서 끝나는 시각을 정하고, 그 시각 이후의 접근은 기록으로 남기기로 했다.

상훈은 은행에서 받은 조건부 유예 문서를 모니터 옆에 붙여 두었다. ‘승인 범위 외 지급 금지’ 아래에는 퇴직 보상이나 영업 접근권 정리 비용이 없었다. 누락은 금지보다 조용했지만, 나중에는 더 비싼 청구서가 되곤 했다.

태경은 세림유통을 포함한 핵심 고객 여섯 곳에 공지를 보냈다. 담당자가 바뀌었고, 기존 주문·가격·개인정보의 확인 창구는 한림리빙이라는 내용이었다. 납품을 계속할지, 주문을 줄일지, 대체 공급처를 찾을지는 고객이 선택할 수 있게 했다. 문자 하나를 보내는 일은 쉬워 보였지만, 그 뒤에는 취소될 주문과 줄어들 현금이 함께 붙어 있었다.

첫 번째 회신은 스무 분 뒤에 왔다. 다온상사는 다음 주 물량을 절반으로 줄이겠다고 했다. 담당 변경이 문제가 아니라, 새 담당자가 언제까지 원단을 확보할 수 있는지 확인할 사람이 없다는 이유였다. 태경은 답장을 쓰다 멈췄다. ‘확보할 수 있습니다’라는 문장은 아직 근거가 없었다. 그는 상훈에게 공급처 확인이 끝나는 시간을 물었고, 상훈은 오후 세 시 전에는 확답할 수 없다고 말했다.

“그대로 보내죠.” 태경이 말했다. “확인 전이라고.”

상훈이 고개를 돌렸다. “그럼 취소할 수도 있습니다.”

“취소할 권한도 고객한테 있습니다.”

태경은 다온상사에 재고 확인 시각과 대체처 문의 창구를 함께 보냈다. 매출을 붙잡는 말은 아니었다. 그 대신 고객이 민수 개인 번호를 찾아 헤매지 않게 하는 말이었다. 한림리빙이 남길 수 있는 것은 계약서 한 장보다 먼저, 누가 어떤 답을 책임지는지의 순서일지도 몰랐다.

상훈은 민수 계정의 마지막 접속 기록을 저장한 뒤 파일 목록을 출력했다. 목록에는 공식 폴더에서 빠진 파일이 없었다. 그러나 목록만으로는 USB 안에 무엇이 있는지 알 수 없었다. 태경은 그 빈칸을 ‘문제 없음’으로 바꾸지 않았다. 고객별 확인표 첫 줄에 ‘개인 저장 범위 미확인’이라고 적고, 그 옆에 자신의 이름을 썼다. 접근권을 끊은 대가로 생긴 무지는 누군가의 결재란에 남아야 했다.

민수는 출입구 앞에서 사원증을 반납했다. 플라스틱 카드가 수거함 바닥에 닿는 소리가 작았다. 그는 뒤돌아보지 않고 휴대전화를 켰다. 세림유통 구매팀장의 메시지가 먼저 와 있었다.

_민수 씨, 담당 바뀌었다는 메일 봤어요. 우리 주문은 누가 설명해 줍니까?_

민수는 답장을 쓰다 지웠다. 대신 회사 공지의 담당 번호를 다시 보냈다. 그 아래에 한 줄을 덧붙였다.

_계속 거래할지 말지는 회사 설명을 들은 뒤 결정하세요. 필요하면 대체처도 알려 드릴게요._

회사를 떠났다고 관계가 전부 자기 것이 되는 것은 아니었다. 그렇다고 회사가 사람 하나의 시간을 통째로 되찾는 것도 아니었다. 민수는 USB가 든 주머니를 만지고 건물 밖으로 나갔다.

태경이 메일함을 열자 감사팀의 사실확인서가 도착해 있었다. 중복 팩토링 의심 건과, 결재 순서가 맞지 않는 부속합의서 사본이 첨부돼 있었다. 수신 대상에는 윤태경 개인의 이름이 첫 줄에 적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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