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권자들은 감동받지 않았다
회귀한 자금팀 대리는 망할 회사를 살리지 않는다 · 2026. 9.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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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권자들은 감동받지 않았다.
윤태경은 그 사실이 오히려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감동은 숫자를 흐리고, 흐린 숫자는 나중에 누군가의 책임으로 돌아왔다.
회의실 벽에는 세 장의 표가 붙어 있었다. 고객의 부분 주문과 반환 조건, 동호가 서명한 지그 사용표, 작업자들의 선택표. 상훈은 그 세 장 아래에 공급처 확인 대기라는 네 번째 종이를 붙였다.
“이 조합으로 전량 회생은 안 됩니다.” 상훈이 말했다. “다만 이틀짜리 부분 납품은 가능합니다. 그 매출은 기존 채무 상환에 섞지 않고, 새 작업의 자재비와 임금, 반납 비용에만 씁니다.”
채권자 대표는 곧바로 물었다. “우리는 뭘 얻습니까?”
“확인할 수 있는 순서를 얻습니다.”
“그게 돈입니까?”
“아직은 아닙니다. 하지만 개인보증으로 받은 돈이 어디에 쓰였는지 모르는 것보다는 낫습니다.”
태경은 아들의 말이 차갑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차갑게 들려야 할 때가 있었다. 공장 명함과 가족 사정이 앞에 나오면, 이미 받은 돈도 앞으로 받을 돈도 한 덩어리로 녹아 버렸다.
혜린은 일곱 줄짜리 조건표를 읽었다. 고객의 부분 주문 범위, 자재 공급처 확인 시각, 지그 사용 종료 시각, 작업자별 참여 시간, 임금 지급 계좌, 기존 법인 채무와의 분리, 다음 검증 날짜. 하나라도 빠지면 채권자들은 즉시 다시 회수 절차를 시작할 수 있었다.
“72시간입니다.” 채권자 대표가 말했다. “그 안에 첫 납품과 계좌 이체 내역을 보여 주십시오. 못 하면 이 유예는 끝납니다.”
“그리고 개인보증은?” 태경이 물었다.
“이번 유예의 조건이 아닙니다. 다만 이후 자금은 별도입니다.”
태경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은 승인이 아니었다. 집을 살렸다는 말도 아니었다. 다만 누군가의 집을 담보로 잡지 않고도, 공장이 실제로 무엇을 할 수 있는지 증명할 시간이 생긴 것이었다.
채권자 대표가 서류를 덮지 않은 채 덧붙였다. “대표님 공장 채권도 우선순위에서 빠지지 않습니다. 다만 이번 부분 주문에서 나오는 돈을 공장 채권으로 돌리면, 저희는 유예를 취소합니다.”
태경은 고개를 들었다. 동호가 내민 지그와 작업자들이 낸 시간을 생각하면, 공장 채권을 먼저 받는 것이 마땅해 보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 돈을 당겨오면 새 작업의 임금과 자재비가 또 줄어든다. 아들이 만든 선택을, 자기 공장 채권으로 다시 눌러 버리는 셈이었다.
“그 돈은 새 작업에 쓰세요.” 태경이 말했다.
채권자 대표는 되물었다. “대표님 공장 몫을 미루겠다는 겁니까?”
“미루는 게 아니라 분리하는 겁니다. 공장 채권은 공장 채권대로 남깁니다. 다만 이번 주문이 그걸 갚는 돈이라고 쓰지는 마세요.”
상훈은 태경을 보았다. 칭찬도 반대도 하지 않았다. 대신 표의 맨 아래에 새 줄을 만들었다. ‘동성정밀 기존 채권: 미지급, 본 유예 자금과 혼합 금지.’
동호는 그 줄을 읽다가 고개를 돌렸다. 아버지가 자신에게 빚진 돈을 포기한 것은 아니었다. 포기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번 일의 대가를 가족의 희생으로 덮지 않을 수 있었다.
“그 줄도 채권자들에게 보냅시다.” 동호가 말했다.
“보내지.” 태경이 답했다.
혜린은 조건표 여섯 번째 줄을 수정했다. 기존 법인 채권과 새 작업 비용의 분리. 그녀는 그 옆에 ‘공개 확인’이라고 적었다. 사소한 문구였지만, 태경은 그것이 집을 담보로 잡지 않는 문구만큼 어렵다는 것을 알았다. 돈을 못 받는 사람의 이름을 지우지 않고, 그 돈을 다른 사람의 시간에서 빼앗지도 않는 일.
회의가 끝난 뒤 상훈은 계단참에서 아버지에게 작은 메모장을 건넸다. 첫 장에는 일곱 개의 확인 항목이 적혀 있었다. 고객 수신 시각, 공급처 동의 범위, 작업자 선택표, 지그 반납, 임금 계좌, 비용 분리, 다음 검증일.
“개인보증 없는 경로는 이 일곱 개가 맞아야 합니다.”
“하나라도 틀리면?”
“유예가 끝납니다. 그래서 처음부터 더 큰 약속을 받지 않는 겁니다.”
태경은 메모장을 닫지 않고 주머니에 넣었다. 예전에는 결재가 서류를 끝내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이제는 결재 전에 누가 빠질 수 있는지를 확인하는 일이 더 많아졌다.
작업장으로 돌아왔을 때 동호는 지그 옆에서 손목시계를 보고 있었다. 반납 시각까지 두 시간 반 남아 있었다. 지석이 조립대에 기대며 말했다.
“이 수량이면 고객이 또 줄일 겁니다.”
“그러면 줄인 걸 받겠지.” 동호가 대답했다.
“그렇게 해서 남는 게 있습니까?”
동호는 절단기 쪽을 보았다. 서연은 퇴근 시간에 맞춰 앞치마를 벗고 있었고, 대체 인력은 아직 오지 않았다. 동호는 그 빈자리를 보고도 전화기를 들지 않았다.
“남는 걸 만들겠다고 사람 시간을 먼저 가져오면, 나중에 남는 건 불량뿐이야.”
지석은 더 말하지 않았다. 그는 작업표에 실제 수량을 적었다. 계획 수량에서 모자란 칸은 비워 두지 않고 ‘미출고’라고 썼다.
새벽 가까이, 공급처에서 회신이 왔다. 미정이 출력물을 들고 뛰어왔다. 문서에는 사용 가능한 자재 수량과 승인 범위가 적혀 있었고, 메일 수신 시각도 남아 있었다. 혜린은 붉은 도장 옆 빈칸을 확인한 뒤, 이번에는 펜을 멈추지 않았다.
“이 시간은 맞습니다.”
그 한마디에 상훈이 자재표의 대기 표시를 지웠다. 동호는 추가 자재 상자를 열었다. 작은 부품들이 작업대에 쏟아졌고, 절단기의 소리는 조금 더 오래 이어졌다. 누군가의 용기 때문에 생긴 소리가 아니라, 확인할 수 있는 자재가 확인된 시간에 도착했기 때문에 생긴 소리였다.
첫 상자가 출고문을 통과할 때 고객은 직원 둘을 보냈다. 그들은 수량을 세고, 검수표와 부분 인수표를 대조했다. 민수는 먼저 취소 물량의 반환 일정부터 설명했다.
“이 수량은 인수하시면 됩니다. 나머지는 취소로 남고, 선급금은 계약서의 날짜에 반환합니다. 추가 발주는 지금 약속하지 않습니다.”
고객 담당자는 말없이 표를 읽었다. “다른 데는 전량 가능하다고 합니다.”
“그럴 수 있습니다.” 민수가 말했다. “저희는 오늘 가능한 만큼만 적었습니다.”
태경은 그 대화를 들으며 손을 주머니에 넣었다. 고객을 붙잡고 싶은 마음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그러나 붙잡기 위해 더 큰 거짓말을 하면, 지금 출고되는 상자까지도 나중에는 거짓말의 증거가 된다.
담당자는 부분 인수표에 서명했다. 그는 돌아서기 전에 말했다. “다음 검증일까지 자료를 보내 주세요. 그때도 이 방식으로 말하면, 다음 주문을 다시 보겠습니다.”
희망이라는 말은 나오지 않았다. 대신 다음 날짜가 생겼다. 태경은 그것이 더 믿을 만하다고 생각했다.
출고 차량이 골목 끝으로 사라진 뒤, 동호는 약속한 시각보다 십 분 먼저 지그를 작업대에서 뺐다. 지석이 아쉬운 표정으로 보았지만 동호는 금속판을 천으로 감쌌다.
“아직 조금 더 할 수 있습니다.”
“조금 더는 내일 표에 쓰면 돼.” 동호가 말했다. “오늘 빌린 건 오늘 돌려준다.”
그는 반납 확인란에 시각을 적고 태경에게 종이를 건넸다. 태경은 서명 대신 확인 표시만 남겼다. 공장 주인이 아들의 도구를 받는 모양은 어색했지만, 어색함이야말로 이번 선택이 예전과 다르다는 증거였다.
상훈은 마지막으로 계좌 이체 내역을 확인했다. 새 작업자 다섯 명의 임금 일부와 자재비가 같은 순서로 나갔다. 공장 채권은 그 아래, 미지급이라는 글자와 함께 남아 있었다. 태경은 그 줄을 지우지 않았다.
회의가 끝난 뒤 동호가 조용히 말했다. “내 지그는 오늘 저녁 여섯 시부터 내일 오후 다섯 시까지입니다. 그 뒤에는 돌려받겠습니다.”
“그래.”
“사장 이름으로 연장하지 마.”
태경은 대답 대신 표에 적힌 반납 시각을 다시 확인했다. 아들이 만든 경계는 공장을 돕기 위해서가 아니라, 공장이 다시 사람들을 집어삼키지 못하게 하기 위한 경계였다.
작업은 해가 지고 시작됐다. 절단기 소리, 조립대 위의 나사 굴러가는 소리, 검수대에서 자를 재는 소리. 동호는 지그를 끼운 뒤 서연에게 공정 순서를 보여 주었다. 서연은 약속대로 야간에 남지 않았고, 다른 조립기사가 두 시간만 자리를 채웠다. 빈 시간은 비어 있는 채로 계산됐다.
“모자랍니다.” 지석이 말했다.
“알아.” 동호는 불량 상자를 열었다. “모자라는 시간으로 가능한 수량만 낸다.”
그 말은 납기를 포기하는 말처럼 들렸지만, 실은 남은 수량을 거짓말로 만들지 않겠다는 말이었다.
새벽 두 시, 공급처 확인 메일이 도착했다. 미정은 수신 시각을 적고, 승인 범위가 적힌 첨부파일을 출력했다. 혜린은 붉은 도장 옆의 빈칸에도 같은 시각을 옮겨 적었다.
“이제 자재는 쓸 수 있습니다.”
동호는 아무 말 없이 다음 상자를 열었다. 금속 조각들이 작업대에 놓이자, 멈춰 있던 절단기 소리가 다시 일정해졌다.
다음 날 오후, 첫 상자가 출고문을 나갔다. 고객은 수량을 세고 일부만 인수했다. 남은 수량은 취소로 남았다. 민수는 그 취소 줄 옆에 반환 예정액과 날짜를 입력했다. 누구도 그 줄을 지우자고 하지 않았다.
태경은 출고 차량이 떠나는 것을 보다가 상훈에게 말했다.
“이게 성공이냐.”
“아니요. 오늘 가능한 걸 한 겁니다.”
“그럼 다음은?”
“다음 검증 날짜를 지키는 겁니다.”
태경은 웃지 않았다. 그러나 예전처럼 더 큰 약속을 하자고도 하지 않았다. 그는 작업자 선택표의 거절 두 줄과, 고객 취소 줄과, 동호의 반납 시각을 모두 다시 보았다. 공장은 전부 살아난 것이 아니었다. 다만 누구를 묻어야 움직이는지 모르는 방식으로는 살지 않게 됐다.
그날 저녁, 민수의 컴퓨터에서 공유 완료 알림이 울렸다. 영업팀이 모아 둔 고객 연락처와 납기 기록이 권한별 폴더로 옮겨지고 있었다. 그런데 민수는 별도의 개인 저장장치에도 같은 파일을 복제하고 있었다. 그는 화면을 끄지 않았다. 태경이 복제 진행 막대를 본 순간, 민수는 파일 이름을 바꾸지 않고 말했다.
“이건 내일 설명하겠습니다. 지금은 출고 확인부터 하죠.”
태경은 답하지 않았다. 72시간 유예는 시작됐고, 공장 밖의 관계까지는 아직 정리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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