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동호는 공장 문을 열면서 간판을 보지 않았다
회귀한 자금팀 대리는 망할 회사를 살리지 않는다 · 2026. 9.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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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동호는 공장 문을 열면서 간판을 보지 않았다.
밤새 비를 맞은 글자는 여전히 한림테크라고 읽혔다. 하지만 그 글자가 오늘 들어오는 사람들의 월급도, 내일 나갈 부품의 규격도 대신 정해 주지는 않았다.
그는 출입문 옆의 사장 명패를 떼어 회의실 탁자 위에 올려놓았다. 그리고 그 자리에 공정표 한 장과 장부 한 장, 작업자 명단 한 장을 펼쳤다. 지그가 필요한 작업, 조립대가 필요한 작업, 고객 동의가 필요한 주문. 각각의 종이 위에는 아직 빈칸이 많았다.
“오늘은 박수칠 사람을 정하는 자리가 아닙니다.” 동호가 말했다. “누가 어디서 일할지, 어떤 조건이면 일하지 않을지 적는 자리입니다.”
작업장에 모인 사람들은 서로를 보았다. 지석은 명단을 들고 있었고, 미정은 자재 상자별로 공급처 이름을 적어 두었다. 태경은 회의실 문가에 섰다. 아들이 아니라 공장 주인이 들어온 자리처럼 보이지 않으려고, 그는 의자를 빼지 않았다.
“먼저 지그 얘기부터 하죠.” 동호가 자기 작업대에서 가져온 금속판을 탁자에 올렸다. “이건 내 돈으로 산 것도 아니고, 내 이름으로 등록된 것도 아닙니다. 그렇다고 누가 여기 있는 사람들 동의 없이 들고 가도 되는 물건은 아닙니다.”
누군가가 물었다. “그럼 누가 결정합니까?”
“쓸 사람하고, 빌려주는 사람하고, 그 작업으로 돈 받는 사람이 같이 결정합니다.”
“사장님은요?”
동호는 명패를 가리켰다. “그 이름으로 결정하면 편하겠죠. 그런데 편하게 결정한 대가는 대개 밑에서 냈습니다.”
말은 크지 않았지만, 작업장 안에서는 오래 남았다. 동호는 상훈에게 고개를 돌렸다. 상훈은 준비해 온 양식을 꺼냈다. 설비 사용은 소유권 이전이 아니라 한 달 단위 사용 동의로, 주문은 고객이 수신 시각까지 확인한 건만, 작업자는 각자 새 작업을 선택한 경우에만. 조건은 셋으로 나뉘어 있었다.
“임금은?” 미정이 물었다.
“새 작업의 임금은 새 작업에서 나옵니다.” 상훈이 말했다. “기존 채무와 섞지 않습니다. 다만 주문이 취소되면 멈추는 시점도 미리 적습니다.”
“그럼 내일 끊길 수도 있다는 거네요.”
“그럴 수 있습니다.”
한 사람이 낮게 웃었다. 웃음은 화난 사람의 것보다 더 메말랐다.
“그럼 우리는 새 간판의 임시 인력입니까.”
동호는 그 질문을 피해 가지 않았다. 그는 탁자 위의 명패를 손가락으로 밀었다. 플라스틱 밑면이 나무에 긁히는 소리가 났다.
“아닙니다. 그래서 오늘 새 간판도 만들지 않습니다. 한 달 뒤에도 여기서 일하겠다고 약속할 수 없는 사람한테, 내가 회사 이름으로 기다리라고 말할 수는 없어요.”
“그럼 왜 모았습니까?”
“각자 내놓을 수 있는 조건을 듣고, 그 조건으로 되는 작업이 있는지 보려고.”
동호는 공정표를 뒤집었다. 뒷면에는 ‘참여’, ‘조건부 참여’, ‘불참’, ‘대기’ 네 줄이 있었다. 그는 첫 줄에 자신의 이름도 쓰지 않았다.
“나부터 적겠습니다. 지그는 평일 주간에만 빌려줍니다. 반납 시각 지나면 끊습니다. 내 이름으로 새 주문을 받지는 않습니다. 내가 맡는 건 가공 순서 설명과 지그 관리까지입니다.”
지석이 물었다. “그럼 현장 책임은 누가 집니까?”
“공정마다 다르게 적지. 절단은 최 반장, 조립은 지석이, 검수는 서연이 가능한 시간에만. 한 사람이 빠지면 그 공정은 빠진 걸로 계산한다.”
“사장님은?”
“법인 정리와 기존 공장 책임.” 동호가 답했다. “새 작업의 인원 배치는 내가 결재하지 않습니다.”
이 대목에서 태경이 한 걸음 앞으로 나왔다. 동호는 아버지가 이제야 반대할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태경은 선택표의 빈 칸을 보다가 말했다.
“내 이름을 빼는 게 책임을 빼는 건 아니다.”
“알아요.”
“기존 법인의 체불, 세금, 설비 소유 문제는 내가 계속 상대한다. 다만 그걸 이유로 여기 있는 사람들한테 새 작업을 하라고는 안 하겠다.”
동호는 그 말을 받아 적지 않았다. 적는 일은 상훈에게 넘겼다. 약속은 말한 사람의 글씨보다, 나중에 확인할 사람이 읽을 문장으로 남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박혜린은 각 문장 옆에 동의 방식도 붙였다. 작업자 선택은 자필 확인 또는 녹취 동의, 설비 사용은 소유·점유·사용범위 분리, 주문은 고객 수신 확인. 붉은 펜 끝이 한 차례 멈췄다. 전날 문서와 같은 모양의 확인 도장이었다.
“또 그 도장입니까?” 상훈이 물었다.
“도장이 문제라는 뜻은 아닙니다.” 혜린이 말했다. “도장만 있고, 누가 언제 무엇을 받았는지가 비어 있으면 문제입니다.”
그녀는 빈 칸에 수신 시각을 적을 자리를 만들었다. 동호는 그 빈칸이 못마땅했다. 공장은 기다려 주지 않는데, 시각 하나를 확인하느라 주문을 놓칠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는 자기 지그의 반납 시각을 막 적어 둔 참이었다. 자기 시간은 중요하고 남의 시간은 대충 넘어가도 된다고 말할 수는 없었다.
잠깐 쉬는 동안, 서연이 동호에게 다가왔다. 그녀는 참여표를 손에 쥔 채였다.
“주말 제외라고 적으면 정말 빼 주실 겁니까?”
“그래야지.”
“납기 안 맞아도요?”
“그럼 납기를 다시 말해야지.”
서연은 종이를 내려다봤다. “예전엔 그렇게 말하면 다음번 명단에서 빠졌습니다.”
동호는 대답하지 못했다. 공장을 지킨다는 말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다음번 명단에서 사라졌는지, 그는 정확히 세어 본 적이 없었다. 이제라도 그 숫자를 다시 세면 늦었다는 사실만 선명해질 것이다.
“이번엔 빠지면 빠진 이유도 적겠습니다.” 그가 말했다. “누구 탓인지 말하기 전에, 어떤 시간이 안 맞았는지.”
서연은 그제야 선택표에 서명했다. 글씨는 작았지만 주말 제외라는 조건은 선명했다.
동호는 작업장 창으로 들어오는 오후 빛을 보았다. 한림테크라는 글자는 밖에 그대로 있었고, 안에서는 다섯 사람의 가능한 시간과 두 사람의 거절이 새로 적히고 있었다. 간판을 끄는 일은 없었다. 다만 간판이 사람들을 대신해 대답하던 방식은 조금씩 멈추고 있었다.
동호가 그 말을 이어받았다. “그래서 지금 선택하라는 겁니다. 남는다고 약속 못 합니다. 대신 나갈 길을 막지 않겠습니다.”
첫 번째로 손을 든 것은 젊은 조립기사 서연이었다. 그는 새 작업에 참여하되 주말 근무는 하지 않겠다고 했다. 아이를 돌봐야 한다는 말이 뒤따랐다. 예전 같으면 동호는 납기부터 계산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서연의 이름 옆에 ‘주말 제외’라고 적었다.
두 번째 사람은 조건을 묻지 않고 거절했다. 다른 공장 면접을 보러 가야 한다고 했다. 지석이 잠깐 굳었지만, 동호는 고개를 끄덕였다.
“언제까지 답할 수 있습니까?”
“오늘 오후.”
“그때까지 작업대는 비워 두겠습니다. 나갈 때 누구 허락 받을 필요 없습니다.”
거절은 기계가 멈추는 소리보다 조용했다. 그러나 동호는 그 조용함이 공장에 남을 빚이라는 걸 알았다. 누군가를 붙잡지 않는다고 해서 빈자리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었다.
박혜린은 벽 쪽에서 서류를 정리하다가 붉은 펜으로 세 칸을 표시했다. 장비 사용 동의, 작업자 선택, 발주처 확인. 서로 다른 날짜가 필요했고, 한 장의 도장으로 묶을 수 없었다.
“이걸 한 번에 결재하면 안 됩니까?” 태경이 물었다.
“안 됩니다.” 혜린은 곧바로 대답했다. “결재는 책임이 어디까지인지 보여야 합니다. 장비를 빌려준 사람이 주문을 책임지는 건 아니고, 주문을 받은 사람이 작업자를 데려갈 권한을 얻는 것도 아닙니다.”
태경은 의자 등받이를 쥐었다. 누군가가 같은 질문을 계속하는 것은 답을 몰라서가 아니라, 예전 방식으로 돌아갈 구멍을 찾기 때문이라는 걸 그는 알았다. 하지만 혜린은 그 구멍을 막는 대신, 각 사람 앞에 따로 문을 열어 두고 있었다.
점심 무렵, 동호는 남은 인원과 공정표를 다시 맞췄다. 서연이 빠진 주말 공정을 빼자 이틀 납기 중 반나절이 모자랐다. 지석은 다른 조립기사에게 물었고, 그는 평일 야간 두 시간만 가능하다고 했다. 동호는 그 조건을 받아 적었다. 가능하다는 말보다 불가능한 시간을 먼저 적는 일이 낯설었다.
“이대로면 절반 물량도 위험합니다.” 지석이 말했다.
“그럼 고객한테 그렇게 말해야지.”
“그래도 해 봐야 하지 않습니까.”
“해 보는 건 할 수 있는 일을 말하는 거다. 못 할 일을 덮는 게 아니고.”
동호는 지그를 다시 들었다. 금속판의 손글씨 번호가 닳아 있었다. 그는 그것을 종이에 올려놓고, 사용 시간과 반납 시각을 적었다. 공장 명패보다 작은 물건이었지만, 이 작은 물건 하나가 누구의 통제 아래 있느냐에 따라 일이 달라졌다.
오후 세 시, 선택표는 완성되지 않은 채 멈췄다. 참여 다섯 명, 조건부 참여 두 명, 거절 두 명, 답변 대기 한 명. 동호는 그 숫자를 숨기지 않고 회의실 유리벽에 붙였다. 태경은 멀리서 그 표를 읽었다.
“이걸 채권자들한테 내겠다는 거냐.”
“네.”
“사람이 둘이나 빠진 걸?”
“빠졌다고 적지 않으면, 내일 누가 일을 안 했는지 또 남 탓이 됩니다.”
태경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 동호는 아버지가 반대할 줄 알았다. 그러나 태경은 유리벽 앞으로 와서 참여자 이름을 하나씩 읽었다. 그리고 거절 두 줄 앞에서도 멈추지 않았다.
“내가 이걸 받아들인다고 해서, 공장을 포기한 건 아니다.” 태경이 말했다.
“알아요.”
“다만 네가 열어 둔 문으로 나가는 사람도 막지 않겠다.”
동호는 고개를 들지 않았다. 고개를 들면 그 말이 화해처럼 보일까 봐서였다. 아직 화해할 일은 없었다. 다만 아버지는 처음으로 공장 문을 잠그지 않는 쪽을 선택했다.
저녁에는 상훈과 혜린이 선택표, 자재표, 장비 사용표를 겹쳐 보았다. 조건이 맞는 조합은 하나뿐이었다. 평일 주간 인원 다섯, 야간 두 시간, 동호의 지그, 공급처 한 곳의 확인 대기, 고객의 부분 주문.
“이 조합이면 납품은 가능합니까?” 상훈이 물었다.
“가능하다고 말할 수 있는 건 내일까지입니다.” 혜린이 답했다. “공급처 확인이 안 오면 자재를 쓸 수 없어요.”
동호는 서류 맨 아래에 이름을 썼다. 사장으로서가 아니라, 지그를 빌려주는 작업자로서. 서명 옆에는 반납 시각과 작업자 선택표의 유효 기간을 적었다.
그가 펜을 내려놓자, 혜린의 휴대전화가 진동했다. 그녀는 화면을 읽고 표정 없이 말했다.
“채권자들이 자료를 받았어요. 이제 이 조합이 실제로 돈을 갚을 수 있는지 묻겠답니다.”
동호는 유리벽에 붙은 이름들을 다시 보았다. 공장 문은 열려 있었고, 그래서 다음 질문은 더 무거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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