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민수는 고객 앞에서 먼저 미안하다고 말하지 않았다
회귀한 자금팀 대리는 망할 회사를 살리지 않는다 · 2026. 9.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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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민수는 고객 앞에서 먼저 미안하다고 말하지 않았다.
사과가 들어가면 거래가 감정으로 바뀌고, 감정으로 바뀐 거래는 누가 비용을 냈는지 남기지 않는다는 걸 그는 알고 있었다.
“출고가 이틀 당겨졌습니다.” 민수가 구매팀 회의실의 화면을 끄며 말했다. “여기서 못 맞추면 선급금 일부를 돌려받겠다는 뜻입니다.”
태경은 상대 회사 담당자 이정우를 보았다. 정우는 악역처럼 굴지 않았다. 자기 공장의 생산계획이 바뀌었고, 한림테크가 새 구조를 검토 중이라는 소문이 들렸으며, 그래서 납기와 책임자를 다시 묻는 사람이었다.
“전액 취소입니까?” 태경이 물었다.
“아닙니다. 가공이 가능한 수량만 받겠습니다. 다만 못 나가는 물량의 선급금은 돌려받아야 합니다. 저희도 조립 라인이 멈춥니다.”
민수가 노트북을 돌렸다. 절단기 한 대, 동호의 지그, 조립대 두 칸, 검수 세 명. 어제 지석이 적은 이름들이 납기표에 그대로 올라와 있었다.
“이 범위만이면 절반 수량은 가능합니다.” 민수가 말했다. “나머지는 취소하셔도 됩니다. 반환 금액과 반환 날짜도 지금 적겠습니다.”
정우가 눈썹을 움직였다. “우리가 전량을 맡기지 않아도 된다는 말입니까?”
“그게 맞는 조건입니다. 전량을 받아 놓고 납기를 못 맞추는 건 더 비쌉니다.”
태경은 그 말이 속을 긁는 것을 느꼈다. 예전의 그는 주문을 놓치지 않겠다고 말했을 것이다. 설비를 더 돌리고, 사람을 붙이고, 일단 나가겠다고 약속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 표에는 사람이름 옆에 ‘선택 대기’가 적혀 있었다. 아직 동호도, 다른 작업자도 새 작업에 서명하지 않았다.
“반환 조건을 공개해 주십시오.” 태경이 말했다. “그리고 저희가 가능한 물량만 계약서에 따로 적겠습니다.”
정우가 민수를 보았다. “대표님이 직접 그런 말을 하시네요.”
“대표가 모르는 약속은 하지 않기로 했습니다.”
정우는 잠시 생각한 뒤 구매담당자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절반 물량, 이틀 납기, 미출고분 선급금 반환. 고객은 선택지를 손에 쥔 채 서명했다. 한림테크는 주문 전체를 붙잡지는 못했지만, 약속보다 큰 일을 받아 적지도 않았다.
회의실 밖에서 민수가 말했다. “고객이 안 떠난다고 약속한 건 아닙니다.”
“알아.”
“그래도 취소권을 먼저 주면, 다음번에는 적어도 우리가 숨긴 게 없다는 건 기억할 겁니다.”
태경은 고개를 끄덕였다. 민수는 충성을 보여 주려고 고객의 발목을 잡은 사람이 아니었다. 자기 이름으로 남길 수 있는 거래만 붙드는 사람이었다.
주차장으로 내려가는 길에 민수는 걸음을 늦췄다. 엘리베이터 문이 닫히자 그는 휴대전화를 꺼내 보였다. 화면에는 다른 공급업체 담당자에게서 온 메시지가 떠 있었다. ‘이번 물량 가능 여부 확인.’
“저쪽에서도 저희 고객한테 연락했습니다.” 민수가 말했다. “제가 막을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태경은 화면을 잠깐 보고 되돌려 주었다. “알아.”
“대표님이 저더러 고객 붙잡으라고 하면, 저는 할 수는 있어요. 우리 일정이 확정된 것처럼 말하고, 취소하기 어렵게 만들어서요.”
“그러지 마.”
민수가 주머니에 휴대전화를 넣었다. “그 말은 기록해 두겠습니다. 나중에 수주가 빠져도 제가 충성 안 해서라고 하시면 안 됩니다.”
“그렇게 안 하겠다.”
“말만으로는 안 됩니다.” 민수가 납품표 하단의 빈칸을 가리켰다. “가능 수량, 반환 조건, 고객이 선택한 날짜. 대표님도 확인했다는 줄이 있어야죠.”
태경은 잠깐 망설였다. 영업 문서에 자기 이름을 남기는 일은 결재와 달랐다. 그 줄은 물량이 빠졌을 때 책임을 피할 구멍을 없앴다. 그러나 그가 아침부터 배운 것도 같은 것이었다. 누구의 선택인지 적지 않으면, 나중에는 모두가 남의 선택을 자기 손해라고 부른다.
그는 민수가 내민 펜으로 날짜 아래에 이니셜을 썼다.
“내가 확인한 건 고객이 선택할 수 있게 했다는 거다. 네가 고객을 붙잡겠다고 약속한 건 아니다.”
민수는 종이를 접지 않고 파일에 넣었다. “그 정도면 됩니다.”
오후 회의가 시작되기 전, 태경은 공장 뒤편 자재창고로 갔다. 공급업체 세 곳의 상자가 벽을 따라 쌓여 있었다. 상자에는 같은 부품인데도 다른 날짜와 다른 도장이 찍혀 있었다. 김미정이 그 앞에서 수량을 세고 있었다.
“이건 다음 주문용입니까?” 태경이 물었다.
“아직 누구 주문인지 모릅니다.” 미정이 말했다. “기존 법인으로 받아 둔 자재인데, 새 작업에 쓰려면 공급업체 동의가 필요할 수 있어요. 가져다 썼다가 반품 조건이 바뀌면 장부가 꼬입니다.”
태경은 상자 하나를 열었다. 안에는 작고 단단한 부품들이 칸칸이 담겨 있었다. 공장은 늘 큰 기계와 큰 돈으로 흔들리는 줄 알았는데, 실제로 일을 멈추게 하는 것은 이렇게 사소한 금속 조각들이었다.
“그럼 지금 쓸 수 있는 건?”
미정은 세 상자 중 하나만 가리켰다. “이건 이틀 안에 다시 확인받으면 됩니다. 나머지는 공급처 답이 와야 해요.”
“이걸 쓰면 다른 주문이 밀리나.”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래서 어느 주문에 쓸지 먼저 적어야 합니다.”
태경은 고개를 끄덕였다. 구제에는 늘 예산이 붙었다. 돈만이 아니라, 자재 하나를 어느 주문에 먼저 보낼지 정하는 예산. 오늘 반쯤 남긴 주문을 살리려면 다른 쪽의 시간을 내놓아야 했다.
그는 미정에게 말했다. “공급처마다 두 가지로 적으세요. 우리가 지금 받을 수 있는 것과, 받으려면 포기해야 하는 것. 숨기지 말고 회의실에 올립시다.”
미정은 놀란 표정으로 그를 보다가 곧 숫자를 적기 시작했다. ‘가능’ 옆에는 수량과 시간, ‘대기’ 옆에는 동의자 이름을 붙였다. 그 메모는 공장 보고서처럼 건조했지만, 태경에게는 누군가의 목을 조르지 않고 작업을 이어 가는 방식처럼 보였다.
채권자 회의에서 상훈이 붙인 표는 전보다 넓어져 있었다. 고객 반환, 자재 대기, 작업자 선택, 설비 사용. 각 칸에는 담당자와 마감 시각이 적혀 있었다. 채권자 대표는 표를 한참 읽다가 말했다.
“대표님 공장에 줄을 세워 달라는 겁니다. 그게 안 되면 회수 절차를 시작하겠습니다.”
“공장만 세우면 안 됩니다.” 태경이 말했다. “어느 줄이 누구 돈을 쓰는지까지 같이 세우죠.”
“그렇게 하면 시간이 듭니다.”
“개인보증으로 돌아가면 더 빨라지겠죠. 그런데 그 돈이 이 표 어디까지 가는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누군가가 한숨을 쉬었다. 태경은 그 한숨이 자신을 향한 것인지, 회의가 길어진 것을 향한 것인지 묻지 않았다. 대신 자재창고에서 본 상자들을 떠올렸다. 급하다는 이유로 섞어 쓰면, 나중에는 무엇이 남의 돈이고 무엇이 새 주문의 돈인지도 알 수 없게 된다.
채권자 대표는 결국 하루의 시간을 줬다. 대신 조건을 덧붙였다. 내일 같은 시각까지 공급업체별 납품 가능 여부와 회수 조건, 그리고 공장 노동자들이 새 작업을 선택하는지 여부를 제출하라는 것이었다.
회의실을 나오는 길에 상훈이 낮게 말했다. “시간을 벌었어요.”
“시간은 공짜가 아니야.” 태경은 표의 빨간 숫자를 보며 말했다. “내일 못 내면 그만큼 더 빚지는 거지.”
그날 저녁 동호에게 전화를 걸었을 때, 통화 연결음은 세 번 울렸다.
“내일 작업자들 앞에서 말하겠다.” 동호가 먼저 말했다.
“뭘.”
“내가 지그를 빌려줄지, 누구랑 일할지. 아버지 공장이라서 따라가라는 말은 하지 마.”
태경은 창밖을 보았다. 젖은 도로 위로 트럭들이 지나갔다. 몇 대는 한림테크 쪽으로 가지 않았다.
“그래. 네가 정해.”
“정하는 건 나 혼자가 아니야. 같이 일할 사람들한테 물을 거다.”
태경은 전화를 끊고도 한동안 수화기를 내려놓지 못했다. 그 말은 공장을 살리는 명령이 아니었다. 그러나 처음으로 누군가가 공장을 살리기 위해 자기 선택권을 내놓지 않겠다고 말하고 있었다.
오후 채권자 회의에서는 그 거래가 곧바로 줄어든 현금으로 번역됐다. 상훈은 표를 벽에 붙였다. 들어오는 돈, 되돌려줄 돈, 멈추면 사라지는 기능, 열네 시간 안에 결정해야 하는 항목. 누군가가 말했다.
“공장 수주가 줄었는데 기능 분리 검토까지 하겠다고요? 지금은 정상화 자금을 더 넣어야 합니다.”
“누가 넣습니까?” 상훈이 물었다.
“대표님이…”
태경은 그 말 끝을 기다리지 않았다. “내가 집을 걸면, 그 돈은 어디에 먼저 쓰이나.”
회의실이 조용해졌다. 상훈이 표의 한 줄을 짚었다. 기존 체불은 이미 지급됐다. 그러나 남은 차입과 공장 채권, 새 주문의 자재비는 아직 섞이면 안 되는 돈이었다.
“개인보증으로 넣은 돈이 기존 채무와 새 주문에 같이 쓰이면, 누가 무엇을 살렸는지 알 수 없습니다.” 상훈이 말했다. “지금 필요한 건 더 큰 약속이 아니라, 어느 기능이 멈추면 어느 돈이 사라지는지 확인하는 겁니다.”
채권자 대표는 24시간 안에 공급업체별 납품 가능성과 회수 조건을 내라고 요구했다. 태경의 공장도 예외가 아니었다. 공장은 더 이상 태경의 사정만으로 미뤄지는 상대가 아니었다.
회의가 끝난 뒤, 태경은 동호에게 전화를 걸었다. 통화 연결음이 길었다.
“내일 작업자들 앞에서 얘기하겠다.” 동호가 먼저 말했다.
“뭘.”
“내가 지그를 빌려줄지, 누구랑 일할지. 아버지 공장이라서 따라가라는 말은 하지 마.”
태경은 창밖을 보았다. 젖은 도로 위로 트럭들이 지나갔다. 몇 대는 한림테크 쪽으로 가지 않았다.
“그래. 네가 정해.”
“정하는 건 나 혼자가 아니야. 같이 일할 사람들한테 물을 거다.”
태경은 전화를 끊고도 한동안 수화기를 내려놓지 못했다. 그 말은 공장을 살리는 명령이 아니었다. 그러나 처음으로 누군가가 공장을 살리기 위해 자기 선택권을 내놓지 않겠다고 말하고 있었다.
그날 밤, 민수에게서 파일 하나가 왔다. 고객사별 납기, 반환 조건, 대체 공급처, 한림테크가 맡을 수 있는 수량. 파일 마지막에는 민수의 이름과 작성 시각이 있었다. 그는 파일을 숨기지 않았고, 자기 책임이 어디까지인지도 같이 적었다.
태경은 화면을 오래 보다가, 내일 작업장에 갈 시간을 달력에 적었다. 이사회 표결보다 먼저 들을 말이 있다는 걸 이제는 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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