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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장은 이름보다 먼저 소리를 냈다

회귀한 자금팀 대리는 망할 회사를 살리지 않는다 · 2026. 8.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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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장은 이름보다 먼저 소리를 냈다.

윤태경은 아침 일곱 시가 되기 전 공장 셔터 앞에 섰다. 간판에는 아직 한림테크라는 글자가 남아 있었지만, 안쪽에서는 절단기 하나가 헛돌고 있었다. 금속을 물지 못한 날의 소리였다. 기계는 멈추지 않았고, 일도 시작되지 않았다.

“저거부터 적으셔야 합니다.” 오지석이 작업복 주머니에서 접힌 목록을 꺼냈다. “기계 이름 말고, 저 기계가 없으면 어느 주문이 못 나가는지요.”

태경은 목록을 받지 않았다. “설비 값부터 봐야지.”

“값은 팔 때 보죠. 지금은 출고를 봐야 합니다.”

지석은 바닥에 분필로 짧은 선을 그었다. 입고 자재가 놓이는 자리에서 절단기, 프레스, 조립대, 검수대, 출고문까지 이어지는 선이었다. 그는 선마다 사람 이름을 붙였다. 최 반장이 절단 전 규격을 확인하고, 미영이 조립 치수를 맞추고, 동호가 지그를 끼운다. 누가 하나 빠지면 기계가 남아도 주문은 나가지 않았다.

“저 작은 거요.” 지석이 동호의 작업대 아래를 가리켰다. 녹슨 금속판에 손글씨 번호가 새겨진 가공 지그였다. “새 설비보다 저게 먼저 비면 멈춥니다. 이번 고객 건은 규격이 한 번 더 꺾여서요.”

태경은 지그를 들었다. 손바닥보다 조금 컸다. 수십 년 공장을 하며 그는 비싼 기계만 자산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 금속판에는 값표 대신 작업자의 손때가 묻어 있었다.

“이걸 옮긴다고?”

“옮길 수 있는지 먼저 물어봐야죠.” 지석이 말했다. “동호 형님이 자기 작업 순서까지 같이 빌려줄 생각이 있는지. 우린 명령할 수 없습니다.”

태경은 지그를 원래 자리에 내려놓았다. 공장 안에는 가족의 물건처럼 보이는 것이 많았지만, 막상 누구의 손으로 움직이는지 묻기 시작하자 자기 것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은 줄어들었다.

상훈은 입고장 쪽에서 태경을 불렀다. 납품처가 보낸 규격 변경 메일을 펼쳐 둔 채였다. 기한은 사흘, 수량은 이전 주문의 절반이었다. 돈은 작았지만, 작업을 끊지 않을 수 있는 주문이었다.

“이 주문은 본체 프레스 없이도 됩니다.” 상훈이 말했다. “절단기 한 대, 지그, 조립대 두 칸, 검수 인력 세 명. 발주처 동의만 받으면 기능 단위로 견적을 낼 수 있어요.”

“회사 이름으로 받던 주문이다.”

“그래서 발주처가 동의해야 합니다. 우리가 옮긴다고 옮겨지는 게 아닙니다.”

말은 맞았지만, 태경은 그 말이 싫었다. 맞는 말이 공장을 구하지 않는 날이 있다는 것을 그는 너무 많이 봤다. 그는 출고문 밖에 쌓인 빈 파렛트를 보았다. 회사가 사라진다는 말은 아직 멀었는데, 일감이 끊긴 바닥은 이미 먼저 비어 있었다.

오후에는 박혜린이 공장에 왔다. 그녀는 구두를 벗어 작업화로 갈아신고도 공장 바닥을 조심해서 밟았다. 무엇이 위험해서가 아니라, 누가 이미 그 자리에 자기 몫을 두었는지 살피는 사람처럼 보였다.

“세 가지를 분리하겠습니다.” 그녀가 회의실 화이트보드에 적었다. “자산은 누가 빌려주는지. 주문은 고객이 누구와 계약할지. 사람은 누가 어디서 일할지. 셋은 한 묶음이 아닙니다.”

태경이 의자를 밀었다. “그렇게 나누면 회사가 남는 게 뭐가 있습니까.”

“남길 것을 정하는 절차입니다.” 혜린은 지우개를 들지 않았다. “회사라는 이름이 세 가지를 모두 자동으로 데려갈 수는 없어요. 지그는 동호 씨의 동의가 필요하고, 주문은 고객의 서면 동의가 필요하고, 작업자는 각자 선택해야 합니다.”

“그럼 아무도 안 따라오면?”

“그 경우 기능 분리는 성립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없는 동의를 있는 것처럼 쓰지 않습니다.”

상훈이 종이를 넘겼다. “기존 법인의 체불과 새 작업의 임금을 섞지 않는 조항도 넣겠습니다.”

혜린은 고개를 끄덕였다. 붉은 펜 끝이 한 번 멈췄다. 외부 문서의 하단에 찍힌 빨간 확인 도장이었다. 그녀는 도장 옆 빈 결재 칸을 보고 문장을 하나 적었다. ‘발주처 동의 수신 시각 확인 필요.’

“이건 뭡니까?” 태경이 물었다.

“아직 확인하지 못한 시간입니다.” 혜린이 말했다. “모르는 걸 추정으로 채우면 나중에 누가 동의했는지도 바뀝니다.”

태경은 그 말이 지나치게 차갑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지석이 아침에 그린 분필선을 떠올렸다. 사람 이름을 빼면 기계가 길을 잃었다. 시간도 마찬가지일지 몰랐다. 누가 언제 허락했는지 모르면, 나중에는 누가 무엇을 빼앗겼는지도 모르게 된다.

회의실을 나와 태경은 동호의 작업대 앞에 멈췄다. 동호는 아무 말 없이 지그를 물티슈로 닦고 있었다. 금속 틈에서 검은 기름이 나왔다. 태경은 그 손놀림을 한참 보다 물었다.

“그걸 빌려주면 공장이 뭐가 되겠냐.”

동호는 손을 멈추지 않았다. “누구한테 빌려주는지부터 물어야죠.”

“새 회사에. 주문 살리려고.”

“새 회사가 내 일까지 가져가면요?”

태경은 대답하지 못했다. 동호가 고개를 들었다. 그의 얼굴에는 억울함보다 계산이 먼저 있었다.

“형님은 공장 살린다는 말을 너무 오래 들었어요. 그 말로 밀린 돈도, 미룬 약속도 다 넘어갔고요. 이번엔 작업 순서까지 내놓으라고 하잖아요. 그럼 내 이름으로 언제, 얼마를 받고, 기존 돈은 누가 갚는지 적어야 합니다.”

“네가 조건을 걸면 주문이 빠질 수도 있다.”

“그러면 빠지는 겁니다. 빌려주는 사람이 모르는 조건이면 그건 빌려주는 게 아니잖아요.”

태경은 화를 내지 않았다. 화를 낼 근거가 없었다. 동호는 공장을 망하게 하겠다는 사람이 아니라, 자신이 또 한 번 공장 비용으로 쓰이는 것을 막겠다는 사람이었다. 태경이 만든 회사에서 태경보다 먼저 그 경계를 배우고 있었다.

“네가 요구할 조건을 써라.”

동호가 처음으로 손을 멈췄다. “제가요?”

“누가 네 지그를 쓰는지, 네가 어느 계약으로 일하는지. 그건 네가 적어야 한다.”

동호는 곧바로 종이를 잡지 않았다. 그는 지그를 천 위에 올려놓고, 작업대 밖의 다른 사람들을 보았다. 혼자 결정하면 동료들까지 끌고 간다는 것을 아는 눈이었다.

“혼자 쓰진 않겠습니다. 같이 일할 사람들하고 보고 적죠.”

태경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 답이 느리다는 사실이 답답하면서도, 처음으로 공장을 살리는 말처럼 들렸다. 누구의 결단 하나가 아니라, 각자가 내놓을 수 있는 만큼을 적는 방식. 그 방식은 보기 좋지 않았고, 회의실에서는 지지부진해 보일 것이다. 그러나 적어도 누군가의 손을 몰래 묶지는 않을 터였다.

지석은 멀리서 아침에 그은 분필선을 지우지 않고 있었다. 바닥에는 자재와 설비 사이를 가르는 하얀 길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 태경은 그것을 보고, 다음 날 그 선 위에 어느 이름을 올릴지 아직 아무도 정하지 못했다는 사실을 받아들였다.

그는 빈 파렛트 쪽으로 걸어갔다. 상훈이 뒤따라왔다.

“아버지, 이사회에서 표결을 미루면 고객이 다른 데로 갈 수 있어요.”

“알아.”

태경은 손등의 기름을 바지에 닦지 않았다. 그 냄새가 오늘의 비용처럼 남아 있었다.

“그렇다고 오늘 개인보증으로 돌아가면 안 됩니다.”

태경은 아들의 얼굴을 보지 않고 말했다. “네가 맞다는 걸 안다고 해서, 내가 만든 걸 잃는 게 덜 아픈 건 아니야.”

상훈은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빈 파렛트 한 장을 세워 두었다. 바람이 불자 얇은 나무판이 덜컹거렸다. 태경은 그 소리를 듣고, 간판보다 먼저 비어 가는 것이 무엇인지 조금 알 것 같았다.

임시 이사회는 오후 네 시에 열렸다. 경영지원 실장은 한림테크 간판이 붙은 자료를 먼저 탁자에 놓았다. 그는 공장 사진을 넘기며 말했다.

“기능 분리는 시장에 회사가 해체된다는 신호를 줍니다. 납품처가 불안해하고, 지역 협력사가 흔들립니다. 지금 필요한 건 분리가 아니라 간판을 지키는 자금입니다.”

“그 자금의 담보는 누구 겁니까?” 상훈이 물었다.

“대표님이 결단하시면 됩니다.”

회의실 공기가 잠깐 멎었다. 태경은 그 문장을 오래 들었다. 결단이라는 말은 늘 그럴듯했다. 다만 그 아래에 자기 집 주소와 가족 이름을 작게 적어 놓을 때만 그 말의 모양이 달라졌다.

“내가 보증을 서면,” 태경이 천천히 말했다. “당신들은 공장을 지킬 겁니까, 아니면 내 집부터 지킬 겁니까.”

실장은 대답하지 못했다. 다른 이사가 말을 이었다. “대표님, 법인 신용이 무너지면 직원들도 불안해집니다. 공장을 다른 구조로 빼면 결국 남는 사람만 챙긴다는 말이 나옵니다.”

지석은 회의실 뒤쪽에 서 있었다. 그는 한 발 앞으로 나왔다. “누가 남는지는 대표님이 정하면 안 됩니다. 오늘 아침에도 그 말 했습니다. 작업자가 선택해야 합니다. 저는 우리 사람들 이름을 적을 수는 있어도, 누가 따라갈지 대신 서명 못 합니다.”

이사회 안에서 누군가 낮게 혀를 찼다. 태경은 지석에게 화를 내고 싶었다. 그러나 그가 말한 것은 회사에 대한 배신이 아니라, 자신도 처음 듣는 규칙이었다. 사람을 붙잡아 공장을 살리는 일과, 사람을 빼앗아 간판을 살리는 일은 다르다는 규칙.

혜린이 마지막 표를 탁자 중앙으로 밀었다. 한쪽에는 즉시 개인보증, 다른 쪽에는 제한적 기능 분리라고 적혀 있었다. 두 칸 아래에는 같은 항목이 있었다. 비용 부담 주체, 고객 동의, 작업자 선택, 기존 채무 처리.

“오늘 표결할 것은 회사의 존폐가 아닙니다.” 혜린이 말했다. “누가 동의하지 않은 비용을 떠안을지, 그리고 그 사실을 기록할지입니다.”

태경은 펜을 들었다가 내려놓았다. 간판을 지키는 쪽에 표를 던지면 오늘은 편해 보일 수 있었다. 하지만 그 표는 동호의 지그와 지석의 사람들, 상훈의 집까지 한 줄로 묶어 버릴 것이었다.

그때 상훈의 휴대전화가 울렸다. 발주처 담당자가 보낸 메일이었다. 사흘짜리 주문의 출고 일정을 이틀 앞당기겠다는 통보. 동의를 받기 전에 생산 능력을 보여 달라는 요구였다.

태경은 빈 표결지 위에 적힌 회사 이름을 보았다. 그리고 회의실 창 너머로, 아직 멈추지 않은 절단기의 소리를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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