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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행이 요구한 것은 돈이 아니었다

회귀한 자금팀 대리는 망할 회사를 살리지 않는다 · 2026. 8.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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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행이 요구한 것은 돈이 아니었다.

누가 망할 때 같이 망을지 적으라는 서명이었다.

사전심사실 유리벽 바깥으로 빗물이 얇게 흘렀다. 이창호 과장은 서류철 두 개를 같은 간격으로 밀어 놓았다. 왼쪽 표지에는 운전자금 한도 증액, 오른쪽에는 사업기능 분리 검토라고 적혀 있었다. 이상훈은 왼쪽 서류의 마지막 장부터 넘겼다. 빨간 밑줄은 한 줄이었다. 대표자 개인 연대보증. 그 아래에는 재무총괄의 책임 확인서가 붙어 있었다. 기존 지급 결의와 자금 전용 경위를 알고 있었으며 향후 상환 계획에 책임 있게 협조한다는 문장. 누가 썼는지보다 누가 도장을 찍는지가 중요한 문장이었다.

“속도가 필요한 쪽은 이쪽입니다.” 이 과장이 왼쪽 서류를 눌렀다. “오늘 보증 의사를 주시고 재무 책임자 확인까지 들어오면 내부 검토를 앞당길 수 있습니다. 대표님 개인 재산 범위는 별도 심사 대상입니다.”

“범위 말고 실행 조건을 말해 주십시오.”

“회사가 상환하지 못하면 대표님 소유 부동산과 가족 재산도 회수 절차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옆에 앉은 윤태경이 의자 등받이에서 등을 뗐다. 상훈은 아버지가 바로 대답하려 한다는 걸 알아차리고 오른쪽 서류를 끌어왔다.

“이쪽은요.”

“늦습니다. 대신 법인 전체가 아니라 실제로 돈을 버는 기능을 따로 봅니다. 설비 사용권, 수주 이관 동의, 생산 인력의 선택, 손실 배분. 그게 문서로 분리되면 제한적인 신용 검토는 가능합니다.”

“개인보증은요?”

“그 경로에는 필수는 아닙니다. 다만 회사 이름만 바꾼다고 되는 건 아닙니다. 무엇을 빌려주고, 어떤 주문을 옮기고, 누가 그 작업을 맡는지까지 확인돼야 합니다.”

태경이 짧게 숨을 뱉었다. “공장 간판은 남겨 두고 공장만 떼라는 말이군.”

“간판을 지키는 게 목적이면 왼쪽이 빠릅니다.” 이 과장이 말했다. “하지만 비용도 개인에게 내려갑니다. 어느 쪽이 옳다고 말씀드릴 수는 없습니다.”

상훈은 두 서류 사이에 펜을 놓았다. 은행은 구원자를 고르라고 한 게 아니라 비용을 낼 사람을 고르라고 하고 있었다.

“책임 확인서의 범위를 나눌 수 있습니까?”

“사실 확인과 향후 협조를 분리해 제출하실 수는 있습니다.”

“확인할 항목을 번호로 주십시오. 확인하지 못한 항목은 빈칸으로 남깁니다.”

이 과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빈칸이 많으면 한도는 보수적으로 봅니다.”

“보수적인 한도와 거짓 서명 중에서는 전자를 택하겠습니다.”

태경은 상훈을 보았지만 말하지 않았다. 상훈은 체크표에 두 선택지의 실행 기한과 필요한 사람 이름을 한 장에 적었다. 서명은 그 뒤에 올 일이었다. 은행을 나와 계단참에 섰을 때 태경이 젖은 난간을 쥐었다 놓았다.

엘리베이터 앞에는 회사에서 따라온 경영지원 실장 한 명이 서 있었다. 그는 회의 내내 말이 없었지만, 상훈이 들고 나온 오른쪽 서류를 알아보고 낮게 물었다.

“그걸 진짜 검토하실 겁니까? 법인 간판을 흔들면 납품처도, 직원도 다 불안해합니다.”

“그래서 자산과 주문과 사람을 따로 적는 겁니다.”

“종이 세 장으로 공장이 삽니까?”

“종이 세 장도 없으면 누구 돈으로 누가 일하는지 못 밝힙니다.”

실장은 입술을 다물었다. 엘리베이터 도착음이 울리자 그는 태경 쪽을 보았다. 태경은 대답하지 않고 문이 열릴 때까지 서류철 모서리만 만졌다. 그 짧은 침묵에도 상훈은 회사 안에서 이미 반대가 준비되고 있다는 걸 읽었다. 빠른 돈을 거절한 대가는 은행의 답변만 늦추는 것이 아니었다. 그동안 누구의 회사인지부터 다퉈야 했다.

“내 집이 들어가면 공장은 오늘 숨을 쉬겠지.”

“오늘 숨 쉬는 대가가 내일 아버지 집까지 멈추게 할 수 있습니다.”

“그럼 공장을 반으로 자르자는 거냐.”

“반이 아니라 기능입니다. 주문을 받는 쪽, 가공하는 쪽, 돈을 받는 쪽을 섞어 둔 채로는 누가 무엇을 망쳤는지도 못 밝힙니다.”

“내가 만든 공장이야.”

“그래서 아버지가 전부 책임지는 방식으로 넘기면 안 됩니다. 아버지가 맡을 일과 회사가 감당할 일을 분리해야 합니다.”

태경은 주차장 쪽으로 먼저 걸었다. 상훈은 뒤따르지 않고 방금 받은 초안을 휴대전화로 찍어 전송했다. 수신자는 한림테크 재무총괄 서은경이었다.

오전 열한 시, 재무팀에는 오래된 복사기 냄새와 식지 않은 믹스커피 냄새가 섞여 있었다. 은경은 책상 위 초안을 읽고 있었다. 초안 오른쪽에는 그녀의 직책과 이름이 이미 인쇄돼 있었고, 그 아래 빈칸만 남아 있었다.

“이건 결재가 아닙니다.” 은경이 말했다.

“그래서 결재로 받으러 온 게 아닙니다.”

“제 이름이 들어갔잖아요.”

상훈은 맞은편 의자를 빼지 않고 서 있었다. “알고 있는 사실, 보지 못한 자료, 승인한 시각을 나눠 적어 주십시오. 모르는 건 모른다고 쓰시면 됩니다.”

은경은 종이를 뒤집었다. 뒷면의 지급 결의 목록을 훑으며 펜 뚜껑을 열었다. “기존 결재는 대표 승인으로 올라왔어요. 나는 자금 배정표를 만들었고 실행 지시는 따로 내려왔습니다.”

“그 차이를 확인서에 적으면 됩니다.”

“그렇게 적으면 은행이 돈을 안 주겠죠.”

“그럴 수 있습니다.”

“그럼 왜 들고 왔어요?”

“돈을 받기 위해서 누군가가 모르는 일을 안다고 쓰게 하려는 건 아니니까요.”

은경의 손이 멈췄다. 창가 계산기 위로 빗물이 반사돼 희미한 숫자처럼 흔들렸다. 그녀는 ‘지급 결의 목록 중’이라는 문장 뒤에 천천히 선을 그었다. 그 선은 다음 문장으로 이어지지 않았다.

“이 보조문서 송부 시각도 묻겠다는 거죠.”

상훈은 종이를 보지 않고 말했다. “그 문서가 있었는지와 누가 언제 보냈는지를 같은 항목으로 묻지 않겠습니다.”

은경은 고개를 들었다. “그럼 뭘 적으라는 겁니까.”

“본인이 직접 확인한 것만요. 이메일을 봤다면 본 날짜와 보낸 사람. 결재를 받았다면 결재 시각. 둘 다 모르면 확인할 수 없다고요.”

은경은 펜을 종이 위에 댔다. ‘확인할 수 없습니다.’ 다섯 글자가 책임 확인서의 중간을 가로질렀다. 그다음 칸에는 서명 대신 같은 문장이 한 번 더 적혔다.

“전체 확인서에는 서명하지 않겠습니다.”

문장은 작았지만 사무실의 공기가 달라졌다. 옆자리 대리는 고개를 숙인 채 키보드를 두드렸고 복사기는 종이를 삼킨 소리를 냈다. 은경은 도망치지 않았다. 자신이 아는 범위의 지급표에는 날인하겠다고 했다. 그러나 본 적 없는 송부 시각과 회사 전체의 상환 약속은 맡지 않겠다고 했다.

상훈은 초안을 접지 않았다. 빈칸이 생긴 그대로 사진을 찍었다. “이 문장은 삭제하지 않겠습니다. 은행에도 그대로 갑니다.”

“제 자리도 그대로일 거라고 생각하진 않아요.”

“그건 제가 약속할 일이 아닙니다. 대신 서명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당신이 확인한 기록까지 지우게 하진 않겠습니다.”

은경은 웃지 않았다. 다만 바닥의 서류 상자를 발끝으로 밀어 책상 아래로 넣었다. 그것이 그녀가 할 수 있는 동의의 전부처럼 보였다.

오후 두 시, 상훈은 은행 법무 담당자 박혜린과 태경을 작은 회의실에 앉혔다. 탁자 가운데에는 세 장짜리 표가 있었다. 첫 장은 자산, 둘째는 주문, 셋째는 사람이다. 혜린은 제목을 읽고 곧바로 말했다.

“이건 분리 계획이 아니라 분쟁 목록입니다. 좋습니다. 적어도 무엇이 없는지는 보이네요.”

태경이 첫 장을 당겼다. “설비는 공장 것이지. 빌려주는 데 무슨 동의가 필요해.”

“설비가 공장 것이라는 말은 지금 가장 위험한 문장입니다.” 혜린이 붉은 펜으로 세 칸을 나눴다. “소유, 점유, 사용권. 셋이 다르면 누가 새 작업에 쓸 수 있는지부터 다시 정해야 합니다.”

상훈은 동호가 남긴 설비 목록에서 한 줄을 펼쳤다. 가공 지그 하나가 있었다. 낡은 금속판에 손으로 새긴 번호가 붙은 물건이었다. 버리려던 보조 치구였지만 특정 규격의 부품을 반복 가공할 때는 다른 설비보다 빨랐다.

“이건 옮길 수 있습니다. 본체 설비는 못 옮겨도 이 지그와 작업 순서는 옮길 수 있어요.”

태경이 목록을 바라봤다. “동호가 그걸 왜 아직 안 버렸지.”

“버릴 물건이 아니라, 빌려줄 수 있는 기능으로 적겠습니다.”

혜린이 고개를 끄덕였다. “다만 기능이라고 쓰면 사람이 따라붙습니다. 주문을 누가 받을지, 작업자가 누구와 계약할지, 임금을 누가 지급할지도 선택권으로 남겨야 해요. 강제로 데려가면 분리가 아니라 전용입니다.”

그녀는 두 번째 장에 ‘주문 이관은 발주처 서면 동의 후’라고 썼다. 세 번째 장에는 ‘작업자 개별 선택 및 기존 체불 분리’라고 적었다. 상훈은 옆에 ‘손실 배분: 기존 법인 부담과 신규 작업 부담을 혼합하지 않음’이라고 덧붙였다.

“이걸로 돈이 나옵니까?” 태경이 물었다.

“오늘은 아닙니다.” 혜린이 말했다. “오늘은 개인보증 없이 검토받을 수 있는 바닥을 만드는 겁니다. 내일 돈이 나올지는 발주처와 작업자, 그리고 회사가 무엇을 포기할지에 달렸어요.”

상훈은 금액 칸을 비워 두었다. 아직 없는 돈을 예상 매출로 적어 놓으면, 그 숫자는 곧 누군가의 희망이 아니라 누군가의 책임이 될 터였다. 오늘 표에는 가능한 작업과 그 비용만 남겼다.

태경의 손이 표 위에서 멈췄다. 그는 회사라는 말 앞에서 한동안 아무것도 적지 못했다. 상훈은 침묵을 재촉하지 않았다. 대신 마지막 줄에 회의 날짜와 참석자 이름을 적고, 각자가 확인한 부분만 이니셜을 남기게 했다.

회의실 문이 열리기 직전, 혜린이 메시지를 확인했다. 화면을 한 번 더 본 뒤 표정 없이 말했다.

“경영진이 내일 아침 이사회를 소집했습니다. 기능 분리는 회사 간판을 빼앗는 일이라며 반대할 겁니다.”

태경이 고개를 들었다. 방금까지 공장 이름을 붙들던 사람의 눈이었다.

상훈은 자산, 주문, 사람이라고 적힌 세 장을 차례로 겹쳤다. 간판을 지키려면 무엇을 포기할지, 간판을 떼려면 누가 살아남을지. 이제 그 질문은 은행 서류가 아니라 회사 안의 표결로 옮겨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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