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금 봉투
회귀한 자금팀 대리는 망할 회사를 살리지 않는다 · 2026. 6.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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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서윤은 등록금 봉투를 열지 않았다.
돈이 필요 없어서가 아니었다. 봉투 안에 돈과 추천서가 같이 들어 있었기 때문이다.
도서관 앞 등록 창구는 이미 셔터를 반쯤 내린 뒤였다. 유리문 안쪽에는 납부 마감 안내가 붙어 있었고, 서윤의 휴대전화에는 부족한 금액과 마감 날짜가 번갈아 떠 있었다. 그녀는 봉투의 두께를 손가락으로 눌렀다. 오빠는 필요한 것보다 많은 돈을 넣었을 것이다. 첫 생의 일을 모르는 서윤에게도 그 방식은 낯설지 않았다. 미안한 사람이 주는 돈에는 가끔 반송 주소보다 큰 지시가 들어 있었다.
봉투 뒤에는 어느 컨설팅 회사의 추천서가 끼워져 있었다. 졸업 뒤에 갈 수 있는 자리, 급여 조건, 담당자 연락처. 추천서 자체가 나쁜 것은 아니었다. 문제는 돈과 같이 왔다는 점이었다. 학비를 받는 대신 그 회사에 가야 하는 것처럼, 거절하면 오빠의 사과까지 거절하는 것처럼 보이게 만드는 묶음.
서윤은 벤치에 앉아 메모장을 열었다.
받을 수 있는 것: 추천서 사본, 담당자 연락처.
받지 않을 것: 진로 지시, 회사 현금, 필요액을 넘는 송금.
확인할 것: 부족한 금액, 상환 여부, 답변 기한.
그녀는 추천서 원본만 꺼내 복사했다. 사본을 가방에 넣고, 원본과 돈은 다시 봉투에 넣었다. 아무것도 받지 않겠다는 허세는 쉬웠다. 다음 학기 휴학 신청서를 쓰는 일까지 감당할 수 있다면. 하지만 도움을 받는다고 해서 자기 선택을 통째로 넘길 이유도 없었다.
편의점 창가 자리에 앉자 오빠에게서 전화가 왔다. 서윤은 세 번 울린 뒤에 받았다.
“봉투 봤어?”
“안 열었어.”
“왜?”
“돈이랑 추천서를 한 봉투에 넣었잖아.”
태경은 잠시 말이 없었다. 통화 너머에는 키보드 두드리는 소리와 사람들이 낮게 말하는 소리가 섞여 있었다. 회사에 있는 모양이었다. 서윤은 그 소리를 듣고도 걱정한다는 말을 먼저 하지 않았다. 걱정은 너무 쉽게 빚이 됐다.
“추천서는 네가 원하면 쓰라고 준 거야.” 태경이 말했다.
“누가 정했는데?”
“내가… 네가 취업 준비할 때 도움이 될까 해서.”
“도움은 따로 줘. 학비랑 취업을 같이 잡으면, 내가 뭘 고른 건지 모르게 돼.”
태경은 변명하지 않았다. 그 점이 오히려 서윤을 불안하게 했다. 예전의 오빠라면 어머니 병원비, 자기 실수, 가족이니까 해야 한다는 말을 길게 꺼냈을 것이다. 갑자기 조용해진 사람은 다음에 더 큰 것을 요구할 수도 있었다.
“그래. 따로 하자.”
“말로 하지 말고 문자로 보내.”
“뭘?”
“추천서는 담당자 연락처만. 내가 연락할지 말지 내가 정해. 돈은 정확히 부족한 금액만, 갚는 건지 아닌지, 나중에 진로 얘기할 때 불이익 없는지. 그 세 개.”
“불이익?”
“오빠가 그 회사 안 가면 서운해할지, 학비 받았으면 말 들어야 한다고 할지. 그런 거.”
태경의 숨소리가 작게 들렸다. 서윤은 그가 서운해하길 바랐던 건 아니었다. 다만 서운함까지 부정하면 계약이 또 흐려진다.
“거절해도 불이익 없어.” 태경이 말했다. “회사도, 추천도, 돈도.”
“그것도 문자로.”
“알겠어.”
통화는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서윤은 부족한 금액을 말해야 했다. 말을 아끼면 독립이 아니라 자존심이 된다. 그녀는 화면을 보며 숫자를 읽었다. 등록금 잔액, 기숙사 보증금 일부, 이번 달 아르바이트가 밀린 날. 큰돈은 아니었지만, 태경이 보낸 봉투 속 전액보다 훨씬 적었다.
“이만큼만 필요해.”
태경은 숫자를 되묻지 않았다. “상환은?”
“내가 정할게. 지금은 빌린 돈으로 적어. 졸업 뒤에 갚을지, 다른 방식으로 갚을지 다시 얘기해.”
“그래도 돼.”
“고맙다.” 서윤은 잠깐 멈췄다. “근데 돈 보내고 나서 내가 어디 취업할지 물어보지 마.”
“안 물을게.”
“물어볼 수는 있어. 답 안 해도 되는 걸로.”
태경이 아주 작게 웃었다. 서윤은 그 웃음을 화해라고 부르지 않았다. 다만 전화를 끊을 수 있는 자리를 남겨 둔 웃음이었다.
문자가 도착했다. ‘추천서 담당자 연락처만 전달. 지원 여부는 서윤 결정. 학비 부족액은 별도 대여로 기록. 진로·취업 선택과 무관하며 거절해도 불이익 없음.’
그 아래에는 큰 금액 송금 취소 알림이 붙어 있었다. 태경은 처음 보낸 돈을 되가져갔다. 서윤은 봉투를 열지 않은 손이 조금 저렸다. 필요한 도움을 받으려면, 받지 않을 도움을 정확히 돌려보내야 했다.
밤 열 시, 태경의 원룸 책상 위에는 윤성정밀 전표가 놓여 있었다. 서윤은 통화를 끊기 전 마지막으로 말했다.
“아버지 건도 나 대신 결정하지 마.”
그 문장은 충고가 아니라 시험이었다. 자기를 위해서만 선택권을 인정하면, 오빠는 결국 가족 중 가장 설득하기 쉬운 사람에게 돈을 먼저 보낼 것이다.
태경은 전표를 현금 데스크 화면에 올렸다. 관계자 거래 표시를 눌렀다. 화면이 한 번 더 확인을 요구했다. 가족·특수관계 여부 공개. 공개 검토 대상. 그는 ‘예’를 눌렀다.
윤성정밀은 이제 비공개로 처리할 수 있는 아버지의 부탁이 아니었다. 다른 채권과 같은 표에 올라온 이해상충 항목이었다. 그 표시 하나로 공장은 더 빨리 살아나지 않는다. 오히려 내일 회의에서 누군가가 왜 가족회사만 따로 표시했느냐고 물을 것이다.
태경은 숨기지 않겠다는 선택이 공장을 포기하는 것과 같지 않기를 바랐다. 그러나 바람은 지급 권한이 아니었다. 그는 전표 옆에 ‘현장 임금·필수 납품과 동일 기준 공개 검토’라고 적었다.
초인종이 울렸다.
문을 열자 윤동호가 서 있었다. 작업복 소매에는 금속 가루가 남아 있었다. 그는 아들 뒤의 책상과, 화면에 떠 있는 관계자 거래 표시를 한 번씩 봤다.
“가족이라고 적었네.”
태경은 문을 넓게 열었다.
“내일 표에서 봅시다.”
동호는 안으로 들어오지 않았다. “내 공장을 네 회사 표에 올린 건 네 선택이야. 공장을 닫을지 말지는 내 말로 하겠다.”
그는 그렇게 말하고 계단 쪽으로 돌아섰다. 태경은 붙잡지 않았다. 서윤에게 준 거절권을 아버지에게도 주려면, 오늘 밤 문 앞에서 결론을 받아내지 않는 편이 맞았다.
서윤은 편의점에서 나온 뒤에도 봉투를 바로 우체통에 넣지 못했다. 돈을 돌려보내는 일은 단순했다. 그러나 추천서 원본을 함께 돌려보내면, 오빠가 다음에는 아무것도 묻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건 원하는 독립과 달랐다. 말하지 않는 사람에게서 멀어지는 건 선택이 아니라 방치가 될 수 있었다.
그녀는 봉투에서 돈만 꺼내지 않은 채, 반송 메모를 한 장 더 넣었다. ‘추천서 원본은 돌려드립니다. 연락처는 받겠습니다. 지원 여부와 진로는 제가 정합니다. 학비는 별도 대여 조건을 문자로 확인한 뒤 받겠습니다.’ 문장은 차가웠지만, 연락처를 받을 수 있다고 쓴 줄이 남아 있었다. 서윤은 그 줄이 자기 몫의 양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협상은 상대가 틀렸다는 증명보다, 다음에도 말할 수 있는 통로를 남기는 일이었다.
편의점 직원이 계산대를 정리하는 동안, 서윤은 휴대전화 메모에 상환 계획의 빈칸도 적었다. 졸업 뒤 자동이체를 할지, 단기 일을 더 할지, 혹은 빌린 돈을 계약으로 남기지 않기로 다시 합의할지. 지금 당장 결정할 수 없는 항목은 ‘미정’이라고 썼다. 미정인 것을 없는 일로 만들지 않는 편이, 오빠에게 배운 거의 유일한 실무였다.
태경은 동호가 계단을 내려가는 발소리가 사라진 뒤에야 문을 닫았다. 첫 생의 자신은 아버지를 붙잡고 내일만 기다리라고 했을 것이다. 그것은 부탁의 모양을 한 명령이었다. 공장에 남을 사람, 공구를 넘길 사람, 작업자에게 폐업을 말할 사람은 동호인데도, 자기는 돈만 보내면 판단까지 살 수 있다고 믿었다.
책상 위 전표에는 납품대금, 작업자 급여일, 외주 공구 회수 예정일이 함께 적혀 있었다. 태경은 관계자 거래 표시 뒤에 두 개의 칸을 더 만들었다. ‘가족 요청 여부.’ ‘공개 검토 동의 여부.’ 첫 칸에는 예, 두 번째에는 확인 전이라고 적었다. 아버지가 공개 검토를 거부하면 그 거부도 표에 남겨야 한다. 가족이라고 해서 선택지를 줄이는 순간, 서윤에게 준 문자도 거짓말이 된다.
그는 현금 데스크 공유 폴더에 전표를 올렸다. 열람 권한은 혜린과 재무 승인자에게만 열었다. 동호에게는 내일 직접 확인할 자료 목록을 보내겠다고 적었다. 전송 버튼을 누르자 화면에는 ‘이해상충 검토 대기’가 떴다. 그 말은 지급 거절이 아니었다. 다만 누구도 몰래 먼저 받지 못한다는 뜻이었다.
휴대전화가 다시 울렸다. 서윤의 문자였다. ‘추천서 연락처는 받았어. 돈은 조건서 보내면 봐.’
태경은 짧게 답했다. ‘알겠어. 조건 먼저 보낼게.’
사과라는 말은 쓰지 않았다. 사과가 약속보다 먼저 오면, 또 용서를 받기 위한 돈이 될 수 있었다. 그는 등록금 대여 조건 초안을 열어 금액 칸을 비워 두었다. 서윤이 말한 부족액을 그대로 옮기기 전, 상환 조항과 진로 불간섭 조항을 먼저 적었다. 돈은 마지막에 들어가도 됐다. 지금 필요한 것은 필요한 만큼만 받겠다는 사람의 선택을 먼저 적는 일이었다.
창밖에서 오토바이 소리가 멀어졌다. 현관 앞에는 더 이상 아무도 없었다. 아버지 공장과 여동생 학비는 서로 다른 표에 있었지만, 오늘 태경이 배운 기준은 하나였다. 도움을 준 사람이 결론까지 가져가면, 그 도움은 결국 다른 이름의 청구서가 된다.
그는 조건서 파일 이름을 ‘지원안’이 아니라 ‘서윤 확인 전’으로 바꿨다. 확인 전인 돈은 보내지 않는 편이, 늦어도 상대의 몫을 남긴다.
서윤도 같은 시각 봉투 위에 발송 예정 날짜를 적었다. 내일 아침까지는 답장을 더 기다리기로 했다. 기다린다는 말은 오빠가 마음을 바꾸길 바란다는 뜻이 아니었다. 자기 조건을 다시 읽고도 그대로 보낼 수 있는지 확인하는 시간이었다.
그 시간은 돈보다 작았지만, 그녀가 직접 고른 마감이었다.
봉투는 끝내 열리지 않았다.
아직은.
그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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