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화

씨앗과 창

기적은 곡물을 먹는다 · 2026. 10.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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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분이 멀지 않은 어느 아침, 왕실의 새 명령이 도착했다. 봉랍은 에드릭의 것이 아니라 더 높은 자리의 것이었다.

겨울헌장이 보호 목록에 올린 종자곡을, 군량으로 전환하라는 것이었다. 에드릭 로스의 다영지 장부가 그 근거였다.

왕실군은 곡물이 필요했고, 그 곡물을 가장 가까운 영지의 종자에서 채우려 했다. 레아 바렌은 그 명령서를 두 번 읽었다.

한 번은 글자를, 한 번은 그 글자 뒤의 셈을. 글자는 군량 요청이었고, 그 뒤의 셈은 헌장을 깨라는 압박이었다.

종자를 군량으로 바꾸는 것은, 토르 마을이 인장을 깨면서까지 지키려 한 봄을 다시 빼앗는 일이었다. 그리고 그 명령은 겨울헌장을 정면으로 거슬렀다.

헌장은 토르 마을의 종자를 보호 목록에 올렸고, 레아는 그 줄에 서명했다. 왕실 명령을 따르면 헌장을 어기는 것이 되고, 헌장을 지키면 왕실에 불복하는 것이 됐다.

에드릭은 그 모순을 정확히 알고 명령을 보냈다. 그는 레아가 헌장과 왕명 중 하나를 깨도록 몰았다.

어느 쪽을 깨든, 레아는 약속을 어긴 자가 됐다.

도안 바렌은 다른 명령도 함께 받았다. 수비대를 감축하라는 것.

왕실은 로헤른이 군사를 줄이고 그 몫의 곡물을 내놓기를 원했다. 도안은 그 감축을 거부했다.

끊긴 다리의 매복을 겪은 그는, 수비대가 줄면 다음 매복을 막을 손이 없다는 것을 알았다.

“북문 수비대를 줄이면, 토르 마을로 가는 길이 다시 끊깁니다. 그땐 종자도 군량도 다 잃습니다.”

그의 거부는 고집이 아니라 셈이었다. 그는 지도 위에 북문과 토르 마을과 끊긴 다리를 짚어 보였다.

수비대를 줄이면 그 세 지점을 동시에 지킬 수 없었다. 군사를 아는 자의 셈이었다.

그러나 레아는 그 셈에 다른 셈을 얹어야 했다. 수비대를 줄이지 않으면 군량을 더 내야 했고, 군량을 더 내면 시민이 굶었다.

도안의 셈은 군사의 자리에서 옳았고, 레아의 셈은 도시 전체의 자리에서 옳아야 했다. 두 옳음의 자리가 달랐다.

같은 곡물을 두고, 군사의 셈과 통치의 셈이 어긋났고, 어느 셈도 틀리지 않았기에 둘은 더 아프게 부딪쳤다.

레아는 두 요구 사이에 섰다. 종자를 지키려면 군량을 다른 데서 내야 했고, 수비대를 지키려면 또 다른 곳을 줄여야 했다.

어느 쪽도 온전히 지킬 곡물이 도시에 없었다. 그녀는 양쪽을 조금씩 줄이는 절충을 택했다.

종자의 일부를 군량으로 내고, 수비대의 일부를 감축하되, 어느 쪽도 무너지지 않을 만큼만. 그것은 누구도 온전히 만족시키지 못하는, 모두를 조금씩 서운하게 하는 절충이었다.

사빈이 그 절충의 수를 장부에 적었다. 종자에서 덜 양과 수비대에서 줄일 양을 나란히.

두 칸 모두 빨간 줄이 그어졌다. 어느 칸도 안전선 위에 있지 않았다.

사빈은 그 위험을 숨기지 않고 레아에게 보였다.

“두 칸 다 최소선 아래입니다. 한쪽이라도 더 나빠지면, 그쪽이 먼저 무너집니다.”

레아는 그 경고를 받아들였다. 절충은 양쪽을 살린 것이 아니라, 양쪽을 똑같이 위태롭게 만든 것이었다.

그녀는 그것을 알면서 택했다. 한쪽을 온전히 살리고 한쪽을 죽이는 것보다, 둘 다 위태롭게 두고 시간을 버는 편이 낫다고 믿었다.

그 믿음이 옳은지는, 아직 알 수 없었다.

그 절충이 양쪽의 반발을 동시에 불렀다. 브렌 토르가 다시 도시로 달려왔다.

종자를 또 내라는 것에.

“인장을 깨면서까지 지킨 봄을, 헌장에 손도장을 찍자마자 또 가져가는 거요?”

그의 분노는 정당했다. 헌장이 종자를 보호한다더니, 왕실 명령 한 장에 그 보호가 깨졌다.

동시에 도안도 반발했다. 수비대 감축은 그가 지키는 도시의 안전을 직접 깎는 일이었다.

레아는 자기가 가장 신뢰하는 두 사람, 도안과 브렌에게 동시에 비난받았다. 속도를 위해 양쪽을 조금씩 깎는 그녀의 통치가, 그 한계를 드러냈다.

레아는 그 비난을 피하지 않았다. 그녀는 두 사람을 같은 방에 불러, 절충의 셈을 한 장의 종이에 그대로 펼쳐 보였다.

종자 칸과 수비대 칸, 그리고 군량으로 내야 할 양. 세 수가 한 종이 위에 있었다.

그녀는 두 사람에게 종이를 밀며 말했다.

“당신들이 다시 나눠 보시오. 내 절충이 틀렸다면, 더 나은 나눔을 적어 주시오.”

브렌과 도안은 그 종이를 들여다보았다. 농부와 군인이 같은 숫자를 두고 머리를 맞댔다.

한참 뒤, 두 사람 다 펜을 내려놓았다. 어느 나눔도, 누군가를 더 위태롭게 하지 않고는 다른 쪽을 살릴 수 없었다.

그들은 레아의 절충이 최선은 아니어도, 더 나은 답이 없다는 것을 자기 손으로 확인했다. 종자를 다 지키면 수비대가 굶고, 수비대를 다 지키면 종자가 사라진다.

어느 쪽을 택해도 누군가 죽는다. 그녀가 택한 절충은 둘 다 조금씩 죽는 길이었다.

“나는 최선을 택한 게 아니오. 덜 나쁜 걸 택했소. 그리고 덜 나쁜 것에도 값이 있다는 걸, 두 사람에게 숨기지 않겠소.”

그것은 변명이 아니라 셈의 공개였다. 브렌도 도안도 그 셈을 반박하지 못했다.

다만 반박하지 못한다고 분노가 사라지지는 않았다. 브렌은 종자 자루를 다시 싸 들고 돌아갔다.

이번에는 인장을 깨지 않았다. 헌장에 손도장을 찍은 그는, 이제 헌장 안에서 싸우기로 했다.

“다음 평의회에서, 이 종자 징발이 헌장 위반인지 따지겠소.”

그가 말했다. 분노를 폭동이 아니라 절차로 옮긴 것.

그것은 레아의 장부가 브렌에게 가르친 것이기도 했다. 도안은 달랐다.

그는 수비대 감축 명령서를 손에 든 채 한참 말이 없었다. 군인에게 자기 부하를 줄이라는 명령은, 회계 장부의 한 줄과 달랐다.

그 한 줄 뒤에는 이름이 있었고, 그 이름마다 기다리는 가족이 있었다. 줄을 긋는 일은 곧 그 가족의 겨울에 줄을 긋는 일이었다.

도안은 누구를 먼저 내보낼지 정해야 했고, 그 일만은 절충으로 나눌 수 없었다. 그는 가장 먼저 내보낼 자로, 급료가 가장 적게 밀린 자가 아니라 가장 많이 밀린 자를 떠올렸다.

역설이었다. 오래 굶긴 자를 먼저 내보내는 것이, 그에게 미안함이 덜한 길처럼 보였다.

그러나 도안은 곧 그 생각을 거뒀다. 가장 많이 밀린 자가 가장 절박한 자였고, 절박한 자를 빈손으로 내보내는 것이 가장 위험했다.

그는 명단을 앞에 두고, 어느 이름에도 줄을 긋지 못한 채 밤을 맞았다. 회계는 숫자를 줄이면 되지만, 지휘관은 사람을 줄여야 했다.

도안은 그 차이의 무게를 그 밤 처음으로 온전히 느꼈다.

그날 밤, 북문에서 사건이 터졌다. 감축 명단이 아직 정해지지도 않았는데, 소문이 먼저 돌았다.

누가 잘리는지 모른다는 것이, 모두를 잘릴 자처럼 만들었다. 급료가 두 달 밀린 수비대 일부가, 그 소문에 동요했다.

그들은 모닥불 앞에 모여 낮은 목소리로 셈했다. 잘리면 급료는 영영 못 받는다.

받을 수 있을 때 받아야 한다. 그 셈이 종자 자루로 향했다.

곡간을 지키던 손이, 그 곡간을 여는 손이 됐다. 지키는 자와 훔치는 자 사이의 거리는, 두 달 치 급료만큼이었다.

어차피 곧 잘릴 자리라면, 두 손 빈 채로 나갈 수는 없다는 자들이 있었다. 그들은 급료 대신 종자 자루를 훔쳐 달아났다.

군량으로 내기로 한 그 종자도, 봄에 뿌릴 그 종자도 아닌, 도시가 가진 마지막 여분의 종자였다. 도안이 그 보고를 받고 달려갔을 때, 북문은 열려 있었고, 종자 자루 몇이 사라진 뒤였다.

달아난 자들의 자리에는 벗어 둔 수비대 외투가 남아 있었다. 외투를 벗는 것은, 더는 도시의 병사가 아니겠다는 표시였다.

도안은 그 외투를 집어 들었다. 그가 함께 끊긴 다리를 지킨 손들 중 하나였다.

적의 매복을 함께 막은 자가, 두 달 치 급료 앞에서 외투를 벗고 도시의 곡간을 열었다. 도안은 그를 미워할 수 없었다.

미워하기에는, 그 급료를 제때 주지 못한 책임이 자기에게도 있었다. 감축 명령이 부른 동요가, 명령이 집행되기도 전에 도시의 종자를 빼냈다.

레아의 절충은 양쪽을 조금씩 살리려 했으나, 그 조금씩의 불만이 모여 도둑이 되었다. 달아난 자들은 본래 악인이라 할 수 없었다.

두 달 급료를 못 받고, 곧 잘릴 거라는 말을 들은 자들이었다. 그들에게 종자 자루는 마지막 급료였다.

도안은 그들을 쫓을지 말지를 정해야 했다. 쫓아 잡으면 본보기가 됐으나, 그 추격에 또 수비대가 들었다.

쫓지 않으면 다음 자들도 같은 길을 택했다. 도안은 쫓되, 잡으면 벌하지 않고 밀린 급료를 셈해 주기로 했다.

종자를 돌려받고, 그 자리에서 급료 장부를 다시 쓰는 것. 그것이 도둑을 막는 동시에 도둑을 만든 원인을 적는 길이었다.

레아는 그 처리를 승인했다. 훔친 자를 벌하기 전에, 왜 훔쳤는지를 먼저 장부에 적는 것.

그것이 이 도시가 같은 도둑을 두 번 만들지 않는 방법이었다. 빈 종자 칸 옆에, 달아난 수비대의 이름이 적혔다.

사빈은 그 이름 옆에 ‘밀린 급료 두 달’이라고 함께 적었다. 훔친 자의 이름만 적으면, 그는 도둑으로만 남는다.

밀린 급료를 함께 적으면, 그 도둑질이 어디서 시작됐는지가 드러났다. 레아는 그 두 줄을 같이 두게 했다.

도둑의 이름과 그 도둑을 만든 빚. 둘 다 적혀야, 다음 겨울에 같은 빈 칸이 다시 생기지 않았다.

그녀는 절충의 실패를 숨기지 않았다. 양쪽을 조금씩 살리려던 그 절충이, 결국 빈 곡간 하나를 더 만들었다는 것을.

속도를 위한 통치에는 속도의 값이 있었고, 그 값이 오늘 밤 북문에서, 사라진 종자 자루의 무게만큼 빠져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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