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화

불은 빌릴 뿐

기적은 곡물을 먹는다 · 2026. 9.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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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빈 노르는 왕실 운송표와 같은 종이섬유를 찾으러 바렌가 지하 문서고로 내려갔다. 종이는 만든 곳마다 섬유의 결이 다르다.

운송표의 종이가 어느 작업장에서 나왔는지를 알면, 그것을 만든 손이 어디 있는지도 좁혀진다. 그는 등불을 들고, 오래된 습기 냄새 속으로 들어갔다.

계단은 아래로 갈수록 차가워졌고, 발소리가 돌벽에 한 박자 늦게 되돌아왔다.

사빈은 회계관이었지, 문서 감정가가 아니었다. 그러나 장부를 오래 다룬 손은 종이의 차이를 안다.

위조된 영수증, 다시 쓴 장부, 덧댄 한 줄. 그는 평생 그런 것들을 골라내며 살았다.

종이를 보는 일은 숫자를 보는 일과 닮아 있었다. 둘 다 ‘맞아떨어지는 듯 보이지만 어딘가 어긋난 것’을 찾는 일이었다.

그는 운송표를 처음 받았을 때부터, 그 종이의 결이 로헤른에서 흔히 쓰는 종이와 다르다는 것을 손끝으로 느꼈다. 오늘 그는 그 느낌을 증거로 바꾸러 내려온 것이다.

느낌은 장부에 적을 수 없지만, 섬유의 일치는 적을 수 있었다.

미카가 따라 내려왔다. 사빈은 그를 조수로 부르지 않았다.

미카는 자기 목적이 있었다. 긁어 버린 후계 통행증 이후로, 그는 자기 축복 문서가 원래 어떤 문구를 담아야 했는지 알고 싶어 했다.

두 사람은 같은 문서고에서, 각자 다른 종이를 찾았다. 사빈은 운송표의 출처를, 미카는 자기 서약의 원문을.

같은 등불 아래 두 갈래의 갈증이 나란히 움직였다.

문서고는 바렌가 가장 깊은 곳에 있었다. 습기를 막으려 벽을 두껍게 쌓았고, 그 두꺼운 벽이 오히려 습기를 가뒀다.

종이마다 곰팡이의 옅은 무늬가 번져 있었다. 사빈은 그 무늬를 읽는 법을 알았다.

어떤 곰팡이는 종이를 빨리 먹고, 어떤 곰팡이는 더디게 먹는다. 곰팡이의 진행만으로도 종이의 나이를 어림할 수 있었다.

그는 운송표 한 귀퉁이를 떼어 와, 문서고의 종이들과 섬유를 맞춰 보았다. 운송표의 섬유는 거칠고 결이 일정했다.

손으로 뜬 종이가 아니라, 큰 작업장에서 틀로 떠낸 종이였다. 그런 작업장은 흔하지 않았다.

사빈은 초기 변경헌장과 현대 교회 사본을 나란히 폈다. 두 문서는 같은 내용을 담고 있어야 했다.

그런데 문장의 길이가 달랐다. 한 줄이 통째로 잘린 것이 아니라, 현대 사본에서는 그 자리가 여백으로 밀려 사라져 있었다.

글자를 지운 것이 아니라, 행간을 늘려 한 줄이 들어설 자리를 없앤 것이다. 교묘한 삭제였다.

흔적을 남기지 않으려는 손은, 흔적을 남기지 않으려 애쓴 그 자국으로 들킨다. 누가 봐도 빠진 줄이 없어 보이도록, 줄 사이의 간격으로 한 줄을 삼켰다.

사빈은 두 사본의 행수를 셌다. 초기 헌장은 한 장에 스물네 줄, 현대 사본은 스물세 줄이었다.

한 줄이 사라졌다. 그러나 현대 사본은 그 한 줄만큼 글자 사이를 넓혀, 장의 길이를 똑같이 맞췄다.

그래서 두 사본을 따로 보면 어느 쪽도 이상하지 않았다. 나란히 놓고 행간을 재야만, 한쪽이 한 줄을 삼킨 것이 드러났다.

사빈은 자를 대고 두 사본의 행간을 쟀다. 현대 사본의 행간이 초기 헌장보다 일정하게 넓었다.

우연한 필사 차이라면 행간이 들쭉날쭉했을 것이다. 일정하게 넓다는 것은, 한 줄을 지우기 위해 전체를 계산해 다시 베꼈다는 뜻이었다.

삭제는 충동이 아니라 설계였다.

사빈은 초기 헌장의 그 자리를 읽었다.

“불은 빌릴 뿐, 사람을 소유하지 않는다.”

그 한 줄이 현대 사본에서 사라져 있었다. 사빈은 그것을 시적인 격언으로 넘기려 했다.

오래된 문서에는 으레 이런 경구가 붙는다고. 미카가 그 줄을 보고 멈췄다.

“이거… 제 축복 문서의 서약 문구랑 닮았어요.”

미카가 말했다. 후계 축복의 서약에도 ‘빛을 빌린다’는 표현이 있었다.

미카는 자기 빈 축복란 때문에 그 문구를 외우고 있었다.

미카는 그 서약을 외우게 된 사연을 짧게 말했다. 축복이 취소된 뒤, 그는 자기가 받지 못한 그 서약이 정확히 무엇이었는지 알고 싶어 성당 서기에게 사본을 청했다.

서기는 사본을 주며, 한 구절을 손가락으로 짚었다. ‘빛을 빌려 가문을 비추되, 빛은 가문의 것이 아니다.’ 미카는 그때 그 문구를 이상하게 여겼다.

축복이 자기 것이 아니라면, 왜 그렇게 큰 의례로 받는 것인가. 지금 헌장의 ‘불은 빌릴 뿐’을 보자, 두 문구가 같은 뿌리에서 나왔다는 것이 분명해졌다.

빛도, 불도, 빌리는 것이었다. 누구의 소유도 아닌 것을, 교회는 소유한 듯 나누어 주고 있었다.

사빈은 미카가 짚은 그 닮음을 무시할 수 없었다. 시적 격언이 후계 서약의 문구와 닮았다면, 그것은 격언이 아니라 법적 문구일 수 있었다.

‘빌릴 뿐’이라는 말은, 무언가를 영구히 소유하지 않는다는 계약의 언어였다. 그러나 사빈은 그것을 결론으로 적지 않았다.

오래된 문구 하나가 모든 계약을 취소하는 마법 열쇠처럼 보이는 것을, 그는 경계했다. 문구는 발견됐을 뿐, 그 효력은 아직 아무것도 증명되지 않았다.

삭제된 여백 옆에 작은 부호가 있었다. 이중 갈고리 모양.

사빈은 그 부호를 알아보았다. 교회 곡물 장부에서 본 이중 획 표식과 닮아 있었다.

곡물을 옮길 때 쓰던 그 부호가, 헌장의 문장을 삭제한 자리에도 있었다. 같은 손, 혹은 같은 학교에서 배운 손이 곡물과 문장을 함께 옮긴 것일 수 있었다.

사빈은 그 부호를 젊은 시절 아르노 벨의 필경본과 비교해 보았다. 비슷했다.

획의 굵기도, 갈고리의 휜 각도도. 그러나 비슷한 것은 확정이 아니었다.

필경 학교에서 같은 부호를 배운 사제가 여럿일 수 있었다. 그는 ‘유사’라고만 적고, 아르노의 이름을 결론에 넣지 않았다.

이름을 적는 순간, 의심은 사실인 척 굳는다. 사빈은 그 굳음을 경계했다.

사빈은 그 부호의 쓰임을 곱씹었다. 곡물 장부에서 이중 획은 ‘이 항목을 다른 장부로 옮겼다’는 표시였다.

헌장에서 같은 부호가 삭제된 줄 옆에 있다면, 그것은 ‘이 문장을 다른 곳으로 옮겼다’는 뜻일 수 있었다. 삭제가 아니라 이동.

사라진 한 줄은 없어진 것이 아니라, 어딘가 다른 문서로 옮겨져 봉인됐을 수 있었다. 그렇다면 원본은 파기된 것이 아니라, 누군가의 손이 닿는 곳에 보관되어 있을 것이었다.

사빈은 그 가능성에 잠깐 숨을 멈췄다. 옮긴 자는 옮긴 것을 버리지 않는다.

옮긴 것이 언젠가 자기에게 칼이 될 줄 알기에, 가장 깊은 곳에 둔다.

미카가 곁에서 그 부호를 손가락으로 따라 그렸다.

“이거, 제 축복 문서 여백에도 있었어요.”

미카가 말했다. 사빈의 손이 멈췄다.

미카의 빈 축복란 옆에도 같은 이중 갈고리가 있었다는 것은, 미카의 후계 서약 역시 ‘삭제’가 아니라 ‘이동’의 대상이었을 수 있다는 뜻이었다. 사빈은 그것을 결론으로 적지 않았다.

다만 ‘미카 축복 문서 여백, 동일 부호 확인 요망’이라고 적었다. 한 아이의 빈칸과 한 도시의 사라진 법이, 같은 부호로 이어져 있었다.

요안이 문서고로 내려왔다. 그는 그 사라진 문구를 보고 곧바로 말했다.

“현대 교회법에는 그 문구가 없습니다. 없는 문구는 효력이 없어요. 지금의 법정에 그걸 들고 가면, ‘출처 불명의 위서’라는 말만 듣습니다.”

사빈은 요안의 말이 옳다는 것을 알았다. 신앙과 법은 다르고, 법정은 종이에 적힌 현행 문구만 인정한다.

발견된 문구가 힘을 가지려면, 그것이 한때 진짜 법이었음을 증명할 원본이 필요했다.

그러나 요안의 목소리에는 미세한 떨림이 있었다. 그는 ‘없는 문구는 효력이 없다’고 말하면서도, 그 문구가 한때 있었다는 사실 자체에 흔들리고 있었다.

사제로서 그는 빛이 교회의 것이라 배웠다. 그런데 창립 헌장은 빛이 누구의 것도 아니라 했다.

그가 평생 집전한 의례가, 빌린 것을 소유한 척 나누어 준 일이었다면. 요안은 그 생각을 끝까지 밀고 가지 못했다.

그는 다만 “원본이 있다면, 이야기가 달라집니다”라고만 했다.

효력이 없다던 그가, 원본의 가능성 앞에서 ‘달라진다’고 말한 것이다. 사빈은 그 모순을 짚지 않았다.

요안 스스로 그 모순 속을 걷고 있었으므로.

사빈은 문서 목록을 뒤졌다. 초기 헌장의 원본이 어디 보관되었는지를 적은 목록.

그 목록의 한 줄에 ‘백맥 수도원’이 있었다. 기도방아 기술과 초기 교회 기록을 보관하는 곳.

원본이 그곳에 아직 남아 있을 수 있었다. 백맥 수도원은 도시에서 사흘 거리였고, 겨울 길이었다.

사빈은 그 줄에 표시를 했다. 지금 당장 갈 수는 없었으나, 가야 할 곳이 생겼다.

발견된 한 줄은 아직 법이 아니라 의문이었고, 그 의문의 답은 도시가 아니라 수도원의 오래된 서가 어딘가에 있었다. 사빈은 등불을 끄기 전, 미카가 자기 축복 사본에 그 사라진 문구를 작게 베껴 적는 것을 보았다.

그는 그것을 말리지 않았다. 빈칸을 채우는 것이 아니라, 사라진 줄을 기억해 두는 일이었다.

문서 목록에는 백맥 수도원 옆에 작은 주석이 달려 있었다. ‘키아 라몬 원장 관리.’ 사빈은 그 이름을 알지 못했으나, 적어 두었다.

원본을 보려면 그 사람의 허락이 필요할 것이었다. 그리고 그런 원본을 지키는 자는, 그것을 노리는 자도 알고 있을 가능성이 컸다.

사빈은 수도원으로 가는 길이 안전하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을 함께 적었다. 그는 발견을 기록하면서, 그 발견이 불러올 위험도 같은 장에 적었다.

좋은 회계는 자산만 적지 않는다. 그 자산에 딸린 부채도 함께 적는다.

‘불은 빌릴 뿐’이라는 한 줄은 자산이었고, 그것을 찾으러 가는 길은 부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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