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 연인이 아니었다
하렘 소문은 재난으로 분류됩니다 · 2026. 5. 9.
윤세라는 백도진의 비밀 연인이 아니었다.
그런데 그 소문 덕분에 천장이 세라만 피해 무너지고 있었다. 철근과 콘크리트가 그녀의 머리 위에서 갈라질 때마다, 보이지 않는 손이 잔해를 양옆으로 밀어 연인에게 바치는 꽃길 같은 틈을 만들었다. 문제는 그 꽃길의 끝이 끊어진 승강장이라는 점이었다. 도진은 살릴 수 있다고 말한 뒤, 먼저 허락부터 물었다.
“윤세라. 지금부터 읽는 문구, 전부 듣고 결정해.”
“삼십 초.”
“충분해.”
“허세면 구조 끝나고 죽인다.”
출근 시간의 강남순환선 구룡역은 반쯤 주저앉아 있었다. 전동차 두 칸이 꺾여 터널 벽에 박혔고, 깨진 광고판에서는 같은 영상이 소리 없이 반복됐다. 잔해에 갇힌 세라와 안전선 밖의 도진. 누군가 붙인 자막은 선명했다.
비밀 연인을 구하러 무자격 계약직이 뛰어들었다.
사람들이 그 문장을 읽어 줄 때마다 소문역이 진동했다. 세라는 연인이 되어 보호받았고, 도진은 연인을 구해야 하는 영웅이 되었다. 역할은 그럴듯했다. 그래서 더 위험했다. 영웅에게는 후퇴가 없고, 보호받는 연인에게는 지휘권이 없었다.
세라가 무전기에 대고 잘라 말했다.
“2번 기둥 서쪽으로 기울어. 민간인 셋, 내 뒤 여덟 미터. 먼저 빼.”
곧바로 임시 현장본부의 확성기가 그녀의 말을 덮었다.
“백도진 씨, 즉시 영웅 서명하십시오! 서명하면 진입 권한을 임시 승인합니다!”
투명 단말 위 붉은 버튼이 번쩍였다. 영웅 역할 수락. 재난조정국 직원은 누르기만 하면 된다는 얼굴이었다. 도진은 버튼 옆의 작은 글씨부터 읽었다.
역할 당사자의 구조 지휘권은 영웅에게 위임된다.
“반품.”
마태호가 방수 가방을 메고 안전선 안으로 미끄러져 들어왔다. 가방에서는 고정핀, 절단기, 케이블이 차례로 튀어나왔다.
“구조용 핀 열둘, 견인 케이블 둘, 목숨은 각자 하나. 그런데 지휘권까지 네가 적재하면 축이 부러져. 그건 배송이 아니라 투기야.”
“나도 알아.”
“아는 놈이 왜 버튼 앞에 서 있어?”
“다른 문구 만들고 있어.”
태호는 도진의 단말을 들여다보다가 얼굴을 구겼다. “삼십 초 안에?”
“이십이 초.” 세라가 정정했다. “잡담 비용은 네 보험에서 빼.”
그 말이 끝나기도 전에 2번 기둥이 내려앉았다. 세라가 부러진 안내판을 어깨로 밀어 민간인 쪽을 막았다. 천장은 여전히 그녀만 절묘하게 피했다. 대신 그녀가 지키는 사람들을 향해 파편을 쏟았다. 소문은 연인을 살려 주겠다고 했지, 현장대장의 명령을 들어 주겠다고 하지는 않았다.
도진은 영웅 서명 창을 닫았다. 새 조항을 세 줄로 줄였다. 손끝이 떨렸지만 질문은 줄이지 않았다.
“확인부터 하자. 첫째, 윤세라는 구조 대상이 아니라 현장 지휘관으로 남는다. 둘째, 백도진은 세라가 지정한 진입로만 연다. 셋째, 이 정정은 지금 갇힌 사람들의 퇴로 확보까지만 유효하다. 이해했어?”
“둘째 수정. 내가 지정한 진입로가 막히면 태호 판단으로 한 번 바꾼다.”
태호가 눈을 크게 떴다. “내 표도 적재된다고?”
“싫으면 빠져.”
그는 기울어진 기둥과 남은 핀을 번갈아 봤다. 농담이 빠진 목소리로 답했다.
“한 번만. 핀 여섯 개 넘으면 중지.”
도진이 문구를 고쳤다. 그리고 마지막 줄을 소리 내 읽었다.
“비용도 있어. 정정으로 줄인 강제력만큼 내 돈, 조정 자격, 능력을 쓴 기억 중 하나가 깎여. 이번 건 얼마가 나올지 몰라.”
“내 쪽 비용은?”
도진은 대답을 서두르지 않았다. 보장할 수 없는 걸 안전하다고 말하면 그 순간부터 설명이 아니라 유인이었다.
“정정 자체가 네 걸 가져가진 않아. 하지만 조정국이 소문을 지휘 공정성 문제로 돌리면 인사상 손해가 생길 수 있어. 그건 내가 막는다고 약속 못 해.”
무전기 너머로 쇳조각 하나가 튕겼다. 세라가 짧게 숨을 삼켰다.
“철회는?”
“서명 전에는 지금. 실행 뒤에는 퇴로 확보가 끝나면 자동 종료. 중간 철회는 통로를 닫을 수 있어서 셋이 같이 중지 판단해야 해.”
“그 조건 포함. 세라, 동의해?”
잔해 너머에서 대답이 없었다. 세라는 시간도 세지 않았다. 그 침묵이 도진에게는 가장 길었다. 급하면 혼자 비용부터 내는 버릇이 손목을 당겼다. 영웅 버튼은 아직 화면 아래에 남아 있었다. 누르면 바로 들어갈 수 있었다.
“백도진.”
“듣고 있어.”
“네 비용까지 들었어. 내 지휘권은 내가 갖는다. 태호한테 한 번 변경권 준다. 퇴로 확보 뒤에는 네 정정권도 끝. 그 조건으로 동의해.”
그제야 도진이 서명했다.
소문역이 한 박자 조용해졌다.
광고판의 자막에서 ‘비밀 연인’이 번져 내렸다. 검은 획들이 물에 젖은 잉크처럼 흘러 ‘현장 지휘관’으로 다시 모였다. 그 순간 세라를 피해 휘던 철근이 멈췄다. 보호의 꽃길은 사라졌다. 대신 그녀가 가리킨 서쪽 벽에 사람 하나가 통과할 틈이 열렸다.
“진입.”
세라의 한마디에 도진이 몸을 던졌다.
첫 틈은 어깨보다 좁았다. 태호가 케이블을 걸고, 도진이 절단기를 밀어 넣었다. 쇳가루가 뺨에 박혔다. 세라는 반대편에서 안내판을 걷어차 민간인 셋을 엎드리게 했다.
“고개 아래. 여덟 걸음. 뛰지 마.”
한 아이가 울면서 세라의 옷자락을 잡았다. 위에서 볼트가 빠지는 소리가 났다. 도진은 아이를 먼저 당기려다 멈췄다. 세라가 가리킨 순서는 노인, 아이, 다리를 다친 회사원이었다. 자신이 보기 좋은 구조와 현장에서 필요한 구조는 달랐다.
“순서 유지.” 도진이 말했다. “태호, 장력 확인.”
“팔십. 핀 넷. 아직 배송 가능.”
노인이 틈을 빠져나왔다. 아이가 뒤를 이었다. 세 번째 회사원의 다리가 걸린 순간, 천장이 다시 울었다. 태호가 케이블을 내려다봤다.
“서쪽 못 버텨. 변경권 쓴다. 남쪽 환기구로 돌려.”
도진은 계산했다. 남쪽은 세라와 멀어졌다. 원래 문구라면 금지된 길이었다. 하지만 세라가 넘긴 한 번의 권한이었다.
“변경 확인. 남쪽으로.”
그가 케이블을 풀자 서쪽 틈이 닫혔다. 현장본부에서 비명이 터졌고, 재난조정국 직원이 확성기로 고함쳤다.
“임의 변경입니다! 영웅 서명으로 복귀하세요!”
“재고 없어요!” 태호가 더 크게 외쳤다.
남쪽 환기구 덮개가 들렸다. 세라가 다친 회사원을 업어 올리고 아이를 밀어 넣었다. 도진은 환기구 안쪽에서 두 사람을 받았다. 마지막으로 세라가 손을 내밀었을 때, 그는 잡기 전에 물었다.
“오른손 괜찮아?”
“왼손. 오른쪽 어깨 맞았어.”
도진은 왼손목을 잡고 당겼다. 세라는 올라오자마자 그의 손을 떼고 뒤를 돌아봤다.
“남은 사람?”
“전부 나왔어.”
그제야 세라가 한쪽 무릎을 짚었다. 기침 사이로 웃음 비슷한 숨이 샜다.
“구조는 합격. 표정은 해고.”
“계약직한테 해고 농담은 타격이 커.”
“그럼 다음엔 웃어.”
구급대원이 다가와 세라의 오른팔을 들려 했다. 세라는 이를 악물고 한 걸음 물러섰다.
“들지 마세요. 타박인지 골절인지 먼저 확인.”
도진이 대신 고정포를 받아 들자 세라가 눈으로 그를 막았다. “내가 말해.”
“알아. 고정포만 전달.”
구급대원은 세라에게 통증 위치를 다시 묻고서야 팔을 고정했다. 도진은 그녀의 대답을 끼어들지 않고 단말에 기록했다. 오른쪽 어깨 충격, 현장 지휘 유지, 정밀 검사 필요. 세라는 마지막 문구를 확인한 뒤 직접 저장을 눌렀다.
뒤늦게 사이렌과 박수가 한꺼번에 터졌다. 누군가는 두 사람이 손을 잡았던 장면만 확대해 생중계했다. 화면 아래 자막은 벌써 바뀌어 있었다.
비밀 연인, 죽음도 갈라놓지 못했다.
세라가 구조 담요를 걷어찼다. “저 문장 내리라고 해.”
재난조정국 직원은 두꺼운 보고서철을 들고 다가왔다. 아까 영웅 서명을 재촉하던 남자였다. 그는 카메라를 의식해 웃으며 첫 장을 펼쳤다.
“두 분의 헌신 덕분에 인명 피해를 막았습니다. 여기 역할 확인란에 서명만 하시면-”
세라가 펜을 빼앗았다. ‘영웅의 비밀 연인’이라고 적힌 칸을 한 줄로 그었다.
“난 현장대장 윤세라예요. 구조받은 건 맞고, 연인 역할은 거부합니다. 영상과 보고서 둘 다 정정하세요.”
직원의 미소가 얇아졌다. “이미 대중 인식이 형성돼서 즉시 정정은 어렵습니다. 우선 내부 절차상-”
“그건 작전이 아니야. 책임 미루기지.”
구조된 회사원이 들것에서 상체를 일으켰다. “저 대장님이 순서 정했습니다. 저 사람 혼자 한 거 아니에요.”
직원이 카메라를 등졌다. 도진은 그 동작까지 원본 보존 항목에 추가했다.
세라는 빈칸에 직접 조건을 적었다. 구조 지휘권 유지. 사적 관계 기록 금지. 영상 원본 보존. 그리고 도진에게 펜을 내밀었다.
“네 몫은 네가 써.”
도진은 ‘영웅’ 칸을 그었다. 그 아래에 정정 비용은 당사자 합의 없이 피해자에게 전가하지 않는다고 적었다. 서명을 마치자 단말 두 대가 동시에 울렸다.
세라가 먼저 자기 화면을 봤다.
인사심의 보류. 윤세라 대장의 승진 심사는 사적 관계에 따른 지휘 공정성 검토가 끝날 때까지 동결됩니다.
도진의 화면에는 숫자가 떴다.
합의정정 비용 정산. 계약 급여 삼 개월분 전액 압류.
태호가 두 통지서를 번갈아 읽었다. 길게 숨을 들이마신 뒤 한 단어로 끝냈다.
“파손.”
펀치라인보다 청구서가 늦게 왔고, 그래서 더 아팠다. 도진은 반사적으로 자기 통지만 닫으려 했다. 세라가 손등으로 그의 화면을 막았다.
“숨기지 마.”
“내 급여야.”
“내 작전에서 생긴 비용이기도 해. 네가 혼자 정산하면 다음엔 허락 안 해.”
도진은 닫기 버튼에서 손을 뗐다. “확인. 공동 기록으로 남겨도 돼?”
“급여와 승진만. 사적 관계는 제외.”
“동의.”
두 사람은 통지를 한 화면에 나란히 띄웠다. 직원이 내민 면책 확인서에는 구조 시각보다 이른 결재 시각이 찍혀 있었다. 아직 붕괴 신고도 들어오기 전이었다.
도진은 마지막 줄에서 손을 멈췄다.
급여 압류 승인자 옆에 낯선 공동서명이 하나 더 있었다.
이름은 번져 읽히지 않았다. 존재만은 선명했다.
“이 서명, 누구 겁니까?”
직원이 보고서철을 낚아채려 했다. 세라가 먼저 그 위에 손을 얹었다. 오른쪽 어깨가 떨렸지만 손은 물러나지 않았다.
“원본 보존.”
도진은 직원 대신 세라를 봤다. 세라는 연인란이 지워진 보고서를 그의 가슴에 밀어 주었다.
“이건 구조 보고서예요.”
그리고 압류서만 따로 접어 자기 주머니에 넣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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