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세 번째 조항
계약 결혼의 열세 번째 조항 · 2026. 6.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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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백서의 아래쪽 모서리가 비에 젖어 있었다.
창문을 닫은 사람은 없었다. 서감사청의 긴 탁자 위로 새벽 전의 빗물이 한 방울씩 튀었고, 젖은 종이는 서명란 옆에서만 조금 더 어두웠다. 리디아 아베른은 그 얼룩을 먼저 보았다. 이름을 적을 자리보다, 비어 있는 승인란보다, 종이가 물을 먹은 방향이 먼저 눈에 들어왔다.
“공녀께 남은 시간은 두 시간보다 적습니다.”
오스윈 델마르는 목소리를 높이지 않았다. 그는 탁자 맞은편에 앉아 있었고, 양손은 검은 장갑 위에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협박을 하는 사람치고는 지나치게 편안한 자세였다.
“첫 종이 울리면 제라드 아베른 공작의 즉결 심리가 시작됩니다. 심리라 부르지만, 절차는 오래 걸리지 않을 겁니다. 항구 지휘권은 동결되고, 미레유 아베른 양은 왕실 피후견인으로 옮겨집니다. 그 뒤에는 삼항구 의회가 누구의 명령을 먼저 들을지 스스로 판단하겠지요.”
리디아는 펜을 잡지 않았다. “자백서에 서명하면요.”
“가문은 존속합니다.” 오스윈은 기다렸다는 듯이 첫 줄을 읽었다. “공작은 재산 일부를 왕실에 환납하고, 공녀는 삼항구 임시 지휘권을 내려놓습니다. 미레유 양은 보호 명목으로 왕궁에 머뭅니다. 공개 재판은 피할 수 있습니다.”
“공개 재판이 아니라 공개 질문을 피하게 되겠군요.”
오스윈의 눈썹이 아주 조금 내려갔다. “질문은 사람을 살리지 못합니다.”
“거짓 자백도요.”
감사청 끝에 선 엘리어스가 숨을 들이켰다. 리디아는 그쪽을 보지 않았다. 엘리어스가 멈추라고 눈짓할 줄 알았고, 그 눈짓을 보면 펜을 내려놓기가 어려워질 줄 알았다.
오스윈은 종이를 한 장 더 밀었다. “공녀께서 끝까지 아버지의 무죄를 믿고 싶어 하시는 마음은 이해합니다. 하지만 오늘은 믿음보다 선택이 필요합니다. 제라드 공작을 살릴 수 있는 선택.”
“살린다는 말의 범위를 확인하겠습니다.” 리디아는 손끝으로 자백서의 젖은 모서리를 눌렀다. 물이 손톱 밑으로 스몄다. “즉결 심리 전에 왕족 배우자가 공동심리권을 청구하면 절차는 중지됩니까?”
오스윈은 답을 늦췄다. 그 짧은 간격으로 충분했다.
“법전에는 그렇게 적혀 있습니다.” 그가 말했다. “그러나 공녀께는 배우자가 없습니다.”
“그래서 이 자백서에는 배우자 관련 권리 포기 조항이 빠져 있군요.”
오스윈의 시선이 처음으로 서류에서 리디아의 얼굴로 올라왔다. 그는 화를 내지 않았다. 화를 내는 사람은 자기 의도를 설명하게 된다. 오스윈은 설명 대신 잉크병을 바로 세웠다.
“빠진 조항을 근거로 서명하지 않겠다는 뜻입니까?”
“빠진 조항이 제게 아직 남은 선택을 말해 주니까요.”
“공녀가 지금 혼인을 찾으러 나가면, 가문 사람들은 공녀를 기다리지 못합니다. 감사청 밖에는 왕실 경비가 서 있고, 삼항구 대리인들은 이미 출입을 제한받았습니다.”
“제한이지 체포는 아닙니다.”
“단어가 사람을 살릴 때도 있습니까?”
“오늘은 그럴 것 같습니다.”
“왕실 피후견 명령은 심리 전입니까, 후입니까?”
“미레유 양을 걱정하신다면 더더욱 서명하셔야 합니다.”
“전입니까, 후입니까.”
오스윈의 장갑 낀 손가락이 탁자를 한 번 눌렀다. “첫 종 이후입니다.”
리디아는 자백서를 들어 올렸다. 빗물에 젖은 모서리가 아래로 처졌다. 종이는 생각보다 잘 찢어지지 않았다. 첫 줄에서 걸렸고, 두 번째 줄에서 길게 찢어졌다. 오스윈은 일어나지 않았다. 엘리어스가 이번에는 숨을 삼키지 못했다.
“공녀.”
“제 대답입니다.”
“그 대답의 비용은 가문이 냅니다.”
“아니요.” 리디아는 찢어진 두 장을 다시 겹쳐 탁자 한가운데에 놓았다. “지금부터는 제가 냅니다.”
“비용을 낼 권한도 아직 공녀께 없습니다.”
“그러면 권한부터 만들겠습니다.”
오스윈의 손이 장갑 안에서 한 번 굳었다. 그것도 기록할 수 없는 흔적이었다. 리디아는 의자를 밀고 일어났다. 다리가 탁자에 닿으며 낮은 소리를 냈지만, 방 안 누구도 그 소리에 대해 말하지 않았다. 감사청 문 앞의 경비가 창끝을 아주 조금 세웠다.
엘리어스가 그녀의 뒤를 따르며 작게 물었다. “도주 경로입니까?”
“아니요.”
“그럼요?”
“가장 가까운 왕족의 동선.”
회랑은 감사청보다 추웠다. 돌바닥의 물기는 바깥에서 묻어 온 발자국을 가늘게 번지게 했다. 카시안 로엔은 북문 보고관 둘과 함께 회랑 끝에서 걸어오고 있었다. 왕의 이복동생, 북문대공, 국왕 유고가 나면 섭정 후보로 이름이 오를 남자. 리디아는 그가 지나갈 길 한가운데에 섰다.
카시안은 걸음을 멈췄다. 그의 시선은 리디아의 젖은 장갑, 찢어진 자백서 조각, 뒤따라 나온 오스윈을 차례로 지나갔다.
“아베른 공녀.”
“전하께 삼항구의 세 표가 필요하다고 들었습니다.”
보고관 중 하나가 고개를 들었다. 카시안은 그에게 물러나라는 손짓도 하지 않았다.
“그 말을 들은 곳과 시각을 먼저 묻고 싶군요.”
“지금 묻는다면 제게는 답할 시간이 없습니다. 전하께도 그렇습니다.” 리디아는 자백서 조각을 접어 손안에 넣었다. “북문군은 항구 함대 없이는 겨울 보급을 한 달 이상 버티기 어렵습니다. 델마르 재상은 비상령을 무기한으로 늘리려 할 겁니다. 전하가 그걸 막으려면 삼항구 중 적어도 둘의 동의가 필요합니다.”
카시안의 얼굴에는 놀람이 늦게도 오지 않았다. “그리고 공녀는 왕족 배우자가 필요하다.”
“제 아버지의 즉결 심리를 90일 공개 심리로 돌려야 합니다. 미레유를 왕실 피후견인으로 넘길 수도 없습니다.”
“혼인을 제안하는 겁니까, 협상을 여는 겁니까.”
“협상을 여는 겁니다. 혼인은 그 형식입니다.”
오스윈이 두 사람 사이로 부드럽게 끼어들었다. “전하, 두 시간 안에 체결되는 혼인은 강요로 해석될 여지가 큽니다. 왕실이 그런 계약에 이름을 올리는 것은—”
“재상께서 방금 공녀에게 내민 선택지도 해석의 여지가 있겠군요.” 카시안이 말했다.
오스윈은 웃지 않았다. “저는 가문을 살릴 길을 제시했습니다.”
“저도 들었습니다.”
리디아는 그 말을 붙잡지 않았다. 고마워하면 거래가 흐려진다. “제 조건은 세 가지입니다. 공동심리권 즉시 청구. 미레유를 협상 카드로 쓰지 않을 것. 아베른 함대의 일상 지휘권은 제가 유지할 것.”
“제 조건도 세 가지입니다.” 카시안은 바로 받았다. “30일 동안 삼항구 함대 협의권. 공개 행사 동행. 북문군 작전 기밀은 필요한 범위에서만 공유.”
“필요한 범위는 누가 정합니까.”
“처음에는 제가 정합니다. 공녀가 검토권을 갖습니다.”
“검토 뒤 이의 제기권까지.”
“기록에 남기는 조건으로.”
“공개 행사 동행은 횟수를 적겠습니다. 무제한 동행은 혼인이 아니라 동원입니다.”
“주 2회. 국왕 유고나 북문 비상 보고 때는 예외.”
“예외에도 사전 통지를 붙입니다.”
카시안은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회랑 바깥에서 비가 처마를 때리는 소리가 촘촘해졌다. 그가 망설이는 동안 리디아는 그 침묵이 거절인지 계산인지 구분하려 애썼다.
“사전 통지는 붙입니다.” 그가 말했다. “다만 통지 뒤 거절하면, 공녀가 그 정치 비용을 부담합니다.”
“그 비용을 기록할 권리도 제게 있어야 합니다.”
“기록 접근권. 엘리어스 렌이 초안을 쓰면 제가 확인하겠습니다.”
오스윈이 낮게 말했다. “이런 계약은 사랑도 신뢰도 없이 왕실을 희화화합니다.”
리디아는 처음으로 그를 보았다. “자백서에는 더 적은 것이 있었습니다.”
중립 공증실은 왕궁 예배당 옆에 붙어 있었다. 낡은 유리창 아래에 공명석 받침대가 놓였고, 엘리어스는 리디아가 불러 주는 문장을 빠르게 받아 적었다. 공증인은 자정에 깨운 사람처럼 눈가가 붉었지만, 실수하지 않으려는 손끝만은 정확했다.
“기간은 1년.” 엘리어스가 읽었다. “기간 중 공동심리권 즉시 청구. 아베른 함대의 일상 지휘권은 리디아 아베른에게 유지. 북문군 작전 기밀은 공동 사안에 한해 열람.”
“침실 분리와 출입 전 고지.” 리디아가 덧붙였다.
카시안은 잠시 펜을 멈췄다. “안전상 예외가 필요합니다.”
“화재, 암살, 의식불명 같은 경우는 예외로 하겠습니다. 그 밖에는 고지.”
“경호 판단이 늦어질 수 있습니다.”
“늦어지는 비용은 제가 집니다. 무단 출입의 비용은 전하가 지고요.”
그는 리디아를 보았다. 이번에는 평가가 조금 길었다. “좋습니다.”
“후계 의무 없음.” 엘리어스가 다음 줄을 읽었다. “재산과 수입 분리. 상대 가족을 인질로 삼지 않음. 체포 또는 감금 명령 전 상호 통지.”
카시안이 펜 끝으로 열두 번째 줄을 짚었다. “거절은 협상 결렬로 볼 수 있다.”
“그 문장은 뺍니다.”
“거절이 계속되면 계약은 작동하지 않습니다.”
“결렬과 배신은 다릅니다.” 리디아는 별지 한 장을 끌어왔다. 손가락에 묻은 물이 종이에 옮겨 갔다. “제13조. 상대의 거절을 배신으로 간주하지 않는다. 거절 이후의 안전, 지위, 기록 접근권은 별도 합의 없이는 철회하지 않는다.”
공증인이 얼굴을 들었다. “그 조항은 해석이 복잡합니다.”
“그래서 넣습니다.”
카시안은 별지를 받아 문장을 읽었다. “상대가 군사 명령을 거절해도 말입니까.”
“그 명령이 저나 제 가문에 효력을 미친다면요.”
“공녀가 항구 동원을 거절해도.”
“전하께서 그 거절을 반역으로 부르지 않는다면 협상은 계속할 수 있습니다.”
엘리어스가 마른 목소리로 물었다. “공명석에 올릴까요?”
공증인은 공명석을 받침대 중앙으로 밀었다. 흐린 회색 돌에는 아무 빛도 없었다. “주의하십시오. 공명석은 발화한 문장과 서명만 기억합니다. 강요 여부도, 진심도, 사랑도 읽지 못합니다. 문구를 어떻게 해석할지는 법정과 사람의 몫입니다.”
“좋습니다.” 리디아가 말했다.
카시안도 같은 대답을 했다.
두 사람은 조항을 소리 내어 읽었다. 돌은 금빛으로 빛나지 않았다. 다만 표면에 아주 얇은 문양이 긁힌 것처럼 생겼다. 리디아는 그 미세한 선을 보며 마지막 서명란에 이름을 적었다. 리디아 아베른. 잉크가 마르기도 전에 카시안의 이름이 그 옆에 놓였다.
공증인은 계약서와 별지를 맞물려 봉인했다. 젖은 모서리의 별지에는 엘리어스가 작은 표시를 남겼다. “초본 수분 흔적 있음. 등록본 대조 필요.”
리디아는 그 기록이 마음에 들었다. 감정보다 물자국이 오래 남을 때가 있다.
“사본은 몇 부입니까?” 그녀가 물었다.
“등록용 원본 하나, 왕실 보관본 하나, 당사자 보관본 둘입니다.”
“당사자 보관본은 제가 하나, 전하가 하나 보관합니다. 왕실 보관본은 봉인 시간과 물자국 표시를 함께 적으십시오.”
공증인은 잠깐 카시안을 보았다. 허락을 구하는 시선이었다. 카시안은 리디아가 아니라 공증인의 손에 놓인 봉인을 보았다.
“공녀가 요구했습니다. 그대로 적으시오.”
리디아는 그 문장이 기록되는 동안 펜촉의 소리를 들었다. 이것은 보호가 아니었다. 아직은 지지라고 부르기도 이르다. 다만 그녀가 요구한 문장이 다른 사람의 입을 거치지 않고 종이에 올랐다. 그 정도의 차이도 지금은 쓸 수 있는 권한이었다.
엘리어스는 그 줄 옆에 작은 검은 점을 찍었다. 나중에 틀린 사본이 나오면, 누가 어느 문장을 빼려 했는지부터 찾겠다는 표시였다.
“공동심리권 청구서를 바로 쓰겠습니다.” 엘리어스가 말했다.
“아직 아닙니다.” 공증인은 봉인된 계약을 들어 올리지 않았다. “왕족 혼인은 공개 등록 전에는 왕실 절차에 효력을 주장할 수 없습니다. 등록청 원장에 오르기 전까지는 사적 계약입니다.”
리디아의 손이 멈췄다.
멀리서 종이 울렸다. 첫 종은 아니었다. 새벽 준비를 알리는 예비 종이었다. 그래도 돌계단 아래의 공기가 바뀌었다. 누군가 문밖에서 뛰어갔고, 공증인은 창밖을 보며 시간을 재듯 입술을 움직였다.
“첫 종까지 두 시간.” 그가 말했다. “등록청은 왕궁 반대편입니다.”
카시안은 손을 내밀지 않았다. 대신 봉인된 계약서를 집어 리디아가 볼 수 있게 옆으로 들었다. “따라오라는 명령은 하지 않겠습니다.”
그는 계단 쪽으로 먼저 움직였다. 두 걸음 떨어진 거리였다.
“하지만 늦으면 둘 다 잃습니다.”
리디아는 찢어진 자백서 조각을 주머니 안쪽에 넣었다. 젖은 종이가 손바닥에 잠깐 달라붙었다가 떨어졌다. 그제야 발이 움직였다. 등록청으로 가는 계단은 길고 젖어 있었고, 첫 종은 아직 울리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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