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화

국가가 내 기억을 산다

내가 구한 사람들 때문에 미래가 틀렸다 · 2026. 9.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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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가 내 기억을 산다

긴급 통신 표시가 관리실 벽면을 덮었다. 주민 안내용 전광판이 한 번 꺼졌다 켜지더니 흰 바탕에 검은 문장이 떠올랐다.

국가연속성본부 우선 채널.

서진이 녹음 버튼을 눌렀다. 임도윤은 먼저 카메라 각도를 바꿨다. 내 얼굴과 화면이 한 프레임에 들어오게. 장유라는 주민들이 몰려 있는 복도 쪽을 확인한 뒤 문을 반쯤 닫았다.

화면에는 권태묵의 얼굴이 나왔다. 처음 보는 얼굴은 아니었다. 패킷 삭제 승인선에서 본 이름, 재난 뒤 공식 브리핑에서 반복되던 목소리, 원래 시간선에서 마지막까지 국가 기능이라는 말을 놓지 않던 사람. 하지만 지금의 그는 아직 그 모든 것을 겪지 않은 표정을 하고 있었다. 피로한 관료가 아니라 오래 전부터 준비한 표를 꺼내는 사람의 얼굴이었다.

"한이겸 씨." 그가 말했다. "회귀 여부는 묻지 않겠습니다. 오늘 필요한 것은 믿음이 아닙니다."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손은 노트 위에 있었다. 장유라의 이름이 적힌 줄을 접어 둔 페이지가 손끝 아래에서 뻣뻣했다.

권태묵은 화면 옆으로 자료를 띄웠다. 사망자 수가 아니라 시간대별 생존자 곡선이었다. 왼쪽에는 해울시 지도가 있었고, 오른쪽에는 셀 번호와 수문, 병원, 지하철 환승 노드가 짧은 선으로 묶여 있었다. 보리동은 셀 3으로 표시됐다. 그 아래 작은 코드가 붙었다.

7C-CANDIDATE / LOCAL DEVIATION.

민채가 숨을 들이마셨다. "저 코드, 아까 패킷 헤더랑..."

"말 줄여요." 서진이 낮게 끊었다. 녹음은 계속 돌아가고 있었다.

권태묵은 그 반응을 기다렸다는 듯 고개를 조금 기울였다. "산소 발생기 두 대, 휴대 발전기 네 대, 위성 중계 단말 하나, 셀 3 외곽 통행권 임시 승인. 그리고 한이겸 씨와 동행자의 현장 조작 혐의는 재난 중 필수 협력 행위로 보류할 수 있습니다."

"대가가 뭡니까." 임도윤이 물었다.

"원본 노트." 권태묵이 바로 답했다. "사망자 명단, 사건 순서, 기억 신뢰도 표기, 그리고 한이겸 씨가 아직 공개하지 않은 고신뢰 시각. 사본이 아니라 원본입니다. 수정 흔적까지 필요합니다."

장유라가 내 쪽을 봤다. 질문이 아니라 정지 신호였다. 나는 이미 거절하려고 입을 열고 있었다.

"안 됩니다."

내 말이 먼저 나갔다. 화면 안의 권태묵은 눈썹 하나 움직이지 않았다. 서진의 펜 끝이 멈췄고, 임도윤은 내 말을 그대로 적었다. 장유라는 문고리에서 손을 떼고 내 앞에 섰다.

"팀한테 묻지도 않고요?"

"저 사람한테 원본을 주면, 사람은 더 많이 갇힙니다."

"그 판단 근거를 나한테도 주세요."

나는 노트를 닫았다. 닫힌 노트가 더 크게 보였다. 내가 들고 있는 것은 답이 아니라 사람의 죽음을 미리 배치한 종이였다. 그런데도 누군가 달라고 하면 먼저 숨기고 싶어졌다. 권태묵이 원하는 것도 그 점이었다. 미래를 믿는 사람이 아니라, 미래를 독점하고 싶은 사람을 그는 이미 알고 있었다.

권태묵이 말했다. "장유라 대장님 말이 맞습니다. 거래 조건은 당사자 모두가 알아야 합니다. 한이겸 씨의 기억은 이미 공공 위험에 영향을 주고 있습니다. 독점할 수 없습니다."

"국가가 독점하는 건 되고요?" 서진이 물었다.

"국가는 사후 책임을 집니다."

"그 말은 보통 책임지는 사람이 살아남을 때만 가능하죠."

권태묵은 서진을 보지 않고 대답했다. "그래서 생존자 곡선이 필요합니다."

그는 두 번째 자료를 띄웠다. 화면 왼쪽의 곡선 하나가 붉게 변했다. 명진역 사고 시각. 내가 장유라를 끌어낸 뒤 사고 기록이 4분 앞당겨졌던 줄과 거의 같은 기울기였다. 다음은 병원 산소 차단. 원래 시간표보다 빨랐지만, 내가 장부에 B로 남긴 압력 저하 구간과 맞았다. 세 번째는 보리동 셀. 오늘 아침의 조기 자율 운용은 권태묵 자료에도 점선으로 들어 있었다. 점선 옆에는 `확정 전, 7C 시뮬레이션 반경`이라고 적혀 있었다.

그가 모든 것을 아는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몇 군데는 비어 있었다. 명진역의 구조대원 이름, 병원 내부 41바이트 패킷의 원문, 수문 annex의 빈 실행자 칸. 자료는 미래가 아니라 시뮬레이션이었다. 그런데 일부가 내 기억과 겹쳤다. 그 겹침이 더 위험했다. 거짓이라면 버리면 되지만, 절반의 진실은 사람을 거래 테이블로 끌어낸다.

"출처." 임도윤이 말했다.

"현재 공개할 수 없습니다."

"그러면 증거 가치 없습니다."

"수사 증거가 아니라 구조 자원 제안입니다." 권태묵의 목소리는 얇아지지 않았다. "보리동 주민 3,412명. 셀 3 자율 예산 11시간 31분. 급수 압력이 현재보다 18퍼센트 더 떨어지면 고층 대피 순서가 바뀝니다. 저는 그 전에 발전기를 넣을 수 있습니다."

민채가 관리실 계기판을 봤다. "급수 압력... 비슷해요. 18까진 아니고, 지금 16 아래예요."

장유라의 눈이 짧게 움직였다. 사람을 살릴 수 있는 숫자가 나온 순간이었다. 그 숫자가 어떤 손에서 나왔는지는 뒤로 밀린다. 그게 권태묵의 힘이었다.

"원본 전체는 못 줍니다." 내가 말했다.

"일부 제공으로는 늦습니다."

"그쪽 자료도 일부잖습니까."

권태묵은 잠깐 침묵했다. 화면 속 그의 뒤로 누군가 서류를 건넸고, 그는 보지도 않고 손짓으로 물렸다. "그렇습니다. 그래서 서로 맞춰 보자는 겁니다."

"맞춘 뒤에는요."

"더 많은 사람이 삽니다."

"누가 빠집니까."

관리실 안 공기가 아주 작게 식었다. 서진의 펜 끝이 다시 움직였다. 장유라는 나를 보지 않고 권태묵을 봤다. 권태묵은 이번에는 대답을 늦췄다.

"모든 구조 계획에는 우선순위가 있습니다."

"사망 예정자라는 뜻입니까."

"구조 가능성과 국가 기능 보존 가능성을 함께 봅니다."

장유라가 낮게 말했다. "말을 바꾸지 마세요. 빠지는 사람이 있냐고 묻고 있습니다."

권태묵은 처음으로 그녀를 정면으로 봤다. "있습니다."

그 한마디는 협박보다 나빴다. 그는 숨기지 않았다. 잔혹함을 예쁘게 포장하지도 않았다. 그렇다고 악당처럼 웃지도 않았다. 그냥 이미 계산한 값을 읽었다. 나는 그 방식이 싫었다. 싫은 이유가 그가 틀렸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내가 노트에서 해 온 일과 너무 닮아 있었기 때문이었다.

"한이겸 씨." 권태묵이 다시 나를 불렀다. "당신은 이미 사람을 골랐습니다. 명진역에서 한 명을 먼저 움직였고, 병원에서 산소 순서를 바꿨고, 보리동에서 전원 예산을 공개했습니다. 차이는 규모입니다."

"차이는 동의입니다."

장유라가 내 말을 받았다. "그리고 현장입니다. 당신 그래프에는 이 문 앞에서 물통 든 사람들이 안 보이죠."

"그래서 현장 자료를 요구합니다."

"현장을 자료로만 보겠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권태묵은 그 말을 부정하지 않았다. 대신 다른 표를 열었다. 이번에는 이름이 아니라 두 줄이 검게 가려져 있었다. 봉인 등급이 다르고, 열람 권한 옆에 `비공개 인명 2`라고 적혀 있었다. 그는 그 줄을 빨리 넘겼지만, 너무 빨라서 더 선명했다. 비공개 두 이름. 국가 기밀일 수도 있고, 증인일 수도 있고, 그가 차마 말하지 못하는 누구일 수도 있었다. 지금 알아서는 안 되는 정보였다. 나는 눈을 떼려고 했지만 이미 봤다.

"그 두 명은 뭡니까." 서진이 물었다.

"현재 거래와 무관합니다."

"그럼 왜 띄웠습니까."

"한이겸 씨가 제가 가진 자료의 범위를 이해해야 하니까요."

범위. 그는 사람도 범위라고 불렀다. 하지만 그 범위 안에 숨은 두 이름을 그는 직접 말하지 않았다. 거기에도 약점이 있었다. 전능한 사람은 숨길 필요가 없다.

외부 복도에서 소리가 커졌다. 급수 펌프가 한 번 더 내려앉았고, 주민들이 물통을 들고 관리실 쪽으로 몰렸다. 장유라는 문을 열어 한 사람에게 지시했다. "고층부터 물통 내려오게 하지 마세요. 계단 막힙니다. 층별 대표 한 명씩."

그녀는 다시 화면으로 돌아왔다. "자원은 받습니다. 발전기, 산소, 중계 단말. 대신 노트 원본은 안 줍니다. 필요한 항목은 현장 조건으로 검증하고, 공개 범위는 여기서 정합니다."

권태묵은 나를 봤다. "한이겸 씨 결정입니까, 장유라 대장 결정입니까?"

"현장 결정입니다." 유라가 말했다.

나는 천천히 노트를 열었다. 모든 페이지를 내놓지 않았다. 대신 보리동과 서해 방벽이 닿는 점선, 병원 산소, 명진역 시각 오차가 있는 페이지 세 장만 책상 위에 펼쳤다. 서진이 즉시 촬영했고, 임도윤이 사본 작성 범위를 기록했다. 원본은 내 손 아래에 남았다. 통제는 조금 덜었지만 완전히 놓지는 못했다. 그게 지금의 한계였다.

"이 세 장으로 발전기 들어옵니까."

"들어갑니다." 권태묵이 말했다. "단, 통행권은 국가연속성본부 감독 하에 발급됩니다."

"감독관 보내겠다는 뜻이네요."

"이미 근처에 있습니다."

서진이 작게 욕을 삼켰다. 민채는 휴대용 시계와 네트워크 시간을 나란히 적었다. 임도윤은 권태묵의 말을 공식 기록으로 남겼다. 관리실은 거래소가 됐다. 물이 줄고, 전기가 줄고, 사람들의 선택권도 줄고 있었다.

그 전에 그는 자원 투입 경로부터 확정했다. 화면 한쪽에 보리동 외곽 도로와 임시 검문선이 떴다. 발전기는 바로 문 앞까지 오지 못했다. 셀 외곽문이 닫힌 상태라면, 서쪽 배수로 점검 출입구까지 차량이 접근하고 그 뒤는 사람이 옮겨야 했다. 산소 발생기는 두 대가 아니라 한 대씩 순차 반입이었다. 위성 중계 단말은 국가연속성본부 요원 손에서만 열렸다.

"감시 장치네요." 서진이 말했다.

"오용 방지 장치입니다."

"누가 오용을 판단합니까."

"제 권한입니다."

장유라가 짧게 웃었다. 웃음이라기보다 숨이 끊긴 소리였다. "그러면 거래가 아닙니다. 목줄 달린 구조죠."

권태묵은 부정하지 않았다. "목줄 없는 구조는 책임도 없습니다."

임도윤이 펜을 멈췄다. "본부장님, 지금 발언은 현장 자율권 제한으로 기록됩니다."

"기록하십시오. 나중에 누가 어떤 조건으로 사람을 살렸는지 남아야 합니다."

그 말은 깨끗해 보였다. 그래서 더 조심해야 했다. 기록은 책임을 남기지만, 동시에 책임을 떠넘기는 도구가 된다. 권태묵은 둘 다 알고 있었다. 그는 어떤 문장이 나중에 재판에서 살아남는지도 아는 사람처럼 말했다.

나는 펼친 세 장의 사본 아래에 조건을 적었다. `원본 반출 금지. 항목별 사본. 현장 검증 전 실행 금지. 주민 공개 범위 별도.` 글씨가 급해지자 장유라가 펜을 빼앗아 네 번째 줄을 더했다.

`당사자 선택권 침해 금지.`

권태묵은 그 줄을 보고 말했다. "대피 작전에서 모든 당사자에게 선택권을 보장할 수는 없습니다."

"그럼 보장하지 못하는 범위를 먼저 말합니다." 장유라가 답했다. "사람은 못 고르는 게 아니라, 자기가 못 고른다는 사실도 모르고 끌려가면 망가집니다."

"그렇게 시간을 쓰면 사망 곡선이 올라갑니다."

"숨겨도 올라갑니다."

두 사람은 서로를 설득하지 못했다. 대신 팀 안에서 누구의 말이 어떤 비용을 만드는지 드러났다. 권태묵은 시간과 숫자를 잃기 싫어했고, 장유라는 선택권을 잃기 싫어했다. 나는 둘 사이에서 노트를 잡고 있었다. 내가 지금까지 해 온 방식은 권태묵 쪽에 더 가까웠다. 그 사실을 인정하는 데 시간이 걸렸다.

외부 화면에 차량 위치가 찍혔다. 산소 발생기 한 대가 셀 외곽 2번 출입구에 도착 예정이라는 표시였다. 권태묵의 제안은 실제였다. 실제이기 때문에 거절이 더 어려웠다.

"자원은 받습니다." 내가 말했다. "하지만 원본은 안 나갑니다. 그리고 보리동 안의 배치 결정은 장유라 대장이 합니다."

"본인이 지휘하지 않겠다는 뜻입니까."

"제가 가진 건 오래된 증언입니다. 지금 문 앞의 사람은 유라 씨가 봅니다."

권태묵의 시선이 아주 잠깐 멈췄다. 그가 원한 것은 노트뿐 아니라 나였다. 사망 곡선을 가진 사람, 통제하려는 사람, 자기 말이 가장 빠르다고 믿는 사람. 내가 한 발 물러서자 거래 대상이 흔들렸다.

권태묵은 마지막으로 다른 자료를 띄웠다. 보리동 구조 보고서 현재본과 원래 모델 비교표. 이름은 대부분 숫자로 처리돼 있었지만, 한 줄만 붉게 표시됐다. `C02-JYR / CURRENT PRESENT / BASELINE ABSENT`.

장유라가 그 줄을 읽었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손가락이 책상 모서리를 한 번 눌렀다. 그 힘 때문에 손톱 아래가 하얗게 변했다.

나는 화면을 끄고 싶었다. 하지만 꺼 버리면 질문은 사라지지 않고 더 커진다.

권태묵이 말했다. "모델에는 구조대장 한 명이 이 시간대 보리동 셀에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현재 현장 의사결정의 핵심 변수로 확인됩니다."

"그래서요." 장유라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권태묵은 이번에도 회귀를 믿느냐고 묻지 않았다. 그는 믿음 대신 빈칸을 찔렀다.

"장유라 씨는 원래 오늘 여기 없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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