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수로의 서명
내가 구한 사람들 때문에 미래가 틀렸다 · 2026. 9.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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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수로의 서명
젖은 콘크리트 냄새는 수문 annex 입구부터 올라왔다. 병원 설비층의 물기와 달랐다. 여기는 바닷물과 녹슨 철이 섞인 냄새였다. 손잡이를 잡자 찬 기운이 손바닥이 아니라 손목뼈로 들어왔다. 수갑이 짧게 울렸다.
기억은 냄새 뒤에 왔다. 남문 수문. 젖은 바닥. 흰 작업등. 윤설아의 이름이 찍힌 로그. 밀려드는 물. 그런데 소리가 없었다. 원래라면 수문 경보가 귀를 찢어야 했다. 기억 속 장면에는 경보음이 없었다. 나는 그 빈칸을 바로 설명하지 않았다. 설명하는 순간 빈칸은 반전 장치가 된다. 지금은 관측값이었다.
"냄새 때문에 멈췄습니까." 임도윤이 물었다.
"기억 큐입니다."
"기억 등급."
"외상 파편. 수문 개방과 윤설아 이름은 강함. 경보음 부재는 누락으로 기록."
서진이 녹음기를 낮췄다. "누락이라고 말했어. 없음이 아니라."
"그래."
그녀는 그 차이를 놓치지 않았다. 가족이라서가 아니라 기록자라서였다.
임도윤은 내 진술을 바로 사건 사실로 쓰지 않았다. 그는 작은 표를 만들었다. 현재 감각, 기억 감각, 확인 필요. 현재 칸에는 젖은 콘크리트 냄새, 손잡이 냉기, 바닷물 냄새가 들어갔다. 기억 칸에는 남문 수문, 작업등, 윤설아 이름, 물이 들어갔다. 확인 필요 칸에는 경보음 부재가 들어갔다.
"이 표가 왜 필요합니까." 기술요원이 물었다.
임도윤이 답했다. "기억 진술과 현장 관측을 섞지 않기 위해서입니다."
나는 그 표를 보며 불쾌함을 느꼈다. 내 기억이 칸 안에 들어가자 덜 진짜처럼 보였다. 그러나 덜 진짜처럼 보이는 방식이 오히려 지금은 필요했다. 내가 확신한다고 해서 증거가 되는 것은 아니다. 확신은 사람을 움직이게 하지만, 증거는 사람을 멈추게 한다.
annex 내부는 좁았다. 한쪽 벽에는 수문 시험 단말이 있었고, 다른 쪽에는 배수로 도면이 아크릴판 아래 붙어 있었다. 오경태가 같이 왔다면 도면을 보고 바로 욕했을 것이다. 그는 병원에 남아 손과 기침을 확인받는 중이었다. 대신 장유라가 도면 앞에 섰다. 그녀는 수문 구조를 다 알지 못했다. 모르는 것을 바로 인정했다.
바닥에는 물이 얇게 말라붙은 자국이 있었다. 최근에 큰 물이 지난 흔적은 아니었다. 발자국은 세 종류였다. 작업화, 운동화, 그리고 미끄럼 방지 덧신. 기술요원은 시설 직원들이 자주 쓰는 덧신이라고 했지만, 누구 것인지는 몰랐다. 임도윤은 사진을 찍고도 발자국을 증거로 확정하지 않았다.
"출입 기록과 대조 전까지는 현장 흔적입니다."
"증거 아닙니까?" 민채가 물었다.
"증거가 될 수 있는 흔적입니다."
그 차이는 이제 익숙해질 때도 됐지만, 여전히 느렸다. 장유라는 수문 도면의 밸브 번호를 자기 무전에 불렀다. 현장에 없는 오경태에게 확인을 요청하는 방식이었다. 잠시 뒤 병원 쪽에서 그의 목소리가 돌아왔다. 기침이 섞여 있었다.
"그 번호면 남문 보조 라인 맞습니다. 근데 시험 모드에서는 물이 안 넘어와야 정상입니다."
"비정상 가능성."
"수동 밸브가 열린 채면 가능. 아니면 로그가 틀렸거나."
유라는 도면에 손가락을 올렸다. "둘 다 확인합니다."
오경태는 직접 나타나지 않았지만, 그의 역할은 남았다. 손과 기침이 그를 현장 밖에 묶었고, 무전은 그가 아는 범위만 보내 왔다. 모두가 모든 곳에 있을 수는 없다. 그 제한이 이번에는 이야기를 덜 거짓말처럼 만들었다.
"여기서 사람이 빠지면 어디로 갑니까."
기술요원이 손가락으로 배수 방향을 짚었다. "남문 주배수로. 지금은 시험 모드라 실제 개방은 안 됩니다."
"시험 모드가 사람을 죽일 수 있습니까."
"명령이 꼬이면 물은 들어옵니다."
"그럼 시험도 현장입니다."
임도윤은 감사 단말을 켰다. 화면에 병원 빨간 문과 같은 계열의 권한 코드가 떴다. `YS-SOUTH-GATE-AUTH`. 이번에는 수문 테스트 로그였다. 실행 시각과 승인 시각 사이에 빈칸이 있었다. 명령을 누른 기록은 없고, 승인 흔적만 남아 있었다.
서진은 화면을 보자마자 촬영부터 요구하지 않았다. "스크롤하지 마세요. 지금 보이는 상태부터."
기술요원이 손을 멈췄다. 화면 하단에는 `executor_id`라는 필드가 있었고 값이 비어 있었다. 그 아래 `proxy_token`은 회색 처리되어 있었다. 클릭할 수 있는지 없는지도 불확실했다. 승인 시각은 명령 시각보다 14초 늦었다. 일반적인 시스템에서는 이상한 순서였다. 그러나 이상하다는 말만으로 조작은 아니다.
임도윤은 세 장을 찍었다. 전체 화면, 빈 필드, 시각 줄. 서진은 같은 장면을 자기 카메라로 찍지 않았다. 원본 촬영권을 두고 다투면 시간이 간다. 대신 그녀는 임도윤의 촬영 시각과 파일명을 받아 적었다.
"제 사본은 언제 받습니까."
"원본 봉인 뒤 검토 사본."
"검토 사본이 삭제된 뒤면 의미 없습니다."
"그래서 지금 파일명을 기록했습니다."
서진은 불만을 삼켰다. 그녀도 알았다. 지금 싸우면 로그를 보는 시간이 줄어든다. 윤설아 이름은 화면에 있었고, 빈칸은 그 이름보다 작게 보였지만 더 위험했다.
"윤설아 권한." 내가 말했다.
서진이 바로 물었다. "직접 조작?"
"미확인."
"좋아. 이제 그 말 먼저 나오네."
그녀가 만족한 건 아니었다. 덜 위험해졌다고 판단한 것이다.
임도윤은 로그를 봉인용 카메라로 촬영했다. "병원 로그와 같은 권한 계열. 직접 실행자 미확인. 승인 시각과 명령 시각 불일치."
"빈칸은 왜 생깁니까." 장유라가 물었다.
기술요원이 머뭇거렸다. "대리 승인, 사후 동기화, 로그 손상. 셋 다 가능합니다."
"가능 말고 지금 구분 가능한 건."
"없습니다."
"넷째는 없습니까." 내가 물었다.
기술요원이 나를 봤다. "넷째요?"
"권한 소유자가 직접 눌렀는데 실행자 필드만 지워진 경우."
"가능합니다. 하지만 그 경우도 원본 로그 없이는 구분 못 합니다."
서진이 바로 적었다. "직접 조작 가능성 배제 안 됨. 대리 가능성도 배제 안 됨."
그 문장은 윤설아를 살리지도 죽이지도 않았다. 나는 그게 마음에 들지 않았다. 마음 한쪽은 이미 그녀를 배신자로 확정해 두고 싶어 했다. 확정하면 다음 행동이 쉬워진다. 그러나 쉬운 행동은 대부분 늦게 대가를 받는다.
나는 윤설아 이름을 봤다. 의심은 유지됐다. 하지만 의심의 모양이 바뀌었다. 병원에서 봤던 서명이 이곳에도 있다. 그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동시에 직접 손가락으로 눌렀다는 뜻도 아니었다. 두 문장을 동시에 들고 있어야 했다. 한쪽만 들면 편해진다. 편해지는 쪽이 대개 위험하다.
임도윤이 현재 수문 경보 시험을 요청했다. 기술요원이 헤드셋을 나눠 주려 했지만 장유라는 거절했다.
"실제 소리를 들어야 합니다. 단, 환자 없고 주민 접근 없는지 확인."
"경보 큽니다."
"그래서 확인합니다."
시험 버튼이 눌렸다. 경보음이 바로 터졌다. 금속 벽이 소리를 되받아쳤고, 수갑이 손목에서 떨렸다. 귀가 아팠다. 서진은 녹음기를 몸에서 조금 떼었다. 장유라는 눈을 찡그렸지만 물러서지 않았다. 이 소리가 미래 기억에 없었다.
기술요원이 계기판을 가리켰다. "경보 회로 정상. 시험 지연 0.8초."
"소리가 안 날 수 있는 조건은?" 장유라가 물었다.
"스피커 전원 차단, 회로 바이패스, 또는 사람이 이미 귀가 손상된 상태."
나는 세 번째 조건에서 손을 멈췄다. 미래 남문에서 나는 이미 충격을 받았을 수도 있다. 정말로 경보가 없었던 게 아니라, 내가 듣지 못했을 수도 있다. 그 가능성을 쓰는 순간 윤설아에 대한 의심이 조금 약해졌다. 약해지는 게 싫어도 써야 했다.
"기억 속 무음은 경보 부재 확정이 아닙니다." 내가 말했다.
서진이 나를 봤다. "다시 말해."
"미래 기억에서 제가 경보를 듣지 못했습니다. 원인은 경보 미작동, 회로 차단, 제 청각 손상 모두 가능."
임도윤은 그 문장을 그대로 기록했다. 장유라도 무전으로 반복했다. 현장 판단은 감각을 쓰지만, 감각을 왕으로 만들면 안 된다. 내가 가장 자주 틀릴 수 있는 지점이었다.
나는 노트에 적었다. 현재 수문 시험 경보: 고음, 즉시 발생, 벽 반사 강함. 미래 남문 기억: 경보음 없음. 원인 미확인. 기억 A에서 누락 항목 분리.
서진이 내 글씨를 봤다. "이건 오빠한테 불리한 기록일 수도 있어."
"그래도 기록해야 해."
"이제 좀 낫네."
그 말이 칭찬처럼 들려서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단말 아래쪽 빈칸에 작은 커서가 깜박였다. 로그 손상처럼 보였지만, 기술요원은 쉽게 말하지 않았다. 임도윤이 요청했다.
"원본 로그 복제. 빈 필드 포함."
"상부 승인 필요합니다."
"증거 보존입니다."
"권한이 막힐 수 있습니다."
"막히는 과정도 기록합니다."
서진이 그 문장을 따라 적었다. 수사관의 증거 봉인 습관은 답답했지만, 지금은 권한을 밀어붙이는 도구가 됐다. 법은 느리다. 느린 대신 막히는 지점을 남긴다.
기술요원이 복제 명령을 눌렀다. 진행률이 3퍼센트에서 멈췄다. 화면 하단의 빈 필드가 한 번 깜박였다. 서진이 숨을 들이켰다.
"지금."
임도윤은 이미 카메라를 들고 있었다. "화면 변화 기록."
빈 필드는 다시 나타났지만, `proxy_token` 회색 줄이 사라져 있었다. 클릭 가능한 영역이 있던 자리에는 공백만 남았다. 기술요원은 손을 떼고 뒤로 물러났다.
"제가 지운 거 아닙니다."
"그 진술 기록." 임도윤이 말했다. "복제 중 필드 변화. 조작 주체 미확인."
민채가 뒤에서 말했다. "화면 캐시 남아 있을 수도 있어요. 스크린샷 메모리에."
"가능한가요?"
"단말이 꺼지기 전이면요. 근데 제가 만지면 또 흔적 남아요."
임도윤은 잠깐 생각했다. "기술요원이 읽기 전용 캡처. 서민채는 절차 조언만."
민채는 입술을 깨물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가 직접 해결하지 못하는 장면은 답답했다. 하지만 그 답답함이 이 사건의 진짜 속도였다.
휴대전화가 울렸다. 내 것이 아니었다. 임도윤이 압수품 봉투를 확인했고, 서진은 자기 화면을 봤다. 발신자 표시 없음. 그런데 통화 대상은 내 이름으로 저장돼 있었다. 서진이 스피커를 켜기 전에 임도윤이 손을 들었다.
통화 버튼 위에서 서진의 엄지가 멈췄다. 그녀는 기자였고, 전화는 언제나 먼저 받는 쪽이었다. 이번에는 받는 속도보다 받는 방식이 중요했다.
"녹음 파일명 먼저." 임도윤이 말했다.
서진이 파일명을 소리 내어 읽었다. 날짜, 시각, 장소, annex. 장유라는 문 쪽으로 몸을 돌렸다. 누가 통화 중에 들어오면 안 된다. 기술요원은 단말 화면을 건드리지 않고 손을 보이게 들었다. 작은 동작들이 모여 통화 전의 공기를 만들었다.
"원음 녹음. 발신 기록 캡처. 통화 시작."
서진이 버튼을 눌렀다.
여자의 목소리가 나왔다. 짧고 건조했다. 비유도, 인사도 없었다.
"그 서명, 내가 누른 게 아니야."
내 손목이 수갑 안에서 굳었다. 그 목소리를 나는 알고 있었다. 윤설아. 원래 시간선에서 가장 확신했던 배신자의 이름. 목소리는 기억보다 낮았고, 피곤했다.
"위치." 임도윤이 말했다.
윤설아는 대답하지 않았다. "감사 로그 빈 칸 봤지. 실행자 필드가 비어 있으면 직접 조작이 아니야. 대리 토큰이거나 사후 덮어쓰기야."
서진이 바로 물었다. "당신이 그걸 어떻게 알아요? 우리가 지금 그 로그 보는 걸."
짧은 정적이 왔다. 물이 배수로 안쪽에서 떨어지는 소리가 더 크게 들렸다.
윤설아가 말했다. "지금 그 빈 칸을 볼 사람이 한이겸밖에 없으니까."
서진이 바로 끼어들었다. "그 말은 정보 출처가 아니라 추정이잖아요."
"추정이야." 윤설아가 답했다. "하지만 지금 네 옆에서 누가 빈칸을 보고 있는지는 알아."
"어떻게."
"그 필드는 원래 공개 화면에 안 떠."
기술요원의 얼굴이 굳었다. 그는 단말 설정을 다시 보려다 멈췄다. 임도윤이 손으로 막았기 때문이다.
"계속 말하십시오." 임도윤이 말했다.
윤설아는 웃지 않았다. "그 화면을 볼 권한을 가진 사람은 많지 않아. 그런데 그 권한으로 현장에 갈 사람은 더 적어. 한이겸은 늘 직접 보려고 하지."
그 말은 친밀함처럼 들렸고, 동시에 감시처럼 들렸다. 둘 중 어느 쪽인지 알 수 없었다. 나는 이름을 부르지 않았다.
내 입에서 오래된 반말이 튀어나오려 했다. 설아야. 나는 그 이름을 삼켰다. 지금 이름을 부르면 기억이 증거를 덮는다.
"왜 먼저 연락했습니까." 내가 물었다.
"네가 서명만 보고 문을 닫을까 봐."
"어디에 있습니까."
"로그 원본부터 복사해. 빈 칸이 사라지기 전에."
통화가 끊겼다. 발신 기록은 남지 않았다. 서진의 녹음기는 돌아가고 있었고, 임도윤의 카메라는 통화 화면을 찍고 있었다. 하지만 윤설아가 어떻게 현재 로그의 빈칸을 알았는지는 남지 않았다.
통화가 끊긴 뒤에도 아무도 바로 말하지 않았다. 장유라가 먼저 움직였다. "로그 복제 계속. 통화 추적은 별도. 지금은 빈칸 사라지는 걸 막아야 합니다."
임도윤은 고개를 끄덕였다. "우선순위 동의."
서진이 내 팔을 잡았다. 수갑 위가 아니라 소매 끝이었다. "오빠, 방금 말로 윤설아를 믿으면 안 돼."
"알아."
"믿지 말라는 뜻만도 아니야. 미워하는 걸 증거로 쓰지 말라는 뜻이야."
그 말은 더 아팠다. 나는 윤설아를 믿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더 쉽게 그녀를 범인으로 만들 수 있었다. 서진은 그걸 봤다.
나는 노트에 새 줄을 적었다. 윤설아: 서명 부인, 빈칸 인지, 정보 출처 미확인, 직접 조작 부인 검증 전. 그 아래에 경보음 누락을 따로 적었다. 두 줄을 합치지 않았다. 아직은 합칠 수 없었다.
annex 단말의 커서가 한 번 깜박이고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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