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화

대리 서명

24시간마다 살인범이 바뀐다 · 2026. 11.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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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리 서명

18:04, 의무실 D-04 앞에는 사람이 없었다.

문은 반쯤 열려 있었다. 손잡이에는 하얀 장갑이 걸려 있었다. 장갑 안쪽은 젖지 않았다. 방금 낀 사람이 빗속을 지나온 것은 아니었다. 강태준은 장갑을 집지 않고 먼저 문틈의 각도를 보았다.

“열고 들어갔습니까, 열어 두고 갔습니까.”

고유라가 로그를 확인했다.

“문 열림 4초. 내부 센서 반응 없음.”

“그럼 들어가지 않았습니다.”

강태준은 장갑 옆에 종이 표식을 놓았다. 손으로 집기 전에 방향을 먼저 남겼다. 오세진의 습관 때문에 배운 느린 절차였다.

오세진은 뒤늦게 복도 끝에서 왔다. 뛰어오지 않았다. 뛰면 의사답지 않다고 생각한 사람처럼 빠른 걸음이었다.

“제가 연 거 아닙니다.”

그는 먼저 말했다.

강태준이 되물었다.

“열었다고 묻지 않았습니다.”

오세진의 입이 닫혔다. 질문보다 먼저 나온 부정은 늘 기록할 가치가 있다.

고유라는 화면을 내게 돌렸다. `YHW_deputy`. 윤해원의 대리 권한. 그러나 윤해원은 회의실에 있었다. 그의 카드도 내 책상 위에 있었다. 그렇다면 남은 것은 대리 발급이었다.

“이주완.”

내가 말했다.

윤해원은 바로 부정하지 않았다. 그는 그 이름을 가능성 목록에 이미 넣어 둔 사람처럼 보였다.

18:20, 이주완은 원장실 옆 작은 회의실에서 발견됐다.

그는 문을 잠그지 않았다. 대신 책상 위에 서류 세 묶음을 펼쳐 두었다. 홍상욱의 결재 대기, 재단 감사 회신, 그리고 `일상 보정 토큰 발급 내역`. 누군가 볼 것을 알고 준비한 배열이었다.

“문을 일부러 열어 두셨습니까.”

강태준이 물었다.

이주완은 안경을 벗지 않았다.

“잠그면 강 팀장님이 더 세게 여시니까요.”

그는 나를 보고 고개를 조금 숙였다.

“서이현 씨는 또 제 문장을 범죄로 번역하겠군요.”

“문장보다 서명이 먼저입니다.”

내가 말했다.

이주완은 그 대답을 마음에 들어 하지 않았다. 마음에 들어 하지 않는 표정은 보였지만, 웃지는 않았다. 그는 웃음으로 도망가는 사람이 아니었다. 조건으로 도망간다.

강태준은 `YHW_deputy` 로그를 그의 앞에 놓았다.

“설명하십시오.”

“대리 권한입니다.”

“누구 대리.”

“직위 대리입니다. 윤해원 개인이 아니라 부원장 직위.”

“발급자.”

이주완은 서류 한 장을 밀었다.

“저입니다.”

고유라가 작게 욕을 삼켰다. 단어는 들리지 않았지만 입 모양은 보였다. 노을이 있었다면 더 정확히 읽었을 것이다.

“왜 발급했습니까.”

“일상 보정 때문입니다.”

강태준이 다시 물었다.

“일상 보정.”

“출입 시스템에는 사람이 없는 순간에도 문이 열려야 하는 일이 있습니다. 응급 물품, 기상 장비, 관제 보정. 모든 것에 원장님 서명을 기다리면 시설이 멈춥니다.”

그는 법률 용어를 길게 늘리지 않았다. 대신 서류 세 장을 보여 줬다. 장비 반납, 냉장 보관함 온도 경보, 응급 접근. 모두 사소했다. 사소한 절차가 사람을 움직인다. 사소해서 더 위험하다.

서류에는 사람의 얼굴이 없었다. 직위, 대리자, 승인 번호, 만료 시각. 이주완은 그런 칸으로 사람을 지웠다. 이름을 지우는 행위가 언제나 악의는 아니다. 야간 근무자가 매번 원장 결재를 기다리지 않도록 만든 절차일 수도 있다. 그러나 같은 절차가 D-04 문 앞에 하얀 장갑을 남겼다.

“만료 시각은 왜 18시 이후입니까.”

강태준이 물었다.

“업무 편의.”

“누구 업무.”

이주완은 서류를 내려다봤다.

“응급 접근은 보통 저녁 회진 뒤에 정리됩니다.”

오세진이 방 끝에서 말했다.

“그건 맞습니다.”

강태준은 오세진을 보지 않고 물었다.

“누가 그렇게 정했습니까.”

오세진은 대답이 늦었다.

“제가 건의했고, 원장실이 승인했습니다.”

이주완은 그 말을 받아 적었다. 자기에게 불리할 수 있는 말도 적었다. 정확해서가 아니라, 나중에 쓸 수 있기 때문이다.

“건의와 승인이 분리됐군요.”

내가 말했다.

이주완은 나를 보았다.

“분리하지 않으면 모두가 같이 죽습니다. 분리하면 누가 어느 칸에서 잘못했는지 다툴 수 있죠.”

“다툴 수 있게 만드는 게 목적입니까.”

“살아남은 문서의 목적은 대개 그겁니다.”

“R-3 토큰도 같은 방식입니까.”

내가 물었다.

이주완의 눈이 나를 향했다.

“그 단어를 누가 알려 줬습니까.”

“기록이요.”

“기록은 말을 안 합니다. 사람이 읽죠.”

“그래서 묻습니다.”

그는 이번에는 대답을 늦췄다.

“R-3은 보정 명령의 예약 실행권입니다. 원래는 장비 보정입니다. 사람을 해치라고 만든 토큰이 아닙니다.”

“사람을 해치지 않아도 사람을 죽일 수 있습니다.”

윤해원이 말했다.

이주완은 그쪽을 보지 않았다.

“그 문장을 기록에 남기실 겁니까.”

윤해원은 바로 답했다.

“남기십시오.”

이주완은 펜을 들었다. 실제로 남겼다. 그 점이 그를 더 얄밉게 만들었다. 그는 협박도 기록하고, 협조도 기록한다. 자기에게 필요한 방식으로만.

18:45, 고유라는 발급 내역을 시간순으로 정렬했다.

R-3 토큰은 원격 보정 명령 기록에서 본 코드와 같은 뿌리를 가졌다. 그러나 내역은 범죄 기록처럼 보이지 않았다. `환기 재시작`, `기압계 재동기화`, `응급 보관함 접근`, `회의실 출입 지연 보정`. 시설이 하루를 유지하기 위해 쓰는 작은 승인들이었다.

“악성 전용이 아니네요.”

고유라가 말했다.

“그래서 더 나쁩니다.”

내가 답했다.

악성 전용이면 찾기 쉽다. 일상 도구가 나쁜 방향으로 쓰였을 때는, 모두가 조금씩 이미 익숙해져 있다.

강태준은 이주완에게 물었다.

“서이현 씨 코트에서 관리 키가 나온 루프. 그때도 대리 권한을 발급했습니까.”

이주완은 이번에는 서류를 바로 찾지 못했다. 손이 오른쪽 묶음과 왼쪽 묶음 사이에서 멈췄다. 그 짧은 멈춤이 오늘 처음 나온 실수였다.

“기억하지 못합니다.”

“기억하지 못한다와 말하지 않겠다는 다릅니다.”

그는 고개를 들었다.

“말하겠습니다. 다만 순서를 지키죠.”

“당신 순서가 아닙니다.”

강태준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이주완은 그 문장에 바로 물러서지 않았다.

“그럼 증거 순서로 하겠습니다.”

그는 `D-09 보관실 / 임시 반출 / 법무 검토`라고 적힌 내역을 꺼냈다. 내 코트에서 나온 관리 키. 그 키가 내게 온 경로는 아직 반쯤 비어 있었다.

“이 권한으로 키를 꺼낼 수 있었습니까.”

“꺼낼 수는 있습니다.”

“누가 꺼냈습니까.”

“기록상 반출자는 없습니다.”

고유라가 화면을 당겼다.

“없다는 게 아니라, 반출자 칸이 대리 서명으로 덮였어요.”

이주완은 고유라를 보았다.

“정확합니다.”

“칭찬하지 마세요.”

고유라는 빠르게 답했다.

그는 더 말하지 않았다. 빠른 말 뒤에 숨을 틈을 남기지 않으려는 사람처럼 키보드를 두드렸다.

19:10, 키 반출 내역과 R-3 토큰 발급 내역이 같은 서명 체인을 가졌다.

발급자 이주완, 승인 근거 홍상욱 직위 계정, 실행 대상 부원장 대리 또는 응급 접근. 종이에 쓰면 깔끔했다. 실제로는 누가 누구를 팔 수 있는지 보여 주는 표였다.

“서이현 씨를 프레임할 기회가 있었군요.”

강태준이 말했다.

이주완은 바로 부정하지 않았다. 그는 부정하기 전에 비용을 계산한다.

“있었습니다.”

“했습니까.”

“그 질문에는 변호인이 필요합니다.”

“여기서 변호인은 당신 자신 아닙니까.”

“그래서 더 필요합니다.”

그는 서랍에서 작은 스티커 묶음을 꺼냈다. 빨간색, 파란색, 회색. 법무감사관의 색 분류였다. 빨간색은 즉시 봉인, 파란색은 사후 검토, 회색은 보류. 내 코트에서 나온 키 반출 기록에는 회색 스티커가 붙어 있었다.

“왜 보류입니까.”

내가 물었다.

“반출 자체는 합법처럼 보이기 때문입니다.”

“내 코트에 들어간 건요.”

“불법처럼 보이죠.”

“그 차이를 이용했습니까.”

이주완은 스티커를 다시 정리했다.

“그 차이를 알고 있었습니다.”

“질문에 답하십시오.”

강태준이 말했다.

“기회를 만들었습니다. 직접 넣었다고는 말하지 않겠습니다.”

“못 말합니까, 안 말합니까.”

“둘 다입니다.”

그 말은 비겁했지만, 비어 있지는 않았다. 우리는 그를 완전히 잡지 못했다. 대신 그가 만든 기회는 잡았다. 문서가 사람을 범인처럼 보이게 하는 방식. 이주완은 그 방식을 너무 잘 알았다.

나는 그를 보고 말했다.

“당신은 어느 쪽입니까.”

“그 질문은 항상 틀렸습니다.”

이주완은 서류 끝을 맞췄다.

“저는 이기는 쪽에 붙는 사람이 아니라, 어느 쪽이 이기든 살아남을 문서를 고르는 사람입니다.”

“그걸 공모라고 부릅니다.”

윤해원이 말했다.

“때로는요.”

이주완은 그 말을 피하지 않았다.

“다만 선은 있습니다.”

강태준이 짧게 웃었다. 웃음이라기보다 숨이 빠진 소리였다.

“지금 선을 말합니까.”

“말해야죠. 안 그러면 제가 아무거나 한 사람이 됩니다.”

이주완은 세 번째 서류 묶음을 열었다.

“저는 원본을 없애는 서명은 하지 않습니다. 원본을 늦게 여는 서명은 했습니다. 원본을 누구 손에 먼저 갈지 바꾸는 서명도 했습니다. 하지만 삭제는 안 했습니다.”

그 문장은 자기 방어였다. 동시에 쓸모 있었다. 사람은 자기 방어를 할 때 자기 규칙을 드러낸다.

“왜 삭제는 안 합니까.”

내가 물었다.

“삭제된 원본은 협상력이 없습니다.”

그의 대답은 너무 빠르고 너무 현실적이었다. 정의가 아니라 가격. 그래서 믿을 수 있었다. 믿고 싶지는 않았다.

윤해원이 낮게 말했다.

“그래서 내 계획표도 팔 수 있었습니까.”

이주완은 그쪽을 보았다.

“팔 수 있었습니다.”

“팔았습니까.”

“아직은 아닙니다.”

“아직.”

윤해원은 그 단어를 되풀이했다.

이주완은 부끄러워하지 않았다.

“시간이 닫히는 섬에서 아직이라는 말은 중요합니다. 오늘 하지 않은 일과 못 한 일을 구분해야 하니까요.”

“그 구분으로 사람이 삽니까.”

“가끔은요.”

그는 나를 한 번 보았다.

“가끔은 법정에서만 삽니다.”

나는 그 문장을 적지 않으려다가 적었다. 마음에 들지 않는 진실도 나중에 필요할 수 있다.

19:40, 이주완은 `YHW_deputy` 발급 원장을 출력했다.

발급 사유는 `응급 접근 일상 보정`. 사용 가능 문은 D-04. 사용 시각 제한은 18시 이후. 첫 인증 문 라우팅과 정확히 맞물렸다.

“이걸 누가 요청했습니까.”

강태준이 물었다.

“요청자는 직위 계정입니다.”

“사람.”

“사람은 기록되지 않았습니다.”

“기록하지 않은 사람.”

이주완은 펜을 내려놓았다.

“그건 저입니다.”

고유라가 바로 말했다.

“그럼 당신이 지운 거잖아요.”

“아니요. 저는 사람 이름을 요구하지 않는 양식을 승인했습니다.”

“그게 지운 거예요.”

고유라의 목소리가 빨라졌다. 질문이 세 개 나올 것 같았다. 강태준이 손을 들어 멈췄다.

“결과는 같습니다.”

이주완은 이번에는 고개를 끄덕였다.

“법적으로는 다릅니다.”

“사람이 죽었을 때도?”

그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 침묵은 이전보다 길었다. 처음으로 계산이 멈춘 것처럼 보였다.

20:05, 우리는 이주완의 서류를 세 봉투로 나눴다.

R-3 일상 보정 발급 내역. D-09 키 반출 대리 서명. YHW_deputy 응급 접근 권한. 세 봉투는 서로 다른 사건처럼 보였지만, 서명 체인은 같았다.

강태준은 봉투마다 `삭제 아님 / 지연 및 재정렬`이라고 썼다.

“그 문구가 마음에 안 듭니다.”

이주완이 말했다.

“정확하지 않습니까.”

“정확합니다. 그래서 마음에 안 듭니다.”

그는 자기 약점을 농담으로 덮지 않았다. 그 정도는 정직했다.

윤해원은 그에게 물었다.

“내 이름으로 발급된 대리 권한을 취소할 수 있습니까.”

“할 수 있습니다.”

“지금 하십시오.”

이주완은 바로 움직이지 않았다.

“취소하면 기존 체인이 깨집니다.”

“좋습니다.”

“좋지 않습니다.”

그는 처음으로 목소리를 낮췄다.

“서이현 씨가 붙잡고 있는 원본 체인도 같이 깨질 수 있습니다.”

나를 향한 말이었다. 나는 그가 무슨 말을 꺼내려는지 알지 못했다. 그러나 내 손은 이미 수첩의 왼쪽 모서리를 누르고 있었다.

“설명하십시오.”

강태준이 말했다.

이주완은 내 목에 걸린 Q-13 키를 보았다. 그 시선은 짧았다. 너무 짧아서 더 정확했다.

“원본 체인에는 법적 결함이 있습니다.”

그는 천천히 말했다.

“첫 접근 권한이 사망자 명의입니다. 그리고 그 사망자의 가족이 비상 절차를 늦춘 상태에서 복사를 시작했습니다. 원본이 살아남아도, 누군가는 그 체인을 증거가 아니라 오염된 사본이라고 부를 겁니다.”

방 안의 모든 시선이 내게 왔다. 나는 그 시선들을 하나씩 보지 않았다. 내 수첩에는 아직 23:55와 00:04 사이가 비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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