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화

윤해원의 계획표

24시간마다 살인범이 바뀐다 · 2026. 11.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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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해원의 계획표

07:10, 윤해원은 자기 이름이 적힌 봉투를 먼저 열지 않았다.

그는 봉투 모서리를 검지로 눌러 책상 끝에 맞췄다. 봉투는 열두 장이었다. 이름은 있었다. 그러나 고유라가 프린터 큐를 복구하자 화면의 원본 목록에는 이름이 없었다. `D-01`, `D-02`, `D-03`. 문 번호만 있었다.

“이름을 지운 겁니까.”

강태준이 물었다.

윤해원은 봉투를 내려놓았다.

“처음부터 넣지 않았습니다.”

그 말은 변명처럼 들리지 않았다. 더 나빴다. 설계였기 때문이다.

고유라는 복구 화면을 확대했다. 출력 예정표는 사람 이름 대신 문 번호, 인증 등급, 지연 초로 나뉘어 있었다. `18:00 이후 첫 공식 인증 문`, `해당 문 권한 그룹`, `봉투 세트 재정렬`. 세 줄은 문서라기보다 스위치에 가까웠다.

“수신자가 사람이 아니에요.”

고유라가 말했다.

“문이에요.”

문. 그 단어는 연구원에서 늘 사람보다 오래 살아남았다. 사람은 죽고, 기억하고, 거짓말을 했다. 문은 열리고 닫힌 로그를 남겼다. 윤해원은 그 점을 이용했다.

강태준은 보드에 `18시 / 첫 인증 문 / 봉투 재정렬`이라고 썼다.

“목적.”

윤해원은 고개를 들었다.

“제가 모든 사람의 선택을 예측했다고 말하지 않겠습니다.”

그는 먼저 선을 그었다. 좋은 선이었다. 그래도 늦었다.

“다만 누가 어느 문을 먼저 열지에 따라 어떤 비밀이 먼저 터지는지는 설계했습니다. 원장실 문이면 원장실 권한군. 의무실 문이면 응급 기록. 생활동이면 개인 동선. 그런 방식입니다.”

“사람을 문으로 바꿨군요.”

내 말은 질문이 아니었다.

윤해원은 부정하지 않았다.

“그 편이 덜 위험하다고 생각했습니다.”

“덜 위험한 쪽이 매번 사람이 죽었습니다.”

그는 잠깐 눈을 내렸다. 길지 않았다. 윤해원은 스스로를 피해자로만 두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래서 더 불편했다.

“그 판단이 틀렸습니다.”

그는 그렇게 말했다. 변명은 붙이지 않았다.

07:35, 우리는 이전 루프들의 봉투 기록을 다시 열었다.

그때 나는 봉투 이름을 사람 순서로 읽었다. 윤해원이 누구를 압박하려 했는지, 누가 먼저 자기 비밀을 보게 됐는지. 하지만 고유라가 문 번호로 정렬하자 다른 표가 나왔다.

노을이 아침 식재료 보관실을 열었던 루프의 첫 인증은 생활동 서쪽문이었다. 그때 먼저 나온 봉투는 생활동 동선과 식당 반사 기록이었다. 고유라가 서버실로 뛰어가며 관제동 보조문을 열었던 루프에서는 로그와 원격 명령이 먼저 밀려 나왔다.

“그럼 봉투가 피해자를 고른 게 아니라.”

고유라가 말을 멈췄다.

강태준이 대신 끝냈다.

“첫 문이 먼저 압박받을 사람을 고른 겁니다.”

정확히는 사람을 고른 것도 아니었다. 문이 권한을 고르고, 권한이 비밀을 고르고, 비밀이 사람을 몰았다. 그 사이에서 사람은 자기 방식으로 움직였다. 그 움직임이 죽음을 만들었다.

윤해원은 표 오른쪽에 손을 올렸다.

“18시 전에 아무도 문을 열지 않으면 기본 세트가 출력됩니다.”

“기본 세트.”

“제 이름으로 묶인 봉투입니다.”

그 말은 자기 희생처럼 들릴 수 있었다. 그러나 그 역시 설계였다. 자신이 먼저 맞는 편이 통제 가능하다고 믿은 사람의 설계.

고유라는 기본 세트와 문별 세트를 나란히 띄웠다. 기본 세트에는 윤해원의 직위 계정, 홍상욱 원장실 아카이브, 오세진 응급 기록이 같은 묶음에 있었다. 의무실 문이 첫 인증이면 응급 기록이 앞으로 나오고, 생활동 문이면 노을의 컵 위치와 식당 반사 기록이 앞으로 올라왔다. 관제동 문이면 R-3 코드와 발전기 버그가 먼저 나왔다.

“이거 우선순위표예요.”

고유라가 말했다.

“비밀 목록이 아니라요. 어떤 비밀이 먼저 사람을 치는지 정한 표.”

윤해원은 그 표현을 고치지 않았다. 고쳐야 할 사람은 고치지 않고, 듣기 싫은 사람은 고치려 한다. 나는 그 차이를 적었다.

강태준은 표를 세 줄로 줄였다.

`D-04: 응급 기록 우선`

`D-07: 생활동 동선 우선`

`D-02: 원격 명령 우선`

“사람 이름이 없으면 책임도 없어집니까.”

그가 물었다.

윤해원은 이번에는 바로 답하지 않았다.

“아니요.”

“그럼 사람 이름으로 다시 쓰십시오.”

윤해원은 펜을 들었다. D-04 옆에는 오세진, 윤해원, 임시 응급 접근. D-07 옆에는 노을, 백소명, 생활동 보관함. D-02 옆에는 고유라, 이주완, 원장실 권한군. 문 번호가 사람으로 돌아오자 표는 더 지저분해졌다. 지저분한 쪽이 진짜에 가까웠다.

노을은 그 표를 보고 문자로 한 줄을 보냈다.

`문도 사람 손으로 열린다.`

짧은 문장이었다. 우리는 너무 늦게 당연한 말을 적었다. 그 문장은 표 맨 위에 남겼다.

“왜 이름으로 하지 않았습니까.”

내가 물었다.

“이름은 바뀝니다. 대리 인증, 분실 키, 직위 계정. 연구원에서는 사람 이름보다 문 권한이 더 정직합니다.”

“정직한 게 아니라 둔한 겁니다.”

윤해원이 나를 보았다.

“문은 누가 왜 여는지 모릅니다.”

그는 그 말에는 바로 답하지 못했다. 처음이었다.

강태준은 고개를 끄덕였다.

“둔한 시스템에 사람의 비밀을 걸면, 사람이 둔한 값으로 처리됩니다.”

문라희는 방 끝에서 듣고만 있었다. 그는 `시스템`이라는 단어를 들을 때마다 입술을 아주 작게 다물었다. 문하진 파일 때와 같은 반응은 아니었다. 이번에는 계산이 먼저였다.

“결정 트리 전체를 볼 수 있습니까.”

문라희가 물었다.

고유라가 답했다.

“출력 규칙만요. 각 문이 어떤 결과를 만들었는지는 루프별 실제 인증과 대조해야 합니다.”

“그래야 합니다.”

문라희의 말은 동의처럼 들리지 않았다. 검증 요구였다.

08:00, 강태준은 모든 사람을 회의실에 모으지 않았다.

모두를 모으면 첫 인증을 막을 수 있다. 그러나 막는 것과 아는 것은 다르다. 이번에는 결정 트리를 읽어야 했다. 강태준은 공식 문 네 개만 감시 대상으로 잡았다. 생활동 서쪽문, 관제동 보조문, 의무실 D-04, 원장실 D-01. 나머지는 경보만 걸었다.

“유도하지 않습니다.”

그는 나를 보고 말했다.

“누가 어디를 열게 만들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압니다.”

“알아도 합니다.”

그는 내 수첩을 가리켰다. 나는 `유도 금지`를 먼저 썼다. 글씨가 평소보다 작았다. 작은 글씨는 숨기려는 마음과 비슷하다. 나는 그 줄을 다시 크게 썼다.

윤해원은 자기 봉투를 열었다. 안에는 이름 없는 표가 있었다. 문 번호와 숫자, 그리고 지연 초. 그는 그 표를 숨기지 않았다. 대신 표 위쪽에 펜으로 선을 그었다.

“제가 아는 것은 여기까지입니다. 누가 실제로 무엇을 선택할지는 모릅니다.”

“그 말로 책임이 줄지는 않습니다.”

강태준이 말했다.

“압니다.”

윤해원의 대답은 너무 빨랐다. 빠른 인정은 때로 방어다.

나는 그에게 물었다.

“왜 나에게 이 표를 남기지 않았습니까.”

“서이현 씨가 18시 전에 문을 고르게 될까 봐요.”

“내가 사람을 실험 변수로 볼 거라고 생각했습니까.”

윤해원은 이번에는 늦게 답했다.

“저도 그랬으니까요.”

그 문장은 나를 공격하지 않았다. 그래서 더 오래 남았다.

08:40, 윤해원은 자신의 계획표 뒷장을 보여 줬다.

거기에는 실패 조건이 있었다. 첫 인증 문이 예상과 다르면 기본 세트로 되돌릴 것. 같은 권한이 두 번 인증되면 두 번째는 무시할 것. 사망자나 퇴실자의 권한은 비활성 처리할 것. 세 조건은 합리적으로 보였다. 문제는 마지막 줄이었다.

`피해 발생 시 다음 루프에서 보정.`

나는 그 줄을 손가락으로 짚었다.

“보정이라는 말이 너무 편합니다.”

윤해원은 그 줄을 보았다.

“맞습니다.”

“그때도 사람 죽는다는 걸 알았습니까.”

“가능성으로 알았습니다.”

“가능성으로 낮게 잡았습니까.”

그는 오세진의 말을 떠올린 듯 입을 닫았다. 죽어도 된다고 낮게 잡았다는 말. 우리는 그 말을 이미 들었다. 같은 말이 다른 사람에게 돌아오면, 죄의 모양도 달라진다.

“그렇게 기록하십시오.”

윤해원이 말했다.

강태준은 썼다.

`윤해원: 피해 가능성을 보정 가능한 실패로 낮게 잡음.`

윤해원은 그 문장을 보며 표정을 바꾸지 않았다. 표정을 바꾸지 않는다고 덜 아픈 것은 아니다. 다만 그는 그 아픔을 자기에게 유리한 설명으로 바꾸지 않았다.

12:20, 노을이 생활동 서쪽문 앞에서 멈췄다.

우리는 그에게 설명을 길게 하지 않았다. 문자로만 보냈다. `18시 이후 첫 공식 문 인증이 봉투 순서를 바꿀 수 있음. 평소 동선 유지. 일부러 바꾸지 말 것.` 노을은 화면을 읽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답장을 보냈다.

`평소라면 18:05에 서쪽문. 오늘도 필요하면 연다. 필요 없으면 안 연다. 일부러 하지 않는다.`

그 문장은 우리보다 정확했다. 일부러 하지 않는 것. 루프에서 가장 어려운 행동이었다.

백소명은 카메라를 들고 원장실 쪽에 있었다. 강태준은 촬영을 금지하지 않았다. 대신 렌즈 위치를 기록했다. 백소명은 불만스러워했지만 따랐다. 기록되지 않은 카메라는 나중에 비밀이 된다.

이주완은 아직 나타나지 않았다. 그의 이름은 표에 없었다. 그러나 대리 인증과 직위 계정이 있는 곳에는 법무감사관이 늦게라도 온다. 나는 그 빈칸을 따로 표시했다.

오세진은 의무실 점검 시간을 18시 이후로 미루겠다고 했다. 그 말은 협조처럼 들렸다. 그러나 강태준은 바로 물었다.

“평소에도 미룹니까.”

“아닙니다.”

“그럼 미루지 마십시오.”

오세진은 눈을 들었다.

“그러다 제가 첫 인증자가 되면요.”

“그게 오늘 확인할 일입니다.”

그는 입술을 다물었다. 사람이 죽을 수 있는 실험 앞에서 평소대로 행동하라는 말은 잔인하다. 하지만 윤해원의 설계가 만든 것은 바로 그 잔인함이었다. 평소 동선을 바꾸면 라우팅은 또 다른 거짓을 만든다. 평소대로 움직이면 누군가 다칠 수 있다.

나는 수첩에 썼다.

`평소 동선 유지도 선택이다.`

그 문장은 나중에 내게 돌아올 것이다.

17:50, 연구원은 평소보다 조용했다.

조용하다는 말은 정확하지 않다. 스피커 점검음은 났고, 태풍 빗소리는 유리벽을 때렸다. 다만 사람의 발이 줄었다. 모두가 문을 의식했다. 의식하는 순간 문은 더 이상 일상 물건이 아니었다.

강태준은 내게 물었다.

“예상은.”

“생활동 서쪽문. 노을이 평소대로 움직이면요.”

“다른 가능성.”

“의무실 D-04. 오세진이 18시 약품 점검을 고집하면.”

“희망은.”

나는 펜을 멈췄다.

“희망은 기록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묻는 겁니다.”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희망은 윤해원이 기본 세트를 받는 것이었다. 그가 자기가 만든 압박을 먼저 맞는 것. 그러나 그것 역시 사람을 칸에 넣는 생각이었다.

17:59:50, 네 개의 문 로그가 한 화면에 떴다.

고유라는 타이머를 켜지 않았다. 타이머는 사람을 재촉한다. 대신 중앙시각과 독립 시계를 나란히 띄웠다. 63초 차이는 아직 설명되지 않았지만, 오늘은 차이 자체가 필요했다.

18:00:00.

아무 문도 열리지 않았다.

18:00:08.

의무실 D-04 앞 센서가 켜졌다. 사용자명은 뜨지 않았다. 카드가 닿기 전, 손잡이만 먼저 움직였다.

“누구.”

강태준이 물었다.

고유라가 화면을 당겼다.

“카메라 사각입니다. 손만 보여요.”

손은 장갑을 끼고 있었다. 하얀 장갑. 의무실에서 흔한 물건이었다. 너무 흔해서 증거가 되기 어렵다.

18:00:13, 카드가 찍혔다.

화면에 뜬 것은 오세진의 이름이 아니었다.

`D-04 / 임시 응급 접근 / YHW_deputy`

윤해원이 의자에서 일어났다.

“저는 발급한 적 없습니다.”

그 말이 사실인지 아닌지는 아직 알 수 없었다. 그러나 프린터는 기다리지 않았다. 회의실 뒤쪽에서 기계음이 났다. 봉투 하나가 출력됐다. 고유라가 달려가 집었다.

봉투 겉면에는 사람 이름이 없었다.

`D-04 FIRST AUTH`

그 아래 작은 글씨가 있었다.

`expected set: changed`

고유라가 나를 보았다.

“기본 세트가 아니에요.”

강태준은 바로 문 쪽으로 뛰었다. 윤해원은 뒤따르려 했다. 나는 그의 팔을 잡았다.

“부원장님.”

그가 나를 봤다.

“이번에는 다른 사람이 먼저 맞을 수 있습니다.”

그 말을 하고 나서야 깨달았다. 피해자가 바뀐다는 말은 안도할 문장이 아니었다. 누군가 다른 사람이 죽을 수 있다는 뜻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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