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화

명령은 어디서 왔나

24시간마다 살인범이 바뀐다 · 2026. 9.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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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령은 어디서 왔나

10:48, 고유라는 홍상욱의 이름이 적힌 칸을 닫았다.

닫는 소리가 먼저 났다. 그다음에야 그는 숨을 길게 내쉬었다. 화면에는 아직 R-3가 남아 있었다. 원소유자 홍상욱, 실사용자 삭제, 승인 실제 시각 00:07. 세 줄은 전날보다 선명해졌지만 질문은 더 나빠졌다. 이름이 선명할수록 사람들은 손을 덜 본다.

“원장님 이름만 더 보면 안 돼요.”

고유라가 말했다.

강태준은 펜을 들었다.

“무엇을 봐야 합니까.”

“생성. 위임. 예약. 삭제요. 네 칸입니다. 명령은 눌린 순간만 보면 늦어요.”

그는 우리에게 허락을 구하지 않았다. 허락받을 사람처럼 보였던 고유라는 사라지고, 로그를 열 사람만 남아 있었다. 그는 보안실 큰 화면을 쓰지 않고 자기 노트북을 회의실 작은 모니터에 연결했다. 커다란 화면은 사람을 설득하기 좋다. 작은 화면은 틀린 칸을 숨기기 어렵다.

홍상욱은 의자 등받이에 손을 얹었다.

“감사 회의 기록은 인사 자료도 포함합니다. 열람 범위를 제한해야 합니다.”

“제한할게요.”

고유라가 바로 대답했다.

“이름, 직급, 생계 이야기 말고 토큰 행위만 봅니다. 누가 누구를 미워했는지 말고 어느 단말이 어느 권한을 빌렸는지만요.”

홍상욱은 반박할 말을 한 번 접었다. 기술어가 아니라 행위어로 바뀐 말은 잡기 어렵다. 개인 정보가 아니라 권한 이동. 감정이 아니라 단말. 고유라는 그 차이를 일부러 골랐다.

10:55, 감사 회의 녹취록이 열렸다.

회의는 2019년 사고 재감사 준비를 명목으로 한 사전 조율이었다. 참석자 목록에는 홍상욱, 윤해원, 이주완, 한도경, 문라희의 이름이 있었다. 오세진은 의료 자문으로 뒤에 붙었다. 고유라는 이름을 접었다. 참석자 대신 발언 순서와 승인 버튼만 남겼다.

첫 번째 승인. 감사 자료 접근 제한. 홍상욱 본인 서명.

두 번째 승인. 18시 이후 봉투 라우팅 조건. 윤해원 제안, 홍상욱 보류, 이주완 문구 수정.

세 번째 승인. 재난 시 중앙 방송과 보정실 안내를 한 묶음으로 지연 송출할 수 있는 예외 조항. 문라희 기술 한계 고지, 홍상욱 운영 승인.

고유라는 세 번째 줄에서 멈췄다.

“여기서 R 슬롯이 생겼어요.”

“원격 보정?”

“네. 그런데 R-3는 여기서 바로 발급되지 않았습니다. 이 회의에서는 슬롯을 열 수 있다는 운영 원칙만 승인돼요.”

홍상욱이 끼어들었다.

“그렇습니다. 원칙 승인과 특정 명령은 다릅니다.”

강태준은 그 말을 그대로 적었다.

“원칙 승인과 특정 명령은 다르다.”

홍상욱은 자기가 원하는 문장이 적혔는데도 편해 보이지 않았다. 강태준의 기록은 변호문이 아니라 다음 질문의 못이었다.

고유라는 회의록 오른쪽에 붙은 감사 로그를 불렀다. `R_GROUP_INIT`. 생성 시각은 2019년 감사 직후가 아니라 이번 재감사 공지 이틀 전이었다. 생성자는 `ADMIN-H`. 실사용자 이름은 없었다. 대신 생성 사유에 짧은 문장이 붙어 있었다. `태풍 고립 대비, 보정 안내 자동화.`

배준호가 옆에서 고개를 들었다.

“태풍 고립 대비면 기상 보고 축소 전입니다.”

그 말은 작았다. 작지만 위치가 생겼다. 태풍이 핑계로 쓰이기 전에 R 그룹은 준비되어 있었다.

“작성 시각.”

강태준이 물었다.

“공지 이틀 전 19:12:04. 중앙망 기준. 독립 시각 보정하면 19:13:07 근처입니다.”

고유라가 대답했다.

“근처?”

문라희가 처음 말했다.

고유라는 눈을 찡그렸다.

“독립 시험기가 그 시간대에 점검 모드라 0.4초 흔들립니다. 근처라고 해야 맞아요.”

문라희는 더 묻지 않았다. 근사값을 싫어하는 사람도 오차 근거가 있으면 입을 닫는다.

11:20, 한도경은 종이 회의록을 가져왔다.

종이는 늦게 나온다. 늦게 나오는 대신 지워진 칸을 가끔 피한다. 전자 로그의 생성자 칸은 `ADMIN-H`였지만, 종이 위임장에는 손으로 쓴 줄이 있었다. `R 계열 임시 위임: 원장 결재 대리 가능.`

나는 그 줄 아래의 서명 칸을 봤다.

홍상욱의 이름이 아니었다.

이름이 비어 있는 것도 아니었다. `대리 서명`이라는 네 글자와 날짜 도장만 있었다. 보통 도장은 사람을 대신하지 않는다. 그런데 이 양식에서는 사람 이름이 빠지고 직무가 들어갔다. 원장 부재 시 재난 운영 대리. 대리권자 성명은 별지.

강태준이 물었다.

“별지.”

한도경은 눈을 내리깔았다.

“별지 파일은 전산에만 있습니다.”

“복구.”

“해야 합니다.”

이번에는 기다리지 않았다. 한도경은 바로 노트북을 열었다. 실행 버튼 위에서 멈추지 않았다. 그 변화도 적어야 했다. 그는 기록을 지키는 사람이 아니라 기록을 꺼내는 사람이 되어 가고 있었다.

복구본은 완전하지 않았다. 대리권자 이름 칸은 검은 사각형으로 가려져 있었다. 그러나 사각형 옆의 단말 번호는 남아 있었다. 회의실 2번 단말. 서명 시각 19:13:13. 같은 줄에 자동 생성된 R-3 초기 토큰 번호가 붙어 있었다.

“회사의 전자 결재에서 대리 서명은 사람 이름을 남기지 않습니까.”

내가 물었다.

이주완이 웃지 않고 대답했다.

“남깁니다. 남겨야 합니다. 그래서 안 남긴 경우가 더 중요합니다.”

“법적으로 무효입니까.”

“무효라고 단정하면 편합니다. 하지만 행정 시스템은 무효 문서로도 일을 합니다. 누군가 그 무효를 알고도 받아들였는지가 다음 문제입니다.”

그는 자기 직업을 설명하지 않았다. 비용만 말했다. 무효라는 말로 끝나지 않는 문서. 그것이 더 불편했다.

11:45, 우리는 회의실 2번 단말을 확인하러 갔다.

복도에는 물기가 말라 가고 있었다. 태풍은 아직 유리창을 밀고 있었지만, 사람들은 물기보다 화면을 더 무서워했다. 회의실 2번 단말은 벽 쪽 긴 책상 끝에 붙어 있었다. 노을이 그 책상 위 컵 위치를 기억한다고 문자로 보냈다. `큰 회의 때 원장은 항상 문 가까운 자리. 2번 단말은 문에서 멀어요.`

그가 본 것은 소리 없는 배치였다. 그래서 더 유용했다. 홍상욱이 평소 앉는 자리와 대리 서명이 찍힌 단말 위치가 달랐다.

강태준은 노을의 문자도 기록에 붙였다.

홍상욱이 말했다.

“회의실 좌석은 고정이 아닙니다.”

“고정이라고 쓰지 않았습니다.”

강태준이 답했다.

“평소 배치와 다른 단말이라고 적습니다.”

홍상욱은 다시 주어를 지우려다 말았다.

“재난 준비 회의였습니다. 급하게 처리된 문서가 많았습니다.”

고유라가 단말의 로컬 캐시를 열었다. 네트워크가 끊겼던 시간대의 임시 저장 파일이 남아 있었다. 파일명은 길었다. 그는 끝부분만 읽었다.

“`proxy_sign_R3.tmp`.”

“임시 파일이 왜 남았습니까.”

“정상 종료가 안 됐으니까요. 서명이 성공하면 임시 파일은 지워져요. 여긴 성공했는데도 남았습니다. 누가 창을 닫기 전에 전원을 끊었거나, 성공 처리만 먼저 보내고 로컬 정리를 못 했거나.”

고유라는 마우스를 움직이지 않았다. 움직이면 파일 시간이 바뀔 수 있었다. 그는 손을 떼고 강태준을 봤다.

“복사본 떠야 합니다. 제가 직접 만지면 나중에 제가 만든 흔적이 섞여요.”

강태준은 바로 장갑을 꼈다. 이현의 시간표가 아니라 고유라의 절차가 수사를 움직였다. 그 점을 나는 조금 늦게 인정했다.

12:10, 복사본의 첫 줄이 열렸다.

`R-3 token issued by delegated signature.`

홍상욱은 입을 열었다가 닫았다. 그는 영어 문장을 모른 척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었다. 윤해원은 서류를 보지 않고 나를 봤다. 마치 이 결과가 자기 봉투 설계의 다음 칸을 움직였다는 것을 아는 사람처럼.

“대리 서명자는 누구입니까.”

강태준이 물었다.

고유라는 고개를 저었다.

“이 파일에는 이름이 없습니다. 대신 대리 서명 세션이 어느 계정으로 열렸는지 나옵니다.”

“계정.”

“`HSW_delegate_03`.”

홍상욱이 말했다.

“그건 제 직무 대리 계정군입니다.”

“본인 계정입니까.”

“아닙니다. 원장 직무에 딸린 비상 계정입니다.”

그는 이번에도 사람을 직무 뒤로 밀었다. 그러나 밀린 자리에는 구멍이 남았다. R-3는 홍상욱의 이름을 달고 있었지만, 발급 순간 홍상욱의 손을 통과하지 않았다. 대리 서명은 사람을 숨기기 위한 빈칸이 아니라, 책임을 미룰 수 있는 문이었다.

나는 공동 장부를 펼쳤다.

`R-3 생성: 대리 서명.`

`원소유: 홍상욱.`

`발급 단말: 회의실 2번.`

`대리 계정: HSW_delegate_03.`

네 줄을 쓴 뒤에도 답은 나오지 않았다. 대신 질문이 좁아졌다. 홍상욱이 눌렀느냐가 아니었다. 홍상욱의 이름으로 누를 수 있게 누가 문을 열었느냐.

고유라는 화면을 닫지 않았다. 그는 마지막 로그를 확대했다. 발급 직후 8초 뒤, 같은 단말에서 감사 회의 녹취록이 열렸다. 열람자는 삭제되어 있었다. 삭제 흔적은 이전 R-3 실사용자 삭제와 같은 모양이었다.

“같은 지우개입니까.”

내가 물었다.

“아직은 같은 모양입니다. 같은 손이라고 쓰면 안 돼요.”

그가 답했다.

그 문장이 이번 화의 가장 중요한 안전장치였다. 같은 모양. 아직 같은 손은 아니다.

12:26, 고유라는 검증용 복사본에서 대리 서명 절차를 다시 돌렸다.

실제 권한을 건드리지 않기 위해 네트워크를 끊은 장치였다. 그는 먼저 빈 결재 양식을 열었다. R 계열 슬롯은 보이지 않았다. 다음으로 감사 회의 녹취록을 열람 상태로 만들었다. 그래도 보이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원장 직무 대리 계정군의 비상 카드 번호를 입력하자, 회색으로 막혀 있던 `R-3 임시 발급` 버튼이 나타났다.

“비밀번호 하나로 되는 게 아닙니다.”

고유라가 말했다.

“회의록 열람 상태, 대리 계정, 비상 카드. 세 조건이 같이 있어야 해요. 누가 홍 원장님 이름만 훔쳐서 누른 구조가 아닙니다.”

홍상욱은 그 말에 바로 기대려 했다.

“그렇다면 제가 더더욱 직접 할 수 없었겠군요.”

“아뇨. 반대예요.”

고유라는 버튼을 누르지 않고 손을 뗐다.

“이 구조를 만들거나 승인한 사람 없이는, 다른 사람이 훔쳐서도 못 합니다. 대리 서명자는 숨었지만 대리 서명 문은 원장 권한 아래 열려 있었어요.”

강태준은 보드에 새 칸을 만들었다.

`발급 조건: 회의록 열람 + 대리 계정 + 비상 카드.`

`의미: 단순 계정 탈취 아님. 승인 구조 필요.`

홍상욱은 이번에는 말을 고르지 못했다. 사람을 지우기 위해 만든 행정 절차가 사람보다 더 많은 조건을 남겼다.

한도경이 복구본 옆에서 낮게 말했다.

“비상 카드는 회의실 보관함에서 꺼낸 흔적이 있습니다.”

“누가 꺼냈습니까.”

내가 물었다.

“보관함 로그도 대리 세션 안에 묶여 있습니다. 이름은 없습니다. 대신 열림 시각은 19:12:58입니다.”

19:12:58. 대리 서명 시각보다 15초 전. 누군가 먼저 카드를 꺼내고, 회의록을 열고, 대리 계정으로 들어갔다. 그 순서는 정답을 주지 않았지만 우연을 줄였다. 권한은 혼자 생기지 않았다.

12:38, 강태준은 홍상욱을 다시 앉혔다.

“원장님은 R-3 발급을 직접 했습니까.”

“아닙니다.”

“대리 서명 계정 운영을 승인했습니까.”

홍상욱은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직접 했느냐는 질문에는 부정이 쉬웠다. 운영을 승인했느냐는 질문은 손보다 넓었다.

“비상 절차상 승인했습니다.”

“누가 쓸 수 있었습니까.”

“명단을 확인해야 합니다.”

“정오 전 제출 약속은 이미 지났습니다.”

홍상욱의 손이 의자 등받이에서 떨어졌다. 그는 처음으로 방어적 명령을 내리지 않았다. 명령할 문장을 고르는 중이었다.

고유라는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R-3 토큰은 홍상욱이 아니라 대리 서명으로 발급됐어요.”

그는 우리를 보지 않고 화면을 봤다.

나는 그 문장을 장부에 옮겼다. 끝에 물음표를 붙이지 않았다. 확인된 사실이었다. 다만 그 사실이 누구를 향하는지는 아직 열지 않았다.

고유라는 자기 이름을 장부 아래 기술 확인자 칸에 적었다. 전에는 내가 시킨 로그를 뽑는 사람이었다. 지금은 질문의 순서를 바꾼 사람이었다. 그는 서명 뒤에 작은 괄호를 붙였다. `생성 경로 확인.` 그 괄호가 이번 회차의 변화였다. 조력자가 아니라 수사의 주체가 남긴 흔적.

대리 서명 계정은 홍상욱의 이름 아래 있었다. 홍상욱의 손은 아니었다. 그 사이에 문 하나가 생겼다. 다음 질문은 그 문을 연 사람이 누구인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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