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

9분의 선택

24시간마다 살인범이 바뀐다 · 2026. 5. 2.

조회수 20

9분의 선택

23:52, D-13 감사 단말의 왼쪽 버튼이 붉게 떴다.

비상 정지.

오른쪽 버튼은 흰색이었다.

원본 복사.

두 버튼 사이에서 커서가 한 번 흔들렸다. 복사율은 87퍼센트였다. 내 목에 걸린 Q-13 키가 셔츠 안쪽에서 뜨거워졌다. 열은 피부보다 늦게 올라왔고, 손끝보다 먼저 기억을 건드렸다. 서도윤의 이름이 새겨진 작은 검은 조각. 오빠가 죽은 뒤 내게 남은 물건 중, 공식 기록에 존재하지 않는 유일한 권한.

비상 정지를 누르면 진행 중인 복사 거래는 폐기된다.

단말은 그 사실을 친절하게 경고하지 않았다. 이미 열어 본 감사 매뉴얼의 각주가 내 손목을 잡고 있었다. `중지 시 임시 파티션의 원본 조각은 폐기한다.` 한 줄. 사람 이름보다 짧은 문장.

23:53:10.

나는 오른쪽 버튼 위에 손가락을 올렸다.

천장 스피커가 먼저 낮은 경고음을 냈다. 뒤이어 보정실 쪽 산소 농도 표시가 노란색에서 붉은색으로 넘어갔다. 화면 오른쪽 아래에 작은 창이 열렸다.

`B-보정실 산소 경보. 수동 환기 지연.`

같은 시각, 감사 단말의 음성 채널이 잡음을 뱉었다.

“서이현 씨, 들립니까.”

윤해원의 목소리였다. 부원장의 침착한 발음은 반쯤 끊겨 있었다. 그래도 단어는 남았다.

“보정실 문이 안 열립니다. 수동 환기 쪽으로 사람 보내 주세요. 지금은 설명할 시간이 없습니다.”

복사율이 88로 바뀌었다.

나는 통신창을 확대했다. 윤해원은 다시 말했다.

“비상 정지 누르지 마세요. 아니, 잠깐. 그게 아니라 사람을 먼저—”

문장이 잡음에 갈렸다. 나는 왼쪽 버튼을 보았다. 비상 정지를 누르면 원본은 사라진다. 오빠의 2019년 원본 로그. 죽은 사람이 무모한 실험자로 남았던 여덟 해의 문장. 홍상욱이 “기관 전체를 위해”라고 서명한 파일의 앞뒤. 윤해원이 오늘 밤 공개하겠다고 약속한 진짜 시각.

23:55:02.

산소 경보가 두 번째 단계로 넘어갔다. 단말은 경보음 때문에 복사 오류가 생길 수 있다고 띄웠다. 이상한 우선순위였다. 사람보다 기록을 먼저 걱정하는 기계라서가 아니었다. 나는 그 창을 읽고 있었다.

내 손가락은 오른쪽 버튼을 눌렀다.

원본 복사.

진행률 막대가 한 칸 앞으로 갔다. 89퍼센트.

왼쪽 아래에 `경보 음소거 600초`가 떠 있었다. 나는 음소거를 눌렀다. 손가락은 젖지 않았고, 떨지도 않았다. 숫자만 늘었다. 90, 91, 92.

윤해원의 채널은 꺼지지 않았다. 스피커가 묵음 처리됐을 뿐, 상태 창은 계속 깜박였다. 내 허리 벨트의 녹음기는 켜져 있었지만, 나는 화면을 닫았다. 나중에 확인할 수 있는 것보다 지금 지키는 원본이 먼저라고 판단했다. 그 판단이 먼저 떠올랐다.

23:59:48.

복사율 99퍼센트에서 숫자가 멈췄다.

Q-13 키가 목뼈 아래에서 더 뜨거워졌다. 나는 셔츠깃을 당겨 키를 밖으로 꺼냈다. 검은 유리처럼 보이는 표면에 단말의 붉은 점이 비쳤다. 비상 정지 버튼이 내 손보다 앞서 키 안에 들어가 있었다. 반사가 실제보다 먼저 움직이는 것처럼 보였다. 조명 때문일 수 있었다. 피로 때문일 수도 있었다. 그때의 나는 어느 쪽도 확인하지 않았다.

00:04:11.

완료음이 울렸다.

나는 그제야 뛰었다.

D-13 감사실의 자동문은 내가 손바닥을 대기 전부터 열리고 있었다. 보안 시스템은 산소 경보를 최우선으로 올렸지만, 복사 거래가 끝날 때까지 출입 잠금은 풀지 않았다. 이 순서도 기록될 수 있었다. 나는 문틀의 보조 카메라가 살아 있는지 확인했다. 렌즈 옆 녹색 점은 꺼져 있었다.

그때도 나는 확인했다.

사람이 닫힌 방 안에 있다는 사실보다, 나중에 누가 무엇을 증명할 수 있는지를 먼저 골랐다. 발은 복도를 향해 뛰고 있었고, 눈은 천장 카메라의 꺼진 점을 세고 있었다. 그 차이가 내 안에서 소리를 내지는 않았다. 대신 계단 난간의 물기, 비상등의 깜박임, Q-13 키의 열감만 차례대로 들어왔다.

D-13 감사실 문을 열자 복도 조명이 두 칸씩 죽어 있었다. 비상등은 바닥의 노란 선을 끊어 가며 밝혔고, 환기 덕트 안에서는 금속이 식는 소리가 났다. 보정실은 생활동 반대편, 지하 코어로 내려가는 중간에 있었다. 9분은 복도에서 더 짧았다. 계단 세 칸을 내려갈 때마다 계산이 줄었다. 8분 40초. 8분 13초. 7분 58초.

엘리베이터 앞에서 오세진을 만났다. 흰 가운의 첫 단추가 잘못 끼워져 있었다. 그는 손에 응급 가방을 들고 있었고, 오른손 엄지는 가방 손잡이를 세 번 문질렀다.

“보정실입니까?”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오세진은 시계를 보지 않았다. 대신 내 목의 Q-13을 보았다가 시선을 내렸다.

“산소 경보가 왜 이제야 올라왔죠?”

“중앙망 지연입니다.”

거짓말은 짧아야 했다. 나는 그렇게 배웠다. 하지만 짧다고 해서 좋은 거짓말은 아니었다.

강태준은 보정실 앞에 먼저 와 있었다. 검은 보안 재킷의 소매가 왼쪽 손목에서 조금 떠 있었다. 오래된 부상인지, 단말 팔찌 때문인지 바로 구분되지 않았다. 그는 문 옆 수동 패널을 열어 둔 채 나를 보았다.

“몇 시에 경보를 확인했습니까.”

“지금은 문부터 여세요.”

“질문을 바꾸겠습니다. 몇 시에 알았습니까.”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강태준은 내 대답 대신 내 손을 봤다. 손가락 끝에 감사 단말의 흰 분말이 묻어 있었다. D-13 키보드에만 남는 마른 코팅 가루였다. 그는 그것을 봤고, 오세진도 봤다.

00:12:40.

수동 패널이 풀렸다. 문은 한 번에 열리지 않았다. 틈이 세 손가락 너비만큼 벌어졌고, 안쪽에서 찬 공기가 나왔다. 산소가 부족한 방의 공기는 차갑지 않다. 그런데도 피부가 식었다. 그건 내 해석이었다. 사실은 환기 팬이 뒤늦게 돌아가고 있었다.

윤해원은 보정실 안쪽 유리벽 아래에 쓰러져 있었다.

흰 셔츠의 왼쪽 소매가 팔꿈치까지 말려 있었다. 바닥에는 깨진 응급 약품 케이스가 있었다. 피는 많지 않았다. 그래서 더 늦게 죽음처럼 보였다. 오세진이 무릎을 꿇고 동공을 확인했다. 그는 시간을 말했다.

“00시 14분. 반응 없습니다.”

강태준은 내 쪽으로 돌아섰다.

“무슨 버튼을 눌렀습니까.”

질문은 경보 시각보다 정확했다. 내가 답할 수 있는 질문이었고, 답하면 모든 계산이 끝나는 질문이었다.

나는 윤해원의 오른쪽 상의 주머니를 보았다. 비어 있었다. 그의 관리 키는 평소 그쪽에 들어간다고 들었다. 오늘 처음 들은 정보였는지, 내가 이미 알고 있던 정보였는지는 분간되지 않았다. 대신 왼쪽 바지 주머니가 조금 불룩했다. 강태준이 몸을 돌리며 그 위치를 가렸다.

“서이현 씨.”

나는 Q-13을 잡았다. 키는 방금보다 뜨거웠다.

00:16:47.

천장 조명이 흰색으로 바뀌었다. 비상등의 노란 선이 사라지고, 보정실 유리벽의 반사가 뒤로 밀렸다. 오세진이 고개를 들었다. 강태준이 내 어깨를 잡았다. 손아귀는 세게 들어왔지만, 제압이 아니라 위치를 고정하는 힘이었다.

“뭘 열었습니까.”

나는 이번에도 대답하지 못했다.

00:17:13.

흰 펄스가 바닥에서 올라왔다.

빛은 번쩍이지 않았다. 접혔다. 보정실 유리벽이 먼저 납작해지고, 강태준의 손이 내 어깨에서 떨어지는 대신 손목 쪽으로 되감겼다. 오세진의 응급 가방은 닫힌 상태로 돌아갔다. 깨진 케이스의 조각들이 바닥에서 떠오르는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깨진 적이 없던 자리로 빠졌다.

내가 마지막으로 본 것은 윤해원의 왼쪽 바지 주머니였다. 불룩한 선이 평평해졌다.

눈을 떴을 때 손가락은 아직 Q-13을 쥐고 있었다.

00:17:13.

생활동 숙소의 천장에는 물 얼룩이 하나 있었다. 전날 밤에 봤던 얼룩이었다. 아니, 전날 밤이라고 부르는 것이 맞다면. 내 휴대 단말은 7월 6일 00:17을 표시했다. 윤해원이 죽은 날보다 정확히 하루 전.

나는 침대에서 내려왔다. 바닥에 떨어뜨렸던 양말이 접힌 상태로 의자 위에 있었다. D-13 감사 단말에 꽂았던 보조 배터리는 가방 안쪽 주머니에 있었다. 복사 완료 파일은 없었다. 허리 벨트의 녹음기도 없었다. 대신 책상 위에는 아직 포장을 뜯지 않은 새 녹음기가 놓여 있었다.

물건들이 돌아와 있었다.

나는 바로 복도로 나가지 않았다. 책상 위 녹음기의 포장을 뜯고 전원을 켰다. 새 파일 번호는 0001이었다. 전날 밤 장비에서 남아야 할 기록은 없었다. 당연한 결과였지만 확인이 필요했다. 사람은 기억하고, 물건은 돌아왔다. 그 문장을 확정하기엔 이르지만, 최소한 내 손 안에서는 그랬다.

숙소 문 옆의 작은 화이트보드에는 도착 일정이 남아 있었다. `07:40 조식, 09:00 감사 브리핑, 13:13 D-13 예비 접근.` 어제 아침에 아무 생각 없이 지나친 글씨였다. 보드 아래 자석 하나가 비스듬했다. 나는 자석을 바로 세웠다가 다시 비스듬히 돌려놓았다. 내 손으로 바꾼 흔적이 다음에도 남는지 보려면, 지금 바꿔서는 안 됐다. 첫 번째 검증은 원형을 보존해야 했다.

나는 문을 열고 복도로 나갔다. 생활동의 야간 조명은 일정했다. 누군가 청소 카트를 밀고 지나간 흔적이 바닥에 남아 있었다. 손잡이 방향, 젖은 자국, 벽시계의 분침. 모두 어제의 것 같았다. 어제라는 단어가 내 안에서 한 번 걸렸다.

07:02, 강태준이 생활동 보안 게이트 앞에서 근무자를 바꿨다. 그는 내게 신분증을 요구했고, 내가 목걸이를 들기 전에 손목을 보았다. 어젯밤 보정실에서 내 어깨를 잡았던 손이었다. 살아 있는 손은 과거를 모른다. 손목의 붕대 위치만 같았다.

“감사팀 서이현 씨 맞습니까.”

“맞습니다.”

“출입 권한은 오늘 13시 이후부터입니다. 그 전에는 생활동과 브리핑룸만 사용하십시오.”

그는 내 대답에서 틀린 부분을 찾듯 1초 더 보았다. 나는 “알겠습니다”라고 말했다. 어젯밤 그의 질문을 떠올리지 않으려고 한 것이 아니었다. 떠올리면 표정이 늦어질 것 같았다.

07:40, 식당에는 노을이 먼저 나와 있었다. 그는 청소 카트에서 마른 천을 꺼내 컵 손잡이를 안쪽으로 돌렸다. 내가 입을 열자, 그는 내 얼굴을 볼 수 있는 위치로 한 걸음 옮겼다. 짧은 문자판을 내밀었다.

`커피는 오른쪽. 컵은 건드리지 마세요.`

어제도 같은 문장을 봤는지는 확실하지 않았다. 다만 컵 손잡이의 방향은 기억났다. 안쪽. 모두 안쪽. 나중에 누군가 바꿨다면 노을은 가장 먼저 볼 사람이었다. 그는 내가 컵을 오래 보는 것을 알아차리고 눈썹을 올렸다.

나는 고개를 저었다. 아직 질문할 권한이 없었다.

08:03, 문라희가 식당 입구의 안전 패널 앞에 섰다. 흰 머리를 낮게 묶은 여자는 패널을 열지 않고, 닫힌 덮개 위 숫자만 확인했다. 13.2, 13.2, 13.1. 표시가 바뀌기 전에 손가락이 다음 줄로 이동했다. 설계자라면 할 수 있는 행동이었다. 루프를 안다고 단정할 수는 없었다. 나는 그 단정이 얼마나 쉽게 생기는지 기록만 했다.

08:12.

식당의 커피 머신 앞에서 나는 검은 유리를 보았다. 흰 가운이 먼저 비쳤다. 1초 뒤, 천장 스피커가 말했다.

“현재 시각, 08시 12분. 태풍 경계 단계는 유지됩니다.”

검은 유리에 비친 흰 가운은 문을 지나간 뒤에야 실제 시야에 들어왔다. 오세진이었다. 그는 약품실 쪽 문을 닫고 식당으로 걸어왔다. 첫 단추는 똑바로 잠겨 있었다.

노을이 카운터 안쪽에서 컵 손잡이를 같은 방향으로 맞추고 있었다. 그는 내 입 모양을 보지 못하는 각도에 있었다. 손은 정확했다. 컵마다 손잡이가 안쪽으로 향했다.

윤해원은 창가 두 번째 자리에 앉아 있었다.

살아 있었다.

그는 죽은 사람처럼 고요하지 않았다. 서류철 모서리를 엄지로 밀어 맞추고, 컵 손잡이가 자기 쪽으로 돌아와 있지 않자 두 손가락으로 반 바퀴 돌렸다. 그 작은 동작 때문에 보정실 바닥의 자세가 더 또렷해졌다. 나는 사망 확인보다 먼저 그가 살아서 물건을 고치는 방식을 봤다.

기록에는 체온이 남지 않지만, 물건의 방향은 남았다. 그게 내가 붙잡을 수 있는 첫 증거였다.

그는 서류철을 내려놓고, 오른쪽 상의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작은 관리 키가 손끝에 걸렸다가 다시 들어갔다. 왼쪽 바지 주머니는 평평했다.

나는 자리에 멈춰 섰다.

윤해원이 고개를 들었다.

“서이현 씨. D-13 접근권 확인은 오후로 미뤄도 됩니다. 어제 늦게 도착하셨으니까요.”

어제.

천장 스피커의 안내음이 정확히 같은 간격으로 다시 울렸다. 커피 머신의 검은 유리 안에서, 윤해원이 나보다 1초 먼저 나를 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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