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 팔레트의 이름
안전수칙을 지키면 죽는다 · 2026. 10.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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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 팔레트의 이름
백기준은 계약 해지서를 접지 못했다. 접으면 협박이 되고, 펼치면 증거가 됐다. 그는 결국 두 종이를 모두 작업대 위에 놓았다. 계약 해지서와 작업중지 요청서가 나란히 있었다.
서진은 자기 이름이 적힌 해지서를 바로 읽지 않았다. 먼저 작업중지 요청서의 빈칸을 봤다. 사유, 요청자, 관리자 조치, 임금 처리. 네 칸 중 임금 처리만 작게 인쇄되어 있었다.
작업중지 중 대기시간은 무급 처리될 수 있음.
한수아가 그 줄을 소리 내어 읽었다. “될 수 있음. 누가 정해요?”
백기준이 대답했다. “회사와 업체 계약.”
“그럼 오늘은 부장님이 정해요.”
“내가 마음대로 못 정합니다.”
“그 말 많이 들었어요. 근데 사람이 팔레트 되면 마음대로 정하던데요.”
백기준은 반박하지 못했다. 작업대 옆 빈 팔레트에는 라벨이 붙어 있었다. 빈 팔레트 1. 바코드 아래 작은 글씨는 먼지에 가려져 있었다. 도윤이 장갑을 끼고 먼지를 닦았다. 이름 하나가 나왔다.
최미정.
그 아래 날짜는 지난달이었다. 배송 상태는 회수 완료. 품목은 팔레트였다. 하지만 라벨 왼쪽에는 일용직 출입 QR 조각이 붙어 있었다. 사람 이름과 물건 라벨이 한 장에 겹쳐 있었다.
“지난달 실종 신고 있었습니까.” 서진이 물었다.
은채가 바로 검색했다. “공식 실종 신고는 없습니다. 가족 문의 전화는 있어요. 상담으로만 남았습니다. 이름 최미정. 물류센터 일용직. 상태는 계약 종료.”
한수아가 말했다. “계약 종료면 사람이 없어져도 퇴사예요?”
백기준은 라벨을 보며 얼굴을 찡그렸다. “최미정 씨는 무단결근 처리됐습니다. 업체가 그렇게 올렸습니다.”
“부장님은 확인했어요?”
“출고 사고가 있었고, 그날 팔레트 하나가 분실됐습니다. 업체가 사람도 그만뒀다고...”
“사람이랑 팔레트가 같이 사라졌는데요.”
서진은 한수아의 말을 그대로 쓰지 않았다. 대신 최미정 이름 라벨, 회수 완료, 계약 종료, 팔레트 분실 동일일이라고 적었다.
라벨 오른쪽 아래에는 편집 코드가 있었다. 작게 찍힌 알파벳과 숫자였다.
SM-RD-06.
서진은 미란에게 바로 전화하지 않았다. S.M.과 같다고 쓰지도 않았다. 편집 코드 SM-RD-06 확인, 작성자 미확정이라고 적었다. 그래도 손이 느려졌다.
백기준은 그 메모를 봤다. “서 팀장님 코드입니까.”
“확인 전입니다.”
“그럼 지금 전화해서 물어보면 되잖아요.”
“전화 답변은 증거가 아닙니다. 그리고 물으면 대답 방식이 사건에 영향을 줄 수 있습니다.”
도윤은 빈 팔레트를 벽에서 떼어냈다. 바닥에는 옅은 사각 자국이 남았다. 자국 안쪽에 작은 바코드 조각이 붙어 있었다. 스캐너를 가까이 대자 화면이 켜졌다.
재고보다 한 명 많음. 보정 팔레트 출고 대기.
작업자들이 뒤로 물러났다. 김문식은 자기 손등의 출근 도장을 문질렀지만 지워지지 않았다. 라만은 조끼 QR을 손으로 가렸다. 박선영은 작업중지 요청서 쪽으로 갔다.
“서명할게요. 무급이어도요.”
응우옌 티란이 말했다. “무급이면 내일 밥값 없습니다.”
한수아는 그 말을 받아 적었다. “그것도 적어요. 작업중지 비용. 밥값, 교통비, 계약 끊길 위험.”
서진은 별첨에 현실 비용 칸을 만들었다. 임금 손실, 교통비, 업체 재계약 불이익, 냉장품 폐기, 출고 지연 위약금. 비용을 쓰자 백기준의 표정이 달라졌다. 회사 손해만 있던 종이에 사람 손해가 같이 올라왔다.
“전부 회사가 부담한다고 쓰면 거짓말입니다.” 백기준이 말했다.
“그럼 확정된 것과 미확정을 나눠 쓰세요.”
백기준은 펜을 들었다. 확정: 작업중지 시간 대기 인정 요청. 미확정: 임금 지급 방식, 업체 계약 불이익, 고객사 위약. 그는 요청이라는 단어를 쓰고 멈췄다.
한수아가 말했다. “요청 말고 보장.”
“보장은 내가 못 합니다.”
“그럼 부장님 권한으로 되는 데까지 쓰고, 안 되는 건 누구한테 올릴지 적어요.”
백기준은 두 번째 줄을 썼다. 다온생활안전 현장운영부장 백기준은 본 건 작업중지로 인한 일용직 대기시간 유급 처리를 회사에 상신하고, 미지급 시 사유와 책임자를 서면 통지한다.
충분하지 않았다. 그래도 공란보다는 나았다.
도윤은 비상정지 버튼을 눌렀다. 이번에는 백기준이 막지 않았다. 컨베이어가 하나씩 멈췄다. 냉장창고 팬 소리만 남았다. 전광판의 출고율 93%가 깜박이다가 작업중지 접수로 바뀌었다.
스캐너가 마지막으로 울렸다. 빈 팔레트 1 라벨 아래에 이름이 하나 더 떠올랐다. 최미정 옆에 김문식, 라만, 박선영, 응우옌 티란, 한수아가 줄줄이 붙으려 했다.
서진이 별첨 책임자 목록을 스캐너 앞에 들었다. 이름은 물건 라벨이 아니라 작업중지 요청자로 적혀 있었다. 스캐너 화면이 멈췄다. 빈 팔레트 1의 대상자 수가 5에서 1로 줄었다. 최미정의 이름만 남았다.
“최미정 씨는 아직 안 돌아왔습니다.” 은채가 말했다.
“알고 있습니다.”
서진은 라벨을 떼지 않았다. 라벨을 떼면 회수 완료가 될 수 있었다. 팔레트째로 보전하기로 했다. 백기준은 지게차 대신 수동 리프트를 가져오게 했다. 작업자 두 명이 목격자로 붙었다. 한수아는 조끼를 아직 벗지 않았다. 작업중지 접수가 완전히 끝나기 전까지는 임시상하차 기록이 남아 있었다.
최미정의 이름이 나온 뒤, 누구도 바로 그가 죽었다고 말하지 않았다. 이 작품의 현장은 그런 결론을 빨리 내릴수록 사람을 더 빨리 잃었다. 서진은 최미정 상태를 세 칸으로 나눴다. 실종 신고 없음, 가족 문의 상담 있음, 팔레트 라벨에 이름 있음.
“가족 연락처 있습니까.”
은채가 말했다. “상담 로그에 끝자리만 있습니다. 원본 열람은 권한 필요.”
백기준은 자기 휴대전화를 꺼냈다. “업체 대표에게 물어보겠습니다.”
“스피커폰, 녹음, 질문 범위 제한.”
백기준은 이번에는 토를 달지 않았다. 업체 대표는 처음에 최미정을 기억하지 못했다. 그러다 팔레트 분실 날짜를 말하자 기억했다.
“아, 그분. 무단결근으로 처리했죠. 연락 안 됐습니다.”
“가족에게 알렸습니까.” 백기준이 물었다.
“업체 직원도 아닌데 가족까지 어떻게 압니까. 일용 앱에 비상연락처 없었습니다.”
한수아가 입을 열려다 닫았다. 서진은 그 장면을 적었다. 비상연락처 공란, 가족 통보 없음. 공란이 다시 사람을 밀어냈다.
스캐너 화면에는 최미정 옆에 회수 완료가 떠 있었다. 서진은 회수 완료라는 단어를 실종 해결로 보지 않았다. 물건 회수 상태였다. 사람 상태는 미확인. 그 구분을 별첨에 굵게 적었다.
백기준은 작업중지 요청서의 관리자 조치 칸에 서명했다. 이름을 쓰고, 직책을 썼다. 백기준, 다온생활안전 현장운영부장. 그 아래에 한 줄을 더 썼다. 빈 팔레트 1 출고 보류 및 사람 이름 분리 확인 전 이동 금지.
“출고 보류하면 위약금이 나옵니다.” 그가 말했다.
“그 비용도 적으세요.”
백기준은 예상 위약금 칸을 만들었다. 정확한 금액은 몰랐다. 모르면 모른다고 써야 했다. 예상 위약금 미확정, 고객사 통보 필요. 한수아는 그 옆에 자기 글씨로 적었다. 작업자 무급 위험 미확정, 지급 주체 통보 필요.
두 미확정이 같은 종이에 놓였다. 회사 손해와 노동자 손해가 처음으로 나란히 보였다.
도윤은 컨베이어가 완전히 멈춘 뒤에도 문을 닫지 않았다. 닫으면 안쪽 작업자들이 다시 대기 상태로 밀릴 수 있었다. 그는 문을 열어 둔 채 난방 손실을 감수했다. 냉장창고 온도는 2도 올라갔다. 백기준은 그 수치를 보고 얼굴을 찡그렸지만, 문 닫으라는 말은 하지 않았다.
박선영이 물었다. “저희 이제 퇴근 찍어도 돼요?”
서진은 바로 허락하지 않았다. 퇴근 스캔은 아직 위험했다. 대신 공동 퇴근 확인서를 만들었다. 작업자 본인, 동료 목격자, 관리자, 외부 기록자. 네 칸이었다. 김문식부터 썼다. 라만은 자기 이름을 천천히 썼고, 티란은 성과 이름 순서를 다시 확인했다.
스캐너는 그 이름표들을 읽으려 했지만, 이번에는 바코드가 없었다. 그냥 종이와 글씨였다. 시스템이 바로 먹지 못하는 기록이었다.
백기준은 퇴근기 앞에 섰다. “한 명씩 찍되, 결과를 소리 내서 말합니다. 실패하면 다시 찍지 않습니다.”
김문식이 찍었다. 화면은 잠깐 멈췄다가 퇴근 보류를 띄웠다. 하지만 그 아래에 새 줄이 있었다.
공동 확인 첨부.
라만도, 박선영도, 티란도 같은 결과였다. 퇴근 완료는 아니었다. 그러나 출근 유지도 아니었다. 다음날까지 계속 작업시키는 상태는 끊겼다.
한수아의 앱에는 임시상하차가 남아 있었다. 그는 백기준을 봤다. 백기준은 관리자 화면에서 한수아 등록을 임시참관 오류로 바꾸었다. 임금 칸 0원은 사라지지 않았다. 대신 사유가 붙었다. 무급 등록 이의 제기.
“이의 제기면 돈 나와요?”
“아직 아닙니다.”
“그럼 끝난 거 아니네요.”
“네.” 백기준이 말했다. “끝난 거 아닙니다.”
그 인정도 기록됐다.
업체 대표는 최미정의 비상연락처가 없다고 했지만, 은채는 상담 로그의 끝자리와 일용 앱의 계좌 예금주 기록을 대조했다. 예금주는 최미정 본인이었다. 입금 은행은 남아 있었다. 가족 연락은 아직 불가능했지만, 적어도 임금을 받은 사람과 라벨의 이름이 같은지 확인할 길은 생겼다.
“계좌번호 전체 열람은 안 합니다.” 서진이 말했다.
은채가 답했다. “끝자리와 예금주만. 지급일은 지난달 14일이 마지막입니다.”
백기준은 그 날짜를 듣고 팔레트 분실일을 확인했다. 같은 날이었다. 그는 손으로 얼굴을 문지르려다 멈췄다. 장갑에 먼지가 묻어 있었다.
“그날 출고 사고 보고서가 있습니다.”
“가져오세요.”
보고서는 짧았다. 팔레트 1개 회수 지연, 작업자 무단결근, 출고 정상화 완료. 책임자 칸에는 업체 반장 이름만 있었다. 다온 확인자 칸은 공란이었다.
한수아가 말했다. “공란이 또 있네요.”
백기준은 보고서를 오래 보았다. “제가 그날 현장에 없었습니다.”
“없으면 공란이어도 돼요?”
“아니요.”
그는 다온 확인자 공란 옆에 오늘 날짜로 메모를 붙였다. 사후 확인 필요, 백기준. 과거를 고치는 서명은 아니었다. 하지만 공란을 그대로 두지 않는 첫 조치였다.
스캐너는 그 메모를 읽지 못했다. 바코드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메모는 잠깐 안전했다. 서진은 그 점도 적었다. 바코드 없는 수기 메모는 즉시 분류되지 않음. 장기 보전성은 미확정.
공동 퇴근 확인이 붙은 뒤, B조 사람들은 바로 집에 가지 못했다. 센터 밖 셔틀은 이미 떠났다. 택시를 부르면 각자 만 원이 넘었다. 백기준은 셔틀 추가 운행을 물었고, 경비실은 기사가 없다고 했다. 한수아는 그 대답도 비용에 넣었다.
“집에 못 가면 퇴근이 아니에요.”
백기준은 창고 앞에서 잠깐 멈췄다가 자기 법인카드를 꺼냈다. “택시비는 제가 먼저 결제하고 회사에 청구하겠습니다. 거절되면 제 비용입니다.”
“그렇게 쓰세요.” 서진이 말했다.
백기준은 썼다. 현장운영부장 선결제. 회사 승인 미확정. 개인 부담 가능성. 그 문장에는 선의와 계산이 같이 있었다. 그래서 백기준에게 맞았다.
김문식은 택시를 기다리며 손등의 출근 도장을 물티슈로 닦았다. 파란 잉크가 완전히 지워지지 않았다. 라만은 자기 이름표를 접지 않고 지갑에 넣었다. 티란은 QR 조끼를 반납하지 않았다. 증거로 들고 가겠다고 했다. 백기준은 반납함을 열어 둔 채 확인서만 받았다. 물건보다 사람이 먼저 나가는 순서가 겨우 만들어졌다.
택시 호출 기록까지 남긴 뒤에야 퇴근 보류자들은 센터 밖으로 나갔다. 경비실 게이트는 처음에 김문식을 다시 출근자로 읽었다. 장영식 경비원이 수동 통과 버튼을 누르려 하자 서진이 막았다.
“수동 통과 사유를 적고 누르세요.”
장영식은 게이트 로그에 작업중지 공동 확인 후 퇴장이라고 입력했다. 그제야 김문식의 이름이 출근자 목록에서 더 늘어나지 않았다. 나가는 문에도 기록이 필요했다.
게이트 밖에서 김문식은 집에 전화했다. 길게 설명하지 못하고 “이제 간다”라고만 말했다. 아이 등원 얘기는 하지 않았다. 서진은 통화 내용을 쓰지 않고, 퇴근 후 가족 연락 가능 상태라고만 적었다. 사생활은 복구됐지만 공개 기록은 최소로 남겨야 했다.
백기준은 택시 영수증도 팔레트 증거와 같은 봉투에 넣으려 했다. 서진이 분리했다. “사람 귀가 비용과 실종 단서는 같은 봉투에 넣지 않습니다.” 비용 보전 파일과 팔레트 보전 파일이 나뉘었다. 섞지 않는 것도 이번 사건의 해법이었다.
빈 팔레트 뒤쪽에는 배송지가 붙어 있었다. 먼지와 랩에 가려져 있던 글자를 도윤이 손전등으로 비췄다.
성안시 생활안전대응원 기록조정실.
수령 담당자 칸은 비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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