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화

작업중지권

안전수칙을 지키면 죽는다 · 2026. 10.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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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업중지권

한수아는 조끼를 벗으려 했다. 도윤이 막았다. “갑자기 벗으면 미등록 이탈로 처리될 수 있어요.”

“입고 있으면 팔레트라잖아요.”

“그래서 순서를 정해야 합니다.”

서진은 창고 문턱에 서서 세 가지를 분리해 적었다. 한수아 본인 이름, 임시참관 등록, 스캐너의 빈 팔레트 1 판정. 같은 사람에게 붙은 세 기록이 서로 달랐다.

백기준은 관리자 화면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출고 지연은 47-1분에서 52분으로 늘었다. 숫자는 더 이상 우연처럼 보이지 않았지만, 서진은 의미를 붙이지 않았다. 지연 시간이 커질수록 백기준의 손가락이 빨라졌다.

“일단 스캐너 꺼요.” 한수아가 말했다.

“끄면 재고 마감이 안 됩니다.”

“사람이 재고로 잡혔는데 마감이 중요해요?”

“마감 안 되면 오늘 일한 사람들 일당 지급도 밀립니다.”

그 말에 작업자들이 동시에 백기준을 보았다. 협박처럼 들렸지만 실제 제약이기도 했다. 일당은 출고 마감과 근태 확정 뒤 지급됐다. 시스템이 멈추면 김문식은 더 늦게 돈을 받았다.

서진은 물었다. “작업중지권 절차 있습니까.”

백기준은 얼굴을 굳혔다. “있습니다. 중대 위험이면 누구나 요청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남용하면 업체 계약에서 불이익이...”

한수아가 말을 끊었다. “남용인지 아닌지 여기서 사람이 팔레트로 찍힌 걸 보고도 판단 못 해요?”

김문식이 손을 들었다. “저는 중지 요청합니다.”

라만도 손을 들었다. 박선영은 망설였다. “중지하면 오늘 돈 안 나올 수 있잖아요.”

한수아는 그에게 가까이 가지 않았다. 설득한다고 손목을 잡으면 또 다른 강제가 됐다. “안 할 사람은 안 해도 돼요. 근데 나중에 누가 대신 남으면, 그건 선택한 게 아니잖아요.”

박선영은 장갑을 벗지 않고 손을 들었다. 응우옌 티란은 자기 이름이 적힌 조끼 라벨을 떼어 손에 쥐고 들었다. 오승필도 들었다. 정규직 사번이 있는 사람이 들어야, 일용직만 문제라는 말이 약해졌다.

도윤은 비상정지 버튼 앞에 섰다. “요청자 확인. 김문식, 라만, 박선영, 응우옌 티란, 오승필, 한수아 목격.”

“저도 요청자예요.” 한수아가 말했다.

“참관 등록이 위험합니다.”

“그래도 제 이름으로요. 임시참관 말고 한수아.”

서진은 그렇게 적었다. 한수아, 본명으로 작업중지 요청. 임시참관 등록과 분리.

백기준은 작업중지 양식을 가져왔다. 양식 맨 위에는 회사 로고가 있었고, 사유 칸이 좁았다. 위험 내용을 세 줄로 쓰게 되어 있었다. 서진은 새 종이를 덧붙였다. 별첨 사유. 사람을 빈 팔레트로 읽은 스캐너, 퇴근 실패, 이중 출근 도장, 임금 손실 가능성.

“양식 밖에 쓰면 접수 안 됩니다.” 백기준이 말했다.

“양식 안에 다 안 들어갑니다.”

“그럼 요약해서 쓰세요.”

“요약하면 사람이 빠집니다.”

그 말에 작업자들이 조용해졌다. 백기준은 펜을 들고도 서명하지 않았다. 출고 지연 알림이 계속 울렸다. 센터장 전화, 업체 반장 전화, 고객사 담당자 전화. 백기준은 모두 받지 않았다.

한수아가 그에게 말했다. “부장님, 지금 서명 안 하면 누가 서명해요? 일용직이 하면 계약 끊기고, 정규직이 하면 징계 먹고, 저는 직원 아니라서 무시할 거잖아요.”

“내가 서명하면 회사가 손해 봅니다.”

“회사 손해랑 사람 퇴근 중에 골라요.”

백기준은 오래 버티지 않았다. 그는 작업중지 요청서 첫 장에 서명하지 않고, 뒤쪽 서랍에서 다른 봉투를 꺼냈다. 다온생활안전 인사팀 봉투였다.

“서진 씨, 지금 오정호 담당관 공문도 있고, 현장 업무 배제 상태입니다. 제가 이 요청서에 당신 이름을 넣으면 회사가 바로 물립니다.”

봉투 안에는 계약 해지 통보서가 있었다. 수신자는 윤서진. 사유는 무단 현장 개입 및 대외 리스크.

도윤이 한 걸음 앞으로 갔다. “장난합니까.”

백기준은 도윤을 보지 않았다. “장난이면 좋겠습니다. 이거 내밀면 서진 씨는 빠질 수 있습니다. 제가 서명하면 우리 회사가 빠질 데가 없습니다.”

서진은 통보서를 받지 않았다. “작업중지 서명 대신 계약 해지서를 제시한 것으로 기록합니다.”

작업중지 요청자는 늘어났지만, 서명 순서는 문제가 됐다. 김문식이 먼저 쓰면 개인 불만으로 보일 수 있었다. 오승필이 먼저 쓰면 정규직 대표처럼 처리될 수 있었다. 한수아가 먼저 쓰면 외부인의 선동으로 몰릴 수 있었다.

서진은 순서를 제안하지 않았다. “각자 왜 쓰는지 한 문장씩 적고, 같은 시간으로 접수합니다.”

김문식은 ‘퇴근이 안 돼서’라고 썼다. 라만은 ‘내 이름이 팔레트가 아니어서’라고 썼다. 박선영은 ‘무급이어도 사람이 먼저라서’라고 쓰려다 멈췄다. 너무 큰 말이었다. 그는 다시 썼다. ‘집에 가야 해서.’ 응우옌 티란은 ‘내 QR 다른 사람에게 쓰지 말 것’이라고 썼다. 오승필은 ‘정규직만 퇴근되는 기록 반대’라고 썼다. 한수아는 ‘임시참관으로 무급 출근 처리 거부’라고 썼다.

각 문장은 작고 달랐다. 그래서 더 나았다. 한목소리 구호가 아니었다.

백기준은 서명란 위에 손을 올렸다. “이걸 접수하면 업체가 반발합니다. 다음 달부터 여기 사람 못 구합니다.”

한수아가 말했다. “사람 못 구하는 게 아니라 이런 조건으로 못 부르는 거겠죠.”

“수아 씨는 생계 걸린 사람들한테 너무 쉽게 말합니다.”

“저도 생계 걸렸어요. 그래서 말하는 거예요.”

백기준은 그 말을 듣고 잠깐 입을 닫았다. 그는 처음으로 한수아를 외부 활동가나 귀찮은 목격자로만 보지 않는 얼굴이 됐다. 하지만 곧 휴대전화가 울렸다. 업체 대표였다. 백기준은 스피커폰으로 받았다.

“부장님, 작업중지 접수하면 오늘 인건비 못 맞춥니다. 애들한테 말해 주세요. 조금만 더 하면 됩니다.”

한수아가 바로 말했다. “애들이 아니고 이름 있어요.”

백기준은 스피커폰을 끄지 않았다. “이름으로 말하세요. 김문식, 라만, 박선영, 응우옌 티란. 네 명 퇴근 실패입니다. 한수아 임시참관도 잘못 등록됐고요.”

전화 너머가 조용해졌다. 이름을 말하는 데 비용이 생겼다. 업체 대표는 더 이상 ‘애들’이라고 하지 못했다.

그 사이 스캐너는 빈 팔레트 1 라벨을 계속 갱신했다. 대상자 수가 4에서 5로 늘었다. 한수아가 완전히 들어간 것이다. 서진은 작업중지 요청서 위에 빈 팔레트 대상자 수 변화를 적었다. 요청서가 단순 항의가 아니라 시스템 반응 기록이 됐다.

도윤은 비상정지 버튼 커버를 다시 열었다. 이번에는 봉인 번호를 뜯지 않고, 봉인 상태 그대로 촬영했다. 봉인을 뜯은 사람이 책임자가 되는 구조일 수 있었다.

“봉인 해제도 별첨으로 가야 합니다.” 서진이 말했다.

백기준은 손을 내밀었다. “제가 뜯겠습니다.”

“혼자 뜯지 마세요.”

“내가 책임자입니다.”

“책임자를 한 명으로 만들면 다시 한 명이 남습니다.”

백기준은 손을 멈췄다. 그 문장은 이 사건의 핵심이었다. 회사에서 배운 책임은 한 사람이 도장 찍고 끝내는 것이었다. 이곳에서는 그 한 사람이 빈 팔레트가 될 수 있었다.

결국 봉인은 세 사람이 함께 확인하고 잘랐다. 백기준, 오승필, 한수아. 서진은 자른 조각을 봉투에 넣었다. 도윤은 버튼을 누를 준비를 했다. 아직 누르지는 않았다. 작업중지 요청서의 관리자 조치 칸이 비어 있었기 때문이다.

봉인 조각을 봉투에 넣은 뒤, 서진은 봉투 겉면에 세 사람 이름을 적었다. 백기준, 오승필, 한수아. 한수아는 자기 이름 옆에 ‘무급 임시참관 이의 제기 중’이라고 덧붙였다.

“그거 꼭 써야 해요?” 백기준이 물었다.

“네. 그래야 나중에 제가 무료로 들어와서 현장 방해한 사람이 아니라, 잘못 등록된 사람으로 남아요.”

백기준은 반박하지 못했다. 그는 현장 사람들을 가족처럼 부르곤 했지만, 가족이라는 말은 계약서에 없었다. 계약서에는 업체, 코드, 지급 조건만 있었다.

작업중지 요청서가 거의 완성될 때, 업체 반장이 나타났다. 그는 헬멧도 쓰지 않고 들어오며 말했다. “누가 일을 세워요? 김문식 씨, 당신 내일부터 나오지 마.”

김문식은 자리에서 일어나려 했다. 도윤이 손으로 막았다. 한수아가 먼저 말했다. “그 말 지금 녹음 중이에요. 작업중지 요청자 불이익 발언으로 적습니다.”

반장은 한수아를 위아래로 봤다. “당신은 뭔데요.”

“한수아. 임시참관으로 잘못 등록된 사람. 이름 적어요.”

반장은 백기준을 봤다. 백기준은 처음으로 반장 편을 들지 않았다. “지금부터 불이익 발언 금지합니다. 작업중지권 행사 중입니다.”

“부장님, 출고 깨지면 우리 계약도 끝납니다.”

“사람을 팔레트로 찍은 게 먼저입니다.”

백기준의 말은 매끈하지 않았다. 그래서 더 현장 말 같았다. 그는 아직 좋은 사람이 아니었다. 손해를 계산하고 있었다. 하지만 계산표에 사람이 들어갔다.

업체 반장은 입을 다물었다. 그가 말하지 못하는 사이, 박선영이 요청서 마지막 칸에 서명했다. 망설이던 사람이 서명하자 다른 사람들도 자기 이름을 확인했다. 작업중지권이 구호가 아니라 종이에 올라갔다.

비상정지 버튼을 누르기 전, 백기준은 냉장품 폐기 예상표를 꺼냈다. 품목명과 수량이 빽빽했다. 닭가슴살, 샐러드, 우유, 냉동 도시락. 폐기 예상 금액은 작업자 일당보다 컸다. 그 표만 보면 버튼을 누르지 않는 게 합리적으로 보였다.

서진은 표 옆에 다른 표를 만들었다. 퇴근 실패자 이름, 잃는 시간, 잃는 임금, 교통비, 다음 근무 영향. 금액은 빈칸이 많았다. 모르는 건 모른다고 썼다. 두 표를 나란히 놓자 백기준은 폐기표만 들고 말할 수 없게 됐다.

한수아가 말했다. “이제 어느 쪽 손해인지 보이죠.”

백기준은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폐기 예상표 위에 ‘확정 전’이라고 썼다. 냉장품이 전부 버려질지, 일부만 지연될지 아직 몰랐다. 회사 손해도 확정 전이었다. 사람 손해만 늘 확정처럼 밀리는 구조가 조금 흔들렸다.

업체 반장은 그 표를 보며 말했다. “이런 걸 누가 다 보상합니까.”

김문식이 작게 답했다. “우리는 맨날 우리가 했습니다.”

그 말 뒤에 아무도 바로 농담하지 않았다. 도윤은 버튼 위에 손을 올렸고, 서진은 요청서 접수 시간을 적었다. 03시 17분. 김문식의 퇴근 실패 시간과 같았다. 같은 시간이 이번에는 멈춤 요청 시간이 됐다.

업체 반장은 김문식에게 따로 말하려 했다. 도윤이 둘 사이에 섰다. “개별 면담 금지. 작업중지 요청 중입니다.”

“내 직원인데요.”

김문식이 처음으로 반장을 직접 봤다. “저 업체 직원 맞는데, 지금은 혼자 얘기 안 하겠습니다.”

그 말은 길지 않았다. 하지만 김문식이 자기 선택을 직접 말한 첫 순간이었다. 한수아는 끼어들지 않았다. 대신 요청서 옆에 개별 면담 거부, 본인 발화라고 적었다.

백기준은 반장에게 말했다. “면담하려면 노동자 본인, 동료 목격자, 회사 관리자 같이 둡니다. 지금은 현장 중지 먼저.”

반장은 헛웃음을 쳤지만 물러났다. 전광판의 빈 팔레트 대상자 수가 5에서 4로 줄었다가 다시 5로 돌아왔다. 김문식의 발화가 잠깐 시스템을 밀어냈지만, 아직 절차가 끝나지 않았다는 뜻이었다.

서진은 그 변화를 놓치지 않았다. 본인 발화만으로는 부족, 공식 중지 필요. 기록 문장이 다음 행동을 정했다.

비상정지 버튼 옆에는 재가동 책임자 칸도 있었다. 중지는 여러 명이 확인했지만, 재가동은 한 명만 쓰게 되어 있었다. 서진은 그 칸을 보고 백기준에게 말했다. “멈추는 것보다 다시 켜는 게 더 위험할 수 있습니다.”

백기준은 재가동 책임자 칸을 비워 두지 않고 별첨이라고 적었다. 재가동 조건은 사람 이름 분리, 퇴근 보류 해제, 빈 팔레트 출고 보류 확인. 아직 하나도 끝나지 않았다. 그래서 버튼을 누르기 전부터 다음 책임이 정해졌다.

재가동 조건을 적자 업체 반장이 다시 항의했다. “그럼 오늘 라인 못 켭니다.” 백기준은 대답했다. “사람이 물건으로 남아 있으면 못 켭니다.” 그 말은 결심이라기보다 조건이었다. 조건이라서 문서에 들어갈 수 있었다.

김문식은 그 조건 옆에 자기 손등의 파란 도장을 찍었다. 서명은 아니었다. 두 번 출근으로 남은 자국을 이번에는 중지 요청의 증거로 돌려놓는 행동이었다. 지워지지 않았다.

전광판의 출고 지연 시간이 멈췄다. 52분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스캐너도 잠깐 멈췄다. 한수아는 조끼를 입은 채 말했다.

“그 종이로 사람 못 내보내요.”

백기준의 손에 들린 계약 해지서 아래로 작업중지 요청서가 보였다. 서명란은 아직 비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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