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내방송의 원본
안전수칙을 지키면 죽는다 · 2026. 8.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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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내방송의 원본
고정애의 임시 승차 기록은 새벽 2시 12분에 발급됐다.
종이에는 탑승역과 하차역이 둘 다 성안역으로 찍혀 있었다. 실제로는 두 번째 종점과 유지보수 승강장을 지나왔지만, 시스템은 그런 역 이름을 만들지 못했다.
고정애는 창구 앞에서 표와 영수증을 나란히 놓았다. 손수건은 아직 젖은 가장자리가 말라 가고 있었다.
“여기서 탔다고 쓰면 거짓말 아니에요?”
창구 직원은 화면을 보며 말했다.
“임시 기록이라 그렇게 나옵니다.”
서진은 보고서 수정란에 적었다. 실제 하차 위치와 발급 기록 불일치. 고정애는 그 문장을 보고 천천히 자기 이름을 썼다. 글씨는 느렸지만 끝까지 본인 손으로 썼다.
기록이 발급되자 다른 승객들의 휴대전화에도 알림이 돌아왔다. 김태후는 자신이 고정애의 손수건을 확인했다는 사진을 받았고, 임지연은 카트 파손 접수 번호를 받았다. 오민석은 회사 단체방에서 무단결근 경고를 받았다.
구조는 끝났지만 하루치 손해는 각자 다른 문서로 나뉘었다.
서진은 현장 카드 사본을 보고서에 붙였다.
미기록 승객은 차량에 잔류시킬 것.
문장은 저장 버튼을 누르는 순간 사라졌다.
보고서에는 빈 줄만 남았다.
은채가 원격 화면을 공유했다.
“자동 삭제입니다. 금칙어가 아니라 문장 단위로 지워져요.”
서진은 다시 입력하지 않았다. 손으로 쓴 카드 사진을 첨부하고, 사라진 문장 위치에 삭제 시각을 적었다.
이도경은 그 장면을 찍고 있었다. 이번에는 송출 표시등이 꺼져 있지 않았다. 회색 예약 표시가 켜져 있었다.
“24시간 뒤 공개면 충분합니까.”
그는 질문처럼 말했지만 화면에는 이미 제목이 있었다.
성안선 막차, 공식 기록이 지운 여덟 번째 사람.
서진은 제목을 읽고 나서 고정애 쪽을 보았다. 고정애는 창구에서 발급받은 종이를 손수건 안에 접어 넣고 있었다.
“동의 받았습니까.”
“얼굴은 뺐습니다. 이름도 가렸고요.”
“피해자가 원하지 않는 제목일 수 있습니다.”
도경은 바로 반박했다.
“피해자라는 말도 기관이 좋아하는 말입니다. 시민 기록이라고 쓰면 됩니까? 아니면 또 기다립니까? 기다리는 동안 회수팀이 다 가져가면요.”
그의 말은 빠르지 않았다. 오히려 한 단어씩 눌렀다. 공개를 늦추는 모든 요청을 은폐로 의심하는 사람의 속도였다.
서진은 휴대전화를 보지 않았다.
“원본 해시를 외부 보관하세요. 보도는 피해자 동의 확인 뒤로 미룹니다.”
“기관 요구라면 거절합니다.”
“고정애 씨 요구인지 먼저 물어보세요.”
도경은 창구 쪽을 봤다. 고정애는 자기 이름이 들어간 임시 기록을 다시 꺼내고 있었다. 직원이 이름 한 글자를 작게 잘못 입력했기 때문이었다.
고정애는 창구에 말했다.
“애 아니고 애자 아니에요. 정애예요. 천천히 써도 틀리게 쓰면 안 되잖아요.”
도경은 예약 화면을 닫지 못했다. 닫는 대신 제목 옆에 보류라고 붙였다. 공개 예약은 취소됐다.
“24시간입니다. 그 뒤에는 제가 묻습니다. 동의 안 한 사람 빼고 갑니다.”
그는 서진에게 말했지만, 눈은 고정애의 종이에 가 있었다.
은채는 버전 0 파일의 사본을 두 개로 나눴다. 하나는 원본 해시 확인용, 하나는 청취용이었다. 그는 화면 오른쪽에 파일 생성일과 수정일을 띄웠다.
생성일은 11년 전 성안역 사고일과 같았다. 수정일은 그 뒤로 여러 번 바뀌어 있었다. 붉은 편집선이 붙었던 카드 날짜와 겹치는 구간도 있었다.
“파일 자체는 오래됐고, 안내 문구는 덧씌워졌습니다. 원본 트랙과 운영 문구가 겹쳐 있어요.”
서진은 하준이라는 이름을 쓰지 않았다.
“분리 가능한 구간만 들읍시다.”
도윤은 치료 대기 의자에 앉아 있었다. 오른쪽 귀에는 거즈가 붙어 있었다. 간호사가 청력 검사를 권했지만 그는 서류부터 보겠다고 했다. 은채가 파일명을 읽자 그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는 나가 있을게.”
“들어야 할 수도 있습니다.”
“못 들어.”
짧은 말이었다. 서진은 붙잡지 않았다. 대신 나간 시각을 적었다. 도윤이 숨기는 것이 있어도 지금 억지로 꺼낼 수는 없었다.
파일은 처음부터 말이 아니었다.
바람 소리 같은 잡음 뒤에 안내음이 들어왔다. 성안선 이용객 여러분께 안내 말씀드립니다. 화재 발생 시 승무원의 지시에 따라 이동하십시오. 그 문장은 현재 안내방송과 같았지만 음질이 낮았다.
은채가 파형을 멈췄다.
“여기 아래에 다른 트랙이 깔려 있어요.”
그는 잡음을 줄였다. 안내음은 얇아지고, 멀리서 아이가 숨을 고르는 소리가 남았다.
서진은 펜 뚜껑을 닫지 못했다.
아이 목소리는 또렷하지 않았다. 합성일 수도 있고, 다른 아이일 수도 있었다. 11년 전 파일이라는 사실만으로 하준이 되지는 않았다.
은채가 말했다.
“가족 영상 있으면 파형 비교는 가능합니다. 확정은 못 해요.”
“확정하지 마세요.”
서진의 말이 먼저 나왔다.
도경은 카메라를 들었다가 다시 내렸다. 그는 이번에는 찍지 않는 쪽을 선택했다. 대신 녹음 시간과 해시값만 메모했다.
“이건 보도 못 합니다.”
“왜요.”
“검증 전 공유 금지. 방금 제가 말한 겁니다.”
그는 불쾌한 얼굴로 자기 말을 적었다. 지키기 싫어서 더 크게 적는 사람처럼 보였다.
은채는 잡음 아래 구간을 조금 더 열었다.
“누나.”
한 단어가 나왔다.
서진은 화면을 보았다. 파형은 작고 끊겨 있었다. 아이가 가까이서 말한 것이 아니라, 방송 장비 옆 어딘가에서 들어간 소리처럼 보였다.
다음 문장은 더 짧았다.
“방송 듣고 있어?”
도경의 손이 자동으로 휴대전화 쪽으로 갔다. 화면은 꺼져 있었다. 배터리를 빼 둔 카메라는 책상 위에 따로 놓여 있었다. 그는 휴대전화 녹음 앱을 켜려다가 멈췄다.
“이건 제보가 아니라 가족 기록일 수도 있습니다.”
“가족 기록인지도 검증 전입니다.”
서진은 자기 목소리가 빨라진 것을 알고 말을 끊었다. 은채는 재생 막대를 뒤로 돌리지 않았다. 같은 문장을 반복해서 듣기 시작하면 확인이 아니라 기대가 섞일 수 있었다.
“한 번만 들은 것으로 기록합니다.”
은채가 말했다. 그는 청취 횟수 1회라고 로그에 남겼다. 도경은 휴대전화 녹음 앱을 닫았다. 공개 충동이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닫힌 앱 화면 위에 그의 엄지가 계속 남아 있었다.
도경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은채도 설명을 붙이지 않았다. 서진은 손바닥으로 책상 모서리를 눌렀다. 하준이 사라진 날에도 그는 전화를 끊기 전 누나라고 불렀다. 그 기억은 증거가 아니었다.
서진은 가족 영상 폴더를 열었다가 닫았다.
“비교는 사본으로 합니다. 원본은 잠급니다.”
은채가 고개를 끄덕였다.
“해시값 고정. 접근자 기록 남깁니다.”
도경은 그제야 물었다.
“이걸 기관에 넘기면 없어집니다.”
서진은 버전 0 저장장치를 작은 봉투에 넣었다. 봉투 입구에는 자기 이름을 쓰지 않았다. 접근자 세 명의 이름을 나란히 썼다. 윤서진, 박은채, 이도경. 도윤의 이름은 듣지 않기로 한 사람의 선택이라 비워 두었다.
비워 둔 이유도 적었다.
청취 거부.
그때 미란에게서 메시지가 왔다.
파일 확보 여부 보고. 백로학원 야간 민원으로 즉시 전출.
이어 사진 한 장이 도착했다. 오래된 출석부를 찍은 사진이었다. 수정액이 여러 겹 발라져 있고, 맨 왼쪽 이름 칸에는 성만 남은 글자가 보였다.
윤.
서진은 확대하지 않았다. 확대하면 글자가 더 선명해질 것 같았지만, 선명해지는 것이 사실이 되지는 않았다.
도경이 화면을 옆에서 봤다.
“이건 공개하면 제보가 들어옵니다.”
“공개하면 재현도 들어옵니다.”
“그럼 아무것도 못 합니다.”
서진은 봉투 입구를 테이프로 붙였다.
“먼저 현장에 갑니다.”
도경은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자기 영상 제목을 지웠다. 파일명은 남겼다.
성안선_버전0_검증전_비공개.
그는 휴대전화를 주머니에 넣으며 말했다.
“비공개가 은폐가 아닌지, 현장에서 확인하겠습니다.”
백로학원 주소는 성안역에서 멀지 않았다. 택시 호출 앱에는 심야 할증과 교통 통제 우회가 동시에 떴다. 노선 중단 때문에 대기 시간이 길어졌다.
고정애는 창구에서 돌아와 서진에게 종이 한 장을 내밀었다.
“이거, 내가 내렸다는 거 맞죠.”
임시 기록에는 탑승 1명, 하차 1명이라고 정정되어 있었다. 서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영상은 어떻게 할까요.”
도경이 물었다. 이번에는 서진이 아니라 고정애에게 물었다. 질문을 던지는 말투는 여전히 날이 서 있었지만, 렌즈는 내려가 있었다.
고정애는 손수건을 접다 말고 도경의 휴대전화를 보았다.
“내 얼굴은 싫어요.”
“얼굴은 가렸습니다.”
“이름도 싫어요. 내가 뭘 잘못해서 나온 것처럼 보이면 싫어요.”
도경은 바로 답하지 못했다. 그는 제목 입력창을 지웠다. 여덟 번째 사람이라는 말도 지웠다. 대신 임시 파일명만 남겼다.
성안선_하차기록_동의전.
고정애는 그 파일명을 읽는 데 시간이 걸렸다. 동의전이라는 단어에서 멈췄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나중에 내가 봐도 되죠.”
“먼저 보여 드리겠습니다.”
도경은 말하고 나서 자기 메모장에 적었다. 당사자 선열람. 그는 그 절차가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처럼 굵게 눌러 썼지만, 지우지는 않았다.
은채가 파일 검증 결과를 다시 보냈다. 버전 0 사본의 해시값, 접근자 세 명, 청취 구간 14초. 그 아래에는 재생 금지 구간이 있었다. 도윤이 나간 뒤에도 은채는 그 구간을 열지 않았다.
“도윤 씨가 왜 피했는지 물어볼까요.”
도경이 말했다.
서진은 택시 호출 화면을 보며 답했다.
“지금은 청취 거부만 기록합니다.”
“거부도 정보입니다.”
“정보라고 해서 전부 바로 공개할 수는 없습니다.”
도경은 웃지 않았다. 이번에는 반박 대신 자기 카메라 배터리를 뺐다. 물리적으로 꺼진 카메라는 말보다 확실했다.
은채는 배터리가 빠진 카메라와 휴대전화 녹음 앱 종료 화면을 각각 사진으로 남겼다.
“나중에 안 찍었다고 주장하려면 근거가 있어야 하니까요.”
도경은 “기자를 피의자 취급하네요”라고 했지만, 사진 삭제를 요구하지 않았다. 대신 자기 수첩에 같은 시각을 적었다. 비공개 상태도 기록으로 남았다.
고정애는 손수건을 접어 가방에 넣었다.
“그럼 난 집에 가도 돼요?”
그 질문이 이번 사건의 끝이었다. 서진은 보고서에 적었다. 고정애 귀가 의사 확인. 추가 촬영 거부.
도경은 카메라를 들지 않았다.
역무원은 고정애에게 대체 교통비 신청서를 내밀었다. 신청서에는 교통카드 번호 칸이 필수로 되어 있었다. 고정애는 빈칸 앞에서 멈췄다.
“현금이라 없어요.”
직원은 “그럼 처리 어렵습니다”라고 했다.
서진은 신청서 아래에 현금 승차권 번호 칸을 그었다. 고정애가 표 뒷면의 작은 숫자를 읽었다. 두 번 틀리고 세 번째에 맞았다. 직원은 처음에는 태블릿에 넣을 곳이 없다고 했지만, 종이 스캔 첨부 메뉴를 찾자 칸이 생겼다.
칸이 생기자 처리 어렵다는 말도 사라졌다. 직원은 같은 사람인데, 화면이 바뀌자 말이 짧아졌다. “접수됐습니다.” 고정애는 접수됐다는 말을 듣고도 바로 가지 않았다. 접수번호가 찍힌 종이를 받을 때까지 창구 앞에 서 있었다.
고정애는 그제야 표를 다시 손수건 안에 넣었다.
“모르는 건 모른다고 쓰면 된다면서요. 없는 건 없다고 써도 되네요.”
서진은 그 말을 보고서에 옮기지 않았다. 대신 신청서 사본을 찍었다. 행동이 이미 남아 있었다.
도경은 그 신청서도 찍었다가, 고정애에게 화면을 돌려 보여 주었다. 고정애는 자기 이름과 표 번호가 보이는 부분을 손가락으로 가렸다.
“이건 빼요.”
도경은 자르기 도구를 열었다. 그는 불만을 말하지 않았지만, 잘라낸 영역을 따로 복원할 수 없게 새 파일로 저장했다. 원본은 비공개 보관함에 넣었다.
서진은 그 순서를 보고서에 적었다. 당사자 확인 후 공개본 분리.
서진이 택시에 오르기 전, 역사 안내판이 다시 켜졌다. 운행중지 안내 아래 캠페인 문구가 반복됐다.
20년 무사고 도시 성안.
그 문구 바로 아래에 작은 줄이 하나 더 있었다.
미접수 민원은 통계에 반영되지 않습니다.
서진은 그 줄을 사진으로 남겼다. 설명은 붙이지 않았다.
택시 안에서 미란의 전화가 왔다.
“윤서진 씨, 백로학원에서는 개인 단서보다 학생 안전을 먼저 보세요.”
“파일의 윤 자와 관련 있습니까.”
미란은 바로 답하지 않았다.
“현장 출석부를 먼저 확인하세요.”
통화가 끊겼다.
서진은 휴대전화 화면을 껐다. 봉투 안의 버전 0 저장장치는 무릎 위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백로학원 사진 속 오래된 윤 자는 아직 이름이 아니었다.
그런데도 서진은 택시 영수증 뒷면에 한 줄을 적었다.
하준으로 쓰지 말 것.
그 아래에 다시 적었다.
윤 자 확인 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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