준서는 라면 두 개를 끓이면서 시간표를 꺼냈다
포기한 선택을 다시 여는 장학생 · 2026. 9.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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준서는 라면 두 개를 끓이면서 시간표를 꺼냈다.
그가 후배를 취사실로 부르는 방식은 삼 년 동안 같았다. 벌점 얘기는 복도에서, 시간표 얘기는 취사실에서, 그리고 기록 얘기는 아무 데서도 하지 않았다.
오늘은 세 번째를 하려고 앉았다. 앉기 전에 물을 두 번 끓였다. 두 번째는 필요 없었다.
“일단 먹어.” 준서가 그릇을 밀었다.
도윤은 앉았다. 생활관 삼 층 취사실이었고, 밤 열한 시였다. 이 시간에 준서가 취사실에 있으면 대개 누군가에게 할 말이 있다는 뜻이었다.
“지하 얘기 들었어.” 준서가 젓가락을 놓았다. “백지훈 건.”
“예.”
“그거 잘했어. 근데 다음엔 못 해.” 그는 젓가락으로 시간표를 짚었다.
“왜요?”
“어제부터 생활관 지하 통행 기록을 자치회가 관리해.” 준서가 시간표를 폈다. “관리한다는 건 기록이 남는다는 뜻이고, 남는 기록은 학사과가 봐.”
“어제부터요?”
“어제부터.”
도윤이 셌다. 7조가 지하에 들어간 게 이틀 전이었다.
“저희 때문이에요?”
“너희 때문일 수도 있고, 너희가 본 것 때문일 수도 있어.” 준서가 말했다. “나는 통보만 받았어. 사유는 안 적혀 있었어.”
준서는 그 문장에서 자기가 통보만 받는 자리에 삼 년 있었다는 것도 같이 말한 셈이었다.
도윤은 시간표를 봤다. 지하 통행 가능 시간이 표시돼 있었다. 정비 시간 두 칸.
“이거 왜 주십니까.” 도윤이 시간표에서 손을 뗐다.
“일단 먹으면서 들어.”
준서는 그 말을 하고 나서 자기 젓가락으로 도윤의 그릇에 김치를 옮겼다.
도윤은 그 동작을 봤다. 이 사람이 뭘 줄 때는 두 가지 경우였다. 진짜 배고파 보일 때, 그리고 뭔가 말하지 않을 때.
“선배.”
“응.”
“지금 뭐 안 말하고 계시죠.” 도윤이 김치를 밀어 놓았다.
준서의 손이 멈췄다. 그리고 웃었다.
“너 그거 어디서 배웠어.”
“조원한테요.”
테이블 위에 준서의 열쇠 꾸러미가 있었다. 생활관 마스터, 취사실, 창고, 그리고 하나 더.
마지막 열쇠는 붉었다. 도금이 아니라 밀랍 같은 붉은 코팅이었고, 다른 열쇠들보다 짧았다.
도윤이 그걸 보는 순간 준서가 꾸러미를 뒤집었다. 붉은 열쇠가 아래로 갔다.
빠른 동작이었다. 숨기려는 동작이었고, 숨기려는 걸 도윤이 봤다는 걸 준서도 알았다.
둘 다 삼 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도윤은 그 삼 초 동안 계산했다.
열쇠를 달라고 하면 준서는 거절한다. 거절하면 이 사람은 다음에 아무것도 안 준다. 훔치면 열쇠는 얻고 사람은 잃는다. 추궁하면 이 사람은 자치회 실무자로서 대답할 것이고, 자치회 실무자의 대답은 규정 문구다.
그리고 네 번째가 있었다.
“선배, 다른 거 부탁드릴게요.”
준서의 어깨가 조금 내려갔다.
“말해.” 준서가 꾸러미에서 손을 뗐다.
“식권 기록이요.”
“식권?” 준서의 목소리가 반 톤 올라갔다.
“3층 뒤편 교실 열세 번째 자리요. 거기 앉는 사람이 밥을 먹었으면 식권 기록이 남을 거예요.”
준서가 젓가락을 내려놓았다.
“학적 번호 없이 식권이 나가는 경우 있어요?”
“…있어.” 준서가 말했다. “임시 발급이 있어. 편입 대기, 교환 학생, 그리고 행정 오류.”
“그 기록 볼 수 있어요?” 도윤은 종이를 준비해 왔다.
“공식으로는 못 봐. 개인정보야.”
“비공식으로는요.”
준서는 그 질문에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라면 국물을 한 번 마셨다. 식은 국물이었다.
“한도윤.”
“예.”
“너 왜 열쇠 얘기 안 해.” 준서가 국물 그릇을 밀어 놓았다.
도윤은 정직하게 말했다.
“달라고 하면 안 주실 거고, 훔치면 선배가 다음에 후배들한테 아무것도 안 줄 거예요.”
“그거 계산이야?”
“계산이에요.” 도윤은 인정했다. “근데 그것만은 아니에요. 선배가 그 열쇠 뒤집을 때 되게 빨랐어요. 오래 그 동작 하신 것 같았어요.”
준서는 그 문장에서 웃지 않았다.
그는 일어나서 창고 쪽으로 갔다. 오 분 뒤에 종이 몇 장을 들고 왔다. 복사기 열기가 남아 있는 종이였다.
오 분은 복사에 필요한 시간보다 길었다. 도윤은 그 사이에 이 사람이 무엇을 뺐을지 생각했고, 생각한 걸 물어보지 않기로 했다.
지금 다 받으면 이 사람은 다음에 줄 게 없어진다.
“이거 규정 밖 복사본이야. 원본 아니고, 열람 기록도 안 남아.” 준서가 놓았다. “내가 준 거 아니야. 여기 놓여 있었던 거야.”
“선배.”
“나준서로 말할게.”
도윤은 그 문장을 알아들었다. 이 사람이 선배 권위를 내려놓는 신호였다.
“나 삼 학년이고 졸업 추천 대기야. 자치회 실무 삼 년 했어.” 준서는 종이를 손끝으로 눌렀다. “그동안 학적 오류로 처리된 건이 열한 건이야. 열한 건 다 내가 서식 정리했어.”
“그게 무슨 뜻이에요?”
“오류라고 적으면 사람이 없어져. 오류는 확인 절차가 없어.” 준서는 그 문장을 오래 준비한 사람처럼 말했다.
무게를 계산하려 했지만 계산이 안 됐다.
“열한 명이요?”
“열한 건이야. 사람인지 진짜 오류인지 나도 몰라.” 준서가 말했다. “근데 두 번은 얼굴을 봤어.”
“왜 안 알리셨어요.”
“알리면 자치회 실무자 자리 없어지고, 없어지면 다음 사람이 앉아. 그 사람은 이 열한 건을 몰라.” 준서는 그 논리를 자기가 싫어하는 얼굴로 말했다. “그렇게 삼 년 했어. 지금 그게 변명이라는 것도 알아.”
“두 번 본 얼굴은요.” 도윤이 물었다.
“한 명은 이 학년이었어. 축구 하던 애야. 발목 부상으로 실습 못 나가게 됐고, 그다음 학기에 오류로 처리됐어.”
“다른 한 명은요.”
준서가 잠깐 멈췄다.
“여자애였어. 키 컸고, 도서관에서 자주 봤어.” 그가 말했다. “이름을 기억해야 하는데, 서식에서 이름 칸을 내가 지웠어. 지운 사람은 안 외워져.”
그 말은 노트에 적지 않았다. 지금 적으면 이 사람 앞에서 증거를 만드는 게 된다. 나중에 적기로 했다.
도윤은 그 종이를 받았다. 받으면서 하나 더 물었다.
“그 열쇠, 뭐예요?”
“안 말할게.” 준서가 꾸러미를 주머니에 넣었다.
“왜요.”
“말하면 네가 갈 거야.” 준서가 말했다. “그리고 나는 네가 가는 걸 막을 이유를 아직 못 만들었어.”
도윤은 더 묻지 않았다. 묻지 않은 걸 기록해 두기로 했다.
복사본은 여섯 장이었다.
임시 식권 발급 내역. 최근 삼십 일. 학적 번호 없는 발급 건이 넷 있었다.
넷 중 셋은 편입 대기였고, 편입 대기자 이름이 적혀 있었다. 셋 다 발급 후 이틀 안에 정식 학적이 붙었다.
네 번째에는 이름 칸이 비어 있었다.
발급 사유 칸에는 두 글자가 있었다. 오류.
사용 기록이 붙어 있었다. 어제 저녁 열여덟 시 사십 분, 학생식당 2층. 어제였다.
도윤은 그 줄을 세 번 읽었다.
오류로 발급된 식권이 어제 사용됐다. 오류는 밥을 먹지 않는다.
사용 시각 옆에 결제 항목이 있었다. 백반, 한 개. 국 추가 없음.
그 세 글자가 도윤에게는 이름보다 강했다. 국 추가 없음은 사람이 고른 것이다.
식권 하단에 표시가 하나 있었다. 인쇄된 게 아니라 찍힌 것이었고, 붉은 밀랍이었다.
도윤은 그 붉은색을 방금 봤다. 오 분 전, 준서가 뒤집은 열쇠에서.
같은 색인지 확인하려면 열쇠를 다시 봐야 했다. 보여 달라고 하면 준서는 지금 보여 줄 것이다. 그러면 이 사람은 오늘 안 말하기로 한 것을 말하게 된다.
도윤은 대신 식권 하단을 사진으로 찍었다. 색 비교는 나중에 미래가 할 것이다.
그는 준서를 봤다. 준서는 이미 그 표시를 보고 있었다.
“…이거 몰랐어요?”
“몰랐어.” 준서가 말했다. 목소리가 낮았다. “복사할 때 하단은 안 봤어.”
“선배.”
“나도 지금 봤어. 진짜야.”
가람이라면 이 목소리에 엇박이 있는지 알 수 있었을 것이다. 도윤은 그걸 알 수 없었고, 알 수 없다는 걸 인정했다.
미래에게 사진을 보낸 건 십오 분 뒤였다. 답이 이 분 만에 왔다.
밀랍 붉은색은 학원 공식 인장 색이 아니에요. 공식은 주홍이에요. 이건 더 어두워요.
그다음 줄이 있었다.
그리고 부속서 세 번째 인장 색이랑 비슷해요. 확인은 원본으로 해야 해요.
도윤은 그 문장에서 부속서라는 단어를 처음 들었다. 미래가 어제 말하지 않은 것이었다.
말하지 않은 게 하나씩 나오는 게 이 조의 방식이 되어 가고 있었다. 조항 네 개로는 그게 안 막혔다.
“이거 조 장부에 올릴게요. 선배 이름은 안 적어요.”
“적어.”
“예?”
“내 이름 적어.” 준서가 말했다. “안 적으면 다음에 나한테 또 부탁할 거야. 적어 놓으면 내가 이걸 준 사람이 되고, 그러면 나도 못 물러나.”
도윤은 그 요청을 받았다. 받는 게 이 사람에게 유리한 일이 아니라는 것도 알았다.
“선배 추천서요.”
“그건 내가 계산할 일이야.” 준서는 그릇을 씻으러 일어섰다.
취사실을 나올 때 준서가 뒤에서 말했다.
“한도윤.”
“예.”
“그 열쇠 어디에 쓰는지는 안 말했지만, 하나는 말할게.” 준서가 꾸러미를 손에 쥐었다. “그거 내가 받은 게 아니야. 삼 년 전에 내 앞 실무자가 두고 갔어.”
도윤은 그 문장을 밖에서 두 번 되뇌었다. 두고 갔다는 건 넘겨준 게 아니라는 뜻이었다.
넘겨줬으면 인수 기록이 있다. 두고 간 건 기록이 없다. 준서는 삼 년 동안 기록 없는 열쇠를 들고 서식을 정리했다.
생활관 계단에서 도윤은 노트를 꺼냈다. 아까 적지 않은 것들을 지금 적었다.
열한 건. 두 번은 얼굴을 봤음. 한 명 이 학년 축구, 한 명 키 큰 여학생, 도서관.
그리고 마지막 줄.
준서 선배는 자기 이름을 적으라고 했다. 이유는 자기가 물러나지 못하게 하려고.
도윤은 그 줄을 쓰고 나서 자기가 첫날에 태호에게 한 요구를 떠올렸다. 두 장 다 적어 주십시오.
같은 종류였다. 그때 도윤은 그게 자기를 지키는 요구라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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