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청서의 뒷면
포기한 선택을 다시 여는 장학생 · 2026. 3. 4.
미래는 협동 심사 신청서를 받자마자 뒷면부터 읽었다.
뒷면에는 공동 책임 조항이 있었다. 조원 중 한 명이 능력 사용으로 손해를 내면 전원의 실습 자격이 함께 동결된다. 앞면에는 그 문장이 없었다. 앞면에는 조원 넷의 이름 칸과 마감 시각만 있었다.
마감은 열두 시 반. 지금 열두 시 십팔 분.
“박미래 학생.”
한도윤이 다가왔다. 미래는 그가 오는 걸 삼 분 전부터 봤고, 오는 동안 그의 왼손을 봤다. 반쯤 채워진 봉인 잠금쇠. 학생 게시판에 조건부 도장 얘기가 돌고 있었다.
“같이 하자. 너 계산 잘하고, 나는-” 그가 말을 시작했다.
“조항 하나 물어볼게요.” 미래가 신청서 뒷면을 그의 앞에 놓았다. “여기 공동 동결 조항. 읽었어요?”
“읽었어.”
“그럼 학생 위반 기록이 몇 건인지도 말해 주세요.”
도윤의 대답이 반 박자 늦었다. 미래는 그 반 박자를 기록했다.
“한 건이야. 입학 실기.” 그가 말했다.
“두 건입니다.” 미래는 종이 한 장을 더 꺼냈다. 공개 열람용 기록 사본이었고, 형광펜이 두 군데 그어져 있었다. “위반 한 건, 대상 학생 위험 판단 저하 및 기권 한 건. 아래쪽은 원인 항목에 재개방 사용이 병기돼 있어요.”
“그건 위반이 아니라 결과 기록이야.”
“그게 더 나빠요.” 미래는 형광펜 자리를 손톱으로 눌렀다. “위반은 벌점으로 끝나요. 결과는 사람한테 남아요. 그리고 학생은 저한테 한 건이라고 말했어요.”
“…빼먹었어.”
“빼먹은 건가요, 안 세기로 한 건가요?”
도윤은 그 질문에 답하지 않았다. 답하지 않는 게 답이었다.
“고지 의무 위반이에요.” 미래는 신청서를 접었다. “난 학생과 안 해요.”
주변에서 몇 명이 돌아봤다. 미래는 목소리를 낮추지 않았다. 낮추면 나중에 사적인 감정 때문이었다고 말이 돌아온다.
“내가 비용 감당할게. 네가 조항 쓰면 그대로 서명하고-”
“학생이 감당한다는 말은 증빙이 없어요.” 미래는 허공에 짧게 괄호를 그렸다. 긴장하면 나오는 습관이었고, 지금 자기가 긴장했다는 사실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리고 학생이 감당해도 동결은 저한테 옵니다.”
미래의 계산으로 이번 학기 장학 잔액은 사십일만 원이었다. 실습 자격이 동결되면 다음 학기 계약금 상환일을 못 지킨다. 상환일을 못 지키면 집으로 통지가 간다. 그 통지가 오면 아버지는 또 자기가 대신 서명하겠다고 할 것이다.
열여덟 살 때 아버지가 대신 서명한 계약서에는 진로 조항이 있었다. 미래가 졸업 후 삼 년간 지정 기관에 근무한다는 조항이었다. 그때 미래는 그 종이를 읽지 않았다. 지금은 모든 종이의 뒷면부터 읽는다.
그러니까 미래가 조항을 쓰는 이유는 성격이 아니었다. 읽지 않아서 잃어 본 사람의 습관이었고, 이건 도윤이 나쁜 사람이냐의 문제도 아니었다. 미래는 그 구분을 정확히 유지했다.
유서린이 옆 테이블에서 신청서를 보고 있었다. 이름 칸 하나만 채워진 상태였다.
“유서린 학생은 왜 아직 비워 뒀어요?”
“조원 셋이 필요한데 둘이 부족해서.” 서린은 고개를 들지 않았다. “효율로 채우면 나중에 못 멈춰.”
“무슨 뜻이에요?” 미래가 되물었다.
“강한 사람 셋을 넣으면 위기 때 각자 자기 판단으로 움직여.” 서린이 펜을 놓았다. “나는 내가 틀렸을 때 나를 멈출 사람이 필요해.”
미래는 그 문장을 계약 용어로 옮겼다. 상호 중단 권한. 조항으로 쓸 수 있는 말이었다. 감정으로 하는 약속은 위기 때 증발하지만, 불이익이 붙은 조항은 증발하지 않는다.
그리고 미래는 자기 계산의 빈칸을 봤다. 그녀가 지금까지 도윤을 거절한 근거는 전부 옳았다. 옳은데도 조원 셋을 못 채우면 미래도 심사에 못 들어간다. 옳은 것과 되는 것이 다른 상황을, 미래는 계약서로 여러 번 봤다.
“유서린 학생, 그거 조항으로 만들면 서명해요?”
“조항 문구를 네가 쓰면.”
그때 이가람이 벽 쪽에서 일어났다. 귀를 반쯤 막고 있다가 손을 내린 상태였다. 미래는 그 애를 강당에서 본 기억이 있었다. 사람 많은 데서 귀를 막고, 그러면서도 누군가의 괜찮다는 말이 틀렸다고 조용히 말했던 애.
“잠깐.”
세 사람이 그쪽을 봤다.
“지금, 네 명 다 같은 데서 엇박이었어.” 가람은 문장 끝의 동사를 삼켰다. “미래는 위험하다고 말하면서 서명하고 싶어 하고. 서린은 필요하다고 말하면서 아직 아무도 안 골랐고. 도윤은 감당한다고 말하면서 목소리가 위로 올라갔고.”
“나는요?” 미래가 물었다.
“…나도.” 가람이 손바닥을 책상에 붙였다. “나는 셋 중에 누가 나를 데려가 주면 좋겠다고 생각하고 있었어. 그게 제일 웅웅거렸어. 그래서 그건 내가 먼저 말할게. 나 들어가고 싶어.”
미래는 그 순서에 놀랐다. 남의 거짓말을 지적한 애가 자기 것을 마지막에 붙였다. 붙이지 않아도 됐는데 붙였다.
“가람 학생 감각은 증거가 됩니까?”
“안 돼. 나는 틀려.” 가람이 말했다. “근데 틀릴 수 있다고 말한 다음에 말하면, 확인은 할 수 있잖아.”
“조건이 붙으면 할 수 있어요.” 미래가 말했다. “호의로는 안 하고, 조항으로는 해요.”
“그 차이가 뭔데.” 도윤이 물었다.
“호의는 학생이 언제든 회수할 수 있고, 조항은 제가 회수할 수 있어요.”
미래는 메모지를 뒤집어 조항을 쓰기 시작했다.
“쓸게요. 하나. 조원은 각자 즉시 거부권을 한 번 갖는다. 누가 ‘멈춰’라고 하면 능력 사용을 그 자리에서 중단한다.”
“무시하면?” 서린이 물었다.
“무시하면 그 사람 성적과 실습 자격이 동결돼요. 학교 규정에 이미 있어요.” 미래는 두 번째 줄을 썼다. “둘. 사용 전 비용을 말로 고지한다. 대상, 시간, 상대가 잃을 것. 세 개 다.”
“고지하면 써도 된다는 뜻으로 읽히는데.” 서린이 지적했다.
“읽히면 안 돼요. 그럼 단어를 바꿀게요.” 미래가 줄을 그었다. “고지하지 않은 사용은 위반으로 본다. 고지한 사용도 거부권 대상이다.”
서린이 짧게 끄덕였다. 미래는 그 끄덕임이 동의인지 검수 통과인지 구분하지 않기로 했다. 둘 다 서명으로 이어지면 같은 값이다.
“세 번째는 내가 붙일게.” 가람이 말했다. “거부권 쓴 사람한테 이유를 안 물어봐도 돼. 이유 말하기 싫을 때도 멈출 수 있어야 하니까.”
그 문장은 그대로 옮겨 적었다. 자기 말로 다듬지 않았다. 다듬으면 원문이 사라지고, 원문이 사라지면 가람이 다음에 말을 안 할 것이다.
도윤이 그 종이를 봤다. 오래 봤다.
“이거 다 나 막는 조항인데.”
“맞아요.”
“…내가 이걸 왜 서명해?”
“학생이 안 하면 우리가 안 해요.” 미래가 펜을 내밀었다. “선택은 학생 거예요. 근데 조건은 우리 거예요.”
“내가 이걸 서명하면, 다음에 사람이 떨어지고 있는데 누가 멈추라고 하면 어떻게 되는데.”
미래는 그 질문이 진짜 질문이라는 걸 알았다. 답을 알면서 확인하려는 게 아니라, 정말 모르는 사람의 질문이었다.
“멈춰야 해요.”
“사람이 죽어도?”
“그때 어떻게 할지는 조항이 정하지 않아요.” 미래는 정확하게 말했다. “학생이 정해요. 그리고 정한 값을 내요. 조항은 값이 얼마인지만 미리 알려 주는 거예요.”
도윤은 그 대답을 한참 봤다. 어제까지 그는 값을 모르고 냈다.
미래는 도윤이 계산할 시간을 줬다. 사실 그가 어떤 계산을 할지는 이미 알고 있었다. 조건부 도장이 찍힌 학생이 협동 심사에 못 들어가면 다음 평가에서 회복할 기회가 없다. 그는 서명할 것이다. 필요해서 서명하는 것과 동의해서 서명하는 것은 다르지만, 종이는 구분하지 않는다.
그래서 미래는 한 줄을 더 썼다.
“넷. 조항에 동의한 이유를 각자 한 문장으로 적는다.”
“그건 왜요?” 가람이 물었다.
“나중에 누가 이걸 어길 때, 그때 뭐라고 썼는지 보면 되니까요.”
도윤이 먼저 썼다. 미래는 그 문장을 읽었다. 내가 어제 사람을 하나 흐리게 만들었고, 다음에 또 그럴 것 같아서.
서린은 짧게 썼다. 내 결정도 틀릴 수 있어서.
가람은 손바닥을 책상에 붙인 채 썼다. 내가 들어가고 싶어서.
미래는 마지막에 자기 칸을 채웠다. 손이 잠깐 멈췄다. 정확한 문장은 하나였고, 그 문장은 계약 용어가 아니었다. 계약 용어로 바꿔 쓸 수도 있었다. 학기 상환 일정의 리스크 회피. 그렇게 쓰면 아무도 안 물어본다.
동결되면 집에 통지가 가서.
쓰고 나서 미래는 그 종이를 뒤집지 않았다. 뒤집으면 숨기는 게 된다.
가람이 종이를 받아 넷의 문장을 차례로 읽었다. 읽는 동안 아무 소리도 내지 않았고, 다 읽고 나서 한 번만 말했다.
“이건 엇박 없어.”
“전부 다?” 미래가 물었다.
“전부 다.” 가람은 자기 손바닥을 다시 책상에 붙였다. “근데 엇박이 없는 건 지금 진심이라는 뜻이야. 내일도 그렇다는 뜻은 아니야.”
각주 한 줄이 조항 맨 아래에 붙었다. 감각 증언은 시점 한정. 그렇게 쓰면 나중에 가람이 틀렸다고 몰릴 일이 없다.
마감 종이 울렸다. 열두 시 삼십 분.
접수대의 직원이 신청서를 확인하고 도장을 찍었다. 분기 7조. 조원 넷.
그리고 봉투 하나를 건넸다. 첫 과제 배정서였다.
미래가 먼저 열었다. 세 줄이었다.
과제 조건: 전 조원 능력 사용 금지. 위반 시 조 전체 자격 즉시 동결. 과제 내용은 현장에서 고지.
장소 칸에는 건물 이름 대신 좌표 하나가 적혀 있었다. 지도에서 찾아보니 강의동 뒤편, 배정 기록이 없는 빈 교실이었다.
네 사람이 그 종이를 동시에 봤다.
“능력 금지면 거부권은 쓸 데가 없네.” 도윤이 말했다.
“그렇게 읽으면 학생은 또 한 건 만들 거예요.” 미래는 종이를 접어 안주머니에 넣었다. “쓸 데가 없는 게 아니라, 이번엔 뭘 멈춰야 하는지 우리도 아직 모르는 거예요.”
가람이 귀를 한 번 만졌다. 아무 소리도 나지 않는 복도에서, 뭔가를 들으려는 사람의 손짓이었다.
“왜요.” 미래가 물었다.
“아직 몰라. 확인하고 말할게.” 가람은 손을 내렸다. “확인 안 하고 말하면 그거 증거처럼 되니까.”
미래는 그 대답을 조항의 언어로 이해했다. 확인 전 진술은 증빙이 아니다. 계약서 밖에서 그 문장을 지키는 사람을 만난 건 처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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