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화

최종 역검증은 회색실 안쪽의 작은 방에서 시작됐다

증거분석관은 빠진 말을 듣는다 · 2026. 9.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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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 역검증은 회색실 안쪽의 작은 방에서 시작됐다. 여름은 벽면에 붙은 사건표를 전부 떼어 테이블 위에 펼쳤다. 백상호의 이름도, 장 모의 이름도, 한경민의 이름도 한쪽으로 밀어 두었다. 가운데에는 행동과 시각만 남겼다.

오전 아홉 시, 외부 검토자가 도착했다. 그는 회색실의 결론을 믿지 않는 사람처럼 자료를 읽었고, 실제로 믿지 않았다.

“백상호가 아니어도 설명되는 고리가 몇 개 있습니다.”

그는 비상키 공유, 공용 케이스, 대리 결제 세 가지를 적었다. 공유 키라면 다른 작업자도 계단에 접근할 수 있었다. 공용 케이스라면 형광 도료가 누구의 손에서 묻었는지 모호했다. 대리 결제라면 백상호 명의 계정이 다른 사람의 행동을 가릴 수 있었다.

민우가 불쾌한 표정을 지었지만, 여름은 검토자의 종이를 그대로 복사했다.

“이 세 가지를 가장 강한 대안으로 세우고, 하나씩 어디까지 버티는지 봅시다.”

서진은 능력 출력이 적힌 메모를 자료함에서 꺼내지 않았다. 그 메모를 제외하면 사슬이 약해질 수 있었지만, 역검증의 첫 조건은 능력 없이도 같은 질문을 통과하는 것이었다. 그녀는 회색표의 해당 칸을 통째로 삭제했다.

첫 번째 대안은 비상키 공유였다. 시설업체의 출입대장에는 여러 사람이 같은 키를 사용할 수 있다고 적혀 있었다. 그러나 사건 전날 시험 횟수가 늘어난 시각은 백상호의 단독 작업 시간과 겹쳤고, 다른 사람의 출입은 없었다. 경민의 관리 소홀 가능성은 여전히 남았지만, 경민은 그 시간에 외부 회의 중이었다는 통화 기록을 제출했다. 그 기록이 거짓일 가능성까지 없애지는 못했지만, 비상키 하나만으로 백상호의 행동을 다른 사람에게 옮길 수는 없었다.

두 번째 대안은 공용 케이스였다. 케이스는 회사 장비라 여러 사람이 만졌고, 바퀴에 묻은 파란 가루도 여러 장소에서 생길 수 있었다. 분석실은 새 도료와 오래된 계단 분말의 접착 순서를 재확인했다. 새 도료가 먼저 눌리고, 그 위에 계단 분말과 피해자 혈흔이 차례로 붙었다는 결과는 그대로였다. 공용이라는 사실은 소유를 흐렸지만, 시험 뒤 실제 이동이 있었다는 층서까지 지우지는 못했다.

세 번째 대안은 대리 결제였다. 백상호 계정의 비밀번호가 여러 사람에게 공유됐을 수 있고, 파란 삼각형 영수증의 고객번호도 편집 서비스에서 공통으로 쓰였을 가능성이 있었다. 그래서 검토자는 결제만으로는 소유를 특정하지 말라고 했다. 민우는 결제 자료를 혐의의 중심에서 내려 외곽 고리로 옮겼다.

“이렇게 하면 백상호 특정이 약해지는 것 아닙니까?”

“과장한 고리를 빼면 약해 보일 뿐입니다. 남은 고리가 독립적이면 오히려 견고해집니다.”

검토자는 사건 전날 비상키 시험 로그, 백상호의 개인 결제 토큰, 원격 초기화 실패, 케이스의 혈흔 층서, USB 접근 시각을 따로 세었다. 그중 어떤 것도 혼자서는 살인을 설명하지 못했다. 그러나 세 가지 대안은 각자 다른 고리를 하나씩 설명하지 못했다.

오전 열한 시, 백상호는 대면 조사를 자청했다. 그는 불법 재하청과 영상 편집은 인정했지만, 한재희의 죽음은 사고였다고 주장했다.

“그 여자가 케이스를 밀고 계단으로 내려갔습니다. 한경민과 부딪혔을 수도 있죠.”

민우는 그 말을 듣고도 목소리를 높이지 않았다. 그는 먼저 백상호의 설명을 그대로 적었다. 자해 또는 충돌, 두 가지 대안이었다. 그 뒤 물리 자료를 한 장씩 꺼냈다.

첫 번째는 새 도료가 눌린 층서였다. 백상호는 다른 케이스에서 묻었을 수 있다고 했다. 민우는 사건 현장의 바퀴 간격과 같은 케이스의 시험 사진을 나란히 놓았다. 두 번째는 비상키 시험이었다. 백상호는 정기 점검이라고 했지만, 정식 작업표와 일치하지 않았다. 세 번째는 개인 결제와 원격 초기화 실패였다. 백상호는 계정 공유를 반복했다.

“공유 계정이면, 왜 본인 명의의 계정에서 그 보관함의 초기화를 시도했습니까?”

“누군가 제 계정을 썼겠죠.”

“그럼 그 누군가가 보관함 번호를 어떻게 알았습니까?”

백상호는 대답 대신 물을 마셨다. 민우는 다음 자료로 넘어갔다. USB의 외부 해시와 마지막 접근 시각이었다. 백상호 장비 식별자는 복제될 수 있지만, 접근 시각은 사건 전후의 다른 기록과 겹쳤다. 그는 여전히 장비를 빌려줬다고 주장했다.

“빌려준 상대가 누구입니까?”

“모릅니다.”

“그럼 왜 보관함을 초기화하려고 했습니까?”

“USB가 거기에 있다는 걸 몰랐습니다.”

백상호의 설명은 각각 가능했지만, 세 가지를 동시에 만족하지 못했다. 그는 장비를 빌려줬다고 하면서 보관함을 몰랐다고 했고, 보관함을 몰랐다면서 원격 초기화를 시도했다. 자백은 아니었지만, 대안 시간선은 계속 끊어졌다.

서진은 유리창 너머에서 그 장면을 보며 수첩을 펼쳤다. 능력을 쓰면 백상호의 말 중 무엇이 거짓인지 즉시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나 즉시 아는 것과 입증하는 것은 다르다. 그녀는 수첩에 ‘능력 사용 안 함’을 적고, 그 옆에 독립 자료의 번호를 적었다.

오후 두 시 반, 다빈과 경민을 위한 사전 설명이 열렸다. 송치 전에 공개할 사실과 공개하지 않을 사실을 나누는 자리였다. 다빈은 제보자의 원문이 정말 봉인되는지 먼저 물었다. 경민은 자신의 재하청 위반과 과거 오판 정정이 송치자료에 포함되는지 물었다.

서진은 두 질문에 같은 답을 하지 않았다. 다빈에게는 공개 제한표와 재검토 절차를, 경민에게는 정정문과 책임표를 따로 보여 주었다. 범인을 잡았다는 사실이 두 사람의 다른 후과를 지우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다빈은 제한표에서 ‘통화 시각 정정’ 항목을 수정했다. 자신이 잘못 말한 시간을 삭제하지 않고, 원래 말한 시각과 정정한 시각을 함께 남기자고 했다. 경민은 오판 기록을 공개하되, 다빈이 왜 거짓말했는지는 쓰지 말라고 요청했다.

“그 이유를 숨기면 사람들이 또 다른 이야기를 만들 겁니다.” 여름이 말했다.

“그 이야기를 막기 위해 아이 이름까지 쓰자는 건 아니잖습니까.” 경민이 답했다. “제가 책임질 부분과 다빈이 선택할 부분을 나눠 주세요.”

다빈은 그 말을 듣고도 경민을 보지 않았다. 그녀는 자신의 부속표에만 서명했다. 경민도 별도의 책임표에 서명했다. 같은 문서에 같은 결론을 쓰지 않는 것이 이번에는 두 사람의 안전을 지키는 방법이었다.

저녁, 외부 검토자는 최종 사슬에서 능력 출력과 추측성 동기를 제거했다. 남은 것은 사건 전날 시험 로그, 케이스 층서, 개인 결제와 보관함 접근 실패, USB의 제한 메타데이터, 백상호 진술의 대안 붕괴였다. 검토자는 ‘백상호가 모든 공모를 알고 있었다’는 문장을 삭제하고, ‘물리 실행과 탈취 시도의 핵심 접근자로 특정’이라고 바꾸었다.

민우는 그 표현이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서명했다. 장 모의 역할은 사후 편집 실행으로 분리됐고, 사전 살인 계획을 알았다는 증거는 부족하다고 적혔다. 범인의 목록은 좁아졌지만, 악인의 크기를 부풀리지는 않았다.

백상호는 마지막 조사에서 민우에게 물었다.

“그 17초가 없다고 사람이 죽습니까?”

민우는 잠시 현장 사진을 보았다. “사람은 계단에서 먼저 죽었습니다.”

그 말 뒤에 누구도 자백을 요구하지 않았다. 증거 사슬은 자백이 아니라 대안 설명이 무너진 자리에서 완성되고 있었다. 설명회가 끝난 뒤 다빈은 복도에서 멈췄다. 경민이 몇 걸음 뒤에 서 있었지만, 먼저 다가가지는 않았다. 서진은 두 사람 사이의 거리를 보고도 누구에게 움직이라고 말하지 않았다.

“제가 바꾼 시간은 정정할게요.” 다빈이 말했다. “그런데 제가 왜 바꿨는지는 쓰지 말아 주세요.”

“이유가 빠지면 정정의 의미가 흐려질 수도 있습니다.”

“그 의미를 제가 다 설명할 수 있을 때까지는요.”

경민은 한참 뒤에 말했다. “그렇게 해 주세요.”

다빈은 그에게 고맙다고 하지 않았다. 경민도 미안하다고 반복하지 않았다. 대신 두 사람은 서로 다른 부속표를 가져갔다. 관계가 회복됐다고 쓰기에는 아직 멀었지만, 적어도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의 공개 범위를 대신 정하지 않는 상태는 남았다.

서진은 사무실로 돌아와 증거표의 순서를 다시 확인했다. 사건 전날 시험 로그가 가장 앞에 있고, 케이스의 층서가 그다음이었다. 개인 결제와 원격 초기화 실패는 같은 계정이라도 서로 다른 출처에서 나왔다. USB 접근 시각은 장비 식별자와 일치했지만, 실제 파일 열람은 확인되지 않았다. 그 제한을 그대로 두어야 보고서가 오래 버틸 수 있었다.

여름은 송치문 초안을 읽다가 ‘공모’라는 단어를 지웠다. 장 모가 돈을 받고 편집했다는 사실은 확인됐지만, 그가 피해 전 계획을 알았다는 증거가 없었다. 그 단어 하나를 넣으면 문서는 더 강해 보였지만, 이후 검토에서 전체 사슬이 함께 흔들릴 수 있었다.

민우가 말했다. “피해자가 죽었는데도 너무 조심스럽군요.”

“피해자가 죽었기 때문에 더 조심해야 합니다.” 여름이 답했다. “그 사람의 사건을 이용해 우리가 모르는 사람까지 확정하면, 피해자의 이름을 두 번 쓰는 셈이 됩니다.”

서진은 그 말을 듣고 장기 질문을 따로 옮겼다. 파란 삼각형의 계열, 17초 렌더 접두사, 윤준호 사건과 겹칠 수 있는 고객번호. 모두 중요한 연결이었지만, 이번 송치의 결론에는 넣지 않았다. 연결은 다음 사건에서 반증 가능한 질문으로 돌아와야 했다.

밤 아홉 시, 외부 검토자는 최종 의견서를 보냈다. 백상호를 특정하는 근거는 다섯 가지였고, 각 근거의 독립 출처와 남은 반증 조건이 함께 적혀 있었다. ‘다른 사람이 비상키를 사용했을 가능성’은 완전히 닫히지 않았지만, 그 경우에도 백상호 계정의 원격 초기화와 USB 접근 시각을 설명해야 했다. 검토자는 그 설명을 아직 찾지 못했다고 썼다.

서진은 문서 마지막에 자신의 이름을 적었다. 그녀는 능력 사용을 통해 얻은 원음 감각을 증거로 제출하지 않았고, 그 사실도 숨기지 않았다. 듣지 않은 것이 수사의 약점이 아니라, 독립 자료로 다시 확인할 수 있게 만든 선택이었다.

회색실의 불이 하나씩 꺼졌다. 복도 모니터에는 봉인된 USB의 보관번호가 남아 있었다. 다빈은 제삼기관의 확인서를 다시 읽었고, 경민은 정정문을 한 번 더 고쳤다. 민우는 송치자료의 순서를 바꾸지 않았다.

서진은 마지막 줄을 읽었다.

‘백상호의 물리 실행·USB 탈취 시도·외주 편집 지시는 서로 다른 책임 범위로 송치한다. 원문 비공개는 피해자 선택으로 유지하며, 장기 연결은 가설로 등록한다.’

그 문장은 사건을 완전히 닫지 않았다. 대신 닫힌 것과 열린 것을 구분했다. 서진은 회색표를 접어 보관함에 넣었다. 그 안에는 정답보다 먼저, 정답을 과장하지 않기 위해 버린 문장들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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